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시작됩니다.”
에드릭의 말이 칠색 의회 한가운데 떨어졌다. 그 한마디 뒤로 이상할 만큼 긴 정적이 이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스테리온의 반환과 아르셀리아의 신전 출두를 두고 팽팽하게 갈리던 시선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에드릭에게 모였다. 성왕국의 정식 사절로 들어온 용사가, 정작 자신을 보낸 신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했다. 그것도. 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말과 함께.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에드릭 옆에 서 있던 사제였다. “용사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 에드릭은 그를 보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성왕국의 공식 사절로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압니다.” “그런데 왕국의 뜻을 거스르는 발언을―” “왕국의 뜻입니까.” 그제야 에드릭이 고개를 돌렸다. 피로가 짙게 남은 얼굴. 붕대 아래로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상처가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흐리지 않았다. “아니면 신전의 뜻입니까?” 사제의 표정이 굳었다. 에드릭은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로 성왕국 의회에서는 아직 드래곤 영토에 대한 공식적인 군사 행동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용사님.” “국왕 폐하의 친서도 없고.” “그만.” “대신관의 명령만 있지요.” 낮게 깔린 마지막 말에 회의장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르셀리아는 옆에 선 아스테리온의 손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미세하게 차가웠던 손끝이 지금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 그도 에드릭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집중해서. 아르셀리아는 조용히 물었다. “그게 다른 거야?” 에드릭이 그녀를 봤다. “많이 다릅니다.” “인간들끼리는?” “성왕국이라 해도 왕과 신전은 하나가 아닙니다.” “신을 믿는 나라잖아.” “그렇다고 대신관이 왕인 건 아닙니다.” 아르셀리아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전이 멋대로 한 거네.” “현재까지는.” 에드릭이 대답했다. “그렇게 봐야 합니다.” 사제가 결국 앞으로 나섰다. “용사 에드릭 벨로안.” 호칭이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의 ‘용사님’이 아니었다. 에드릭도 알아차렸는지 아주 짧게 웃었다. “예.” “성왕국의 명예를 훼손하는 발언을 당장 철회하십시오.” “싫습니다.” 아르셀리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익숙한 대답이었다. 그녀가 옆을 봤다. 아스테리온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아르셀리아가 작게 말했다. “쟤 좀 나 닮아 가는 거 같은데.” 아스테리온도 낮게 대답했다. “좋은 변화 아닙니까.” “내가 왜 기준인데.” “제 기준입니다.” “조용.” “예.” 둘의 속삭임이 작은 소리였는데도 회의장에 있던 드래곤 몇몇은 들었다. 또 시선이 왔다. 아르셀리아는 이제 무시하기로 했다. 사제는 에드릭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당신은 신께 선택된 용사입니다.” 에드릭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 말.” “…….” “이제 그만 들었으면 좋겠군요.” 사제가 멈췄다. 에드릭은 자신의 비어 있는 허리춤을 내려다봤다. 원래라면 그곳에 아스테리온이 있어야 했다. 성왕국에서는 그것을 용사의 증거라 불렀다. 신께서 선택한 인간. 성검에게 인정받은 영웅. 하지만. 정작 아스테리온은 자신을 한 번도 주인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 에드릭이 말했다. “아스테리온은 저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회의장 여기저기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 이미 들은 사실인 드래곤도 있었지만. 본인의 입으로 확인하는 것은 달랐다. “저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에드릭은 아스테리온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잠깐.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스테리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드릭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들었습니다. 제가 신에게 선택될 아이이고, 언젠가 성검을 들 것이고, 드래곤을 죽여 성왕국을 지킬 것이라고.” 아르셀리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어릴 때부터?” “예.” “몇 살.” “일곱.” “미쳤네.” 너무 즉각적인 대답에 에드릭이 잠깐 굳었다. 세레니스가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나도 동의.” 아르셀리아는 이해되지 않았다. 일곱 살. 그 나이에. 너는 누군가를 죽일 사람이라고 가르친다. 그게 용사라서 당연하다고. “싫다고 안 했어?” 에드릭의 시선이 조금 흐려졌다. “그게 싫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아르셀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어딘가 익숙한 말이었다. 아스테리온이 처음부터 검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이 검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처럼. 에드릭 역시. 용사라는 역할 밖의 삶을 배운 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에드릭은 말을 이었다. “제가 열여섯이 되던 해 아스테리온을 처음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르셀리아가 느꼈다. 그래서 손을 조금 더 단단하게 잡았다.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잠깐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전은 성검이 저를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에드릭이 웃었다. 씁쓸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했습니다. 아스테리온은 한 번도 제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으니까요.” 회의장이 더 조용해졌다. “검이 말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의지가 있는지도. 싫고 좋은 것이 있는지도.” 아르셀리아가 아스테리온을 봤다. 그는 무표정했다. 하지만 문양을 통해 감정이 아주 희미하게 스며왔다. 차갑고 오래된 감정. 체념. 그건 분노보다 더 오래 남은 것이었다. 에드릭도 아마 그걸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르셀리아는 대신 물었다. “왜 몰랐는데.”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르셀리아가 곧바로 아스테리온을 봤다. “왜 안 했어?” 아스테리온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했습니다.” 에드릭의 눈이 커졌다. 아스테리온은 여전히 그를 보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는.” “…….” “싫다고도 했고.” 금빛 눈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놓으라고도 했고.” 아르셀리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돌아가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그 말이 끝난 뒤. 아무도 바로 말을 하지 못했다. 아스테리온은 웃지 않았다.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순했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나중에는 말할 이유가 없어졌죠.” 에드릭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저는.” “압니다.” 아스테리온이 처음으로 에드릭을 봤다. “당신은 몰랐겠죠.” “그래도.” “당신이 제게 직접 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에드릭이 아무 말도 못 했다. “하지만.” 아스테리온의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에드릭이 고개를 숙였다. “…예.” 사제가 낮게 끼어들었다. “성검은 신성한 사명을 수행한 것입니다.”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즉시 그에게 향했다. 사제는 말을 이었다. “무기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것을 고통으로 해석하는 것부터가 오염의 증거입니다.” 그 순간. 아르셀리아가 손을 놓았다. 아스테리온이 놀라 그녀를 봤다. 하지만 그녀가 앞으로 나가기 위해 놓은 것이었다. 붉은 머리카락 끝이 아주 약하게 떠올랐다. 열기. “너.” 사제가 굳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무기라서 고통 없다고?” “성검은―” “얘 아프다고 하는데.” “그것은 계약자가 만들어 낸 잘못된 자아―” 화르륵. 아르셀리아의 발밑에 불길이 솟았다. 카르디안이 즉시 말했다. “아르셀리아.” “안 죽여.” “그걸 묻기 전에 먼저 말했군.” “안 태워.” 세레니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조금은 태울 것 같은데.” “조금.” 사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우렐리안 의장이 지팡이를 들어 바닥을 한 번 쳤다. 쿵. 의회의 중립 마력이 아르셀리아의 불꽃과 사제 사이로 들어왔다. “아르셀리아 로하르트.” “왜.” “여기는 칠색 의회다.” “알아.” “사절을 불태우면 외교 문제가 된다.” 아르셀리아가 사제를 노려보며 물었다. “얼마나 태우면 외교 문제 아닌데.” 아우렐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세레니스가 얼굴을 가렸다. 카르디안이 대신 말했다. “안 태우는 게 제일 좋다.” “귀찮네.” “참아.” 아르셀리아는 마지못해 불길을 거뒀다. 뒤로 돌아왔을 때. 아스테리온이 그녀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아르셀리아가 봤다. “왜.” “잡고 계셨잖습니까.” “필요해?” “지금은.” 그가 아주 조금 웃었다. “제가 잡고 싶습니다.” 아르셀리아는 말없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바로 얽혀 왔다. 조금 전보다 더 자연스러웠다. 회의장에 또 묘한 침묵이 흘렀지만. 이번에는 정말 무시했다. 아우렐리안이 에드릭에게 물었다. “전쟁이 시작된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라.” 에드릭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신전이 성검을 되찾으려는 이유는 단순히 유물을 잃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알고 있다.” “아스테리온의 용살 명령을 다시 완전히 깨우려는 겁니다.” 아르셀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아스테리온도 손끝에 힘을 줬다. 카르디안이 낮게 물었다. “근거는.” “저를 치료하던 신관들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어디서.” “황금령으로 오기 전.” 에드릭은 잠시 숨을 골랐다. “제가 신전으로 돌아간 뒤 성검을 잃은 책임을 물었습니다.”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때렸어?” 에드릭이 애매한 얼굴로 대답했다. “…비슷했습니다.” “어디.”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습니다.” “난 중요한데.” 아르셀리아가 그의 붕대를 봤다. 황금령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했다. 아르셀리아는 에드릭을 죽이지 않았다. 처음 싸웠을 때도 적당히 날려 보냈을 뿐. 그런데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분명 자신과 싸운 것보다 더 심하게 다쳐 있었다. “저 상처 신전이 한 거야?” 에드릭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결국 말했다. “일부는.” 회의장 공기가 다시 싸늘해졌다. 세레니스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자기네 용사인데?” “성검을 잃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에드릭의 입꼬리가 씁쓸하게 올라갔다. “신전에서 지난 십수 년간 발표한 모든 신탁이 거짓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아우렐리안이 낮게 말했다. “그래서 입을 막으려 했군.” “처음에는요.” “처음에는?” 에드릭이 사제들을 잠시 봤다. “그 뒤에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옆의 사제가 날카롭게 말했다. “더 이상 말하지 마십시오.” 에드릭은 무시했다. “아스테리온이 아르셀리아 님을 진짜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그의 시선이 두 사람의 손목 문양에 닿았다. “신전은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아르셀리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지금까지는 성검의 완전한 힘을 깨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아스테리온의 금빛 눈이 차갑게 굳었다. “저를 이용해 놓고도?” “인간은 아스테리온의 힘을 전부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건 우리도 확인했다.” 에르하르트가 말했다. 황금령 기록으로도 인간 주인은 아스테리온의 완전한 힘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에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르셀리아 님이 검을 잡았을 때.” 아르셀리아는 처음 검을 빼앗던 순간을 떠올렸다. 금빛. 손에 닿자마자 살아난 듯 울리던 검. “처음으로 완전한 반응이 나왔습니다.” 에드릭이 말했다. “신전은 그걸 기다렸습니다.” 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를?” “정확히는.” 에드릭의 얼굴이 굳었다. “성검에게 선택받는 드래곤을.” 정적. 이번에는. 누구도 바로 말을 하지 못했다. 카르디안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설명해.” “저도 전부 아는 건 아닙니다.” “아는 것부터.” 에드릭이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신전 지하의 봉인구역에 오래된 예언문이 있습니다.” 옆 사제가 얼굴을 새하얗게 했다. “에드릭!” 처음으로 이름만 불렀다. 에드릭은 돌아보지 않았다. “저는 어릴 때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는데.” 에드릭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검은.” 잠깐. “용의 손에서 완성된다.” 아르셀리아의 손목 문양이 아주 약하게 뛰었다. 아스테리온의 가슴에서도 같은 박동이 느껴졌다. 에드릭이 계속 말했다. “그리고 완성된 검은.” 그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용의 피로 문을 연다.” 세레니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문.” “모릅니다.” “예언문 뒤는?” “당시에는 가려져 있었습니다.” 카르디안이 낮게 말했다. “그걸 신전이 알고 있었다면.” “그래서 아스테리온을 계속 인간 용사들에게 넘겼습니다.” “드래곤이 가져갈 때까지?” “아마도.” 에드릭의 목소리에 혐오가 섞였다. “성검을 든 영웅들이 계속 드래곤을 사냥하도록 만든 것도.” 아르셀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제야. 이상하게 맞아떨어졌다. 용살성검을 들고. 드래곤에게 보낸다. 그 과정에서 언젠가는. 드래곤이 성검을 빼앗을 수도 있다. 보통이라면 잃어버릴 위험인데. 신전은 그것마저 계산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스테리온이 낮게 물었다. “그렇다면.” 모두가 그를 봤다. “제가 아르셀리아에게 빼앗긴 것도.” 금빛 눈이 천천히 차가워졌다. “그들에게는 실패가 아니었다는 겁니까.” 에드릭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아르셀리아가 갑자기 손을 놓았다.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봤다. 이번에는 그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주먹을 쥐기 위해서였다. “진짜 마음에 안 들어.” 발밑에 불꽃이 다시 피었다. 카르디안이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누구를 태우려고.” “신전.” “여기 없다.” “알아.” “그러면.” “나중에.” 아스테리온이 손을 내밀었다. 아르셀리아가 그걸 보고.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손가락을 끼웠다. “그럼.” 아우렐리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왕국 신전의 목적은 성검 회수 자체가 아니다.” “예.” “아르셀리아와의 계약을 끊는 것도 아니고.” 에드릭은 잠시 망설였다. “…오히려 반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르셀리아가 눈을 찌푸렸다. “반대?” “계약을.” 에드릭이 두 사람의 손을 봤다. “더 깊게 만들려고 할 겁니다.” 아스테리온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누구 마음대로.” 아르셀리아가 옆을 봤다. 방금. 자신이 자주 하는 말을. 아스테리온이 했다. 그는 신전의 사절을 노려보며 말했다. “제 계약은.” 한 단어씩. “저와 아르셀리아의 것입니다.” 그 말에. 아르셀리아의 심장이 이상하게 한 번 뛰었다. 그런데 아스테리온은 모르고 계속 말했다. “신전이 만든 것도 아니고.” 손가락에 힘이 들어왔다. “신에게 허락받은 것도 아닙니다.” 회의장 한가운데.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퍼졌다. “그러니 누구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네레이온이 낮게 물었다. “그 계약이 완성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모르면서?”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래서 알아낼 겁니다.” “만약 그 끝이 드래곤에게 재앙이라면.” 아스테리온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르셀리아를 봤다. “그때는 제가 선택하겠습니다.” 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뭘.” “멈추는 방법을.” “혼자?” “….” “또 혼자 하려고?” 아스테리온이 입을 다물었다. 아르셀리아는 그를 빤히 봤다. “너 진짜 자꾸 그런다.” “어떤 걸 말입니까.” “일 생기면 혼자 가려고 하는 거.” “그게 더 안전할 때가―” “나한테는 안 안전해.” 아스테리온이 멈췄다. 아르셀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네가 어디 갔는지 모르잖아.” “…….” “문양도 아프고.” 한 박자. “내 보물도 없어지고.” 금빛 눈이 천천히 흔들렸다. 회의장에 드래곤이 몇십이나 있다는 사실도. 아르셀리아는 잊은 듯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손을 조금 흔들었다. 맞잡힌 손. “같이 해.” 아스테리온이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세레니스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고. 카르디안은 천장을 봤다. 아우렐리안조차 잠시 시선을 피했다. 아스테리온이 아주 낮게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왜.” “제가 정말 혼인 신청을 하고 싶어집니다.” 정적. 아르셀리아의 얼굴이 즉시 굳었다. “지금 이 상황에?” “이런 상황이라서 더.” “싫어.” “아직 말도 안 했습니다.” “말할 거잖아.” “예.” “하지 마.” “그럼 내일.” “아스테리온.” “예.” “진짜 조용히 해.” 그가 웃었다. “알겠습니다.” 회의장 곳곳에서 숨죽인 웃음이 흘렀다. 네레이온마저 관자놀이를 눌렀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군.” 카르디안이 낮게 말했다. “나도 백 년 넘게 저랬지만 요즘은 더 심해졌다.” “네가 왜 익숙한 얼굴인데.” “익숙해지고 싶어서 익숙해진 게 아니다.” 아르셀리아가 둘을 노려봤다. “다 들려.” 둘 다 입을 다물었다. 그때. 에드릭이 갑자기 휘청했다.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즉시 돌아갔다. “야.” 에드릭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기침. 그리고 손바닥 위. 붉은 피. 세레니스가 바로 앞으로 나갔다. “에드릭.” “괜찮.” “그 말 여기서 금지야.”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에드릭이 어이없는 얼굴로 그녀를 봤다. “왜.” 아스테리온이 아주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가 먼저 금지당했습니다.” “…….” “상당히 엄격합니다.” 아르셀리아가 노려봤다. “너는 조용.” 세레니스는 에드릭의 손목을 잡아 상태를 확인했다. 표정이 바로 굳었다. “이거.” 은빛 마력이 그의 몸을 한 바퀴 훑었다. “치료가 덜 된 게 아니야.” 에드릭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카르디안이 다가왔다. “뭔데.” 세레니스가 에드릭의 목깃을 잡았다. “미안.” “잠―” 옷깃이 내려갔다. 쇄골 아래. 붉고 검은 문양. 신전에서 사용하는 신성 문양과 비슷했지만. 뒤틀려 있었다. 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스테리온의 손도 차가워졌다. 그는 그것을 알아봤다. “복종 각인.” 에드릭이 눈을 감았다. “아십니까.” 아스테리온의 표정이 사라졌다. “비슷한 것을 봤습니다.” 자신의 기억 속. 검은 제단. 몸에 새겨지던 명령. 『복종하라.』 아르셀리아가 아주 낮게 물었다. “얘한테도 한 거야?” 아스테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이 조금 떨렸다. 에드릭이 어렵게 말했다. “제가 황금령으로 도망친 뒤.” “다시 잡혔어?” “예.” “그런데 어떻게 여기 왔어.” 에드릭이 옆의 사제들을 바라봤다. “보내 줬습니다.” 회의장 전체의 공기가 멎었다. 아르셀리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왜.” 에드릭이 대답하려는 순간. 쇄골 아래의 검은 문양이. 빛났다. “에드릭!” 세레니스가 급히 손을 뻗었다. 늦었다. 문양에서 새하얀 빛이 폭발했다. 콰앙―! 아르셀리아가 본능적으로 아스테리온을 자신의 뒤로 끌었다. 카르디안은 검은 장벽을 세웠고, 에르하르트와 아우렐리안도 동시에 의회 결계를 펼쳤다. 빛이 사라졌을 때. 에드릭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동자가 흐렸다. 입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칠색 의회에 고합니다.』 에드릭의 목소리인데. 에드릭의 말이 아니었다. 사제들의 얼굴도 굳었다. 그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성왕국은 평화를 원합니다.』 아르셀리아의 입꼬리가 차갑게 비틀렸다. “저렇게?” 『그러므로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에드릭의 몸이 떨렸다. 손끝이 바닥을 긁었다. 저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은 멈추지 않았다. 『성검과 레드 드래곤을 성왕국으로 인도하십시오.』 아스테리온의 금빛 눈이 완전히 차가워졌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에드릭의 목에서 피가 흘렀다. 세레니스가 문양을 억누르려 했지만 튕겨 나왔다. “젠장.” 『신께서 드래곤을 다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회의장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마지막. 『특히.』 에드릭의 고개가. 억지로. 아르셀리아와 아스테리온 쪽으로 돌아갔다. 『성검이 선택한 레드 드래곤은.』 아르셀리아의 손목 문양이 강하게 뛰었다. 『살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아스테리온의 손이 움직였다. 아르셀리아보다 먼저. 그녀의 앞으로. 몸으로 가렸다. 금빛 눈이 무서우리만큼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시.” 그가 낮게 말했다. “말해 보십시오.” 에드릭의 입이 웃었다. 에드릭의 웃음이 아니었다. 『성검 아스테리온.』 그 이름. 『돌아오라.』 아스테리온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그 드래곤을 죽이고.』 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 자리로 돌아오라.』 순간. 아스테리온의 목덜미 아래. 검은 명령 문양이 아주 희미하게 떠올랐다. 아르셀리아가 즉시 손을 잡았다. “아스테리온.” 그의 호흡이 잠깐 끊겼다. “나 봐.” 금빛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명령이 움직인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스테리온이 웃었다. 아주 작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안 괜찮다고 하면.” “괜찮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아르셀리아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에드릭의 입을 빌린 신전을 향해 말했다. “싫습니다.” 문양이 한번 강하게 타올랐다.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지만. 놓지 않았다. “저는.” 손목의 붉고 금빛인 문양이 함께 빛났다. “돌아갈 자리가 없습니다.” 아르셀리아가 그를 봤다. 아스테리온도 그녀를 봤다. 그리고 아주 조용하게 말을 바꿨다. “아니.” 금빛 눈이 천천히 부드러워졌다. “이제는 있군요.” 아르셀리아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제가 돌아갈 곳은.”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오직 그녀에게 머물렀다. “여기입니다.” 명령 문양에. 처음으로. 아주 가는 금이 갔다. 에드릭의 입에서 낯선 비명이 터졌다. 『아스테리―』 퍽. 연결이 끊겼다. 에드릭의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세레니스가 받아 냈다. 동시에 아스테리온의 목덜미 문양도 사라졌다. 회의장에는 거친 숨소리만 남았다. 아르셀리아는 여전히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스테리온.” “예.” “방금.” “예.” “여기가 돌아갈 곳이라고 했어?” 아스테리온이 조금 웃었다. “그랬습니다.” “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르셀리아의 손등을 들어 올렸다. 입술이 닿기 직전. 멈췄다. 전에. 허락을 받지 못했던 행동. 금빛 눈이 그녀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낮은 목소리.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회의장에는 아직 수십 마리의 드래곤이 있었다. 카르디안의 얼굴이 급격히 험악해졌다. 세레니스는 에드릭을 붙잡은 채 눈만 반짝였다. 아르셀리아는 자신의 손등과. 아스테리온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아주 잠깐 고민했다. “한 번만.” 아스테리온의 눈이 휘었다. “예.” 그의 입술이. 아르셀리아의 손등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정말 짧았다. 그런데. 손목의 문양이. 쿵. 두 사람의 심장처럼 함께 뛰었다. 아르셀리아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아스테리온도 눈을 들었다. 둘 다 느꼈다. 문양이. 조금 더 깊어졌다. 세레니스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저건.” 카르디안이 이를 악물었다. “설마.” 아우렐리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표정에는 아까와 다른 긴장감이 있었다. “손을.” 아르셀리아가 즉시 손을 뒤로 숨겼다. “안 만져.” “만지지 않는다.” “그럼.” “보여 줘라.” 아르셀리아가 못마땅한 얼굴로 손목을 들었다. 붉은색과 금색으로 얽혀 있던 문양. 그 중심에. 전에는 없던 작은 고리가 하나 생겨 있었다. 아우렐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세레니스가 물었다. “뭔데.” 아우렐리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셀리아가 재촉했다. “또 반려 어쩌고야?” 긴 침묵. 그리고. 아우렐리안이 천천히 말했다. “정확히는 아직 아니다.” 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아스테리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르셀리아가 바로 그를 봤다. “좋아하지 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얼굴이 했어.” 아우렐리안이 이마를 짚었다. “문양이 한 단계 더 진행됐다.” 회의장 분위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아르셀리아가 손목을 내려다봤다. “키스해서?” “손등입니다.” 아스테리온이 정정했다. “그게 그거잖아.” “조금 다릅니다.” “지금 그게 중요해?” “저한테는.” “조용.” 아우렐리안이 둘을 끊었다. “접촉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 “방금 아스테리온이.” 아우렐리안은 잠시 말을 고르듯 멈췄다. “자신이 돌아갈 곳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아스테리온의 미소가 사라졌다. 아르셀리아도 그를 봤다. 아우렐리안이 문양을 바라봤다. “이 각인은 단순히 마력을 주고받는 계약이 아니다.” “알아.” “그보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서로를 어디에 두는지에 반응하는 것 같군.” 정적. “소유.” 한 박자. “신뢰.” 한 박자. “그리고.” 아우렐리안의 시선이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훑었다. “귀속.” 아르셀리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귀속?”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자신의 삶 안에 어디까지 들이는가.” 아스테리온의 눈이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그러니.” 아우렐리안이 낮게 말했다. “당분간 조심해라.” 아르셀리아가 바로 물었다. “뭘.” “…전부.” “그게 뭐야.” “마력 교환.” “필요한데.” “알고 있다.” “손잡는 것도?” “그것 역시 필요할 수 있지.” “그럼 뭘 조심해.” 아우렐리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세레니스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웃지 않으려고. 카르디안은 이미 결론을 아는 얼굴이었다. 결국 의장이 아주 피곤하게 말했다. “지나치게 친밀한 접촉.” 아르셀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얼마나.” 아우렐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그걸 내가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지?” “모르니까 묻잖아.” “아르셀리아.” “왜.” 세레니스가 결국 앞으로 나섰다. “내가 나중에 설명해 줄게.” 아르셀리아가 의심스럽게 봤다. “너 웃고 있는데.” “기분 탓이야.” 아스테리온이 아주 조용히 물었다. “키스도 포함됩니까?” 카르디안의 검은 마력이 순간 피어올랐다. “네가 왜 그걸 묻지?” “중요하니까요.” “안 중요하다.” “저한테는.” 아르셀리아가 천천히 아스테리온을 봤다. “너.” “예.” “왜 궁금해.”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언젠가 할 생각이라서요.” 회의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아르셀리아의 귀 끝이. 천천히. 붉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스테리온.” “예.” “검으로 변해.” “왜요.” “지금 당장.” “싫습니다.” “왜!” 아스테리온이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정말 즐거운 얼굴로. “지금 주인님 얼굴이 상당히 귀여우셔서요.” 화르륵―! 아르셀리아의 불꽃이 칠색 의회 천장까지 솟구쳤다. 그리고. 신전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사실보다. 그날 의회에서 가장 빠르게 퍼진 소문은 따로 있었다. 적염령의 아르셀리아 로하르트가 용살성검과 반려 각인을 완성해 가고 있다. 그 소문을 들은 당사자 둘 중. 한 명은 극구 부정했고. 다른 한 명은. “괜찮은 방향이군요.” 아주 만족스러워했다.화염궁으로 돌아온 첫날 밤.아르셀리아는 자신의 침실 앞에서 두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한 명은 검은 머리에 금빛 눈.다른 한 명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색만 놓고 보면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아스테리온은 아주 자연스럽게 침실 문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이 방을 사용하던 사람처럼 태연했다. 반면 카르디안은 팔짱을 낀 채 그런 아스테리온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아르셀리아는.피곤했다.“왜 둘 다 여기 있어.”카르디안이 먼저 대답했다.“의회에서 정한 동행 감시.”“그래서.”“네가 자는 동안도 주변을 확인해야 한다.”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내가 잘 때까지?”“그래.”“안 돼.”“뭐가.”“귀찮아.”카르디안이 한숨을 쉬었다.“네 편의를 위해 온 게 아니다.”“그럼 누구 편의인데.”“칠색 의회.”“내 집이잖아.”“그러니까 더 문제다. 신전에서 이미 화염궁 위치와 구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그 말에는 아르셀리아도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자신은 화염궁의 결계를 믿었다.적염령에서도 가장 깊은 곳.용암 계곡과 붉은 절벽 사이에 숨겨진 궁전.허락받지 않은 인간이 들어오기 어려운 곳.하지만 얼마 전까지도 신전이 아스테리온의 위치를 감지했고, 황금령까지 추적대를 보내지 않았던가.그래도.“침실까지는 안 돼.”아르셀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카르디안이 눈썹을 올렸다.“왜.”“내 방이니까.”“저 검은 들어가면서.”아르셀리아가 즉시 옆을 봤다.아스테리온이 얌전히 서 있었다.너무 얌전해서 더 수상했다.“얘는.”아르셀리아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마력 때문에.”“손 잡고 충전하면 보물고에서도 버틴다며.”아스테리온이 아주 부드럽게 끼어들었다.“요즘은 균열 때문에 인간형 유지가 불안정합니다.”카르디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래서 꼭 침실 안이어야 하나.”“주인님의 마력에 가장 가까운 곳이니까요.”“보물고가 더 가까울 수도 있지.”“침실이 더
칠색 의회의 불꽃이 가라앉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정확히는.아르셀리아의 불꽃이 아니라.회의장 안의 분위기가.“그러니까.”아르셀리아는 아직도 붉어진 귀 끝을 숨기지 못한 채 아스테리온을 노려봤다.“다시는 의회에서 그런 말 하지 마.”아스테리온은 매우 온순한 얼굴로 물었다.“어떤 말씀이요?”“키스.”“아.”“아, 하지 마.”“알겠습니다.”너무 순순하게 대답해서 오히려 수상했다.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진짜 알아들었어?”“예.”“다시는 안 해?”“의회에서는.”“아스테리온.”“예.”금빛 눈이 웃었다.아르셀리아가 손을 들었다가 멈췄다. 한 대 치고 싶은데 아직 검신에 금이 가 있었다.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그게 더 짜증 났다.이제는 화를 내다가도 ‘얘 아프지’가 먼저 생각났다.“왜 한숨을 쉬십니까?”“너 때문에.”“그렇게 자주 저를 생각하십니까?”“진짜 검으로 만들어 버릴까.”“그건 원래도 가능합니다.”“…….”“다만 지금은 인간형이 더 좋습니다.”아르셀리아가 이를 악물었다.옆에서는 세레니스가 이미 웃다가 지친 얼굴로 의자에 기대 있었다.“둘이 정말 반려 아니야?”“아니야.”아르셀리아가 즉시 대답했다.“정말?”“응.”“그럼 하나만 물어보자.”“뭔데.”세레니스가 턱으로 둘의 손을 가리켰다.“그건 언제 놓을 거야?”아르셀리아가 내려다봤다.손.아직도 잡고 있었다.정확히는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얽혀 있었다.회의가 거의 끝나 가는 지금까지.한 번도 놓지 않았다.아르셀리아가 바로 손을 빼려 했다.그러자.아스테리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왜.”“아직 마력이 필요합니다.”“진짜?”“예.”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거짓말 아니고?”“확인해 보시겠습니까?”“어떻게.”“놓아 보시면 됩니다.”아르셀리아가 잠시 고민했다.그리고 손을 놓았다.하나.둘.셋.아스테리온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금빛으로 만들어
“시작됩니다.”에드릭의 말이 칠색 의회 한가운데 떨어졌다.그 한마디 뒤로 이상할 만큼 긴 정적이 이어졌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스테리온의 반환과 아르셀리아의 신전 출두를 두고 팽팽하게 갈리던 시선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에드릭에게 모였다. 성왕국의 정식 사절로 들어온 용사가, 정작 자신을 보낸 신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했다.그것도.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말과 함께.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에드릭 옆에 서 있던 사제였다.“용사님.”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에드릭은 그를 보지 않았다.“알고 있습니다.”“성왕국의 공식 사절로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그것도 압니다.”“그런데 왕국의 뜻을 거스르는 발언을―”“왕국의 뜻입니까.”그제야 에드릭이 고개를 돌렸다.피로가 짙게 남은 얼굴.붕대 아래로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상처가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흐리지 않았다.“아니면 신전의 뜻입니까?”사제의 표정이 굳었다.에드릭은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제가 알기로 성왕국 의회에서는 아직 드래곤 영토에 대한 공식적인 군사 행동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용사님.”“국왕 폐하의 친서도 없고.”“그만.”“대신관의 명령만 있지요.”낮게 깔린 마지막 말에 회의장 분위기가 바뀌었다.아르셀리아는 옆에 선 아스테리온의 손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미세하게 차가웠던 손끝이 지금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그도 에드릭의 말을 듣고 있었다.집중해서.아르셀리아는 조용히 물었다.“그게 다른 거야?”에드릭이 그녀를 봤다.“많이 다릅니다.”“인간들끼리는?”“성왕국이라 해도 왕과 신전은 하나가 아닙니다.”“신을 믿는 나라잖아.”“그렇다고 대신관이 왕인 건 아닙니다.”아르셀리아는 잠시 생각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신전이 멋대로 한 거네.”“현재까지는.”에드릭이 대답했다.“그렇게 봐야 합니다.”사제가 결국 앞으로 나섰다.“용사 에드릭 벨로안.”호칭이 바뀌었다.조금
칠색 의회는 드래곤들조차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아르카디아의 일곱 영지가 맞닿는 중앙 산맥, 어느 색의 드래곤에게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중립지대. 일곱 개의 거대한 첨탑이 원을 그리듯 세워져 있었고, 중앙에는 오래된 원형 궁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궁전 외벽에는 적색, 은색, 금색, 흑색, 청색, 녹색, 그리고 지금은 거의 사라진 백색의 마력석이 차례로 박혀 있었다.칠색 의회.드래곤들이 전쟁을 결정하고, 영지 간 분쟁을 조정하며, 인간 왕국과의 외교 문제를 논의하는 곳.아르셀리아는 그 앞에 도착하자마자 생각했다.귀찮다.아주 많이.“왜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옆에서 아스테리온이 물었다.“돌아가고 싶어.”“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그래서 더.”아르셀리아는 원형 궁전 위로 떠 있는 일곱 개의 마력 고리를 올려다봤다.평소라면 이 장소에는 가까이 오지도 않는다. 칠색 의회의 소집장이 날아와도 웬만한 문제라면 대리인을 보내거나 아예 무시했다. 레드 드래곤 중에서도 아르셀리아 로하르트의 괴팍함은 제법 유명해서, 최근 백 년 사이에는 굳이 그녀를 부르지 않는 분위기까지 만들어져 있었다.그런 자신이.직접 왔다.그것도.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맞잡힌 손.자신의 왼손과.아스테리온의 오른손.아침부터 계속 이 상태였다.황금령에서 의회까지 이동하는 동안 아스테리온의 인간형이 두 번이나 흔들렸기 때문이다.아직 균열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다.직접 마력을 공급하면 인간형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고, 손을 잡는 방식이 가장 부담이 적었다.문제는.“또 봅니다.”아스테리온이 말했다.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돌렸다.“뭘.”“손.”“확인한 거야.”“무엇을요?”“문양.”“분명 제 손을 보고 계셨는데요.”“문양도 손목에 있잖아.”“그러면 손목을 보셨어야죠.”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놓을까?”아스테리온이 손가락에 힘을 줬다.“그건 안 됩니다.”“그러니까 조용히 해.”“예.”그는 순순히 대답
황금령의 밤하늘이 붉게 물들었다.거대한 날개가 펼쳐지는 순간, 황금수 주변을 가득 메웠던 빛 정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르셀리아의 인간형 몸이 붉은 마력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커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변했고, 목과 어깨를 타고 올라오던 붉은 비늘은 곧 전신을 뒤덮었다. 날개 안쪽의 금빛 균열이 용암처럼 번뜩이자, 황금령의 서늘했던 공기마저 단숨에 뜨거워졌다.곧 황금수 앞뜰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고개를 들었다.붉은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황금령을 둘러싼 하얀 빛기둥은 모두 열두 개.각각의 기둥을 중심으로 신성 문양이 땅을 타고 이어져 있었다. 위에서 보면 아마 하나의 거대한 원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인간 몇 명을 잡기 위한 마법진이 아니었다. 영지 하나를 봉쇄하고, 그 안에 있는 드래곤의 마력 자체를 억누르기 위한 규모였다.아르셀리아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 코웃음을 쳤다.“제법 준비했네.”그 목소리가 인간의 말처럼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드래곤 특유의 마력이 섞인 음성이 황금령 전체를 울렸다.바닥이 떨렸다.멀리 진을 치고 있던 성기사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그런데도 퇴각하지 않았다.대신 가장 앞의 흰 망토를 걸친 남자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경고한다. 레드 드래곤 아르셀리아 로하르트. 즉시 인간형으로 돌아가 투항하라.』아르셀리아의 거대한 머리가 조금 기울었다.“싫어.”너무 간단한 대답이었다.남자의 얼굴이 멀리서도 굳는 것이 느껴졌다.『당신은 현재 성왕국의 신성 유물을 불법 점유하고―』“그거 말인데.”아르셀리아가 말을 끊었다.“계속 내 거 불법 점유라고 하잖아.”『성검 아스테리온은 성왕국이 수백 년간 보관해 온―』“그래서?”『……뭐라?』“보관했다고 네 거야?”붉은 눈이 가늘어졌다.“훔쳐다가 천 년 갖고 있었다고 주인이 바뀌나?”뒤쪽에 있던 세레니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카르디안은 웃지 않았다. 대신 이미 검은 마력을 손끝에 모으고 있었다.에르하르트 역시
검은 빛이 터진 직후.아르셀리아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었다. 태양이 꺼진 것처럼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검은 장막이 황금수의 기록실을 집어삼켰고, 몸을 짓누르는 낯선 힘이 손끝에서부터 팔을 타고 올라왔다.차갑다.신성력도 아니고.드래곤의 마력도 아니다.오히려 둘을 억지로 끊어 놓으려는 힘에 가까웠다.아르셀리아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아스테리온과 연결된 무언가가.자신을 떼어 내려고 한다.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싫어.”누구에게 하는 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하지만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계약자와 개체 간 연결을 차단합니다.』낯선 목소리.아스테리온의 안쪽에서 흘러나오던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사람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명령 그 자체.아르셀리아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검날을 더 단단히 잡았다.손바닥이 다시 깊게 베였다.따뜻한 피가 손목을 타고 흘렀다.“아르셀리아!”카르디안이 그녀의 팔을 잡으려 했다.“손 놔! 검이 이미―”“건드리지 마.”목소리가 낮았다.카르디안의 손이 멈췄다.아르셀리아의 주변에서 붉은 불꽃이 천천히 피어올랐다.폭발하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조용했다.그래서 더 위험했다.불꽃은 그녀의 발끝에서 손목을 타고 올라가 검신을 감쌌다.아스테리온의 금빛과.아르셀리아의 붉은빛.두 색이 검은 장막 안에서 서로를 찾아 얽혔다.『차단 실패.』목소리가 울렸다.『계약자 마력 저항 확인.』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계약자.”피 묻은 입술 끝이 아주 조금 비틀렸다.“누구 마음대로.”『……』“내가 언제 너희랑 계약했는데.”대답은 없었다.“아스테리온.”그녀가 검을 바라봤다.아직 남자 형태였다.한쪽 팔만 검날로 변한 채.금빛 눈에는 다시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하지만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그의 시선은 오직 하나에만 고정돼 있었다.아르셀리아의 손.피.자신의 검날 위에 흐르는.그녀의 피.“손.”아스테리온이 쉰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