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정오가 되기 전, 대신전의 신관들이 돌아갔다.
예복 담당자들은 가져온 상자를 풀지도 못했고,
황실 일정관은 문서 한 장을 남긴 채 별궁을 떠났다.
누구도 침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황제에게 보낸 일정 취소 통보의 답은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엘리시아는 밀랍이 찍힌 봉투를 책상 위에 놓은 채 한동안 뜯지 않았다.
검은 밀랍 위에 눌린 황금 독수리 문장은 전생 내내 수없이 보았던 것이었다.
황후가 될 사람에게 보내는 연서에도,
성녀의 내통 혐의를 정리한 조사 명령서에도 같은 문장이 찍혀 있었다.
이레나는 봉투를 내려놓은 뒤 한 걸음 물러섰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작성하신 답신이라고 합니다.”
“전달자는 돌아갔습니까?”
“예. 답변은 필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엘리시아는 봉인을 잘랐다.
편지에는 세 문장만 적혀 있었다.
‘성녀의 요청에 따라 오늘의 검토 일정을 취소하겠습니다.’
‘재조정 여부와 시기는 성녀 측에서 결정해주십시오.’
황실은 별도의 방문을 요청하지 않겠습니다.
전생의 칼릭스라면 쓰지 않았을 문장이었다.
그는 엘리시아가 피곤하다고 하면 일정을 줄였고,
대신 더 늦은 시간에 직접 별궁을 찾아왔다.
자신의 방문은 업무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엘리시아 역시 그런 그를 반겼다.
그때는 문이 열리는 소리만 들어도 그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엘리시아는 편지 끝의 서명을 살폈다.
획의 기울기, 마지막 글자를 누르는 힘,
잉크가 마르기 전에 접은 흔적까지 칼릭스의 것이 맞았다.
위조 여부는 지금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문장을 고른 사람은 전생의 결속식 삼십 일 전 칼릭스와 같지 않았다.
그가 달라졌을 가능성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함정이었다.
미래를 아는 사람이 자신만은 아닐 수도 있었다.
엘리시아는 편지를 접어 원래 봉투에 넣었다.
“이레나.”
“예.”
“이 편지는 별도 보관함에 넣어주세요. 전달 시각과 전달자 이름도 적고요.”
“황실 답신을 증거물처럼 보관하실 생각입니까?”
“지금부터 제게 오는 모든 문서를 그렇게 취급할 겁니다.”
이레나는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평소였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문턱에서 멈춘 뒤부터 그녀는 엘리시아가 정한 선을 한 번도 넘지 않았다.
“그럼 성녀 측 인장을 새로 준비하겠습니다. 보관 열쇠는 누가 맡을까요?”
엘리시아는 잠시 생각했다.
전생에는 중요한 문서를 대신전에 맡겼다.
황실 문서는 황실 기록관이, 신탁은 대신전이,
성녀 개인의 서류는 결속 준비위원회가 보관했다.
엘리시아의 이름이 적힌 문서 중 정작 엘리시아만 볼 수 없는 것이 더 많았다.
“제가 한 개를 맡고, 당신이 한 개를 맡으세요. 두 열쇠가 함께 있어야 열리게 만들고요.”
이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안으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일정표와 결속 준비 문서 원본을 전부 가져다주세요.”
“전부라면 양이 상당할 겁니다.”
“그래서 오늘 다른 일정을 취소한 거예요.”
엘리시아는 편지를 넣은 봉투 위에 손을 얹었다.
“누가 제 이름으로 무엇을 결정했는지 처음부터 확인하겠습니다.”
해가 지고 별궁이 조용해진 뒤에도 엘리시아는 잠들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결속식 준비 문서가 높이 쌓여 있었다.
황실과 대신전이 합의한 의식 순서, 성녀의 거처 이전 계획,
결속 후 신성력 검사 일정, 황후 교육 예비안까지 빠짐없이 정리돼 있었다.
서명란에는 엘리시아의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직접 서명한 기억은 없는 문서가 절반을 넘었다.
일부는 약혼 당시 위임한 권한으로 처리됐고,
일부는 성녀 선발 규정에 따라 대신전이 대리 승인했다.
거부권에 관한 문서는 한 장도 없었다.
엘리시아는 발견한 문서마다 붉은 끈을 묶었다. 내일은 법률관을 부르고,
그다음에는 로젠베르크가의 문서와 대조해야 했다.
칼릭스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알 수 없으니 황실 기록은 더 늦게 요청할 생각이었다.
창밖이 완전히 어두워질 무렵, 이레나가 마지막 순찰을 마치고 돌아왔다.
“침실 밖 경비는 두 명입니다. 문은 잠그지 않겠습니다.”
엘리시아는 문서를 덮었다.
“고마워요.”
이레나가 잠시 서 있었다.
“오늘 밤 제가 안쪽 응접실에 머물까요?”
엘리시아는 거의 그렇다고 대답할 뻔했다.
살아 있는 이레나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강한 유혹이었다.
문밖의 발소리를 듣고,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오다 죽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레나는 엘리시아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밤새 경계해야 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아니요. 평소대로 쉬세요.”
“불편한 일이 생기면 종을 당겨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이레나가 나간 뒤 엘리시아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잠금쇠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 누웠으나 눈을 감지 않았다.
처형대의 붉은 천이 어둠 속에서 다시 내려올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몸을 일으켜 문을 확인했고, 그때마다 문은 안쪽에서 열렸다.
그 정도면 됐다.흰 뿔의 왕이 첫 번째 열린 왕로 구간을 넘은 것은 해가 지기 직전이었다.성벽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서쪽 고지대 관측기가 그 모습을 잡았다.거대한 흰 뿔이 석회암 사이를 통과할 때 지면이 미세하게 울렸고,왕의 발밑에서는 오래된 왕핵 잔류가 하나씩 드러났다 사라졌다.왕은 서쪽 평야의 사람 냄새를 따라가지 않았다.가장 먼저 무너진 제3 겨울 비축창고 방향으로 곧장 내려왔다.이미 주민과 근무자는 모두 빠져 있었다.창고 바닥 아래에는 팔십 년 전 왕핵 수송선이 지나고 있었다.흰 뿔의 왕이 창고 외곽에 도착하자 남아 있던 왕핵 잔류가 크게 흔들렸고,그 순간 창고 서쪽 벽이 아래로 꺼졌다.곡물자루와 소금통이 지하로 쏟아졌으며 건물 절반이 무너졌지만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이미 열린 다섯 구간이었다.저수지 수문을 닫는다고 바로 복구되지 않았다.석회암대 사이에 다시 차단수가 차고 광물수지가 굳으려면 최소 며칠이 필요했으며,그동안 흰 뿔의 왕은 서쪽 평야로 넘어올 수 있었다.황실 왕핵관리국은 가장 빠른 해결책을 제시했다.칼릭스가 왕핵을 사용해 열린 구간의 지맥명령을 임시 고정하면수 시간 안에 왕로를 다시 막을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로스테에도 같은 문서가 도착했다.하겐은 읽고 아무 말 없이 엘리시아 쪽으로 넘겼다.그녀는 제안서 마지막까지 확인했다.황제의 직접 왕핵 사용.예상 지속시간 사십 분.절명흔 영향 불명.성공 가능성 높음.
“거기만 막으면 남은 잠금은 유지할 수 있나?”“공급을 복구하면요. 이미 열린 구간을 다시 닫으려면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리지만, 아직 살아 있는 구간은 더 열리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저장조 위치는?”현재 지도에서는 서부 수리저수지로 쓰이는 작은 시설이었다.로스테 주민에게 직접 식수를 공급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겨울이 지나면 서쪽 농경지에 물을 대는 보조저수지였다.문제는 새벽회가 저장조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배출수문을 열어 차단수를 계속 계곡 밖으로 버리고 있다는 점이었다.수문을 닫으면 해결된다.그러나 현재 그곳에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하겐이 곧바로 병력을 보내지 않고 최근 관측부터 확인하게 했다. 열감지기에는 저장조 관리동 안에서 여섯 개의 생체 반응이 잡혔고, 주변 지하에는 왕핵 장치가 없었다.새벽회 조직원일 가능성이 높았다.이번에는 시간이 있었다.왕이 저장조로 향하는 것도 아니었다.하겐은 중앙고원 때와 달리 체포와 시설 확보를 동시에 시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정규 경비대를 씁니다. 시설을 되찾는 작전이고 왕핵 파편도 없으니, 도망자 추격보다 수문 확보가 우선입니다.”엘리시아는 자신의 권한 안에서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저수지 물에는 광물수지가 섞여 있습니다. 전투 중 수문이나 저장탱크가 깨지면 아래 농경지로 흘러갈 수 있으니 하류 접근을 먼저 막겠습니다. 부상자는 그 물로 씻지 않도록 현장 의료대에도 알려주세요.”명령은 각자의 권한으로 따로 나갔다.한 사람이 전체 작전을 잡지 않았다.그게 느리기는커녕 오히려 빨랐다.무엇을 누가 결정해야 하는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서부 수리저수지 전투는 길지 않았다.새벽회 인원 여섯 명은 정면으로 싸우기보다 수문을 끝까지 열어놓고 빠져나가려고 했고, 경비대는 관리동을 포위하되 하류 쪽 퇴로 하나를 의도적으로 비워뒀다. 조직원들이 사람을 뚫고 도망치려고 싸우게 만드는 대신 시설과 반대쪽으로 빠지도록 길을 남긴 것이다.네 명은 그 길을 이용
서쪽 평야의 첫 이주는 예상보다 빨리 시작됐지만, 창고 근무자들이 가장 늦게 움직였다. 제3 비축창고에는 로스테가 겨울 동안 사용할 곡물과 소금, 건초가 들어 있었고, 그중 상당량은 흰 뿔의 왕 전쟁이 시작된 뒤 외곽 주민들을 먹이기 위해 따로 확보한 물자였다. 창고 책임자는 인원부터 빼라는 명령을 받았으면서도 수레 여덟 대에 곡물자루를 먼저 올리려 했고, 베른하르트가 현장 회선을 열었을 때까지도 사람과 물자를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왕 예상 진입까지 두 시각 남았습니다. 사람 열아홉 명이고 수레 여덟 대면 충분합니다.”베른하르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지반이 먼저 흔들릴 가능성은 계산했습니까?”“아직 왕이 석회암대를 넘지도 않았습니다.”“왕 때문에만 무너지는 게 아닙니다. 잠금이 풀리면서 지맥 압력이 이미 바뀌고 있습니다.”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그때 창고 바닥 관측판에서 첫 균열값이 잡혔다.눈으로 보이는 흔들림은 없었지만 지하 오래된 운송선 한쪽에서 석회암층이 갈라지고 있었다.베른하르트가 다시 말했다.“물자를 구하다 다치면 그 물자를 옮길 사람도 없어집니다. 사람 먼저 나가십시오.”이번에는 현장 책임자가 고개를 숙였다.곡물수레 가운데 이미 적재가 끝난 세 대만 출발했고, 나머지 물자는 그대로 남겨졌다. 근무자 열아홉 명이 마지막 수레 뒤를 따라 빠져나간 지 십여 분 뒤, 창고 동쪽 바닥이 처음으로 내려앉았다.비축창고 하나를 지키기 위한 전투는 없었다.그 대신 건물 전체가 손실목록에 들어갔다.서부 역참에서는 말 열두 마리를 전부 데리고 나올 수 없었다. 주민 수송에 필요한 말부터 먼저 빼고 남은 네 마리는 울타리를 열어 자유롭게 빠져나가도록 했으며, 임시거처 주민들은 개인 짐을 한 수레에 제한한다는 지역 책임자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침구를 남겼고 누군가는 반년치 장작을 두고 떠났다.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한 문장으로는 나중에 설명되지 않을 손실들이 길 옆에 그대로 남았다.엘리시
왕로의 세 번째 잠금이 꺼진 뒤 서쪽 평야에 즉시 대피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왕로가 실제로 흰 뿔의 왕을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지 확인하지 않은 채 모든 주민을 한꺼번에 내보내면, 오히려 겨울 수송로를 마비시켜 다른 지역의 피난과 보급까지 동시에 막을 수 있었다. 하겐은 북쪽 관측값을 붙잡고 왕의 첫 이동을 기다렸고, 베른하르트는 서쪽 평야 주민 명부와 비축창고 근무자 수를 다시 확인했으며, 엘리시아는 평의회에 긴급 안건 하나를 올렸다. 자신에게 서부 지역 전체의 지휘권을 넘겨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왕로 개방과 함께 발생할 수 있는 신성 잔류·왕핵 오염·의료 이동에 한해 지역 명령을 바로 내릴 수 있도록 권한을 분리해달라는 안건이었다.평의회는 전투 중이라고 표결을 생략하지 않았다. 현재 참석 가능한 의원 스물셋 가운데 스무 명이 찬성했고, 반대 둘과 기권 하나가 기록에 남았다. 엘리시아에게 넘어온 것은 군사권도, 주민 강제이동권도 아니었다. 서쪽 평야의 치료시설 분산, 신성오염 구역 설정, 왕핵 잔류물 접근금지, 의료수송 우선순위 조정 권한만이었고, 주민 대피 자체는 각 지역 책임자와 베른하르트가 함께 결정하며 전투병력 운용은 하겐이 계속 맡았다. 세 사람이 서로의 권한을 대신 사용할 수 없다는 문구까지 서명된 뒤에야 명령서는 현장으로 내려갔다.“전쟁 중에 서류가 너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베른하르트가 마지막 사본을 접으며 말하자 엘리시아는 서쪽 지도를 계속 바라본 채 대답했다.“서류가 없어서 나중에 누가 뭘 했는지 모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요 며칠 우리가 계속 보고 있잖아요.”팔십 년 전 백각 관리망도, 십일 년 전 가짜 왕핵 실험도 처음에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누가 어느 시점에 무슨 권한을 가지고 무엇을 바꿨는지가 지워지면서,책임은 직무명과 자동장치 뒤로 숨어버렸다. 엘리시아는 같은 실수를 피하기 위해 속도를 늦출 생각은 없었지만, 빠르
검은 갑주를 걸친 포로의 신원은 밤이 깊어서야 확인됐다.본명은 마티아스 로웰.황실 기사단도, 왕핵국 기술자도 아니었다.십일 년 전 북부 왕핵 실험분과에서 하급 운송기사로 근무하다 실험 종료 뒤 실종 처리된 사람이었다. 당시 나이는 스물셋이었고 현재 서른넷. 사망기록은 없었으나급여와 주민기록이 십 년 이상 완전히 끊겨 있었다.흑갑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서로 다른 번호 갑주의 부품을 이어 붙인 임시 장비였다.오른쪽 어깨는 4번.왼쪽 다리는 11번.가슴판 안쪽에는 숫자가 긁혀 사라진 오래된 1번 부품.하나의 흑갑 기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을 가진 갑주들이여러 사람과 시설 사이를 돌았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