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금령은 손님을 반기는 방식부터 달랐다.
적염령의 경계가 타오르는 용암과 열기로 침입자를 밀어낸다면, 황금령은 오히려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하얀 바위산 사이로 황금빛 숲이 이어졌고, 잎사귀마다 빛이 맺혀 바람이 불 때마다 수천 개의 작은 종처럼 반짝였다. 길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아르셀리아 일행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풀과 나무가 스스로 몸을 비켜 하나의 길을 만들었다. 그게 문제였다. “원래 이래?”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카르디안이 짧게 대답했다. “아니.” 세레니스도 주변을 둘러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나 황금령에 열 번은 와 봤는데, 나무가 먼저 길을 만들어 준 적은 없어.”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했다. 아스테리온. 그는 여전히 창백했다. 조금 전까지 붉은 기가 완전히 빠져 있던 얼굴은 그나마 나아졌지만, 목덜미와 손등에 나타난 금빛 비늘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황금령 깊숙이 들어올수록 아주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눈이었다. 지금은 다시 인간과 비슷한 동공으로 돌아왔지만 가끔 빛이 스칠 때마다 세로로 길게 갈라졌다. 드래곤의 눈처럼. 아르셀리아가 그의 손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잡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이 황금령의 목소리를 들은 뒤부터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그가 쓰러질까 봐 잡았고, 그다음에는 진명 문양이 불안정하게 뛰어서 잡았다. 그런데 이제는 굳이 놓아야 할 이유를 생각하지 못한 채 계속 잡고 있었다. 아스테리온도 마찬가지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 아르셀리아가 손가락을 조금 움직이면 그에 맞춰 손가락을 더 단단하게 감았다. 카르디안의 시선이 두 사람의 손에 닿았다. 표정이 미세하게 나빠졌다.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지?” 아르셀리아가 그를 봤다. “왜.” “마력 공급은 이미 충분해 보이는데.” “알아.” “그럼.” 아르셀리아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냥.” 카르디안이 입을 다물었다. 세레니스가 옆에서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었다. 아르셀리아는 그 표정을 보고 바로 덧붙였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얼굴이 했어.” “내 얼굴을 너무 잘 읽네.” 아스테리온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르셀리아가 옆을 봤다. “무슨 생각.” “저와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이제는 그냥 좋으신 게 아닐까 하는.” “놓을까?” 아스테리온의 손에 즉시 힘이 들어갔다. “그건 싫습니다.” “그럼 조용히 해.” “예.” 카르디안이 결국 고개를 돌렸다. “보기 싫군.” 아스테리온이 웃었다. “질투입니까?” “죽여 달라는 요청인가?” “아르셀리아.” “둘 다 입 닫아.” 둘은 동시에 조용해졌다. 세레니스가 작게 웃었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앞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드래곤의 기척. 한둘이 아니었다. 황금빛 나무 사이로 여러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모두 금발. 모두 금빛 눈. 그리고 옷깃이나 손목 어딘가에 골드 드래곤을 상징하는 태양 문양을 달고 있었다. 가장 앞에는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길게 내려오는 금발에, 옅은 금색 눈. 겉모습만 보면 쉰 정도로 보였지만 아르셀리아는 그에게서 최소 천 년 가까운 시간의 냄새를 느꼈다. 남자는 아르셀리아와 세레니스, 카르디안을 차례로 봤다. 그리고. 아스테리온에게 시선이 멈췄다. 정확히는. 그의 가슴에.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잠시 뒤. 그가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스테르.” 아스테리온의 손이 순간 굳었다. 아르셀리아도 바로 느꼈다. 맞잡힌 손을 통해 감정이 밀려왔다. 놀람. 혼란. 그리고. 기억보다 먼저 몸이 알아보는 듯한 그리움. 아스테리온의 숨이 짧게 끊겼다. “그 이름.” 아주 낮은 목소리. “어떻게 아십니까.” 남자의 금빛 눈이 흔들렸다. 그 반응이 이상했다. 마치 아스테리온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예상 밖이라는 듯. 그러나 남자는 곧 표정을 정리했다. “나는 황금령의 수호자, 에르하르트 아우룸이다.” 카르디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황금령의 대수호자가 직접 경계까지 나오다니.” 에르하르트의 시선은 여전히 아스테리온에게 붙어 있었다. “황금의 심장이 돌아왔으니.” 그의 대답은 단순했다.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아르셀리아의 손을 조금 더 세게 감았다.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저 사람이 널 알아보는 것 같아?” “모르겠습니다.” “느낌은.” 아스테리온은 아주 잠깐 망설였다. “이상합니다.” “어떻게.” “…그립습니다.” 아르셀리아가 에르하르트를 바라봤다. 그립다. 본 적도 없는 상대를. 기억하지도 못하는 상대를. 그 순간 에르하르트의 시선이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손목의 문양. 그걸 본 순간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변했다. “그 문양.” 아르셀리아가 바로 손목을 조금 뒤로 당겼다. “알아?” 에르하르트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낮게 물었다. “언제 생겼습니까.” “이틀 전.” “무슨 조건에서.” “마력 줬어.” “어떤 방식으로.” 아르셀리아가 손을 들어 보였다. “손잡고.” 그 순간 황금령에서 나온 드래곤 몇 명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에르하르트도 눈을 감았다. 아르셀리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다 그렇게 반응해.” 세레니스가 속삭였다. “좋은 반응은 아닌 것 같은데.” “나도 알아.” 아스테리온이 에르하르트에게 물었다. “저 문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에르하르트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르셀리아를 봤다.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용핵을 연결하는 문양이라고 들었어.” 에르하르트의 시선이 카르디안에게 향했다. 카르디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심연령 기록에 그렇게 남아 있다.” “틀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에르하르트가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완전한 설명도 아닙니다.” 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이런 식이다. 기록은 일부만 남았고. 모두가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인간은 진명 계약. 블랙 드래곤은 용핵 연결 문양. 그리고 골드 드래곤은 또 다른 무언가를 알고 있다. “정확하게 말해.”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돌려 말하면 그냥 황금령 보물고부터 뒤질 거야.” 세레니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협박이 너무 드래곤답다.” 에르하르트는 오히려 아주 조금 웃었다. “로하르트의 레드 드래곤답군요.” “나 알아?” “모르기 어렵습니다.” “난 너 모르는데.” “그럴 수 있습니다. 나는 의회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그는 잠시 아르셀리아와 아스테리온을 번갈아 봤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시죠.” “먼저 말해.” “여기서 하기에는 긴 이야기입니다.” “짧게.” 에르하르트가 결국 대답했다. “그 문양은 최초의 드래곤들이 사용하던 생명 공유 각인의 흔적입니다.” 아르셀리아가 멈췄다. 아스테리온도 마찬가지였다. “생명 공유?” 카르디안이 낮게 되물었다. 에르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반려 각인보다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둘을 단순히 부부나 반려로 묶기 위한 문양이 아닙니다.” “그럼.” 아르셀리아가 손목을 내려다봤다. “뭘 공유하는데.” “마력.” 에르하르트가 말했다. “감각.” 아스테리온의 눈이 조금 굳었다. “기억.” 아르셀리아는 자신이 보았던 제단을 떠올렸다. “그리고.” 에르하르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심한 경우 생명까지.” 정적. 아르셀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심한 경우?” “문양이 완성된다면.” “완성되면 어떻게 되는데.” 에르하르트는 잠시 망설였다. “한쪽이 죽을 때 다른 한쪽이 무사하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르셀리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스테리온의 손이 즉시 빠졌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가 아르셀리아의 손을 놓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르셀리아가 그를 봤다. “왜 놔.” “이제 잡으면 안 되겠습니다.” “왜.” “방금 들으셨잖습니까.”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조금 딱딱해졌다. “제가 죽으면 아르셀리아에게도 영향이 갈 수 있습니다.” “너 죽을 생각 있어?”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럼.” “저는.” 아스테리온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당신을 죽일 수 있는 명령까지 안고 있습니다.” 그 말에 주변 공기가 무거워졌다. 황금령 드래곤들의 표정도 변했다. 에르하르트가 처음으로 날카롭게 물었다. “무슨 명령.” 아스테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셀리아가 대신했다. “모든 드래곤을 멸하래.” 순간. 황금령 쪽 드래곤들의 마력이 일제히 요동쳤다. 금빛이 나무 사이로 번쩍였다. 카르디안이 바로 앞으로 한 걸음 나섰고. 세레니스의 주변에도 서리가 피어올랐다. 아르셀리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마력 거둬.” 에르하르트가 손을 들었다. 황금령 드래곤들이 멈췄다. “거두십시오.” 곧 마력이 사라졌다. 그러나 경계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에르하르트는 한참 동안 아스테리온을 바라봤다. “용살 명령.” “알고 있습니까?” 아스테리온이 물었다. “…전승으로.” “또 전승.” 아르셀리아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여긴 제대로 남은 기록이 하나도 없어?” 에르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있었습니다.” “과거형?” “신들과의 전쟁 뒤 대부분 불탔습니다.” “누가 태웠는데.” 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 “인간의 신전.”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굳었다. 아르셀리아도 바로 그를 봤다. 신전. 또 신전이었다. 에르하르트가 말했다. “안으로 가시죠. 무엇보다.” 그가 아스테리온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금빛 비늘. “저 상태를 오래 방치하면 좋지 않습니다.” 아르셀리아가 즉시 물었다. “왜.” “깨어나고 있으니까요.” “뭐가.” 에르하르트가 아주 조용하게 말했다. “그의 안에 있는 드래곤이.” 황금령의 중심부에는 궁이 없었다. 적염령의 화염궁처럼 거대한 건물도 없었다. 대신. 나무가 있었다. 산 하나를 그대로 덮을 만큼 거대한 황금 나무. 뿌리는 절벽 사이로 수십 갈래 뻗어 있었고, 가지는 하늘을 가릴 만큼 넓게 퍼져 있었다. 잎 하나가 인간의 손바닥만 했으며, 나무 전체에서 오래된 드래곤의 마력이 느껴졌다. 아르셀리아는 나무를 올려다봤다. “이건 처음 보네.” 세레니스가 대답했다. “밖에서는 안 보여.” “왜.” “결계.” 에르하르트가 앞에서 말했다. “황금수는 황금령이 허락한 자에게만 보입니다.” 아르셀리아가 바로 물었다. “그럼 우리 다 허락받은 거야?” “당신들은 손님이니까.” 에르하르트의 시선이 아스테리온에게 향했다. “저분은 다릅니다.” “뭐가.” “황금수가 직접 문을 열었습니다.” 아스테리온이 나무를 올려다봤다. 표정은 복잡했다.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기억에는 없습니까?” “예.” “그런데.” 에르하르트가 조용히 물었다. “길은 압니까?” 아스테리온의 눈이 흔들렸다. “무슨.” 에르하르트는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뒤로 물러났다. “가 보십시오.” 아스테리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르셀리아가 그를 봤다. “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가만있어.” 아르셀리아가 먼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 순간. 아스테리온의 손이 움직였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아르셀리아가 내려다봤다. 아스테리온 자신도 놀란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손을 놓으려 했다. 아르셀리아가 오히려 그의 손을 잡았다. “같이 가.” “아르셀리아.” “문양 때문에 접촉하면 안 된다며.” “그렇습니다.” “아직 완성 안 됐잖아.” “그게 중요한 게.” “불안하지.” 아스테리온이 멈췄다. 정곡이었다. 아르셀리아는 그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지금.” “…….” “불안하잖아.” 진명 문양을 통해. 느껴졌다. 아스테리온이 아무리 웃고. 태연한 척해도. 황금령에 들어온 뒤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두려움보다 더 복잡했다. 돌아오고 싶었다는 기억. 그런데 돌아온 곳을 기억하지 못한다. 눈앞의 모든 것이 그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아르셀리아라면 그것만으로도 화가 났을 것이다. 아스테리온은 한참 동안 그녀를 보다가 결국 말했다. “조금만.” “뭐.” “조금만 잡고 있겠습니다.” “잡아.” 그가 이번에는 손가락을 얽지 않았다. 단순히 손만 잡았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한 듯했다. 아스테리온의 호흡이 조금 안정됐다. 에르하르트는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낮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또 같은 선택을 하는군.” 아르셀리아가 바로 돌아봤다.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들었는데.”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다 나중이야.” 세레니스가 뒤에서 속삭였다. “황금령 특징인가 봐.” “마음에 안 들어.” 아르셀리아는 투덜거리면서도 아스테리온과 함께 황금수 쪽으로 걸었다. 처음에는 방향이 없었다. 거대한 뿌리만 사방에 엉켜 있었다. 그런데 몇 걸음 뒤. 아스테리온이 멈췄다. “이쪽.” 모두가 그를 봤다.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알아?” “아니요.” “그런데.” 아스테리온은 오른쪽을 바라봤다. 두 개의 거대한 뿌리가 맞붙은 곳.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가까이 가자. 웅― 황금빛 문양이 떠올랐다. 벽처럼 보이던 뿌리가 천천히 갈라졌다. 안쪽으로. 계단이 나타났다. 세레니스가 숨을 삼켰다. 카르디안의 얼굴이 굳었다. 에르하르트만 조용했다. 아르셀리아가 그를 쳐다봤다. “너 알고 있었지.” “가능성을 생각했습니다.” “뭔 가능성.” “황금수가.” 에르하르트가 아스테리온을 바라봤다. “그를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 아스테리온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아르셀리아는 그걸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 계단 아래에는 긴 복도가 있었다. 빛이 없는데도 벽 전체가 은은한 황금빛을 냈다. 이상하게도 먼지가 없었다. 수천 년 동안 누군가 계속 관리해 온 것처럼 깨끗했다. 벽에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드래곤. 인간. 그리고. 날개를 가진 존재. 아르셀리아가 걸음을 늦췄다. “신?” 에르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과 드래곤의 전쟁입니다.” 벽화는 오래됐다. 첫 장면에는 드래곤과 신이 같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두 번째에는 인간들이 땅에 도시를 세우고. 세 번째에는. 전쟁. 빛의 창이 드래곤을 꿰뚫고 있었다. 검은 불꽃이 하늘을 태웠다. 그리고 가장 끝. 한 마리의 거대한 골드 드래곤이 있었다. 다른 드래곤보다 훨씬 컸다. 머리 위에는 왕관처럼 뿔이 뻗어 있었고. 가슴에서는 태양 같은 빛이 흘러나왔다. 그 앞에는 작은 존재가 서 있었다. 아르셀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사람. 검은 머리. 작은 소년. 벽화라 얼굴은 뚜렷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아스테리온도 멈췄다. “…….” 그의 손이 차가워졌다. 아르셀리아가 벽화를 더 가까이 봤다. 소년은 골드 드래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 아래 고대 용언이 새겨져 있었다. 아르셀리아가 읽었다. “별의 아이.” 그 다음. “황금의 후계자.” 그리고 마지막. 글자는 일부 깨져 있었다. 아르셀리아가 손가락으로 먼지를 쓸었다. “…아스테르.” 아스테리온의 숨이 멎었다. 세레니스가 바로 옆으로 왔다. “진짜 그 이름이야?” “응.” 에르하르트는 말이 없었다. 카르디안이 그를 노려봤다.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었지.” “확인 전에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에르하르트가 아스테리온을 봤다. “이제는.” 그가 천천히 말했다. “부정하기 어렵군요.”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뭘.” 에르하르트의 시선이 벽화 속 소년에게 향했다. “아스테리온은.” 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 “처음부터 검이 아니었습니다.” 정적. 아스테리온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아르셀리아가 그를 봤다. 얼굴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러면.” 아스테리온이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무엇이었습니까.” 에르하르트가 대답하려는 순간. 복도 끝에서. 쿵― 심장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황금빛 문 하나. 닫혀 있었다. 그 문 너머에서. 또. 쿵― 아스테리온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스테리온.” 아르셀리아가 즉시 그를 붙잡았다.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정말.” “거짓말.” 그가 웃으려 했다가 멈췄다. 아르셀리아가 조금 전 했던 말이 떠오른 듯했다. 싫으면 싫다고 해. 무서우면 무섭다고 하고. 아스테리온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솔직하게 말했다. “무섭습니다.” 아르셀리아의 손이 그의 팔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 “뭐가.” “저 문 뒤에 있는 것이.”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저를 알고 있을까 봐.” 아르셀리아는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알아보면 좋은 것 아닌가. 기억을 찾으러 왔으니까. 그런데 다음 말을 듣고 알았다. “모두가 저를 아는데.” 아스테리온이 아주 낮게 말했다. “저만 저를 모르면.” 금빛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르셀리아는 그를 한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손가락까지 완전히 얽었다.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내려왔다. “아르셀리아.” “넌 너잖아.” “…….” “기억 없어도.”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네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아스테리온은 말이 없었다. “옛날에 뭐였든.” 아르셀리아는 문을 봤다. “확인하면 돼.” “만약.” “응.” “제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존재라면요.” “그래도 넌 내 보물이야.” 너무 간단했다. 아르셀리아에게는. 검이면 검이라서 보물이고. 드래곤이면 드래곤이라서 버리는 게 아니었다. 원래 무엇이었든. 이미 자신의 보물고에 들어왔다. 자신이 내 거라고 말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스테리온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정말 반칙이군요.” “뭐가.” “그런 말.” “싫어?” 잠시 침묵. 그리고. “아니요.” 그가 아주 조용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아르셀리아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싫은 거 말하기 연습은 잘하더니.” “좋은 걸 말하는 연습도 해야겠군요.” “해.” “아르셀리아가 좋습니다.” “…….” 아르셀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세레니스가 뒤에서 입을 가렸다. 카르디안은 눈을 감았다. “왜 갑자기 그 얘기로 가.” 아스테리온의 얼굴에 오랜만에 능글맞은 미소가 돌아왔다. “연습하라고 하셔서.” “그건 그런 뜻이 아니었어.” “저한테는 맞았습니다.” “그만.” “예.” 하지만 손은 놓지 않았다. 아르셀리아도 놓지 않았다. 황금빛 문 앞에 서자. 문양이 먼저 반응했다. 아르셀리아와 아스테리온의 맞잡은 손목에서 빛이 퍼졌다. 붉은색. 금색. 두 빛이 문 위로 흘러 들어갔다. 에르하르트가 놀란 얼굴로 한 걸음 나섰다. “잠깐.” 늦었다. 쿠구구구―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천 년 동안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것처럼 무거운 소리가 지하 전체를 울렸다. 틈 사이로 빛이 흘러나왔다. 아르셀리아는 본능적으로 아스테리온보다 반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가 바로 알아차렸다. “왜 앞에 서십니까.” “혹시 위험하면.” “제가 검인데.” “그래서?” “보통은 제가 앞에 서야 합니다.” 아르셀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내 보물인데 내가 지켜야지.” 아스테리온이 할 말을 잃었다. 카르디안이 뒤에서 중얼거렸다. “저런 식이면 평생 못 이기겠군.” 세레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졌어.” “뭘 말입니까?” 아스테리온이 물었다. 세레니스가 환하게 웃었다. “말해도 몰라.” 문이 완전히 열렸다. 안쪽은. 작은 공간이었다. 예상과 달랐다. 보물도. 무기도. 거대한 제단도 없었다. 오직. 둥근 방 중앙에. 금빛 수정 하나가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작은 기억이 잠들어 있었다. 소년 둘. 한 명은 금발. 다른 한 명은 검은 머리. 검은 머리의 어린아이가 금발의 소년 뒤를 따라다녔다. 『형.』 그 목소리. 아르셀리아가 들었던 것과 같았다. 아스테리온의 몸이 굳었다. 수정 안의 금발 소년이 돌아봤다. 얼굴은 아직 흐렸다. 『왜 또 따라와, 아스테르.』 『같이 가.』 『위험해.』 『그래도.』 검은 머리 소년이 금발 소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형이잖아.』 순간. 아스테리온의 손이 떨렸다. 수정 속 장면이 바뀌었다. 거대한 골드 드래곤. 그 앞에 두 소년. 그리고. 금발의 소년이 골드 드래곤으로 변했다. 아르셀리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게.” 에르하르트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초대 황금룡.”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검은 머리의 어린 아스테리온에게 향했다. “그럼 아스테리온은.” 에르하르트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수정이 대답했다. 빛이 퍼졌다. 어린 아스테르의 등 뒤로. 작은 날개가 펼쳐졌다. 황금빛. 하지만 순수한 금색만은 아니었다. 끝부분에는 밤하늘 같은 은빛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머리 위. 아주 작은 뿔 두 개. 아스테리온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니.” 처음이었다. 그가 그렇게 빠르게 부정한 것은. “저건.” 자신의 목덜미를 잡았다. 금빛 비늘. “제가 아닙니다.” 에르하르트가 낮게 말했다. “맞습니다.” “아니.” “아스테르.”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아르셀리아가 즉시 그를 봤다.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완전히 창백했다. “저는.” 호흡이 흐트러졌다. “성검입니다.” 쿵. 가슴 안에서 심장이 뛰었다. “인간들이 사용한.” 쿵. “용을 죽인.” 쿵. “검입니다.” “아스테리온.” 아르셀리아가 불렀다. 그가 듣지 못했다. “제가 드래곤이라면.”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럼.”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공포가 한꺼번에 터지고 있었다. “저는 제 종족을 죽인 겁니까?” 정적. 그 질문에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스테리온의 금빛 눈이 흔들렸다. “저 안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제가 베었던 것들은.” 기억 속 피. 비늘. 비명. 수백 년. 천 년. 얼마나 많은지조차 모르는 죽음. 그 모든 것이 갑자기 다른 의미가 되어 돌아왔다. “저와 같은 존재였던 겁니까?” 그 순간. 쿵―! 황금빛 마력이 폭발했다. 아스테리온의 몸에서. 금빛 비늘이 순식간에 목을 넘어 턱 아래까지 번졌다. 동공이 길게 찢어졌다. 등 뒤에서 빛이 터졌다. 무언가가 나오려 했다. 날개. 하지만 완전하지 않았다. 검의 형상과 드래곤의 형상이 뒤섞여 불안정하게 떨렸다. “아스테리온!” 아르셀리아가 달려들었다. 아스테리온이 뒤로 물러났다. “오지 마십시오.” “가만있어.” “아르셀리아.” “지금 너 상태 이상해.” “다가오지 마!” 처음으로. 그가 아르셀리아에게 소리쳤다. 그 순간. 둘 다 멈췄다.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바로 무너졌다. “죄송.” “사과하지 마.” 아르셀리아가 잘랐다. “싫은 거 말하랬잖아.” “…….” “지금 내가 가까이 오는 거 싫어?” 아스테리온은 대답하지 못했다. 진명 문양을 통해. 감정이 흘러왔다. 싫지 않다. 오히려. 다가와 줬으면 한다. 그런데 무섭다. 자신이 무엇으로 변할지. 또 어떤 명령이 튀어나올지. 혹시 그녀를 해칠지. 아르셀리아는 그것을 전부 느꼈다. 그래서. 다가갔다. 한 걸음. 아스테리온이 움찔했다.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응.” 또 한 걸음. “아르셀리아.” “싫으면 밀어.” “…….” “할 수 있으면.” 아스테리온은 손을 들지 못했다. 결국. 아르셀리아가 그의 바로 앞에 섰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금빛 비늘이 번진 뺨을 잡았다. 아스테리온의 몸이 크게 떨렸다. “나 봐.” 금빛 세로 동공이 그녀에게 향했다. “네가 뭐였는지는 나중에 확인해.” “…….” “네가 뭘 했는지도.” 붉은 눈이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근데 지금 너는.” 아르셀리아가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아스테리온이야.” 그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주워 온.”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귀찮은 검.” 아스테리온의 입술이 떨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더 조용하게. “내 보물.” 쿵. 심장이 크게 뛰었다. 아스테리온의 금빛이 순간 폭발했다. 아르셀리아는 피하지 않았다. 빛 속에서. 그의 이마가 그녀의 어깨에 떨어졌다. 마치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는 사람처럼. 아르셀리아는 잠깐 굳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등을 잡았다. 손바닥 아래로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드래곤의 것과 비슷한. 아니. 드래곤의 체온이었다. 아스테리온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낮게. 아르셀리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잠깐만.” “응.” “이대로 있어도 됩니까.” 아르셀리아는 그의 등을 한 번 두드렸다. “응.” 아스테리온의 손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 근처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닿기 직전에 멈췄다. 허락을 기다리듯. 아르셀리아가 알아차렸다. “잡아도 돼.” 그 말이 떨어진 뒤에야. 아스테리온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세게는 아니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마치 너무 강하게 잡으면 이 순간이 깨질 것처럼. 아르셀리아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남자가 자신의 허리를 안고 있는데.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에 그렇게 흔들리던 그의 마력이 자신의 체온 아래서 점점 안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스테리온이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아르셀리아.” “응.” “제가 정말 드래곤이면.” “응.” “그래도 검이라고 부르실 겁니까.” 아르셀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응.”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 “왜요?” “처음 만났을 때 검이었잖아.” “…….” “드래곤이어도 검이고.” 그녀가 당연한 듯 말했다. “검이어도 드래곤이면 둘 다 하면 되지.” 아스테리온이 결국 웃었다. 아주 작은 웃음이었다. 이번에는 숨기기 위한 것도. 능글맞게 넘기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욕심이 많으시군요.” “드래곤이잖아.” 아르셀리아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방 중앙의 황금 수정이 다시 빛났다. 이번에는 영상이 아니었다. 목소리. 아주 오래된. 아르셀리아가 꿈에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 『아스테르.』 아스테리온의 몸이 굳었다. 『네가 이 기록을 보고 있다면.』 금빛 수정에 금발의 남자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얼굴이 보였다. 황금빛 머리. 붉은 기가 아주 조금 섞인 금색 눈. 아스테리온과 닮지는 않았다. 그런데 웃을 때의 입매가 이상할 만큼 비슷했다. 남자는 카메라 같은 것이 아니라. 수천 년 뒤 누군가가 정말 자신을 보고 있다는 듯 정면을 바라봤다. 『나는 아마 네 곁에 없겠지.』 아스테리온의 손이 아르셀리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너는.』 남자가 아주 슬프게 웃었다. 『많은 것을 잊었을 거다.』 정적.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줘.』 아스테리온의 눈에서. 아무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초대 황금룡은 말했다. 『너는 용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적이 없다.』 아르셀리아의 숨이 멎었다. 카르디안이 고개를 들었다. 세레니스도 움직이지 않았다. 『너는 검이 아니다.』 아스테리온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마지막. 『너는.』 기록 속 남자가. 아주 다정하게 웃었다. 『내 동생이다.』 황금빛이. 방 전체를 가득 채웠다.화염궁으로 돌아온 첫날 밤.아르셀리아는 자신의 침실 앞에서 두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한 명은 검은 머리에 금빛 눈.다른 한 명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색만 놓고 보면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아스테리온은 아주 자연스럽게 침실 문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이 방을 사용하던 사람처럼 태연했다. 반면 카르디안은 팔짱을 낀 채 그런 아스테리온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아르셀리아는.피곤했다.“왜 둘 다 여기 있어.”카르디안이 먼저 대답했다.“의회에서 정한 동행 감시.”“그래서.”“네가 자는 동안도 주변을 확인해야 한다.”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내가 잘 때까지?”“그래.”“안 돼.”“뭐가.”“귀찮아.”카르디안이 한숨을 쉬었다.“네 편의를 위해 온 게 아니다.”“그럼 누구 편의인데.”“칠색 의회.”“내 집이잖아.”“그러니까 더 문제다. 신전에서 이미 화염궁 위치와 구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그 말에는 아르셀리아도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자신은 화염궁의 결계를 믿었다.적염령에서도 가장 깊은 곳.용암 계곡과 붉은 절벽 사이에 숨겨진 궁전.허락받지 않은 인간이 들어오기 어려운 곳.하지만 얼마 전까지도 신전이 아스테리온의 위치를 감지했고, 황금령까지 추적대를 보내지 않았던가.그래도.“침실까지는 안 돼.”아르셀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카르디안이 눈썹을 올렸다.“왜.”“내 방이니까.”“저 검은 들어가면서.”아르셀리아가 즉시 옆을 봤다.아스테리온이 얌전히 서 있었다.너무 얌전해서 더 수상했다.“얘는.”아르셀리아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마력 때문에.”“손 잡고 충전하면 보물고에서도 버틴다며.”아스테리온이 아주 부드럽게 끼어들었다.“요즘은 균열 때문에 인간형 유지가 불안정합니다.”카르디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래서 꼭 침실 안이어야 하나.”“주인님의 마력에 가장 가까운 곳이니까요.”“보물고가 더 가까울 수도 있지.”“침실이 더
칠색 의회의 불꽃이 가라앉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정확히는.아르셀리아의 불꽃이 아니라.회의장 안의 분위기가.“그러니까.”아르셀리아는 아직도 붉어진 귀 끝을 숨기지 못한 채 아스테리온을 노려봤다.“다시는 의회에서 그런 말 하지 마.”아스테리온은 매우 온순한 얼굴로 물었다.“어떤 말씀이요?”“키스.”“아.”“아, 하지 마.”“알겠습니다.”너무 순순하게 대답해서 오히려 수상했다.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진짜 알아들었어?”“예.”“다시는 안 해?”“의회에서는.”“아스테리온.”“예.”금빛 눈이 웃었다.아르셀리아가 손을 들었다가 멈췄다. 한 대 치고 싶은데 아직 검신에 금이 가 있었다.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그게 더 짜증 났다.이제는 화를 내다가도 ‘얘 아프지’가 먼저 생각났다.“왜 한숨을 쉬십니까?”“너 때문에.”“그렇게 자주 저를 생각하십니까?”“진짜 검으로 만들어 버릴까.”“그건 원래도 가능합니다.”“…….”“다만 지금은 인간형이 더 좋습니다.”아르셀리아가 이를 악물었다.옆에서는 세레니스가 이미 웃다가 지친 얼굴로 의자에 기대 있었다.“둘이 정말 반려 아니야?”“아니야.”아르셀리아가 즉시 대답했다.“정말?”“응.”“그럼 하나만 물어보자.”“뭔데.”세레니스가 턱으로 둘의 손을 가리켰다.“그건 언제 놓을 거야?”아르셀리아가 내려다봤다.손.아직도 잡고 있었다.정확히는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얽혀 있었다.회의가 거의 끝나 가는 지금까지.한 번도 놓지 않았다.아르셀리아가 바로 손을 빼려 했다.그러자.아스테리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왜.”“아직 마력이 필요합니다.”“진짜?”“예.”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거짓말 아니고?”“확인해 보시겠습니까?”“어떻게.”“놓아 보시면 됩니다.”아르셀리아가 잠시 고민했다.그리고 손을 놓았다.하나.둘.셋.아스테리온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금빛으로 만들어
“시작됩니다.”에드릭의 말이 칠색 의회 한가운데 떨어졌다.그 한마디 뒤로 이상할 만큼 긴 정적이 이어졌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스테리온의 반환과 아르셀리아의 신전 출두를 두고 팽팽하게 갈리던 시선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에드릭에게 모였다. 성왕국의 정식 사절로 들어온 용사가, 정작 자신을 보낸 신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했다.그것도.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말과 함께.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에드릭 옆에 서 있던 사제였다.“용사님.”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에드릭은 그를 보지 않았다.“알고 있습니다.”“성왕국의 공식 사절로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그것도 압니다.”“그런데 왕국의 뜻을 거스르는 발언을―”“왕국의 뜻입니까.”그제야 에드릭이 고개를 돌렸다.피로가 짙게 남은 얼굴.붕대 아래로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상처가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흐리지 않았다.“아니면 신전의 뜻입니까?”사제의 표정이 굳었다.에드릭은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제가 알기로 성왕국 의회에서는 아직 드래곤 영토에 대한 공식적인 군사 행동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용사님.”“국왕 폐하의 친서도 없고.”“그만.”“대신관의 명령만 있지요.”낮게 깔린 마지막 말에 회의장 분위기가 바뀌었다.아르셀리아는 옆에 선 아스테리온의 손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미세하게 차가웠던 손끝이 지금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그도 에드릭의 말을 듣고 있었다.집중해서.아르셀리아는 조용히 물었다.“그게 다른 거야?”에드릭이 그녀를 봤다.“많이 다릅니다.”“인간들끼리는?”“성왕국이라 해도 왕과 신전은 하나가 아닙니다.”“신을 믿는 나라잖아.”“그렇다고 대신관이 왕인 건 아닙니다.”아르셀리아는 잠시 생각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신전이 멋대로 한 거네.”“현재까지는.”에드릭이 대답했다.“그렇게 봐야 합니다.”사제가 결국 앞으로 나섰다.“용사 에드릭 벨로안.”호칭이 바뀌었다.조금
칠색 의회는 드래곤들조차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아르카디아의 일곱 영지가 맞닿는 중앙 산맥, 어느 색의 드래곤에게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중립지대. 일곱 개의 거대한 첨탑이 원을 그리듯 세워져 있었고, 중앙에는 오래된 원형 궁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궁전 외벽에는 적색, 은색, 금색, 흑색, 청색, 녹색, 그리고 지금은 거의 사라진 백색의 마력석이 차례로 박혀 있었다.칠색 의회.드래곤들이 전쟁을 결정하고, 영지 간 분쟁을 조정하며, 인간 왕국과의 외교 문제를 논의하는 곳.아르셀리아는 그 앞에 도착하자마자 생각했다.귀찮다.아주 많이.“왜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옆에서 아스테리온이 물었다.“돌아가고 싶어.”“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그래서 더.”아르셀리아는 원형 궁전 위로 떠 있는 일곱 개의 마력 고리를 올려다봤다.평소라면 이 장소에는 가까이 오지도 않는다. 칠색 의회의 소집장이 날아와도 웬만한 문제라면 대리인을 보내거나 아예 무시했다. 레드 드래곤 중에서도 아르셀리아 로하르트의 괴팍함은 제법 유명해서, 최근 백 년 사이에는 굳이 그녀를 부르지 않는 분위기까지 만들어져 있었다.그런 자신이.직접 왔다.그것도.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맞잡힌 손.자신의 왼손과.아스테리온의 오른손.아침부터 계속 이 상태였다.황금령에서 의회까지 이동하는 동안 아스테리온의 인간형이 두 번이나 흔들렸기 때문이다.아직 균열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다.직접 마력을 공급하면 인간형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고, 손을 잡는 방식이 가장 부담이 적었다.문제는.“또 봅니다.”아스테리온이 말했다.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돌렸다.“뭘.”“손.”“확인한 거야.”“무엇을요?”“문양.”“분명 제 손을 보고 계셨는데요.”“문양도 손목에 있잖아.”“그러면 손목을 보셨어야죠.”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놓을까?”아스테리온이 손가락에 힘을 줬다.“그건 안 됩니다.”“그러니까 조용히 해.”“예.”그는 순순히 대답
황금령의 밤하늘이 붉게 물들었다.거대한 날개가 펼쳐지는 순간, 황금수 주변을 가득 메웠던 빛 정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르셀리아의 인간형 몸이 붉은 마력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커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변했고, 목과 어깨를 타고 올라오던 붉은 비늘은 곧 전신을 뒤덮었다. 날개 안쪽의 금빛 균열이 용암처럼 번뜩이자, 황금령의 서늘했던 공기마저 단숨에 뜨거워졌다.곧 황금수 앞뜰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고개를 들었다.붉은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황금령을 둘러싼 하얀 빛기둥은 모두 열두 개.각각의 기둥을 중심으로 신성 문양이 땅을 타고 이어져 있었다. 위에서 보면 아마 하나의 거대한 원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인간 몇 명을 잡기 위한 마법진이 아니었다. 영지 하나를 봉쇄하고, 그 안에 있는 드래곤의 마력 자체를 억누르기 위한 규모였다.아르셀리아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 코웃음을 쳤다.“제법 준비했네.”그 목소리가 인간의 말처럼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드래곤 특유의 마력이 섞인 음성이 황금령 전체를 울렸다.바닥이 떨렸다.멀리 진을 치고 있던 성기사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그런데도 퇴각하지 않았다.대신 가장 앞의 흰 망토를 걸친 남자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경고한다. 레드 드래곤 아르셀리아 로하르트. 즉시 인간형으로 돌아가 투항하라.』아르셀리아의 거대한 머리가 조금 기울었다.“싫어.”너무 간단한 대답이었다.남자의 얼굴이 멀리서도 굳는 것이 느껴졌다.『당신은 현재 성왕국의 신성 유물을 불법 점유하고―』“그거 말인데.”아르셀리아가 말을 끊었다.“계속 내 거 불법 점유라고 하잖아.”『성검 아스테리온은 성왕국이 수백 년간 보관해 온―』“그래서?”『……뭐라?』“보관했다고 네 거야?”붉은 눈이 가늘어졌다.“훔쳐다가 천 년 갖고 있었다고 주인이 바뀌나?”뒤쪽에 있던 세레니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카르디안은 웃지 않았다. 대신 이미 검은 마력을 손끝에 모으고 있었다.에르하르트 역시
검은 빛이 터진 직후.아르셀리아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었다. 태양이 꺼진 것처럼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검은 장막이 황금수의 기록실을 집어삼켰고, 몸을 짓누르는 낯선 힘이 손끝에서부터 팔을 타고 올라왔다.차갑다.신성력도 아니고.드래곤의 마력도 아니다.오히려 둘을 억지로 끊어 놓으려는 힘에 가까웠다.아르셀리아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아스테리온과 연결된 무언가가.자신을 떼어 내려고 한다.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싫어.”누구에게 하는 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하지만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계약자와 개체 간 연결을 차단합니다.』낯선 목소리.아스테리온의 안쪽에서 흘러나오던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사람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명령 그 자체.아르셀리아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검날을 더 단단히 잡았다.손바닥이 다시 깊게 베였다.따뜻한 피가 손목을 타고 흘렀다.“아르셀리아!”카르디안이 그녀의 팔을 잡으려 했다.“손 놔! 검이 이미―”“건드리지 마.”목소리가 낮았다.카르디안의 손이 멈췄다.아르셀리아의 주변에서 붉은 불꽃이 천천히 피어올랐다.폭발하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조용했다.그래서 더 위험했다.불꽃은 그녀의 발끝에서 손목을 타고 올라가 검신을 감쌌다.아스테리온의 금빛과.아르셀리아의 붉은빛.두 색이 검은 장막 안에서 서로를 찾아 얽혔다.『차단 실패.』목소리가 울렸다.『계약자 마력 저항 확인.』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계약자.”피 묻은 입술 끝이 아주 조금 비틀렸다.“누구 마음대로.”『……』“내가 언제 너희랑 계약했는데.”대답은 없었다.“아스테리온.”그녀가 검을 바라봤다.아직 남자 형태였다.한쪽 팔만 검날로 변한 채.금빛 눈에는 다시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하지만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그의 시선은 오직 하나에만 고정돼 있었다.아르셀리아의 손.피.자신의 검날 위에 흐르는.그녀의 피.“손.”아스테리온이 쉰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