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르셀리아는 계약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좋아하지 않았다. 드래곤은 본래 계약에 민감한 종족이었다. 인간처럼 문서 몇 장에 서명하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력과 이름, 피와 맹세가 얽히면 그것은 수백 년을 넘어 영혼에까지 남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아르셀리아는 웬만하면 계약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손목에는 처음 보는 문양이 떠올라 있었다. 붉은빛과 금빛이 섞인 얇은 선이 손목을 한 바퀴 감싸고, 그 중심에는 검과 날개를 닮은 문양이 희미하게 맥동했다. 아르셀리아는 손을 들어 올렸다. 문양은 사라지지 않았다. 반대편에 서 있는 아스테리온의 손목에도 똑같은 것이 있었다. 세레니스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이거 그냥 마력 연결 아니야.” “나도 알아.” 아르셀리아는 짧게 대답했다. “그럼 왜 이렇게 태연해?” “안 태연한데.” “표정이 똑같잖아.” “화나면 더 조용해져.” 세레니스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아르셀리아의 시선은 줄곧 아스테리온에게 박혀 있었다. “설명해.” “무엇을요.” “모르는 척하지 마.” 아스테리온이 잠깐 웃었다. “무서우시군요.” “지금 농담할 때 아니야.” 이번에는 웃음이 조금 줄었다. 아르셀리아가 한 걸음 다가갔다. “계약이 시작됐다고 했지.” “예.” “무슨 계약.” “아직 완전히 확정된 건 아닙니다.” “그래서 뭔데.” 아스테리온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이 오히려 더 수상했다. 아르셀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지금 말 안 하려고 시간 끄는 거지.” “가능하면 조금 더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확인?” “문양이 어떤 방식으로 안정되는지.” “내 몸에 생긴 걸 나보다 먼저 확인하겠다고?” 그 말에 아스테리온이 아주 미세하게 숨을 멈췄다. 아르셀리아는 그것까지 놓치지 않았다. “정말 숨기는 거 있네.” “아르셀리아.” “말해.” 세레니스도 한마디 보탰다. “나도 듣자. 이 정도면 네 문제만은 아니야. 성검이랑 드래곤 사이에 미확인 계약이 생겼는데 칠색 의회까지 소문이 났어. 이거 잘못하면 정치 문제 돼.” 아르셀리아가 세레니스를 돌아봤다. “정치?” “당연하지. 네가 누군데.” “드래곤.” “적염령 순혈 레드 드래곤.” “그게 그거지.” 세레니스가 이마를 짚었다. “아니야. 전혀 아니야.” 아르셀리아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세레니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영향력 있어. 특히 인간권이랑 접점이 거의 없는 네가 성왕국의 용살성검이랑 계약했다고 알려지면, 다들 의미를 붙여.” “내가 붙인 것도 아닌데.” “소문은 원래 당사자 허락 안 받아.” 그 말은 맞았다. 아르셀리아는 짜증스럽게 손목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아스테리온을 봤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말해.” 이번에는 아스테리온도 더 미루지 않았다. “성검에는 두 종류의 계약이 있습니다.” “두 종류?” “소유 계약과 진명 계약.” 세레니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진명 계약?” “들어본 적 없어.”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아스테리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인간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요.” “드래곤에게도.” “드래곤도 성검과 계약할 일이 거의 없었겠죠.” “거의가 아니라 없었겠지.” 세레니스가 툭 내뱉었다. 아스테리온은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목에 떠오른 문양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소유 계약은 단순합니다. 검이 사용자를 허용하는 것. 인간들이 말하는 ‘성검의 선택’이 거기에 가깝습니다.” “그럼 어제 빛난 게 그거야?”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예.” “그게 끝이 아니었고.” “아닙니다.” “지금 이 문양은?”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에 닿았다. “진명 계약의 초기 문양으로 보입니다.” “보입니다?” 아르셀리아의 목소리가 바로 차가워졌다. “확실하지 않아?” “저도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세레니스가 헛웃음을 냈다. “천 년 넘게 산 성검이 모르는 계약이 있다고?”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진명 계약은 제가 선택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니까요.” 아르셀리아가 멈췄다. “그럼 누가 선택하는데.” 아스테리온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둘 다.” 방 안의 공기가 조용해졌다. 아르셀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난 선택한 적 없어.” “의식적으로는.” “그 말 마음에 안 드는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아스테리온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거의 사라졌다. “진명 계약은 마력보다 더 깊은 층에서 반응합니다.” “쉽게 말해.”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을 때.” 아르셀리아의 눈썹이 올라갔다. “뭘 인정해.” 아스테리온이 아주 잠깐 망설였다. 세레니스가 대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아르셀리아가 그녀를 봤다. “왜.” 세레니스는 아스테리온을 보며 물었다. “그거 혹시 반려 계약 비슷한 거야?” 정적. 아르셀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아스테리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거의 긍정처럼 느껴졌다. 아르셀리아가 천천히 말했다. “아니지?” 아스테리온이 부드럽게 웃었다.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닙니다.” “그 말은 반쯤 맞다는 뜻처럼 들리는데.” “상당히 예리하시군요.” “아스테리온.” 이름을 낮게 부르자 이번에는 남주도 표정을 정리했다. “성검의 진명 계약은 단순한 소유 관계보다 깊습니다. 서로의 마력과 존재를 연결하고, 일정 범위 안에서 감각과 힘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세레니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끊을 수 있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또 ‘수도’네.” 아르셀리아가 짧게 말했다. “확실한 게 하나도 없잖아.” “진명 계약 자체가 거의 사라진 방식이라.” “그럼 왜 넌 알고 있어.” 그 질문에 아스테리온은 아주 잠깐 멈췄다. 아르셀리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그거.” “뭘요.” “방금 또 숨겼어.” “…….” “네가 이 계약을 왜 알고 있는지 말 안 했잖아.” 아스테리온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제 안에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기록?” “제가 만들어졌을 때 새겨진 것들.” “누가 만들었는데.” 그 질문에 방 안의 온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세레니스도 아르셀리아도 바로 알아차렸다. 아스테리온의 얼굴에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아주 오래된 기억을 건드린 사람처럼 잠깐 눈을 내렸다. “신전.” 짧은 대답. 아르셀리아가 곧바로 물었다. “성왕국 신전?” “지금의 성왕국보다 훨씬 이전의 신전입니다.” “얼마나 전.”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을 잃었어?” “일부는.” 세레니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부라는 건?”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삭제됐거나.” “…….” “봉인됐거나.” 아르셀리아는 더 이상 장난스럽게 묻지 않았다. 그 말은 분위기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천 년 넘게 존재한 성검. 드래곤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무기. 그리고 그 안에 삭제되거나 봉인된 기억. 아르셀리아는 다시 손목의 문양을 봤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귀찮은 걸 주워 왔다는 생각이 더욱 확실해졌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아야겠어.” “말씀하시죠.” “이 계약 때문에 내가 위험해?”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앞으로는.” “모릅니다.” “그럼 너는?” “저는 원래 위험한 물건입니다.” “농담하지 말고.” “농담 아닙니다.” 아르셀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스테리온은 담담했다. “저는 용살성검입니다.” 그 말이 처음으로 무겁게 들렸다. 아르셀리아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레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몇 초 뒤.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그럼 더 조사해야겠네.”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엇을요.” “너.” “저를?” “응.” 아르셀리아는 너무 당연한 듯 말했다. “내가 가진 게 뭔지는 알아야지.” 그 순간. 아스테리온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내가 가진 것. 그 말에. 이번에는 능글맞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조사는 곧바로 시작됐다. 아르셀리아는 화염궁의 다섯 번째 보물고를 열었다. 고대 유물과 문서들이 쌓여 있는 곳이었다. 오래된 금속판, 마력 결정, 고대어가 새겨진 돌 조각, 인간 왕국이 생기기도 전부터 존재한 문서들. 세레니스는 그 안에 들어오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이걸 다 언제 정리할 건데.” “정리돼 있어.” “어디가.” “나는 알아.” “그건 정리가 아니야.” 아르셀리아는 무시했다. 아스테리온은 뒤에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장난기는 거의 사라져 있었다. “여기 상당히 오래된 자료가 있군요.” “당연하지.” “성검 관련 자료도?” “아마.” 세레니스가 물었다. “아마?” “어딘가.” “…….” 아르셀리아는 거대한 서랍 하나를 열었다. 금속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안에는 두루마리 수십 개가 들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이거 아님.” 다음. “이것도.” 또 다음. “아, 이건 인간 왕국 족보네.” 세레니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왜 그런 걸 가지고 있어.” “예뻐서.” “족보가?” “표지가 금박이잖아.” 세레니스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 얼굴이었다. 아스테리온은 작게 웃었다. “역시 드래곤이군요.” “뭐.” “아닙니다.” 한참 뒤. 아르셀리아는 낡은 검은 가죽 표지의 책 하나를 꺼냈다. 표지는 거의 갈라져 있었고, 중앙에는 오래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검. 날개. 그리고 원. 아르셀리아는 손을 멈췄다. 자신의 손목에 떠오른 문양과 비슷했다. “이거.” 세레니스도 가까이 다가왔다. “같아 보여.” 아스테리온의 표정이 굳었다. 아르셀리아는 즉시 그 반응을 봤다. “알아?” “…….” “또 숨기려고?” “아닙니다.” 아스테리온이 책을 바라봤다. “저 문양은.”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고대 성좌문입니다.” “성좌문?” “신전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존재했던 표식입니다.” 세레니스가 눈을 찌푸렸다. “그런데 왜 성검 계약 문양이랑 닮았지?” 아스테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셀리아는 책을 열었다. 처음 몇 장은 고대어였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드래곤은 긴 시간을 살고, 오래된 문자도 비교적 많이 보존한다. 페이지를 넘기던 아르셀리아의 손이 중간에서 멈췄다.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낮게 읽었다. “별의 검은 용의 심장을 통해 깨어난다.” 세레니스가 멈췄다. 아스테리온의 눈빛이 변했다. 아르셀리아는 다음 줄을 읽었다. “검은 용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이번에는 완전히 정적이었다. 아르셀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스테리온을 봤다. “이거.”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 이야기 아니야?” 아스테리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처음보다 더 무거웠다. 세레니스가 숨을 죽였다. 아르셀리아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다음 문장. 글자가 일부 지워져 있었다. 읽을 수 있는 부분은 얼마 없었다. “…금빛 심장…” “…신을 벨 수 있는…” 그리고 마지막 줄. “용의 피를 가진 검.” 아르셀리아의 손끝이 멈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스테리온의 금빛 눈을 바라봤다. “너.” 그녀가 낮게 물었다. “정말 성검 맞아?” 아스테리온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주 천천히 웃었다. 그런데 이번 웃음은. 평소와 달랐다. 기쁜 것도. 능글맞은 것도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이 질문을 기다려 온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 질문.” 아스테리온이 낮게 말했다. “저도 천 년째 궁금했습니다.” 그날 저녁. 아르셀리아는 서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홀로 있고 싶었다. 하지만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아르셀리아는 책에서 눈도 들지 않았다. “나가.” “제가 누군지 확인도 안 하시는군요.” “너잖아.” “어떻게 아셨습니까?” “기척.” 아스테리온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열 걸음보다 조금 더 멀리 떨어져도 괜찮은 모양이었다. “계약이 안정되는 중입니다.” “안 물었어.” “궁금해하실까 봐.” “안 궁금해.” 아스테리온은 대답 대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아르셀리아는 한동안 책을 읽는 척했다. 하지만 내용은 들어오지 않았다. 몇 분 뒤. 결국 책을 덮었다. “왜 말 안 했어.” “무엇을요.” “네 정체를 네가 모른다는 거.” 아스테리온이 잠시 침묵했다.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처음.” “예.” “왜.” 그가 시선을 내렸다. “말해도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누구 기준으로.” “제 기준으로.” 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네 마음대로네.” “그건 인정합니다.” “나는 네 주인이라며.” 그 말에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아르셀리아는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네가 뭔지 모르면 나도 곤란하잖아.” “….” “그리고.” 그녀가 잠깐 말을 멈췄다. “내 보물이 뭔지도 모르는 건 싫어.” 아스테리온은 그대로 굳었다. 아주 잠깐. 정말 짧게. 하지만 분명히. 아르셀리아는 그의 얼굴에서 익숙하지 않은 표정을 봤다. 당황. 아니. 그보다 더 약한 것. 마치 아무도 그렇게 말해 준 적이 없는 것처럼. “왜.”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또 그 말이 좋아?” 아스테리온이 천천히 웃었다. 이번에는 장난기가 거의 없었다. “예.” “이상하네.” “그런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보물이라는 말에 집착해.” 그 질문에 아스테리온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 아주 낮게 말했다. “저는 늘 무기였으니까요.” 아르셀리아가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저를 가졌습니다.” 아스테리온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아무도 저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재가 조용해졌다. 아르셀리아는 몇 초 동안 그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 말했다. “나는 원하는데.”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예?” “예뻐서 가져왔잖아.” “…….” “능력 없어도 가져왔을 거야.” 이번에는 완전히 대답이 없었다. 아르셀리아는 정말 별 의미 없이 말했다. “평범한 검이었어도.” 그녀가 턱을 괴었다. “보물고에는 뒀겠지.” 아스테리온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평소처럼 능글맞은 얼굴이 아니었다. 조금. 정말 조금. 쓸쓸해 보였다. “그런 말을 너무 쉽게 하시는군요.” “뭐가.” “사람을 망치는 말.” “너 사람 아니잖아.” “그건 맞습니다.” “그러니까 괜찮네.” 아스테리온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르셀리아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검 하나를 주워 왔을 뿐인데. 왜 자꾸 이상한 반응을 하는지. 늦은 밤. 아르셀리아는 침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문 앞에서 멈췄다. 아스테리온이 따라오고 있었다. “왜.” “같이 가려고요.” “보물고.” “오늘도요?” “당연하지.” 아스테리온이 아주 슬픈 척했다. “너무하십니다.” “오늘 아침 소문 못 들었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는 아니야.” “언젠가는 좋아지실 겁니다.” “언제.” “혼인한 뒤?” 아르셀리아가 바로 문을 닫으려 했다. 아스테리온이 손으로 문을 잡았다. “농담입니다.” “안 웃겨.” “알겠습니다.” “가.” 아스테리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르셀리아의 눈썹이 올라갔다. “왜.” “마력.” 아르셀리아가 손목을 봤다. 문양은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아까 줬잖아.” “계약 초기라 소모가 빠릅니다.” “진짜?” “예.” “거짓말 아니고?” 아스테리온은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성검의 명예를 걸고.” “그 명예 믿어도 돼?” “아마도.” “…….” 아르셀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빨리.”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천천히. 손바닥이 맞닿았다. 금빛 신성력이 부드럽게 흘렀다. 아르셀리아의 붉은 마력도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두 힘이 손목 위에서 얽혔다. 문양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 순간. 아르셀리아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아주 짧게. 자신의 것이 아닌 감각. 차가운 바닥. 금속. 피 냄새. 그리고. 어딘가에서 들리는 목소리. 『죽여라.』 아르셀리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손을 놓았다. 마력 연결이 끊겼다. 아스테리온도 동시에 굳었다. “방금.” 아르셀리아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뭐였어?” 아스테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아르셀리아가 낮게 불렀다. “아스테리온.” 그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금빛 눈 안에 처음으로 명확한 두려움이 있었다. “들으셨습니까.” “응.” “무슨 말을.” 아르셀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죽여라.” 그 순간. 아스테리온의 눈빛이 완전히 굳었다. 아르셀리아는 확신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누구를 죽이라는 거야.” 아스테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테리온.” 이번에는 조금 더 강하게 불렀다. 그는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드래곤.” 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아스테리온은 웃지 않았다. “제 안에 남아 있는 명령입니다.” 정적. “모든 드래곤을.”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멸하라는 명령.” 아르셀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스테리온도. 둘 사이에 남은 것은. 손목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계약 문양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아르셀리아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주운 이 검이. 언젠가 정말. 자신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고.화염궁으로 돌아온 첫날 밤.아르셀리아는 자신의 침실 앞에서 두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한 명은 검은 머리에 금빛 눈.다른 한 명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색만 놓고 보면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아스테리온은 아주 자연스럽게 침실 문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이 방을 사용하던 사람처럼 태연했다. 반면 카르디안은 팔짱을 낀 채 그런 아스테리온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아르셀리아는.피곤했다.“왜 둘 다 여기 있어.”카르디안이 먼저 대답했다.“의회에서 정한 동행 감시.”“그래서.”“네가 자는 동안도 주변을 확인해야 한다.”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내가 잘 때까지?”“그래.”“안 돼.”“뭐가.”“귀찮아.”카르디안이 한숨을 쉬었다.“네 편의를 위해 온 게 아니다.”“그럼 누구 편의인데.”“칠색 의회.”“내 집이잖아.”“그러니까 더 문제다. 신전에서 이미 화염궁 위치와 구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그 말에는 아르셀리아도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자신은 화염궁의 결계를 믿었다.적염령에서도 가장 깊은 곳.용암 계곡과 붉은 절벽 사이에 숨겨진 궁전.허락받지 않은 인간이 들어오기 어려운 곳.하지만 얼마 전까지도 신전이 아스테리온의 위치를 감지했고, 황금령까지 추적대를 보내지 않았던가.그래도.“침실까지는 안 돼.”아르셀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카르디안이 눈썹을 올렸다.“왜.”“내 방이니까.”“저 검은 들어가면서.”아르셀리아가 즉시 옆을 봤다.아스테리온이 얌전히 서 있었다.너무 얌전해서 더 수상했다.“얘는.”아르셀리아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마력 때문에.”“손 잡고 충전하면 보물고에서도 버틴다며.”아스테리온이 아주 부드럽게 끼어들었다.“요즘은 균열 때문에 인간형 유지가 불안정합니다.”카르디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래서 꼭 침실 안이어야 하나.”“주인님의 마력에 가장 가까운 곳이니까요.”“보물고가 더 가까울 수도 있지.”“침실이 더
칠색 의회의 불꽃이 가라앉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정확히는.아르셀리아의 불꽃이 아니라.회의장 안의 분위기가.“그러니까.”아르셀리아는 아직도 붉어진 귀 끝을 숨기지 못한 채 아스테리온을 노려봤다.“다시는 의회에서 그런 말 하지 마.”아스테리온은 매우 온순한 얼굴로 물었다.“어떤 말씀이요?”“키스.”“아.”“아, 하지 마.”“알겠습니다.”너무 순순하게 대답해서 오히려 수상했다.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진짜 알아들었어?”“예.”“다시는 안 해?”“의회에서는.”“아스테리온.”“예.”금빛 눈이 웃었다.아르셀리아가 손을 들었다가 멈췄다. 한 대 치고 싶은데 아직 검신에 금이 가 있었다.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그게 더 짜증 났다.이제는 화를 내다가도 ‘얘 아프지’가 먼저 생각났다.“왜 한숨을 쉬십니까?”“너 때문에.”“그렇게 자주 저를 생각하십니까?”“진짜 검으로 만들어 버릴까.”“그건 원래도 가능합니다.”“…….”“다만 지금은 인간형이 더 좋습니다.”아르셀리아가 이를 악물었다.옆에서는 세레니스가 이미 웃다가 지친 얼굴로 의자에 기대 있었다.“둘이 정말 반려 아니야?”“아니야.”아르셀리아가 즉시 대답했다.“정말?”“응.”“그럼 하나만 물어보자.”“뭔데.”세레니스가 턱으로 둘의 손을 가리켰다.“그건 언제 놓을 거야?”아르셀리아가 내려다봤다.손.아직도 잡고 있었다.정확히는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얽혀 있었다.회의가 거의 끝나 가는 지금까지.한 번도 놓지 않았다.아르셀리아가 바로 손을 빼려 했다.그러자.아스테리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왜.”“아직 마력이 필요합니다.”“진짜?”“예.”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거짓말 아니고?”“확인해 보시겠습니까?”“어떻게.”“놓아 보시면 됩니다.”아르셀리아가 잠시 고민했다.그리고 손을 놓았다.하나.둘.셋.아스테리온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금빛으로 만들어
“시작됩니다.”에드릭의 말이 칠색 의회 한가운데 떨어졌다.그 한마디 뒤로 이상할 만큼 긴 정적이 이어졌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스테리온의 반환과 아르셀리아의 신전 출두를 두고 팽팽하게 갈리던 시선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에드릭에게 모였다. 성왕국의 정식 사절로 들어온 용사가, 정작 자신을 보낸 신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했다.그것도.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말과 함께.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에드릭 옆에 서 있던 사제였다.“용사님.”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에드릭은 그를 보지 않았다.“알고 있습니다.”“성왕국의 공식 사절로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그것도 압니다.”“그런데 왕국의 뜻을 거스르는 발언을―”“왕국의 뜻입니까.”그제야 에드릭이 고개를 돌렸다.피로가 짙게 남은 얼굴.붕대 아래로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상처가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흐리지 않았다.“아니면 신전의 뜻입니까?”사제의 표정이 굳었다.에드릭은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제가 알기로 성왕국 의회에서는 아직 드래곤 영토에 대한 공식적인 군사 행동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용사님.”“국왕 폐하의 친서도 없고.”“그만.”“대신관의 명령만 있지요.”낮게 깔린 마지막 말에 회의장 분위기가 바뀌었다.아르셀리아는 옆에 선 아스테리온의 손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미세하게 차가웠던 손끝이 지금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그도 에드릭의 말을 듣고 있었다.집중해서.아르셀리아는 조용히 물었다.“그게 다른 거야?”에드릭이 그녀를 봤다.“많이 다릅니다.”“인간들끼리는?”“성왕국이라 해도 왕과 신전은 하나가 아닙니다.”“신을 믿는 나라잖아.”“그렇다고 대신관이 왕인 건 아닙니다.”아르셀리아는 잠시 생각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신전이 멋대로 한 거네.”“현재까지는.”에드릭이 대답했다.“그렇게 봐야 합니다.”사제가 결국 앞으로 나섰다.“용사 에드릭 벨로안.”호칭이 바뀌었다.조금
칠색 의회는 드래곤들조차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아르카디아의 일곱 영지가 맞닿는 중앙 산맥, 어느 색의 드래곤에게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중립지대. 일곱 개의 거대한 첨탑이 원을 그리듯 세워져 있었고, 중앙에는 오래된 원형 궁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궁전 외벽에는 적색, 은색, 금색, 흑색, 청색, 녹색, 그리고 지금은 거의 사라진 백색의 마력석이 차례로 박혀 있었다.칠색 의회.드래곤들이 전쟁을 결정하고, 영지 간 분쟁을 조정하며, 인간 왕국과의 외교 문제를 논의하는 곳.아르셀리아는 그 앞에 도착하자마자 생각했다.귀찮다.아주 많이.“왜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옆에서 아스테리온이 물었다.“돌아가고 싶어.”“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그래서 더.”아르셀리아는 원형 궁전 위로 떠 있는 일곱 개의 마력 고리를 올려다봤다.평소라면 이 장소에는 가까이 오지도 않는다. 칠색 의회의 소집장이 날아와도 웬만한 문제라면 대리인을 보내거나 아예 무시했다. 레드 드래곤 중에서도 아르셀리아 로하르트의 괴팍함은 제법 유명해서, 최근 백 년 사이에는 굳이 그녀를 부르지 않는 분위기까지 만들어져 있었다.그런 자신이.직접 왔다.그것도.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맞잡힌 손.자신의 왼손과.아스테리온의 오른손.아침부터 계속 이 상태였다.황금령에서 의회까지 이동하는 동안 아스테리온의 인간형이 두 번이나 흔들렸기 때문이다.아직 균열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다.직접 마력을 공급하면 인간형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고, 손을 잡는 방식이 가장 부담이 적었다.문제는.“또 봅니다.”아스테리온이 말했다.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돌렸다.“뭘.”“손.”“확인한 거야.”“무엇을요?”“문양.”“분명 제 손을 보고 계셨는데요.”“문양도 손목에 있잖아.”“그러면 손목을 보셨어야죠.”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놓을까?”아스테리온이 손가락에 힘을 줬다.“그건 안 됩니다.”“그러니까 조용히 해.”“예.”그는 순순히 대답
황금령의 밤하늘이 붉게 물들었다.거대한 날개가 펼쳐지는 순간, 황금수 주변을 가득 메웠던 빛 정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르셀리아의 인간형 몸이 붉은 마력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커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변했고, 목과 어깨를 타고 올라오던 붉은 비늘은 곧 전신을 뒤덮었다. 날개 안쪽의 금빛 균열이 용암처럼 번뜩이자, 황금령의 서늘했던 공기마저 단숨에 뜨거워졌다.곧 황금수 앞뜰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고개를 들었다.붉은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황금령을 둘러싼 하얀 빛기둥은 모두 열두 개.각각의 기둥을 중심으로 신성 문양이 땅을 타고 이어져 있었다. 위에서 보면 아마 하나의 거대한 원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인간 몇 명을 잡기 위한 마법진이 아니었다. 영지 하나를 봉쇄하고, 그 안에 있는 드래곤의 마력 자체를 억누르기 위한 규모였다.아르셀리아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 코웃음을 쳤다.“제법 준비했네.”그 목소리가 인간의 말처럼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드래곤 특유의 마력이 섞인 음성이 황금령 전체를 울렸다.바닥이 떨렸다.멀리 진을 치고 있던 성기사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그런데도 퇴각하지 않았다.대신 가장 앞의 흰 망토를 걸친 남자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경고한다. 레드 드래곤 아르셀리아 로하르트. 즉시 인간형으로 돌아가 투항하라.』아르셀리아의 거대한 머리가 조금 기울었다.“싫어.”너무 간단한 대답이었다.남자의 얼굴이 멀리서도 굳는 것이 느껴졌다.『당신은 현재 성왕국의 신성 유물을 불법 점유하고―』“그거 말인데.”아르셀리아가 말을 끊었다.“계속 내 거 불법 점유라고 하잖아.”『성검 아스테리온은 성왕국이 수백 년간 보관해 온―』“그래서?”『……뭐라?』“보관했다고 네 거야?”붉은 눈이 가늘어졌다.“훔쳐다가 천 년 갖고 있었다고 주인이 바뀌나?”뒤쪽에 있던 세레니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카르디안은 웃지 않았다. 대신 이미 검은 마력을 손끝에 모으고 있었다.에르하르트 역시
검은 빛이 터진 직후.아르셀리아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었다. 태양이 꺼진 것처럼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검은 장막이 황금수의 기록실을 집어삼켰고, 몸을 짓누르는 낯선 힘이 손끝에서부터 팔을 타고 올라왔다.차갑다.신성력도 아니고.드래곤의 마력도 아니다.오히려 둘을 억지로 끊어 놓으려는 힘에 가까웠다.아르셀리아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아스테리온과 연결된 무언가가.자신을 떼어 내려고 한다.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싫어.”누구에게 하는 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하지만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계약자와 개체 간 연결을 차단합니다.』낯선 목소리.아스테리온의 안쪽에서 흘러나오던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사람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명령 그 자체.아르셀리아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검날을 더 단단히 잡았다.손바닥이 다시 깊게 베였다.따뜻한 피가 손목을 타고 흘렀다.“아르셀리아!”카르디안이 그녀의 팔을 잡으려 했다.“손 놔! 검이 이미―”“건드리지 마.”목소리가 낮았다.카르디안의 손이 멈췄다.아르셀리아의 주변에서 붉은 불꽃이 천천히 피어올랐다.폭발하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조용했다.그래서 더 위험했다.불꽃은 그녀의 발끝에서 손목을 타고 올라가 검신을 감쌌다.아스테리온의 금빛과.아르셀리아의 붉은빛.두 색이 검은 장막 안에서 서로를 찾아 얽혔다.『차단 실패.』목소리가 울렸다.『계약자 마력 저항 확인.』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계약자.”피 묻은 입술 끝이 아주 조금 비틀렸다.“누구 마음대로.”『……』“내가 언제 너희랑 계약했는데.”대답은 없었다.“아스테리온.”그녀가 검을 바라봤다.아직 남자 형태였다.한쪽 팔만 검날로 변한 채.금빛 눈에는 다시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하지만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그의 시선은 오직 하나에만 고정돼 있었다.아르셀리아의 손.피.자신의 검날 위에 흐르는.그녀의 피.“손.”아스테리온이 쉰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