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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이름을 내가 기억하고 있어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1 12:04:32

『너는 내 동생이다.』

그 말이 떨어진 뒤에도 한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황금 수정에서 흘러나온 빛은 방 전체를 가득 채운 채 천천히 흔들렸다. 오래된 햇빛처럼 부드러운 빛이었지만, 그 안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편안한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아르셀리아는 자신의 어깨에 기댄 아스테리온을 내려다봤다.

그는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도 힘이 빠졌다. 손끝만이 옷자락을 움켜쥔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검으로 살아온 시간이 최소 천 년이 넘는다.

그동안 그는 자신을 성검이라고 믿었다.

드래곤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

사람의 손에 들려야만 움직이는 검.

그런데 이제 와서.

처음부터 검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것도.

자신이 죽여 온 존재와 같은 드래곤이었다고.

아르셀리아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하나는 알았다.

지금 아스테리온에게 필요한 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손을 올려 그의 뒤통수를 가볍게 눌렀다.

“조금 더 있어도 돼.”

아스테리온의 몸이 아주 작게 굳었다.

“…제가 지금 상당히 보기 좋지 않을 텐데요.”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아르셀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원래도 완벽하게 보기 좋진 않았어.”

아스테리온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그건 조금 상처인데요.”

“그래도 예뻐.”

“…….”

“그래서 주웠잖아.”

이번에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르셀리아는 그걸 보고 조금 안심했다.

평소처럼 대꾸할 기운이라도 돌아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금빛 눈이 한 번 크게 흔들리더니 아스테리온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반칙입니다.”

“또 뭐가.”

“제가 지금 이런 상태인데.”

그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아르셀리아는 잠시 생각했다.

“하지 마?”

“…아니요.”

대답은 바로 나왔다.

“계속해 주십시오.”

아르셀리아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욕심 많네.”

“주인을 닮았습니다.”

“내가 왜.”

“드래곤이시잖습니까.”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아르셀리아는 이번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등을 한 번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 손길에 아스테리온의 호흡이 아주 조금씩 안정됐다.

그런데 뒤에서.

“둘이 조금만 떨어져 줄래?”

세레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르셀리아가 돌아봤다.

“왜.”

세레니스가 손가락으로 둘을 가리켰다.

정확하게는.

서로 붙어 있는 몸을.

아르셀리아의 손은 아직 아스테리온의 등에 있었고, 아스테리온의 팔도 그녀의 허리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나야 괜찮은데.”

세레니스가 말했다.

“저쪽이 죽을 것 같아서.”

시선 끝.

카르디안이 있었다.

표정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아르셀리아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

카르디안이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얼굴은 아닌데.”

“그냥 계속해.”

“뭘.”

“……됐다.”

아스테리온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질투가 심하시군요.”

카르디안의 검은 눈이 번뜩였다.

“지금 감정적으로 불안정해 보이니 한 번은 참아 주지.”

“상당히 친절하시군요.”

“두 번은 없다.”

“그럼 한 번 더 해 봐도 됩니까?”

“아스테리온.”

아르셀리아가 이름을 부르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예.”

“지금은 싸우지 마.”

“알겠습니다.”

그제야 아르셀리아는 그의 허리에서 팔을 떼어 냈다.

아스테리온도 아주 느리게 그녀를 놓았다.

다만 완전히 떨어지기 직전.

그의 손끝이 아르셀리아의 손목을 스쳤다.

진명 문양이 아주 약하게 빛났다.

아르셀리아는 그를 바라봤다.

잡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다.

말하지 않았지만.

문양을 통해 너무 선명하게.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스테리온이 순간 멈췄다.

“잡아.”

“…괜찮습니까?”

“아까도 잡았잖아.”

“생명 공유 각인이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완성되는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그리고.”

아르셀리아가 그의 손을 먼저 잡았다.

“네가 지금 불안하잖아.”

아스테리온이 입을 다물었다.

손가락 사이로 따뜻한 체온이 스며들었다.

금빛 마력이 붉은 마력과 아주 희미하게 엉켰다.

그제야 아스테리온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세레니스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쯤 되면 반려 아니라고 하는 게 더 어려워지는데.”

아르셀리아가 바로 돌아봤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들었어.”

“기분 탓이야.”

“나 귀 좋아.”

“드래곤이니까 그렇겠지.”

카르디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너도 들었잖아.”

“들었지만 무시하고 있다.”

“왜.”

“지금은 저 수정이 더 중요하니까.”

맞는 말이었다.

아르셀리아는 다시 황금 수정을 바라봤다.

기록 속 초대 황금룡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아스테리온이 다시 고개를 들자.

수정이 반응했다.

웅―

빛이 퍼졌다.

그리고 기록이 이어졌다.

『아스테르.』

초대 황금룡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조금 전보다 더 낮고.

더 슬펐다.

『네가 이곳까지 돌아왔다는 것은 아마도 내가 실패했다는 뜻일 거다.』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굳었다.

아르셀리아는 손을 놓지 않았다.

『우리는 신들을 믿었다.』

벽면에 새로운 장면이 펼쳐졌다.

하늘.

수많은 드래곤.

그리고 빛으로 이루어진 존재들.

처음에는 함께 서 있었다.

드래곤과 신.

적이 아니었다.

초대 황금룡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함께 이 세계를 지켰지. 그들은 하늘을 관리했고, 우리는 땅의 마력을 지켰다. 인간은 그 사이에서 살아갔다.』

그림이 바뀌었다.

도시.

신전.

신을 향해 무릎을 꿇은 인간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드래곤.

『하지만 인간의 기도가 힘이 된다는 것을 신들이 깨달은 순간부터 모든 것이 변했다.』

카르디안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세레니스도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신들은 더 많은 믿음을 원했고,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들보다 강한 존재가 없어야 했다.』

아르셀리아가 작게 말했다.

“드래곤.”

에르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 속 목소리도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우리를 괴물로 만들었다.』

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상하게 익숙한 이야기였다.

인간들은 오래전부터 드래곤을 재앙이라고 불렀다.

왕국을 불태우고.

공주를 납치하고.

인간을 잡아먹으며.

황금을 쌓아 놓고 사는 괴물.

실제로 그런 드래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르셀리아처럼.

그런데도 이야기는 늘 비슷했다.

『인간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보다 자신이 미워해야 할 대상을 더 쉽게 죽인다.』

기록 속 황금룡이 씁쓸하게 웃었다.

『신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흘러나왔다.

“…그래서 용살성검을.”

기록이 잠시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초대 황금룡은 마치 그 말을 들었다는 듯 말했다.

『그래.』

아스테리온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들이 너를 탐낸 이유도 그것이었다.』

정적.

『아스테르. 너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했다.』

수정 안에 어린 아스테르가 나타났다.

검은 머리.

금빛 눈.

작은 뿔.

그리고 등에 난 날개.

하지만 그 날개는 일반적인 골드 드래곤과 달랐다.

황금빛 아래에 별빛처럼 희미한 은색이 흘렀다.

『너는 우리 중에서도 별의 마력에 가장 가까운 아이였다.』

아르셀리아가 벽화에서 읽었던 글자가 떠올랐다.

별의 아이.

황금의 후계자.

『드래곤의 힘과 하늘의 힘을 동시에 다룰 수 있었지.』

카르디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신성력.”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내려갔다.

금빛 신성력.

그는 그것이 성검이 되었기 때문에 생긴 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은 네 힘이면 신조차 벨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모두가 굳었다.

아르셀리아의 붉은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신을.

벤다.

용살성검이 아니라.

신살검.

그 순간 아르셀리아는 어딘가 이상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왜 성검의 힘과 드래곤 마력이 부딪치지 않는지.

왜 오히려 서로를 받아들이는지.

왜 아스테리온이 인간의 손에서는 완전한 힘을 내지 못했는데 자신을 잡았을 때 처음으로 빛났는지.

애초에.

아스테리온의 힘은 드래곤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너를 빼앗았다.』

황금룡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네 이름을 지웠다.』

아스테리온의 손이 떨렸다.

『기억을 지우고.』

황금빛 화면 위로 검은 제단이 나타났다.

아르셀리아가 이미 본 장소.

어린 아스테르가 사슬에 묶여 있었다.

『몸을 부수고.』

금빛 사슬.

비명.

『용핵을 훼손했다.』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굳었다.

아르셀리아 역시 숨을 멈췄다.

그러면.

검으로 만들어진 것은 단순한 변신이 아니었다.

정말로 몸을 부쉈다.

아스테리온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본 아르셀리아가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기록은 계속됐다.

『내가 널 되찾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화면이 바뀌었다.

피투성이의 어린 아스테르.

몸이 무너지고 있었다.

비늘은 깨지고.

빛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앞.

초대 황금룡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도 깊은 상처가 있었다.

『네 용핵은 오래 버티지 못할 상태였다.』

초대 황금룡의 손이 자신의 가슴으로 향했다.

아스테리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설마.”

다음 장면.

황금빛.

심장.

초대 황금룡이 자신의 가슴에서 빛나는 조각 하나를 꺼냈다.

자신의 용핵.

심장의 일부.

그리고 어린 아스테르의 가슴에 넣었다.

『그래서 내 심장을 나누었다.』

아스테리온의 숨이 멎었다.

아르셀리아도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 아스테리온 안에서 뛰는 것.

황금의 심장.

그것은 신전이 넣은 것이 아니었다.

원래.

형이 준 것이었다.

그런데 기억에서는 신전의 사람들이 그것을 집어넣고 있었다.

서로 맞지 않는다.

아르셀리아가 즉시 눈을 가늘게 떴다.

“기억이 바뀌었어.”

카르디안도 알아차렸다.

“그래.”

“그때 본 건 신전에서 넣는 장면이었는데.”

“조작됐다는 뜻이다.”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신이 믿었던 기억조차.

진짜가 아니었다.

기록 속 황금룡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너를 데려갔다.』

그 순간.

화면이 크게 흔들렸다.

『내가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황금룡은 처음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미안하다.”

기록 속 목소리였는데.

이번에는 너무 생생해서.

마치 바로 앞에서 말한 것 같았다.

『미안하다, 아스테르.』

아스테리온의 금빛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닦지 않았다.

아르셀리아도 모른 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엄지로 그의 손등을 천천히 쓸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기억해라.』

황금룡이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는 슬픔보다 단단한 것이 있었다.

『네 안의 황금은 족쇄가 아니다.』

아스테리온의 가슴에서.

쿵.

심장이 뛰었다.

『돌아오는 길이다.』

쿵.

『언젠가 네 이름을 모두 잃어도.』

쿵.

『내 심장이 네게 말해 줄 거다.』

빛이 번졌다.

『너는 검이 아니라고.』

아스테리온이 눈을 감았다.

『누구의 무기도 아니라고.』

그 순간.

아르셀리아의 손목 문양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금룡이 아주 조금 웃었다.

『네가 누구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록이 끝나는 듯 빛이 약해졌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황금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스테르.』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만약 네가 이곳에 혼자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르셀리아의 손목 문양이 갑자기 크게 빛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누군가 네 심장과 연결되어 있다면.』

아르셀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아스테리온도 그녀를 봤다.

설마.

『그 존재를 지켜라.』

순간.

아스테리온의 눈빛이 달라졌다.

황금룡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네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 준 자보다.』

금빛 눈이 흔들렸다.

『네가 스스로 이름을 말할 수 있게 해 준 자를.』

아르셀리아가 아스테리온을 처음 불렀던 밤.

“아스테리온.”

보물고에서.

그 이름을 입에 담았던 순간.

그의 눈이 흔들렸던 이유가.

이제야 조금 이해됐다.

『그 자가.』

황금룡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네가 돌아갈 곳일지도 모르니까.』

빛이 꺼졌다.

완전히.

아스테리온은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다.

아르셀리아도 재촉하지 않았다.

기록이 사라진 방 안에는 아주 약한 금빛만 남아 있었다.

세레니스는 눈가를 손가락으로 한 번 훔쳤다.

“나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르셀리아가 봤다.

“울어?”

“아니.”

“눈 빨간데.”

“황금빛이 눈에 들어가서 그래.”

카르디안이 무심하게 말했다.

“거짓말 못하네.”

세레니스가 노려봤다.

“너도 눈 좀 촉촉한데?”

“아니다.”

“둘 다 똑같아.”

아르셀리아는 두 사람을 무시했다.

아스테리온이 더 중요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손을 보고 있었다.

“아스테리온.”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예.”

목소리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아르셀리아가 잠시 고민했다.

“아스테르라고 불러?”

아스테리온이 굳었다.

아르셀리아는 바로 덧붙였다.

“싫으면 안 하고.”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조금 전에도.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다.

아스테리온이라는 이름으로 천 년을 살았다.

아스테르는 자신이 잃어버린 과거다.

갑자기 그 이름을 받아들이라고 하면 오히려 낯설 수 있었다.

“싫습니다.”

한참 뒤.

그가 말했다.

아르셀리아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너무 쉽게.

아스테리온이 오히려 당황했다.

“왜 이유를 묻지 않으십니까.”

“싫다며.”

“그렇긴 하지만.”

“그럼 안 하면 되지.”

아스테리온의 눈이 흔들렸다.

“아스테리온.”

아르셀리아가 일부러 그 이름을 다시 불렀다.

“지금은 이게 네 이름이잖아.”

“…예.”

“네가 나중에 아스테르도 좋아지면 그때 부르면 되고.”

아스테리온은 그녀를 오래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왜 그렇게.”

“뭐가.”

“항상 쉬우십니까.”

“어려울 게 있어?”

“보통은 있습니다.”

“난 없어.”

“그렇군요.”

“응.”

아르셀리아는 잠시 그를 보다 물었다.

“그래도.”

“예.”

“형은 기억나?”

아스테리온의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이번에는 슬픈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조금.”

“뭐가.”

“…손.”

그가 자신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어릴 때.”

눈을 감았다.

“이렇게 쓰다듬어 줬던 것 같습니다.”

아르셀리아가 말없이 바라봤다.

아스테리온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자주 혼냈습니다.”

“왜.”

“제가 따라다녀서.”

“형 좋아했네.”

“…예.”

이번 대답은 빨랐다.

아르셀리아는 그 단순한 대답이 이상하게 가슴에 남았다.

아스테리온은 형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 형의 심장을 품은 채.

형과 같은 종족을 천 년 동안 죽였다.

그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아르셀리아는 지금 그 이야기를 더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아스테리온이 눈을 크게 떴다.

아르셀리아가 천천히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한 번.

두 번.

“…뭐 하십니까.”

“이렇게?”

아스테리온의 표정이 멈췄다.

“형이.”

아르셀리아가 손바닥으로 그의 머리 위를 다시 한번 부드럽게 쓸었다.

“이렇게 해 줬어?”

아스테리온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슷합니다.”

“그럼 됐네.”

“뭐가요.”

“조금 기억났잖아.”

아스테리온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이번에는 웃었다.

그러나 아르셀리아의 손이 내려오려는 순간.

그가 손목을 잡았다.

“왜.”

“조금만 더.”

“…….”

“안 됩니까?”

아르셀리아는 그를 한동안 봤다.

천 년 넘은 성검.

최초의 드래곤의 동생.

자신보다도 훨씬 오래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지금 표정은 이상하게.

어린애 같았다.

아르셀리아는 다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만.”

“내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안 돼.”

“모레는요?”

“아스테리온.”

“예.”

“말 많아.”

“조용히 있겠습니다.”

정말 입을 다물었다.

다만 고개를 아주 조금 낮췄다.

아르셀리아가 편하게 만질 수 있게.

세레니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르셀리아가 돌아봤다.

“왜.”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참고 있어.”

“뭔데.”

“아니야. 계속해.”

카르디안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질투하지 마십시오.”

“눈도 안 뜨고 어떻게 알지?”

“기척이 살벌합니다.”

“다음에는 검집째 묻어 주지.”

“아르셀리아가 찾으러 올 겁니다.”

카르디안이 아르셀리아를 봤다.

“찾을 거냐.”

아르셀리아가 당연하게 말했다.

“내 건데.”

카르디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테리온의 미소는 조금 더 깊어졌다.

황금 수정의 기록이 끝난 뒤 에르하르트는 일행을 황금수 상층의 기록실로 안내했다.

아르셀리아는 들어가자마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책이 많아서였다.

정확히는.

오래된 물건이 많아서.

황금빛 금속으로 만든 판.

고대 드래곤의 비늘에 새긴 기록.

수천 년 전 마력 결정.

아르셀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하나 가져가도 돼?”

에르하르트가 바로 대답했다.

“안 됩니다.”

“하나만.”

“안 됩니다.”

“나 여기까지 왔는데.”

“손님에게 기록물을 나눠 주는 전통은 없습니다.”

아스테리온이 낮게 말했다.

“제가 하나 가져다드릴까요?”

에르하르트의 얼굴이 굳었다.

“도둑질을 권하지 마십시오.”

아르셀리아가 아스테리온을 봤다.

“어디 있는지 기억해 둬.”

“예.”

“둘 다 들립니다.”

에르하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레니스가 웃었다.

“이제 좀 평소 같다.”

아르셀리아는 이미 가장 오래돼 보이는 금판 앞에 앉았다.

아스테리온도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잠시 뒤.

그의 몸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아르셀리아가 즉시 알아차렸다.

“왜.”

“아무것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스테리온의 손등 위로 금빛 비늘이 확 번졌다.

그가 급히 손을 움켜쥐었다.

“아스테리온.”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아르셀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아스테리온의 가슴 안에서.

쿵―!

거대한 박동이 울렸다.

황금수 전체가 흔들렸다.

에르하르트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두 번째 박동.

쿵―!

그리고.

아스테리온의 목덜미에 있던 금빛 비늘 사이로.

검은 문양이 나타났다.

아르셀리아가 바로 알아봤다.

본 적 있다.

그의 기억 속.

신전이 몸에 새기던 명령 문양.

“아스테리온.”

그녀가 손을 뻗었다.

아스테리온이 갑자기 뒤로 물러났다.

“오지 마십시오.”

“또 시작이야?”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정말 안 됩니다.”

검은 문양이 한 줄 더 번졌다.

쇄골.

목.

가슴.

마치 안쪽에서 기어 나오는 것처럼.

아스테리온이 이를 악물었다.

『확인.』

낯선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모두가 굳었다.

그 목소리는.

아스테리온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몸 안쪽에서.

명령처럼.

울려 나왔다.

『황금의 심장 각성률 31%.』

에르하르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성검 회수 절차를 개시합니다.』

아스테리온의 몸이 휘청했다.

아르셀리아가 달려들었다.

“아스테리온!”

그녀가 그의 손목을 잡는 순간.

금빛이 폭발했다.

콰앙―!

아르셀리아의 몸이 뒤로 밀렸다.

카르디안이 곧장 그녀의 등을 받쳤다.

“아르셀리아!”

“놔.”

그녀는 즉시 다시 일어섰다.

아스테리온은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하지만.

표정이 달라졌다.

금빛 눈에 초점이 없다.

팔이 천천히 변했다.

검.

새하얗고 아름다운 성검의 날이 팔을 대신했다.

그리고.

끝이.

아르셀리아를 향했다.

세레니스의 주변에 얼음이 솟았다.

카르디안도 검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에르하르트가 소리쳤다.

“모두 물러나십시오!”

아르셀리아만 움직이지 않았다.

“아스테리온.”

금빛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반응했다.

“나 봐.”

『제1명령 활성화.』

아스테리온의 몸이 떨렸다.

『용종 식별.』

금빛 시선이 아르셀리아에게 고정됐다.

그리고.

『최우선 제거 대상 확인.』

아르셀리아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최우선?”

카르디안이 소리쳤다.

“아르셀리아, 떨어져!”

하지만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갔다.

아스테리온의 검끝이 흔들렸다.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아주 작게.

“…오지.”

아르셀리아가 멈췄다.

아스테리온의 입술이 떨렸다.

“오지 마십시오.”

그는 아직 안에 있었다.

명령에 완전히 삼켜진 게 아니다.

아르셀리아는 다시 한 걸음 갔다.

“싫어.”

“아르셀리아.”

“어제부터 계속 오지 말래.”

“이번에는.”

“안 들을 건데.”

“제가.”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검끝이 그녀의 심장을 향했다.

“당신을 찌를 수 있습니다.”

아르셀리아는 검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아스테리온을 봤다.

“그럼 참아.”

“그게.”

“넌 하기 싫잖아.”

아스테리온의 눈이 흔들렸다.

『명령 거부 감지.』

검은 문양이 더 깊게 번졌다.

아스테리온이 고통스럽게 숨을 삼켰다.

『복종 교정 시작.』

그 순간.

그의 몸이 꺾였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르셀리아의 눈이 완전히 붉어졌다.

“누가.”

불꽃이 발밑에서 피어올랐다.

“내 거한테.”

카르디안이 바로 알아차렸다.

“아르셀리아.”

붉은 비늘이 그녀의 목선을 타고 올라왔다.

“명령하는데.”

주변 온도가 순식간에 상승했다.

황금수의 기록실이 흔들렸다.

에르하르트가 놀란 얼굴로 아르셀리아를 봤다.

레드 드래곤의 분노.

그것도 보물을 건드렸을 때의.

가장 위험한 분노였다.

하지만 아르셀리아는 폭주하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을 봤다.

그의 손.

떨리는 검끝.

자신을 베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붙잡고 있는 의지.

그녀가 다시 다가갔다.

“아스테리온.”

“…오지 마.”

“봐.”

“제발.”

이번에는.

그가 처음으로 말했다.

“제발 오지 마십시오.”

아르셀리아가 멈췄다.

한 걸음 거리.

검끝만 뻗으면 닿는다.

그녀는 아주 조용하게 물었다.

“나 죽이기 싫어?”

아스테리온의 입술이 떨렸다.

“싫습니다.”

“확실해?”

“예.”

“그럼 됐어.”

아르셀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스테리온의 검날을.

맨손으로 잡았다.

“아르셀리아!”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검날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붉은 피가 흘렀다.

한 방울.

두 방울.

새하얀 성검의 날을 타고 내려갔다.

아스테리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놔.”

이번에는 반말이었다.

그도 모르고 튀어나온 듯했다.

“놓으십시오.”

아르셀리아는 오히려 더 꽉 잡았다.

피가 늘어났다.

“싫어.”

“다칩니다.”

“벌써 다쳤어.”

“그러니까!”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터졌다.

“놓으라고!”

아르셀리아의 붉은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네가 싫다며.”

“뭘.”

“나 죽이는 거.”

“….”

“그럼 네가 이겨.”

명령이 아니라.

검이 아니라.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의지를 선택하라는 말.

그 순간.

진명 문양이 폭발하듯 빛났다.

붉은색과 금색.

두 빛이 아르셀리아의 손에서 아스테리온의 검신을 타고 올라갔다.

『오류.』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용살 명령과 미확인 계약 충돌.』

아스테리온의 숨이 멎었다.

아르셀리아가 피 묻은 손으로 검을 놓지 않았다.

“아스테리온.”

금빛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돌아와.”

그 순간.

어디선가.

아주 오래된 다른 목소리가 함께 울렸다.

『아스테르.』

형의 목소리.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마.』

쨍―!

맑은 파열음.

모두의 눈이 커졌다.

아스테리온의 검날 한가운데.

아주 작은 금이 생겼다.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다는.

용살성검에.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그리고 아스테리온은.

그 금을 내려다보지도 않았다.

오직.

피가 흐르는 아르셀리아의 손만 바라봤다.

“아르셀리아.”

이번에는.

주인님도.

드래곤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이름.

아르셀리아는 아주 조금 웃었다.

“응.”

금빛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검끝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명령 거부.』

낯선 목소리가 차갑게 선언했다.

『개체 아스테리온의 자아 저항을 확인.』

『강제 회수 단계로 전환합니다.』

순간.

아스테리온의 가슴 중앙에서.

검은 빛이 폭발했다.

그리고 성왕국의 지하.

노인은 눈앞의 석판을 보며 천천히 웃었다.

붉은 문장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었다.

― 제1차 회수 실패.

그 아래.

― 외부 방해 개체 확인.

― 레드 드래곤 아르셀리아 로하르트.

노인의 손끝이 그 이름을 천천히 훑었다.

“역시.”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네가 문제였군.”

그리고 석판 가장 아래에.

새로운 명령이 새겨졌다.

― 회수 우선순위 변경.

― 성검보다 먼저, 계약자를 확보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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