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르셀리아는 계약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좋아하지 않았다. 드래곤은 본래 계약에 민감한 종족이었다. 인간처럼 문서 몇 장에 서명하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력과 이름, 피와 맹세가 얽히면 그것은 수백 년을 넘어 영혼에까지 남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아르셀리아는 웬만하면 계약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손목에는 처음 보는 문양이 떠올라 있었다. 붉은빛과 금빛이 섞인 얇은 선이 손목을 한 바퀴 감싸고, 그 중심에는 검과 날개를 닮은 문양이 희미하게 맥동했다. 아르셀리아는 손을 들어 올렸다. 문양은 사라지지 않았다. 반대편에 서 있는 아스테리온의 손목에도 똑같은 것이 있었다. 세레니스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이거 그냥 마력 연결 아니야.” “나도 알아.” 아르셀리아는 짧게 대답했다. “그럼 왜 이렇게 태연해?” “안 태연한데.” “표정이 똑같잖아.” “화나면 더 조용해져.” 세레니스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아르셀리아의 시선은 줄곧 아스테리온에게 박혀 있었다. “설명해.” “무엇을요.” “모르는 척하지 마.” 아스테리온이 잠깐 웃었다. “무서우시군요.” “지금 농담할 때 아니야.” 이번에는 웃음이 조금 줄었다. 아르셀리아가 한 걸음 다가갔다. “계약이 시작됐다고 했지.” “예.” “무슨 계약.” “아직 완전히 확정된 건 아닙니다.” “그래서 뭔데.” 아스테리온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이 오히려 더 수상했다. 아르셀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지금 말 안 하려고 시간 끄는 거지.” “가능하면 조금 더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확인?” “문양이 어떤 방식으로 안정되는지.” “내 몸에 생긴 걸 나보다 먼저 확인하겠다고?” 그 말에 아스테리온이 아주 미세하게 숨을 멈췄다. 아르셀리아는 그것까지 놓치지 않았다. “정말 숨기는 거 있네.” “아르셀리아.” “말해.” 세레니스도 한마디 보탰다. “나도 듣자. 이 정도면 네 문제만은 아니야. 성검이랑 드래곤 사이에 미확인 계약이 생겼는데 칠색 의회까지 소문이 났어. 이거 잘못하면 정치 문제 돼.” 아르셀리아가 세레니스를 돌아봤다. “정치?” “당연하지. 네가 누군데.” “드래곤.” “적염령 순혈 레드 드래곤.” “그게 그거지.” 세레니스가 이마를 짚었다. “아니야. 전혀 아니야.” 아르셀리아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세레니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영향력 있어. 특히 인간권이랑 접점이 거의 없는 네가 성왕국의 용살성검이랑 계약했다고 알려지면, 다들 의미를 붙여.” “내가 붙인 것도 아닌데.” “소문은 원래 당사자 허락 안 받아.” 그 말은 맞았다. 아르셀리아는 짜증스럽게 손목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아스테리온을 봤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말해.” 이번에는 아스테리온도 더 미루지 않았다. “성검에는 두 종류의 계약이 있습니다.” “두 종류?” “소유 계약과 진명 계약.” 세레니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진명 계약?” “들어본 적 없어.”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아스테리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인간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요.” “드래곤에게도.” “드래곤도 성검과 계약할 일이 거의 없었겠죠.” “거의가 아니라 없었겠지.” 세레니스가 툭 내뱉었다. 아스테리온은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목에 떠오른 문양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소유 계약은 단순합니다. 검이 사용자를 허용하는 것. 인간들이 말하는 ‘성검의 선택’이 거기에 가깝습니다.” “그럼 어제 빛난 게 그거야?”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예.” “그게 끝이 아니었고.” “아닙니다.” “지금 이 문양은?”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에 닿았다. “진명 계약의 초기 문양으로 보입니다.” “보입니다?” 아르셀리아의 목소리가 바로 차가워졌다. “확실하지 않아?” “저도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세레니스가 헛웃음을 냈다. “천 년 넘게 산 성검이 모르는 계약이 있다고?”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진명 계약은 제가 선택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니까요.” 아르셀리아가 멈췄다. “그럼 누가 선택하는데.” 아스테리온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둘 다.” 방 안의 공기가 조용해졌다. 아르셀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난 선택한 적 없어.” “의식적으로는.” “그 말 마음에 안 드는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아스테리온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거의 사라졌다. “진명 계약은 마력보다 더 깊은 층에서 반응합니다.” “쉽게 말해.”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을 때.” 아르셀리아의 눈썹이 올라갔다. “뭘 인정해.” 아스테리온이 아주 잠깐 망설였다. 세레니스가 대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아르셀리아가 그녀를 봤다. “왜.” 세레니스는 아스테리온을 보며 물었다. “그거 혹시 반려 계약 비슷한 거야?” 정적. 아르셀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아스테리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거의 긍정처럼 느껴졌다. 아르셀리아가 천천히 말했다. “아니지?” 아스테리온이 부드럽게 웃었다.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그 말은 반쯤 맞다는 뜻처럼 들리는데.” “상당히 예리하시군요.” “아스테리온.” 이름을 낮게 부르자 이번에는 남주도 표정을 정리했다. “성검의 진명 계약은 단순한 소유 관계보다 깊습니다. 서로의 마력과 존재를 연결하고, 일정 범위 안에서 감각과 힘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세레니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끊을 수 있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또 ‘수도’네.” 아르셀리아가 짧게 말했다. “확실한 게 하나도 없잖아.” “진명 계약 자체가 거의 사라진 방식이라.” “그럼 왜 넌 알고 있어.” 그 질문에 아스테리온은 아주 잠깐 멈췄다. 아르셀리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그거.” “뭘요.” “방금 또 숨겼어.” “…….” “네가 이 계약을 왜 알고 있는지 말 안 했잖아.” 아스테리온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제 안에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기록?” “제가 만들어졌을 때 새겨진 것들.” “누가 만들었는데.” 그 질문에 방 안의 온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세레니스도 아르셀리아도 바로 알아차렸다. 아스테리온의 얼굴에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아주 오래된 기억을 건드린 사람처럼 잠깐 눈을 내렸다. “신전.” 짧은 대답. 아르셀리아가 곧바로 물었다. “성왕국 신전?” “지금의 성왕국보다 훨씬 이전의 신전입니다.” “얼마나 전.”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을 잃었어?” “일부는.” 세레니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부라는 건?”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삭제됐거나.” “…….” “봉인됐거나.” 아르셀리아는 더 이상 장난스럽게 묻지 않았다. 그 말은 분위기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천 년 넘게 존재한 성검. 드래곤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무기. 그리고 그 안에 삭제되거나 봉인된 기억. 아르셀리아는 다시 손목의 문양을 봤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귀찮은 걸 주워 왔다는 생각이 더욱 확실해졌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아야겠어.” “말씀하시죠.” “이 계약 때문에 내가 위험해?”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앞으로는.” “모릅니다.” “그럼 너는?” “저는 원래 위험한 물건입니다.” “농담하지 말고.” “농담 아닙니다.” 아르셀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스테리온은 담담했다. “저는 용살성검입니다.” 그 말이 처음으로 무겁게 들렸다. 아르셀리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레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몇 초 뒤.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그럼 더 조사해야겠네.”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엇을요.” “너.” “저를?” “응.” 아르셀리아는 너무 당연한 듯 말했다. “내가 가진 게 뭔지는 알아야지.” 그 순간. 아스테리온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내가 가진 것. 그 말에. 이번에는 능글맞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조사는 곧바로 시작됐다. 아르셀리아는 화염궁의 다섯 번째 보물고를 열었다. 고대 유물과 문서들이 쌓여 있는 곳이었다. 오래된 금속판, 마력 결정, 고대어가 새겨진 돌 조각, 인간 왕국이 생기기도 전부터 존재한 문서들. 세레니스는 그 안에 들어오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이걸 다 언제 정리할 건데.” “정리돼 있어.” “어디가.” “나는 알아.” “그건 정리가 아니야.” 아르셀리아는 무시했다. 아스테리온은 뒤에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장난기는 거의 사라져 있었다. “여기 상당히 오래된 자료가 있군요.” “당연하지.” “성검 관련 자료도?” “아마.” 세레니스가 물었다. “아마?” “어딘가.” “…….” 아르셀리아는 거대한 서랍 하나를 열었다. 금속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안에는 두루마리 수십 개가 들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이거 아님.” 다음. “이것도.” 또 다음. “아, 이건 인간 왕국 족보네.” 세레니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왜 그런 걸 가지고 있어.” “예뻐서.” “족보가?” “표지가 금박이잖아.” 세레니스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 얼굴이었다. 아스테리온은 작게 웃었다. “역시 드래곤이군요.” “뭐.” “아닙니다.” 한참 뒤. 아르셀리아는 낡은 검은 가죽 표지의 책 하나를 꺼냈다. 표지는 거의 갈라져 있었고, 중앙에는 오래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검. 날개. 그리고 원. 아르셀리아는 손을 멈췄다. 자신의 손목에 떠오른 문양과 비슷했다. “이거.” 세레니스도 가까이 다가왔다. “같아 보여.” 아스테리온의 표정이 굳었다. 아르셀리아는 즉시 그 반응을 봤다. “알아?” “…….” “또 숨기려고?” “아닙니다.” 아스테리온이 책을 바라봤다. “저 문양은.”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고대 성좌문입니다.” “성좌문?” “신전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존재했던 표식입니다.” 세레니스가 눈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성검 계약 문양이랑 닮았지?” 아스테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셀리아는 책을 열었다. 처음 몇 장은 고대어였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드래곤은 긴 시간을 살고, 오래된 문자도 비교적 많이 보존한다. 페이지를 넘기던 아르셀리아의 손이 중간에서 멈췄다.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낮게 읽었다. “별의 검은 용의 심장을 통해 깨어난다.” 세레니스가 멈췄다. 아스테리온의 눈빛이 변했다. 아르셀리아는 다음 줄을 읽었다. “검은 용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이번에는 완전히 정적이었다. 아르셀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스테리온을 봤다. “이거.”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 이야기 아니야?” 아스테리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처음보다 더 무거웠다. 세레니스가 숨을 죽였다. 아르셀리아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다음 문장. 글자가 일부 지워져 있었다. 읽을 수 있는 부분은 얼마 없었다. “…금빛 심장…” “…신을 벨 수 있는…” 그리고 마지막 줄. “용의 피를 가진 검.” 아르셀리아의 손끝이 멈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스테리온의 금빛 눈을 바라봤다. “너.” 그녀가 낮게 물었다. “정말 성검 맞아?” 아스테리온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주 천천히 웃었다. 그런데 이번 웃음은. 평소와 달랐다. 기쁜 것도. 능글맞은 것도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이 질문을 기다려 온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 질문.” 아스테리온이 낮게 말했다. “저도 천 년째 궁금했습니다.” 그날 저녁. 아르셀리아는 서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홀로 있고 싶었다. 하지만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아르셀리아는 책에서 눈도 들지 않았다. “나가.” “제가 누군지 확인도 안 하시는군요.” “너잖아.” “어떻게 아셨습니까?” “기척.” 아스테리온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열 걸음보다 조금 더 멀리 떨어져도 괜찮은 모양이었다. “계약이 안정되는 중입니다.” “안 물었어.” “궁금해하실까 봐.” “안 궁금해.” 아스테리온은 대답 대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아르셀리아는 한동안 책을 읽는 척했다. 하지만 내용은 들어오지 않았다. 몇 분 뒤. 결국 책을 덮었다. “왜 말 안 했어.” “무엇을요.” “네 정체를 네가 모른다는 거.” 아스테리온이 잠시 침묵했다.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처음.” “예.” “왜.” 그가 시선을 내렸다. “말해도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누구 기준으로.” “제 기준으로.” 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네 마음대로네.” “그건 인정합니다.” “나는 네 주인이라며.” 그 말에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아르셀리아는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네가 뭔지 모르면 나도 곤란하잖아.” “….” “그리고.” 그녀가 잠깐 말을 멈췄다. “내 보물이 뭔지도 모르는 건 싫어.” 아스테리온은 그대로 굳었다. 아주 잠깐. 정말 짧게. 하지만 분명히. 아르셀리아는 그의 얼굴에서 익숙하지 않은 표정을 봤다. 당황. 아니. 그보다 더 약한 것. 마치 아무도 그렇게 말해 준 적이 없는 것처럼. “왜.”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또 그 말이 좋아?” 아스테리온이 천천히 웃었다. 이번에는 장난기가 거의 없었다. “예.” “이상하네.” “그런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보물이라는 말에 집착해.” 그 질문에 아스테리온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 아주 낮게 말했다. “저는 늘 무기였으니까요.” 아르셀리아가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저를 가졌습니다.” 아스테리온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아무도 저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재가 조용해졌다. 아르셀리아는 몇 초 동안 그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 말했다. “나는 원하는데.”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예?” “예뻐서 가져왔잖아.” “…….” “능력 없어도 가져왔을 거야.” 이번에는 완전히 대답이 없었다. 아르셀리아는 정말 별 의미 없이 말했다. “평범한 검이었어도.” 그녀가 턱을 괴었다. “보물고에는 뒀겠지.” 아스테리온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평소처럼 능글맞은 얼굴이 아니었다. 조금. 정말 조금. 쓸쓸해 보였다. “그런 말을 너무 쉽게 하시는군요.” “뭐가.” “사람을 망치는 말.” “너 사람 아니잖아.” “그건 맞습니다.” “그러니까 괜찮네.” 아스테리온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르셀리아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검 하나를 주워 왔을 뿐인데. 왜 자꾸 이상한 반응을 하는지. 늦은 밤. 아르셀리아는 침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문 앞에서 멈췄다. 아스테리온이 따라오고 있었다. “왜.” “같이 가려고요.” “보물고.” “오늘도요?” “당연하지.” 아스테리온이 아주 슬픈 척했다. “너무하십니다.” “오늘 아침 소문 못 들었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는 아니야.” “언젠가는 좋아지실 겁니다.” “언제.” “혼인한 뒤?” 아르셀리아가 바로 문을 닫으려 했다. 아스테리온이 손으로 문을 잡았다. “농담입니다.” “안 웃겨.” “알겠습니다.” “가.” 아스테리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르셀리아의 눈썹이 올라갔다. “왜.” “마력.” 아르셀리아가 손목을 봤다. 문양은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아까 줬잖아.” “계약 초기라 소모가 빠릅니다.” “진짜?” “예.” “거짓말 아니고?” 아스테리온은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성검의 명예를 걸고.” “그 명예 믿어도 돼?” “아마도.” “…….” 아르셀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빨리.”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천천히. 손바닥이 맞닿았다. 금빛 신성력이 부드럽게 흘렀다. 아르셀리아의 붉은 마력도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두 힘이 손목 위에서 얽혔다. 문양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 순간. 아르셀리아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아주 짧게. 자신의 것이 아닌 감각. 차가운 바닥. 금속. 피 냄새. 그리고. 어딘가에서 들리는 목소리. 『죽여라.』 아르셀리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손을 놓았다. 마력 연결이 끊겼다. 아스테리온도 동시에 굳었다. “방금.” 아르셀리아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뭐였어?” 아스테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아르셀리아가 낮게 불렀다. “아스테리온.” 그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금빛 눈 안에 처음으로 명확한 두려움이 있었다. “들으셨습니까.” “응.” “무슨 말을.” 아르셀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죽여라.” 그 순간. 아스테리온의 눈빛이 완전히 굳었다. 아르셀리아는 확신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누구를 죽이라는 거야.” 아스테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테리온.” 이번에는 조금 더 강하게 불렀다. 그는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드래곤.” 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아스테리온은 웃지 않았다. “제 안에 남아 있는 명령입니다.” 정적. “모든 드래곤을.”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멸하라는 명령.” 아르셀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스테리온도. 둘 사이에 남은 것은. 손목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계약 문양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아르셀리아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주운 이 검이. 언젠가 정말. 자신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고.차를 다 마셨을 무렵, 아르셀리아는 책을 펼쳤다.아스테리온은 찻잔을 정리하다가 그녀를 봤다.“무슨 책입니까?”“서고에서 가져왔어.”“예.”“네가 전에 읽던 거.”아스테리온의 손이 멈췄다.“제가요?”“응.”그녀가 표지를 보여 줬다.은월령의 고대 식물과 마력 반응에 관한 책이었다.아스테리온은 며칠 전 그 책을 읽다가 파란색 꽃이 등장하는 부분에 표시를 해 두었다.“이거.”아르셀리아가 책장을 넘겼다.“네가 좋아한다고 했던 꽃.”“월광초.”“응.”“왜 가져오셨습니까?”“궁금해서.”“…….”“네가 왜 좋아하는지.”아스테리온은 그녀를 바라봤다.아르셀리아는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빛이 닿으면 파랗게 보이고, 어두워지면 은빛으로 바뀐다며.”“예.”“희귀한 꽃은 아닌데 은월령에서는 정원에 많이 심는다고.”“그렇습니다.”“그럼 나중에 화염궁에도 심어 볼까?”아스테리온의 눈이 커졌다.“화염궁에요?”“응.”“적염령의 기온은 월광초에 맞지 않을 텐데.”“온실 있잖아.”“…….”“마력 조절하면 되지.”아스테리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들었다.“왜.”“제가 좋아한다고 해서.”“응.”“꽃을 심으시려고요?”“싫어?”“아닙니다.”“그럼.”아르셀리아는 다시 책을 봤다.“너 파란색 좋아하잖아.”“…….”“푸른 러그도 샀고.”“예.”“이 꽃도 예쁘다며.”“예.”“그럼 네 방 창가에서 보이면 좋잖아.”아스테리온은 천천히 창가를 바라봤다.창문 밖에는 화염궁의 붉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그곳에.파란 꽃이 핀다면.자기가 좋아하는 색의 꽃이.아르셀리아의 정원에.피어난다면.“…….”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주인님.”“응.”“그 꽃은.”“응.”“제가 직접 심어도 됩니까?”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들었다.“네가?”“예.”“식물 키워 본 적 있어?”“없습니다.”“그럼 리엔한테 물어봐.”“예.”“온실 한쪽 비워 줄게.”아스테리온의 눈이 조금 밝아졌다.“정말입니까?”“
똑똑.아스테리온의 손이 멈췄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똑똑.두 번째 노크.“아스테리온.”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나야.”아스테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문으로 걸어갔다.손잡이를 잡았다.그리고 문을 열었다.아르셀리아가 서 있었다.짙은 붉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고, 평소 집무실에서 입던 검은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얇은 책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작은 접시가 있었다.“왜 그렇게 봐?”아르셀리아가 물었다.아스테리온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아스테리온?”“오셨군요.”“응.”“정말.”아르셀리아가 눈썹을 올렸다.“약속했잖아.”“예.”“들어가도 돼?”아스테리온은 곧바로 옆으로 비켜섰다.“물론입니다.”아르셀리아가 문턱을 넘었다.그 순간 아스테리온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어제도 왔다.그제도 왔다.처음 초대했던 날에도 왔다.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아르셀리아가 자기 발로.약속한 시간에.자신을 만나기 위해.이 방에 왔다.“뭐 해?”아르셀리아가 물었다.아스테리온이 정신을 차렸다.“아닙니다.”“또 멈췄어.”“예.”“왜?”그는 천천히 웃었다.“반가워서요.”아르셀리아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나도.”“…….”“너 보니까 반갑네.”아스테리온은 다시 멈췄다.아르셀리아가 웃었다.“또.”“……예.”“오늘 몇 번 멈출 거야?”“아직 모르겠습니다.”“그럼 일단 차부터 줘.”“예.”아스테리온은 그녀를 방 안으로 안내했다.아르셀리아는 자연스럽게 푸른 러그 위에 앉았다.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찻상 위에 올려놓았다.아스테리온이 물었다.“이건 무엇입니까?”“과자.”“…….”“차 마신다며.”“예.”“빈속에 마시면 심심하잖아.”아스테리온은 접시를 내려다봤다.작은 버터 과자였다.화염궁 주방에서 만든 것으로 보였다.“직접 가져오셨습니까?”“응.”“왜요?”아르셀리아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봤다.“손님이 빈손으로 오면 좀 그렇잖아.
“성검님?”관리 정령의 부름에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들었다.“예.”“여기 기록이 하나 빠졌어요.”정령이 가리킨 곳은 붉은 수정 왕관과 황금 술잔 사이였다.아스테리온이 처음 놓였던 자리.그곳의 목록에는 오래된 항목이 남아 있었다.고대 성검. 소유자 아르셀리아 로하르트.아스테리온은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소유자.그 단어는 이제 익숙하지 않았다.아르셀리아는 왕실 기록에서 자신을 사용한 사람들을 ‘소유자’가 아니라 ‘사용자’로 고쳐 적었다. 자신을 검으로 다루던 이들의 이름을 읽으며, 그들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었다고 말해 주었다.하지만 지금 눈앞의 기록은 조금 달랐다.그는 스스로 아르셀리아의 보물이 되고 싶다고 했다.그녀의 검이고 싶었다.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보물고의 물품 목록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이 항목은.”아스테리온이 조용히 말했다.“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어떻게요?”그는 잠시 생각했다.그리고 펜을 들었다.기존 기록 위에 선을 그었다.고대 성검. 소유자 아르셀리아 로하르트.그 아래 새로운 문장을 적었다.아스테리온. 현재 독립된 인격체로 생활 중. 보물고 보관 대상에서 제외.관리 정령이 눈을 깜빡였다.“그럼 성검님은 이제 보물 목록에서 빠지는 거예요?”아스테리온은 잠시 멈췄다.“공식 물품 목록에서는요.”“아가씨가 아쉬워하시지 않을까요?”“…….”그는 빈 선반을 바라봤다.“아마.”조금 웃었다.“아르셀리아는 여전히 저를 보물이라고 부르실 겁니다.”“그럼 목록에서도 보물 아닌가요?”“그건 다른 뜻입니다.”“어떻게 다른데요?”아스테리온은 대답을 고르느라 잠시 생각했다.“여기 있는 물건들은 주인님이 어디에 놓을지 정하실 수 있습니다.”“네!”“하지만 저는 제가 어디에 있을지 고를 수 있습니다.”정령은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활짝 웃었다.“아! 성검님은 걸어 다니는 보물이네요!”“…….”아스테리온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말하면 또 조금 이상하지만.”“왜요?
아르셀리아는 자신이 무슨 약속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어제 아스테리온의 방에서 차를 마셨고, 오늘도 가겠다고 했다. 그것도 그가 좋아하는 차를 마셔 보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별다른 의미 없이 한 말은 아니었다.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방을 조금씩 채워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고, 그가 고른 물건을 함께 사용하는 일도 생각보다 즐거웠으니까.그러니 약속을 지키는 것은 당연했다.문제는 아스테리온이 그 약속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주인님, 오늘 저녁 일정이 있으십니까?”아침 식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테리온이 물었다. 아르셀리아는 빵에 버터를 바르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없는데.”“집무실 업무는요?”“오전에 끝낼 거야.”“칠색 의회에서 연락이 올 가능성은 없습니까?”“연락이야 언제든 오지. 왜?”“아닙니다.”아스테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식탁 옆에 놓아 둔 작은 수첩을 펼쳤다. 그리고 무언가를 적었다.아르셀리아의 손이 멈췄다.“너 지금 뭐 적었어?”“오늘 일정입니다.”“내 일정?”“제 일정입니다.”“보여 줘.”아스테리온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수첩을 건넸다.아르셀리아는 펼쳐진 페이지를 내려다봤다.오전에는 서고 목록 정리, 정오에는 식사, 오후에는 보물고 물품 대조와 개인 독서 시간이 적혀 있었다. 여기까지는 평범했다.그런데 저녁 일정이 이상했다.오후 여섯 시 — 아르셀리아 방문 예정.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차 준비. 찻잔 세척. 의자 주변 정리. 러그 상태 확인.아르셀리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너.”“예.”“나 손님이야?”“예.”“어제도 갔잖아.”“오늘도 오시니까요.”“그런데 왜 이렇게 준비해?”아스테리온은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손님을 맞이하는 일이니까요.”“내가 무슨 황실 사절단이야?”“그분들보다 중요하십니다.”아르셀리아는 입을 다물었다.아스테리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첩을 돌려받았다.“그리고 어제는 주
아르셀리아는 아침부터 자기 방문 앞에 서 있었다.정확히는, 문에 걸린 작은 나무 문패를 보고 있었다.돌아오면 반갑습니다.어제 아스테리온이 월백촌 시장에서 사 온 선물이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나무판에는 특별한 마력이 깃들어 있지 않았고, 세공 역시 화염궁 보물고에 보관된 고대 유물들과 비교하면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아르셀리아는 침실에서 나갈 때마다 그것을 한 번씩 읽게 되었다.오늘 아침에만 벌써 세 번째였다.“…….”그녀는 손가락으로 나무판의 가장자리를 가볍게 건드렸다.달칵.문패가 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뭐 하십니까?”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르셀리아가 돌아봤다.아스테리온이었다.검은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은 그는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어제 시장에서 산 검은색 찻잔을 들고 있었다. 인간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마력은 안정적이었으며, 얼굴에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아르셀리아는 문패를 가리켰다.“이거.”“예.”“생각보다 예뻐.”아스테리온의 시선이 문패로 향했다.“어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오늘도 예쁘다고.”“그렇습니까.”“응.”아스테리온이 조금 웃었다.“그럼 잘 샀군요.”“잘 샀지.”아르셀리아는 다시 문패를 바라봤다.“근데 왜 하필 이 문장이야?”어제도 이유를 들었다. 자신이 돌아왔을 때 반가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나니 조금 더 궁금해졌다.아스테리온은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처음에는 다른 문장을 생각했습니다.”“뭔데?”“‘어서 오십시오.’”“그것도 괜찮네.”“예. 하지만 조금 이상했습니다.”“왜?”“그건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니까요.”아르셀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돌아오면 반갑다는 것도 누구한테나 할 수 있잖아.”“말은 그렇습니다.”아스테리온이 문패를 바라봤다.“하지만 저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주인님께서 돌아오실 때 반갑다는 뜻으로 골랐습니다.”아르셀리아는 잠시
아스테리온이 시장 안으로 사라진 뒤, 아르셀리아는 정확히 열두 번 그의 뒷모습이 사라진 방향을 돌아봤다.열두 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열세 번째 돌아보려던 순간이었다.“…….”아르셀리아는 고개를 돌리려던 것을 멈추고 눈앞의 가게를 노려봤다. 가게 주인이 진열대에 놓인 유리 장식품을 정리하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없어.”“그럼 혹시 기다리시는 분이…….”“있어.”“아, 그러시군요.”가게 주인은 더 묻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침묵이 오히려 아르셀리아의 신경을 건드렸다. 자신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뻔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그것도 이상했다.아르셀리아는 기다리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화염궁에 찾아오는 손님은 대부분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고, 늦는 자가 있으면 기다리지 않고 다른 일을 했다. 칠색 의회에서 회의가 지연되면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도 그녀였다.그런데 지금은 월백촌 시장 입구에서, 자기 보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아니.보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그는 분명 자기 검이었다. 계약으로 이어진 성검이었고, 그녀가 에드릭에게서 빼앗아 온 보물이기도 했다.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조금 전 아스테리온은 자신의 돈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혼자 시장 안으로 걸어갔다.아르셀리아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그가 혼자 고르고 싶어 했으니까.“…….”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고작 선물 하나인데.아르셀리아는 허리춤에 찬 작은 시계를 확인했다.십칠 분.“……별로 안 지났네.”생각보다 훨씬 적은 시간이었다.그녀는 결국 근처 찻집의 야외 의자에 앉았다. 따뜻한 차를 한 잔 주문하고, 시장 입구가 잘 보이는 자리를 골랐다.가게 주인이 물었다.“동행분이 오시면 차를 더 준비해 드릴까요?”아르셀리아는 잠깐 망설였다.“응. 한 잔 더.”“어떤 차로요?”“…….”아스테리온이 좋아하는 차가 뭐였더라.화염궁에서는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