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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고에 남자를 들였다는 소문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9 22:23:01

아르셀리아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주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평소와 달랐다.

침실의 공기가 낯설었다.

정확히는, 자신 말고 다른 존재의 기척이 있었다.

아르셀리아는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붉은 수정으로 장식된 천장에는 새벽빛이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기 전이라 방 안은 어두웠고,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이 침대 가장자리만 겨우 밝혔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은 채 귀를 기울였다.

숨소리.

아주 얕았다.

인간이 아닌 것처럼 고요했지만 분명 누군가 있었다.

아르셀리아의 붉은 눈이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창가.

거기에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등 뒤로 느슨하게 흘러내렸고, 몸에는 어젯밤 어디선가 주워 온 듯한 검은 셔츠와 바지가 걸쳐져 있었다. 황금빛 눈은 창밖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깨어난 순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인님.”

아르셀리아의 얼굴이 즉시 굳었다.

“왜 여기 있어.”

“어제 말씀드렸는데요.”

“뭘.”

“멀리 떨어질 수 없다고.”

아르셀리아는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분명 보물고에 넣어 두었다. 정확히는, 다시 검으로 변하라고 지시했고 아스테리온은 뻔뻔하게 싫다고 했으며, 결국 아르셀리아가 보물고 문을 잠가 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침실에 있다.

아르셀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문 잠갔는데.”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나왔어.”

“검에게 문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중요하진 않습니다.”

“…….”

“특히 제 주인이 같은 궁 안에 있을 때는요.”

아르셀리아는 침묵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 눈빛이 조금 차가워졌다.

“내 허락 없이 침실에 들어온 거야?”

아스테리온의 미소가 아주 조금 줄었다.

가볍게 넘겨도 될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를 구별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 부분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다시는 하지 마.”

“예.”

“그리고 나가.”

“그건 어렵습니다.”

아르셀리아가 그를 노려보았다.

“사과한 지 한 호흡도 안 됐는데.”

“침입한 것은 사과드린다고 했지, 떨어져 있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

“제 인간형을 유지하려면 주인님의 마력이 필요합니다.”

“검으로 있으면 되잖아.”

“그건 제가 싫습니다.”

아르셀리아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맨발이 붉은 대리석 바닥에 닿았다. 몸을 일으킨 순간 길게 흘러내린 적발 사이로 작은 뿔이 드러났다.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잠시 그 뿔에 머물렀다.

아르셀리아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뭘 봐.”

“아무것도 아닙니다.”

“봤잖아.”

“예뻐서요.”

아르셀리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드래곤한테 그런 말 하지 마.”

“왜죠?”

“귀찮아져.”

아스테리온이 웃었다.

“좋아한다고 말하면 더 귀찮아집니까?”

“그만.”

“아직 좋아한다고는 안 했습니다.”

“곧 할 것 같으니까.”

“눈치가 빠르시군요.”

아르셀리아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지나쳐 세면대로 향했다.

아스테리온은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아르셀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 따라와.”

“말했지 않습니까.”

“멀리 떨어질 수 없다고?”

“예.”

“얼마나.”

아스테리온이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현재는 열 걸음 정도?”

아르셀리아가 멈췄다.

“현재는?”

“계약이 안정되면 조금 더 멀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더 가까이 있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왜.”

“주인님의 마력과 제 신성력이 어떻게 섞이는지 아직 정확히 모르니까요.”

아르셀리아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조금 진지해졌다.

신성력과 드래곤의 마력.

상극에 가깝다.

인간들이 드래곤을 상대할 때 성검이나 성유물을 사용하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신성력은 드래곤의 마력핵을 직접 건드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힘 중 하나였다.

그런데 아스테리온은 어제 자신이 손잡이를 잡은 순간 오히려 폭발적으로 빛났다.

그것도 ‘주인을 인정하는 빛’이라는 말을 인간 용사가 했다.

아르셀리아는 세면대 앞에서 손을 멈췄다.

“어제.”

“예.”

“그 빛.”

아스테리온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주인님께서 저를 잡았을 때요?”

“응.”

“성검이 계약자를 인정할 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난 계약한 적 없는데.”

“저는 했습니다.”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돌아갔다.

“누구 마음대로?”

아스테리온은 망설이지 않았다.

“제 마음대로.”

“…….”

“성검은 주인을 선택합니다.”

“인간이 널 선택하는 게 아니고?”

“인간들은 그렇게 믿고 싶어 하지요.”

그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식었다.

처음이었다.

어젯밤부터 줄곧 능글맞게 웃던 남자의 얼굴에서 인간을 향한 냉소가 스쳤다.

“수많은 인간이 저를 손에 넣었습니다. 왕도 있었고, 성기사도 있었고, 용사도 있었죠. 그들은 모두 자신이 저를 선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는?”

“아무도 아니었습니다.”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금빛 눈이 잠시 지나치게 깊어졌다.

“주인님이 처음입니다.”

아르셀리아는 그 시선을 받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 주인님이라는 말부터 좀 그만해.”

“싫으십니까?”

“이상해.”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아르셀리아.”

아스테리온이 조용해졌다.

아르셀리아는 세수를 하다가 그 침묵이 길어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었다.

아스테리온은 여전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왜.”

“이름을 허락하시는군요.”

“이름 부르는 게 뭐.”

“인간들은 저한테 성검이라고만 했습니다.”

아르셀리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수건을 집었다.

“난 인간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르셀리아라고 해.”

아스테리온은 아주 느리게 웃었다.

“그럼 가끔만 주인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왜 가끔.”

“좋아서요.”

“……귀찮아.”

“그 말씀도 자주 하시는군요.”

“네가 귀찮게 하니까.”

아스테리온은 기분 나빠하는 기색도 없이 웃었다.

아르셀리아는 문득 생각했다.

검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성격이 있는 검이라는 게 더 이상했다.

심지어 아주 귀찮은 성격이었다.

아침 식사는 평소보다 두 배로 피곤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스테리온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화염궁의 식당은 인간 기준으로는 작은 연회장만 했다. 긴 검은 식탁 위로 붉은 유리등이 떠 있었고, 창밖에서는 용암강이 천천히 흘렀다.

아르셀리아는 평소처럼 뜨거운 차를 마시며 빵을 뜯었다.

맞은편의 아스테리온은 접시에 손도 대지 않았다.

아르셀리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안 먹어?”

“먹을 필요 없습니다.”

“왜.”

“검이니까요.”

“지금은 남자잖아.”

“그래도 본질은 같습니다.”

“배 안 고파?”

“그런 감각은 있습니다.”

“그럼 먹어.”

아스테리온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걱정하시는 겁니까?”

“아니.”

“상처받았습니다.”

“상처받을 몸도 아니잖아.”

“정확하시군요.”

아르셀리아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잠시 뒤 아스테리온이 포크를 들었다.

아르셀리아가 눈길만 주었다.

“먹을 필요 없다며.”

“아르셀리아가 먹으라고 했으니까요.”

“…….”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좋은 검입니다.”

아르셀리아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 말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어떤 부분이요.”

“검이면서 사람처럼 굴고, 사람처럼 굴면서 자꾸 검인 척해.”

아스테리온의 눈에 웃음기가 번졌다.

“둘 다 저니까요.”

그 말은 이상하게도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아르셀리아는 잠시 그의 얼굴을 보다가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그때 식당 문이 열렸다.

작은 불도마뱀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어제 소파 옆에서 자고 있던 화염령이었다.

놈은 아르셀리아를 보자 꼬리를 흔들었다.

“키륵.”

“왔어?”

불도마뱀은 식탁 아래를 지나 아르셀리아의 발치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아스테리온을 봤다.

정지.

“…….”

“…….”

불도마뱀과 아스테리온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키륵?”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기울였다.

“저를 아십니까?”

“키르르르륵!”

불도마뱀의 몸 전체에서 불꽃이 확 피어올랐다.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루비.”

불꽃이 조금 줄었다.

루비는 여전히 아스테리온을 경계했다.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내 거야.”

그 순간.

아스테리온의 손이 멈췄다.

루비의 불꽃도 멈췄다.

아르셀리아는 아무것도 모른 채 차를 마셨다.

“그러니까 공격하지 마.”

“키륵……?”

루비가 혼란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스테리온은 아주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르셀리아.”

“왜.”

“한 번만 더.”

“뭘.”

“방금 말씀.”

아르셀리아가 그를 봤다.

“내 거?”

“예.”

“싫어.”

“아쉽군요.”

“검 하나 주웠다고 왜 이렇게 피곤하지.”

“저는 행복합니다.”

“난 아니야.”

“곧 행복해지실 겁니다.”

“무슨 자신감이야.”

아스테리온이 너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예쁘잖습니까.”

아르셀리아의 손이 멈췄다.

아스테리온은 웃었다.

“검일 때 좋아하셨으니까.”

“…….”

“인간형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아니.”

“방금 아주 잠깐 망설이셨습니다.”

“기분 탓이야.”

“드래곤도 거짓말을 하는군요.”

아르셀리아는 그에게 빵 하나를 던졌다.

아스테리온이 가볍게 받아냈다.

루비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울었다.

“키륵.”

아르셀리아에게는 어쩐지 한숨처럼 들렸다.

문제는 그날 오전부터 시작됐다.

화염궁에는 인간 하인은 거의 없었다.

적염령에서 태어난 불정령들과 소수의 드래곤 혈족이 궁을 관리했다. 다른 드래곤의 궁처럼 수행원이 많지도 않았다.

아르셀리아가 사람 많은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문이 퍼질 일도 적었다.

원래라면.

그런데 하필 그날.

은월령에서 손님이 왔다.

“아르셀리아!”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르셀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아스테리온은 책을 넘기다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서재에 있었다.

정확히는 아르셀리아가 책을 읽고 있었고, 아스테리온은 열 걸음 이내에 있어야 한다며 맞은편 소파를 차지한 상태였다.

“누구죠?”

“귀찮은 애.”

“친구입니까?”

“아니.”

“아르셀리아!”

문이 벌컥 열렸다.

은빛 머리카락이 먼저 들어왔다.

실버 드래곤 세레니스였다.

달빛 같은 은발과 옅은 청회색 눈을 가진 여자. 은월령의 귀족이자 아르셀리아와 약 삼백 년 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다.

친구냐고 물으면 아르셀리아는 아니라고 했고.

세레니스는 맞다고 했다.

“왜 답장이 없어?”

“읽었어.”

“읽었으면 답을 해야지.”

“싫었어.”

“그걸 지금 대답이라고…….”

세레니스의 말이 끊겼다.

시선이 아르셀리아 너머로 향했다.

아스테리온.

아스테리온은 책을 든 채 세레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레니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다시 아르셀리아.

다시 아스테리온.

그리고 또 아르셀리아.

“…….”

아르셀리아는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왜.”

세레니스가 아주 천천히 물었다.

“저 남자 누구야?”

“검.”

“……뭐?”

“검이라고.”

세레니스가 아스테리온을 봤다.

아스테리온이 예의 바르게 웃었다.

“아스테리온입니다.”

“사람인데?”

“검입니다.”

세레니스의 표정이 더 이상해졌다.

“사람으로 변하는 검?”

“응.”

“어디서 났는데?”

“주웠어.”

“어디서?”

“어제 인간이 들고 왔어.”

세레니스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인간은?”

“보냈어.”

“검만 뺏고?”

“응.”

아스테리온이 정정했다.

“제가 아르셀리아를 선택했습니다.”

세레니스가 또 멈췄다.

“선택?”

“계약자로요.”

“…….”

세레니스가 조용히 아르셀리아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저거 정체 알아?”

“성검.”

“그건 나도 들었어. 정확히.”

“용살성검.”

세레니스의 눈이 확 커졌다.

“미쳤어?”

아르셀리아가 귀를 막았다.

“시끄러워.”

“드래곤 죽이는 검을 왜 집에 들여!”

“예쁘잖아.”

“그게 이유야?”

“충분하지.”

세레니스가 이마를 짚었다.

“아르셀리아.”

“응.”

“가끔 네가 레드 드래곤이라는 사실이 너무 선명해서 무서울 때가 있어.”

“칭찬?”

“아니.”

그때 아스테리온이 말했다.

“저도 아직 아르셀리아를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세레니스가 홱 돌아봤다.

“‘아직’?”

아스테리온이 미소 지었다.

“농담입니다.”

“안 웃겨.”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세레니스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실버 드래곤의 마력이 서재 안에 얇게 퍼졌다.

아르셀리아가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싸우지 마.”

“쟤 위험해.”

“알아.”

“아는데 두고 있어?”

“내 거니까.”

세레니스가 굳었다.

아스테리온도 잠깐 조용해졌다.

아르셀리아는 그제야 둘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세레니스가 아주 천천히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내 거.”

“…….”

“내가 주웠으니까.”

세레니스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어디에 뒀는데?”

아르셀리아는 조금 귀찮아졌다.

“뭘.”

“어제 처음 가져왔을 때.”

“보물고.”

세레니스의 입이 벌어졌다.

아르셀리아는 그 표정을 보고 뒤늦게 불길함을 느꼈다.

“왜.”

“몇 번째.”

“세 번째.”

“개인 보물고?”

“응.”

세레니스는 눈을 감았다.

깊은 침묵.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왜 그러는데.”

세레니스가 눈을 떴다.

“너 진짜 몰라?”

“뭘.”

“살아 있는 존재를 개인 보물고에 들이는 게 무슨 뜻인지.”

아르셀리아는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반려.”

“알잖아!”

세레니스의 목소리가 서재를 울렸다.

아르셀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얘는 검이잖아.”

세레니스가 아스테리온을 가리켰다.

“지금 저게 검으로 보여?”

아스테리온이 친절하게 웃었다.

“필요하시면 검으로 변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조용히 해요.”

“예.”

세레니스는 다시 아르셀리아를 봤다.

“보물고에 넣고, ‘내 거’라고 했고.”

“응.”

“이름도 부르게 했지?”

“응.”

“궁에서 같이 지내고?”

“그건 얘가 멀리 못 떨어진다고 해서.”

“잠깐.”

세레니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밤에는?”

아르셀리아가 대답했다.

“침실에 왔어.”

세레니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

아스테리온이 웃었다.

“아직 함께 자지는 않았습니다.”

“당신 진짜 조용히 해요.”

“예.”

세레니스는 한동안 아르셀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늦었어.”

“뭐가.”

“소문.”

“무슨 소문.”

“너 반려 들였다는 소문.”

아르셀리아가 잠시 멈췄다.

“누가 알아.”

세레니스가 그녀를 불쌍하다는 듯 바라봤다.

“내가 여기 들어올 때 화염궁 입구에 있던 불정령 셋이 나를 보면서 계속 속닥거리더라.”

“뭐라고.”

세레니스가 완벽하게 흉내 냈다.

“‘아가씨께서 어젯밤 보물고의 남자를 침실로 데려가셨대.’”

정적.

아르셀리아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아스테리온은 입을 손으로 가렸다.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웃어?”

“아닙니다.”

“웃었잖아.”

“기뻐서요.”

“뭐가 기뻐.”

“공식적인 반려에 조금 가까워진 것 같아서.”

“아니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사람 아니고 드래곤.”

“더 좋군요.”

아르셀리아의 손끝에 불꽃이 피었다.

세레니스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잠깐, 서재 태우지 마.”

“쟤만 태울 거야.”

아스테리온이 여유롭게 말했다.

“저는 불에 잘 견딥니다.”

“시험해 볼까?”

“주인님께서 직접 해 주신다면.”

“……너 진짜.”

아르셀리아는 처음으로 성검을 주워 온 것을 아주 조금 후회했다.

정확히는.

검만 가져왔어야 했다.

성격까지 딸려 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날 오후.

소문은 이미 화염궁을 넘어섰다.

적염령.

은월령.

황금령.

심지어 칠색 의회까지.

내용은 전달될 때마다 조금씩 변했다.

처음에는.

아르셀리아가 살아 있는 성검을 보물고에 들였다.

그다음에는.

아르셀리아가 인간 남자를 보물고에 숨겨 두었다.

그리고 조금 뒤.

아르셀리아가 보물고에서 반려를 골랐다.

마지막으로 칠색 의회에 도착했을 때는.

적염령의 아르셀리아 로하르트가 용살성검과 반려 계약을 맺고 같은 침실을 사용 중이다.

아르셀리아가 그 소문을 들은 것은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앞에는 세레니스.

옆에는 아스테리온.

세레니스는 눈을 피했다.

아스테리온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아르셀리아가 천천히 물었다.

“같은 침실?”

세레니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소문이라는 게 원래 그래.”

“반려 계약?”

“그것도…….”

“같은 침실?”

“왜 그 부분만 두 번 말해.”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아스테리온에게 향했다.

“너.”

“예.”

“오늘부터 보물고에서 자.”

“싫습니다.”

“명령이야.”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바라보다 아주 천천히 웃었다.

“그러면 조건이 있습니다.”

아르셀리아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가 왜 네 조건을 들어.”

“인간형을 유지하려면 마력이 필요하니까요.”

“검으로 자.”

“그건 더 싫습니다.”

“…….”

아스테리온이 몸을 조금 숙였다.

금빛 눈이 그녀와 가까워졌다.

“하루에 한 번.”

“뭐.”

“직접 마력을 주십시오.”

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가장 간단한 방법은.”

아스테리온이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는 겁니다.”

아르셀리아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길고 반듯한 손가락.

검을 쥐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단단한 손.

잠시 고민했다.

보물고.

침실.

소문.

그리고 더 이상의 귀찮은 오해.

아르셀리아는 결국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웅―

금빛 빛이 두 사람의 손 사이에서 피어났다.

아르셀리아의 붉은 마력과 아스테리온의 금빛 신성력이 서로 얽혔다.

세레니스의 눈이 커졌다.

“……잠깐.”

아르셀리아가 돌아봤다.

“왜.”

“손목.”

“뭐?”

세레니스가 아르셀리아의 손목을 가리켰다.

붉은빛과 금빛이 섞인 얇은 문양이 피부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반대쪽.

아스테리온의 손목에도.

똑같은 문양.

세레니스의 얼굴이 굳었다.

아르셀리아도 처음으로 표정을 잃었다.

아스테리온만 조용히 그 문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역시.”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역시?”

그 순간.

아스테리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아주 잠깐.

하지만 분명했다.

그는 이 문양을 알고 있었다.

“너.”

아르셀리아가 그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이게 뭔지 알아?”

아스테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금빛 눈 속에서 무언가 오래된 것이 흔들렸다.

그리고.

아주 조용하게.

말했다.

“계약이 시작됐습니다.”

아르셀리아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계약.”

아스테리온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다시 웃었다.

익숙한 능글맞은 얼굴로.

“글쎄요.”

아르셀리아는 그 순간 확신했다.

이 검.

자신에게 뭔가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단순히 예뻐서 가져온 보물을 제대로 조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기 전에.

그 정체를.

정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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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검은 드래곤과 혼인하고 싶어 합니다    제 침실에 남자가 둘은 필요 없습니다

    화염궁으로 돌아온 첫날 밤.아르셀리아는 자신의 침실 앞에서 두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한 명은 검은 머리에 금빛 눈.다른 한 명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색만 놓고 보면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아스테리온은 아주 자연스럽게 침실 문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이 방을 사용하던 사람처럼 태연했다. 반면 카르디안은 팔짱을 낀 채 그런 아스테리온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아르셀리아는.피곤했다.“왜 둘 다 여기 있어.”카르디안이 먼저 대답했다.“의회에서 정한 동행 감시.”“그래서.”“네가 자는 동안도 주변을 확인해야 한다.”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내가 잘 때까지?”“그래.”“안 돼.”“뭐가.”“귀찮아.”카르디안이 한숨을 쉬었다.“네 편의를 위해 온 게 아니다.”“그럼 누구 편의인데.”“칠색 의회.”“내 집이잖아.”“그러니까 더 문제다. 신전에서 이미 화염궁 위치와 구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그 말에는 아르셀리아도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자신은 화염궁의 결계를 믿었다.적염령에서도 가장 깊은 곳.용암 계곡과 붉은 절벽 사이에 숨겨진 궁전.허락받지 않은 인간이 들어오기 어려운 곳.하지만 얼마 전까지도 신전이 아스테리온의 위치를 감지했고, 황금령까지 추적대를 보내지 않았던가.그래도.“침실까지는 안 돼.”아르셀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카르디안이 눈썹을 올렸다.“왜.”“내 방이니까.”“저 검은 들어가면서.”아르셀리아가 즉시 옆을 봤다.아스테리온이 얌전히 서 있었다.너무 얌전해서 더 수상했다.“얘는.”아르셀리아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마력 때문에.”“손 잡고 충전하면 보물고에서도 버틴다며.”아스테리온이 아주 부드럽게 끼어들었다.“요즘은 균열 때문에 인간형 유지가 불안정합니다.”카르디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래서 꼭 침실 안이어야 하나.”“주인님의 마력에 가장 가까운 곳이니까요.”“보물고가 더 가까울 수도 있지.”“침실이 더

  • 성검은 드래곤과 혼인하고 싶어 합니다   반려가 아니라는데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칠색 의회의 불꽃이 가라앉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정확히는.아르셀리아의 불꽃이 아니라.회의장 안의 분위기가.“그러니까.”아르셀리아는 아직도 붉어진 귀 끝을 숨기지 못한 채 아스테리온을 노려봤다.“다시는 의회에서 그런 말 하지 마.”아스테리온은 매우 온순한 얼굴로 물었다.“어떤 말씀이요?”“키스.”“아.”“아, 하지 마.”“알겠습니다.”너무 순순하게 대답해서 오히려 수상했다.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진짜 알아들었어?”“예.”“다시는 안 해?”“의회에서는.”“아스테리온.”“예.”금빛 눈이 웃었다.아르셀리아가 손을 들었다가 멈췄다. 한 대 치고 싶은데 아직 검신에 금이 가 있었다.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그게 더 짜증 났다.이제는 화를 내다가도 ‘얘 아프지’가 먼저 생각났다.“왜 한숨을 쉬십니까?”“너 때문에.”“그렇게 자주 저를 생각하십니까?”“진짜 검으로 만들어 버릴까.”“그건 원래도 가능합니다.”“…….”“다만 지금은 인간형이 더 좋습니다.”아르셀리아가 이를 악물었다.옆에서는 세레니스가 이미 웃다가 지친 얼굴로 의자에 기대 있었다.“둘이 정말 반려 아니야?”“아니야.”아르셀리아가 즉시 대답했다.“정말?”“응.”“그럼 하나만 물어보자.”“뭔데.”세레니스가 턱으로 둘의 손을 가리켰다.“그건 언제 놓을 거야?”아르셀리아가 내려다봤다.손.아직도 잡고 있었다.정확히는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얽혀 있었다.회의가 거의 끝나 가는 지금까지.한 번도 놓지 않았다.아르셀리아가 바로 손을 빼려 했다.그러자.아스테리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왜.”“아직 마력이 필요합니다.”“진짜?”“예.”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거짓말 아니고?”“확인해 보시겠습니까?”“어떻게.”“놓아 보시면 됩니다.”아르셀리아가 잠시 고민했다.그리고 손을 놓았다.하나.둘.셋.아스테리온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금빛으로 만들어

  • 성검은 드래곤과 혼인하고 싶어 합니다   성검을 돌려줘도 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시작됩니다.”에드릭의 말이 칠색 의회 한가운데 떨어졌다.그 한마디 뒤로 이상할 만큼 긴 정적이 이어졌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스테리온의 반환과 아르셀리아의 신전 출두를 두고 팽팽하게 갈리던 시선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에드릭에게 모였다. 성왕국의 정식 사절로 들어온 용사가, 정작 자신을 보낸 신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했다.그것도.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말과 함께.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에드릭 옆에 서 있던 사제였다.“용사님.”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에드릭은 그를 보지 않았다.“알고 있습니다.”“성왕국의 공식 사절로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그것도 압니다.”“그런데 왕국의 뜻을 거스르는 발언을―”“왕국의 뜻입니까.”그제야 에드릭이 고개를 돌렸다.피로가 짙게 남은 얼굴.붕대 아래로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상처가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흐리지 않았다.“아니면 신전의 뜻입니까?”사제의 표정이 굳었다.에드릭은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제가 알기로 성왕국 의회에서는 아직 드래곤 영토에 대한 공식적인 군사 행동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용사님.”“국왕 폐하의 친서도 없고.”“그만.”“대신관의 명령만 있지요.”낮게 깔린 마지막 말에 회의장 분위기가 바뀌었다.아르셀리아는 옆에 선 아스테리온의 손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미세하게 차가웠던 손끝이 지금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그도 에드릭의 말을 듣고 있었다.집중해서.아르셀리아는 조용히 물었다.“그게 다른 거야?”에드릭이 그녀를 봤다.“많이 다릅니다.”“인간들끼리는?”“성왕국이라 해도 왕과 신전은 하나가 아닙니다.”“신을 믿는 나라잖아.”“그렇다고 대신관이 왕인 건 아닙니다.”아르셀리아는 잠시 생각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신전이 멋대로 한 거네.”“현재까지는.”에드릭이 대답했다.“그렇게 봐야 합니다.”사제가 결국 앞으로 나섰다.“용사 에드릭 벨로안.”호칭이 바뀌었다.조금

  • 성검은 드래곤과 혼인하고 싶어 합니다   칠색 의회는 제 혼인부터 의심했습니다

    칠색 의회는 드래곤들조차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아르카디아의 일곱 영지가 맞닿는 중앙 산맥, 어느 색의 드래곤에게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중립지대. 일곱 개의 거대한 첨탑이 원을 그리듯 세워져 있었고, 중앙에는 오래된 원형 궁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궁전 외벽에는 적색, 은색, 금색, 흑색, 청색, 녹색, 그리고 지금은 거의 사라진 백색의 마력석이 차례로 박혀 있었다.칠색 의회.드래곤들이 전쟁을 결정하고, 영지 간 분쟁을 조정하며, 인간 왕국과의 외교 문제를 논의하는 곳.아르셀리아는 그 앞에 도착하자마자 생각했다.귀찮다.아주 많이.“왜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옆에서 아스테리온이 물었다.“돌아가고 싶어.”“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그래서 더.”아르셀리아는 원형 궁전 위로 떠 있는 일곱 개의 마력 고리를 올려다봤다.평소라면 이 장소에는 가까이 오지도 않는다. 칠색 의회의 소집장이 날아와도 웬만한 문제라면 대리인을 보내거나 아예 무시했다. 레드 드래곤 중에서도 아르셀리아 로하르트의 괴팍함은 제법 유명해서, 최근 백 년 사이에는 굳이 그녀를 부르지 않는 분위기까지 만들어져 있었다.그런 자신이.직접 왔다.그것도.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맞잡힌 손.자신의 왼손과.아스테리온의 오른손.아침부터 계속 이 상태였다.황금령에서 의회까지 이동하는 동안 아스테리온의 인간형이 두 번이나 흔들렸기 때문이다.아직 균열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다.직접 마력을 공급하면 인간형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고, 손을 잡는 방식이 가장 부담이 적었다.문제는.“또 봅니다.”아스테리온이 말했다.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돌렸다.“뭘.”“손.”“확인한 거야.”“무엇을요?”“문양.”“분명 제 손을 보고 계셨는데요.”“문양도 손목에 있잖아.”“그러면 손목을 보셨어야죠.”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놓을까?”아스테리온이 손가락에 힘을 줬다.“그건 안 됩니다.”“그러니까 조용히 해.”“예.”그는 순순히 대답

  • 성검은 드래곤과 혼인하고 싶어 합니다   드래곤을 잡으러 왔다면 각오는 했겠지

    황금령의 밤하늘이 붉게 물들었다.거대한 날개가 펼쳐지는 순간, 황금수 주변을 가득 메웠던 빛 정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르셀리아의 인간형 몸이 붉은 마력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커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변했고, 목과 어깨를 타고 올라오던 붉은 비늘은 곧 전신을 뒤덮었다. 날개 안쪽의 금빛 균열이 용암처럼 번뜩이자, 황금령의 서늘했던 공기마저 단숨에 뜨거워졌다.곧 황금수 앞뜰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고개를 들었다.붉은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황금령을 둘러싼 하얀 빛기둥은 모두 열두 개.각각의 기둥을 중심으로 신성 문양이 땅을 타고 이어져 있었다. 위에서 보면 아마 하나의 거대한 원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인간 몇 명을 잡기 위한 마법진이 아니었다. 영지 하나를 봉쇄하고, 그 안에 있는 드래곤의 마력 자체를 억누르기 위한 규모였다.아르셀리아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 코웃음을 쳤다.“제법 준비했네.”그 목소리가 인간의 말처럼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드래곤 특유의 마력이 섞인 음성이 황금령 전체를 울렸다.바닥이 떨렸다.멀리 진을 치고 있던 성기사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그런데도 퇴각하지 않았다.대신 가장 앞의 흰 망토를 걸친 남자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경고한다. 레드 드래곤 아르셀리아 로하르트. 즉시 인간형으로 돌아가 투항하라.』아르셀리아의 거대한 머리가 조금 기울었다.“싫어.”너무 간단한 대답이었다.남자의 얼굴이 멀리서도 굳는 것이 느껴졌다.『당신은 현재 성왕국의 신성 유물을 불법 점유하고―』“그거 말인데.”아르셀리아가 말을 끊었다.“계속 내 거 불법 점유라고 하잖아.”『성검 아스테리온은 성왕국이 수백 년간 보관해 온―』“그래서?”『……뭐라?』“보관했다고 네 거야?”붉은 눈이 가늘어졌다.“훔쳐다가 천 년 갖고 있었다고 주인이 바뀌나?”뒤쪽에 있던 세레니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카르디안은 웃지 않았다. 대신 이미 검은 마력을 손끝에 모으고 있었다.에르하르트 역시

  • 성검은 드래곤과 혼인하고 싶어 합니다   내 피가 묻은 검은 아무도 못 가져갑니다

    검은 빛이 터진 직후.아르셀리아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었다. 태양이 꺼진 것처럼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검은 장막이 황금수의 기록실을 집어삼켰고, 몸을 짓누르는 낯선 힘이 손끝에서부터 팔을 타고 올라왔다.차갑다.신성력도 아니고.드래곤의 마력도 아니다.오히려 둘을 억지로 끊어 놓으려는 힘에 가까웠다.아르셀리아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아스테리온과 연결된 무언가가.자신을 떼어 내려고 한다.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싫어.”누구에게 하는 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하지만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계약자와 개체 간 연결을 차단합니다.』낯선 목소리.아스테리온의 안쪽에서 흘러나오던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사람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명령 그 자체.아르셀리아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검날을 더 단단히 잡았다.손바닥이 다시 깊게 베였다.따뜻한 피가 손목을 타고 흘렀다.“아르셀리아!”카르디안이 그녀의 팔을 잡으려 했다.“손 놔! 검이 이미―”“건드리지 마.”목소리가 낮았다.카르디안의 손이 멈췄다.아르셀리아의 주변에서 붉은 불꽃이 천천히 피어올랐다.폭발하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조용했다.그래서 더 위험했다.불꽃은 그녀의 발끝에서 손목을 타고 올라가 검신을 감쌌다.아스테리온의 금빛과.아르셀리아의 붉은빛.두 색이 검은 장막 안에서 서로를 찾아 얽혔다.『차단 실패.』목소리가 울렸다.『계약자 마력 저항 확인.』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계약자.”피 묻은 입술 끝이 아주 조금 비틀렸다.“누구 마음대로.”『……』“내가 언제 너희랑 계약했는데.”대답은 없었다.“아스테리온.”그녀가 검을 바라봤다.아직 남자 형태였다.한쪽 팔만 검날로 변한 채.금빛 눈에는 다시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하지만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그의 시선은 오직 하나에만 고정돼 있었다.아르셀리아의 손.피.자신의 검날 위에 흐르는.그녀의 피.“손.”아스테리온이 쉰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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