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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이름으로 묶어둔 붉은 끈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2 16:55:31

잿빛이 밴 금발은 등 중간까지 내려와 있었고, 

녹회색 눈 가장자리에는 얇은 금빛 테두리가 남아 있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했지만, 

감옥에서 말라붙었던 뺨과 터진 입술은 없었다.

엘리시아는 잠옷의 목선을 잡아 내렸다.

왼쪽 쇄골에서 심장 쪽으로 번진 성흔이 희미하게 빛났다. 

검게 탄 흔적도, 처형 직전 신성력이 역류하며 생겼던 균열도 보이지 않았다.

상처가 없었다.

그 사실이 기쁨보다 먼저 공포를 불러왔다.

꿈이라면 지나치게 선명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백합 줄기의 풋내, 

밤새 꺼져 있던 벽난로의 재 냄새까지 모두 현실이었다. 

반대로 죽음이 꿈이었다고 믿기에는 

붉은 천의 축축한 감촉이 목 안쪽에 남아 있었다.

엘리시아는 거울 앞에 놓인 은제 과도를 집었다.

망설이지 않고 엄지 끝을 그었다. 얇은 붉은 선이 벌어지고, 

피 한 방울이 손톱 옆으로 맺혔다. 통증이 뒤늦게 따라왔다.

그녀는 피를 닦지 않은 채 창가로 갔다.

책상 위에는 오늘 일정이 적힌 카드가 놓여 있었다.

오전, 결속 예복 최종 치수 확인.

정오, 대신전 파견 신관 접견.

오후, 황제 폐하와 결속식 순서 검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날짜가 쓰여 있었다.

결속식까지 삼십 일.

엘리시아는 카드를 끝까지 읽었다. 

종이가 손가락 사이에서 구겨졌지만 찢지는 않았다. 

증거를 없애고 싶은 충동보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빨랐다.

침실 밖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금속 장식이 서로 부딪히는 익숙한 소리가 났다. 

엘리시아는 과도를 쥔 채 문을 바라보았다. 노크가 세 번 이어졌다.

“엘리시아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과도의 끝이 책상에 부딪혔다.

죽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감옥의 지하 통로에서 그녀를 구하려다 등에 검을 맞고 쓰러졌던 사람. 

피가 너무 많이 흘러 손으로 막을 수조차 없었고, 

마지막까지 쇠창살 열쇠를 엘리시아 쪽으로 밀어주었던 사람.

이레나 보스.

엘리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문밖의 사람이 다시 불렀다.

“엘리시아 님?”

“잠시만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평온하게 나왔다. 

엘리시아는 과도를 내려놓고 엄지의 피를 천으로 눌렀다. 

손끝이 떨리는 것을 숨기기 위해 상처를 단단히 감쌌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흰색과 금색이 섞인 성기사 제복을 입은 이레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짙은 갈색 머리는 목 뒤에서 단단히 묶여 있었고, 

어깨에는 성녀 호위대의 푸른 망토가 걸려 있었다. 

목덜미 아래로 검에 베인 흔적은 없었다.

살아 있었다.

이레나는 침대가 흐트러진 모습과 엘리시아의 창백한 얼굴을 차례로 살폈다. 

곧 책상 위의 과도와 손가락에 감긴 천을 발견하고 표정이 굳었다.

“손을 다치셨습니까?”

그녀가 다가오려 하자 엘리시아가 손을 들었다.

“거기 계세요.”

이레나는 즉시 멈췄다. 질문하지도, 

괜찮다는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억지로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 반응까지 기억 속과 같았다.

엘리시아는 이레나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눈썹 왼쪽에 난 작은 흉터, 긴장하면 턱을 아주 조금 당기는 습관, 

대답을 기다릴 때 오른손 엄지가 검집의 이음새를 누르는 버릇까지 그대로였다.

“오늘이 며칠이죠?”

“제국력 삼백열두 해, 여름 끝달 스무이레입니다.”

엘리시아의 시선이 일정 카드로 내려갔다.

“결속식은요?”

“삼십 일 뒤입니다.”

“제가 어제 무엇을 했습니까?”

이레나의 표정에 의문이 번졌다. 그래도 대답은 빨랐다.

“오전에는 대신전에서 성흔 검사를 받으셨고, 

오후에는 로젠베르크 후작 각하와 식사를 하셨습니다. 

저녁에는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결속 서류를 읽으시다가 자정 전에 잠드셨습니다.”

“폐하를 만났습니까?”

“어제는 만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오후에 순서 검토가 예정돼 있습니다.”

엘리시아는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지만 손목을 누르지는 않았다. 

네 번의 호흡은 이미 끝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진정이 아니라 판단이었다.

날짜는 맞았다.

결속식까지 삼십 일.

칼릭스와 약혼 관계였으며, 아직 교단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전이 성녀의 거부권을 지웠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던 때였다.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

혹은 같은 끝을 향해 다시 움직이기 직전.

“이레나.”

“예, 엘리시아 님.”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 목 안이 따가워졌다. 

엘리시아는 죽었던 사람을 끌어안거나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손을 뻗지 않았다. 

이레나는 살아 있었다. 그 사실을 자신의 감정으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 일정을 전부 취소해 주세요.”

“전부 말입니까?”

“예. 대신전 신관도, 예복 담당자도 들이지 마세요. 

황제 폐하와의 검토 일정은 성녀 측의 사정으로 재조정한다고 전달해주시고요.”

이레나는 잠시 망설였다.

“황실에서 이유를 물으면 어떻게 답할까요?”

엘리시아는 구겨진 일정 카드를 펴서 책상 위에 놓았다. 

종이의 접힌 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성녀가 자신의 상태를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세요. 그 이상은 설명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문은 잠그지 마세요.”

이레나가 문 쪽을 돌아보았다.

“잠겨 있지 않습니다.”

엘리시아는 대답 대신 직접 문으로 갔다.

이레나가 옆으로 물러났다. 엘리시아는 손잡이를 내리고 문을 밀었다. 

복도 쪽으로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바깥에는 성녀 호위대 두 명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 있었지만, 

누구도 문 앞을 막지 않았다.

엘리시아는 문턱에 선 채 복도의 양 끝을 살폈다.

탈출로를 확인하는 죄수처럼 보일 수 있었다. 이레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오늘은 제가 허락한 사람만 들이세요.”

“예.”

“황제 폐하께서 오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레나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결속식을 한 달 앞둔 성녀가 황제를 문밖에 세우겠다는 말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지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엘리시아는 열린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신이 직접 닫았다.

잠금쇠는 건드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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