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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 열일곱 번째 자리는 비어 있었다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8 17:15:39

그제야 명령이 내려갔다.

배수판이 열렸다.

폐병원 지하의 수위가 아주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수면이끼 군락의 생체값도 내려갔다.

생체낭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흰 뿔의 왕도 뒤에서 따라왔다.

그리고 그 둘보다 먼저, 폐병원 아래 잠들어 있던 회각충 군체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수분이 줄어들자 잠들어 있던 개체들이 하나씩 몸을 폈다.

수면이끼 농도가 낮아지며 깨어나는 것이다.

첫 번째 개체가 움직였다.

그다음에는 열 마리 가까이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회각충들은 저장구 깊은 곳으로 몰려가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테사가 자동관측기의 방향을 바꿨다.

“아래에 뭔가 있습니다.”

십일 년 전 군의무국 도면에는 없는 공간이었다.

회각충이 파낸 흙 아래에서 금속판 하나가 드러났다.

왕핵 유사반응은 없었다.

신성력도 없었다.

대신 수면이끼 뿌리가 금속판 아래로 깊게 내려가 있었다.

몇 분 뒤 첫 번째 회각충이 틈을 열었다.

그 아래에서 차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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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348. 열일곱 번째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제야 명령이 내려갔다.배수판이 열렸다.폐병원 지하의 수위가 아주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다.그와 동시에 수면이끼 군락의 생체값도 내려갔다.생체낭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흰 뿔의 왕도 뒤에서 따라왔다.그리고 그 둘보다 먼저, 폐병원 아래 잠들어 있던 회각충 군체에서 변화가 나타났다.수분이 줄어들자 잠들어 있던 개체들이 하나씩 몸을 폈다.수면이끼 농도가 낮아지며 깨어나는 것이다.첫 번째 개체가 움직였다.그다음에는 열 마리 가까이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그러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회각충들은 저장구 깊은 곳으로 몰려가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테사가 자동관측기의 방향을 바꿨다.“아래에 뭔가 있습니다.”십일 년 전 군의무국 도면에는 없는 공간이었다.회각충이 파낸 흙 아래에서 금속판 하나가 드러났다.왕핵 유사반응은 없었다.신성력도 없었다.대신 수면이끼 뿌리가 금속판 아래로 깊게 내려가 있었다.몇 분 뒤 첫 번째 회각충이 틈을 열었다.그 아래에서 차가운 공기가 올라왔다.그리고 자동관측기 온도가 갑자기 떨어졌다.오스카가 오래된 폐병원 건축기록을 찾아냈다.병원이 세워지기 전 그 자리에는 다른 시설이 있었다.백각 관측사업 초기의 지하실.용도란에는 아주 짧게 적혀 있었다.‘왕핵 소거 후 생체 변화 관찰실.’엘리시아가 화면을 응시했다.회각충이 금속판 아래로 하나둘 내려가기 시작했다.지하 깊은 곳에서 미세한 생체 반응이 연이어 켜졌다.하나가 아니었다.수십 개였다.그리고 그중 가장 큰 반응 하나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폐병원은 수면이끼 저장지로 끝나는 곳이 아니었다.십일 년 전 사람들이 회각충을 가져와 실험하기 훨씬 전부터, 팔십 년 전 백각 관측사업이 소거 뒤 살아남은 생물들을 지하에 모아두던 장소였다.할런 밀러의 마지막 전신을 읽은 뒤, 세레나는 곧바로 제4광맥 격리실로 가지 않았다.밤새 황실 조사관 숙소의 작은 탁자 위에는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자료가 펼쳐져 있었다. 하나는 일곱 해 전 할런이 기억하는 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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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웃음이 지나갔다.성벽 밖에서 마물이 움직이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웃을 수 있었다.그 웃음 때문에 위험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하루 종일 공포만으로 버티지는 않았다.해가 완전히 진 뒤 생체낭의 왕핵 유사반응은 거의 사라졌다.남은 것은 아주 약한 신성 잔류와 황제계 닻 흔적, 그리고 자체 생체 순환뿐이었다.십일 년 동안 장치 안에서 맡았던 완충 기능은 사실상 끝난 셈이었다.테사는 밤 관측판을 정리하면서 말했다.“내일쯤이면 외부 잔류가 거의 없어질 겁니다.”하겐이 물었다.“그러면 죽나?”“모릅니다. 기록상으로는 분해된다고 했습니다.”“균열로 떨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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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대형 가짜 왕핵 실험에 관여한 부서들의 원본 폐기명령과 보존명령을 전부 따로 보관해주세요. 서로 섞어서 하나의 사건으로 정리하지 말고요.”“그렇게 하겠습니다.”“그리고 생체낭을 회수하겠다는 요청이 황실에서 나오면 일단 보류해주세요.”칼릭스가 이유를 묻지 않고 먼저 확인했다.“현재는 로스테 관할 밖 북부 지맥구역입니다.”“네. 무엇보다 회수하려고 사람이 가까이 가는 순간 흰 뿔의 왕과 같은 구역에 들어갑니다.지금은 관측만 하는 게 낫습니다.”“동의합니다.”잠시 후 칼릭스가 한 가지를 덧붙였다.“엘리시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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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균열 가장자리에서 생체낭이 멈췄다.외피가 한 차례 크게 수축했고, 내부에 남아 있던 왕핵 유사반응이 빠르게 낮아졌다.무언가를 내보내는 것처럼 보였다.테사가 측정값을 읽다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왕핵 잔류를 배출합니다.”대형 가짜 왕핵 안에서 십일 년 동안 흡수했던 것 중 일부가 균열 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그 순간 흰 뿔의 왕이 움직였다.왕은 생체낭을 향해 가지 않았다.그 아래로 스며드는 잔류를 따라 균열 가장자리까지 한 걸음 가까워졌다.그리고 흰 뿔을 낮췄다.로스테가 며칠 동안 여러 번 본 소거 행동과 같았다.왕핵 유사반응이 조금씩 사라졌다.생체낭은 그동안 계속 내부 잔류를 내보냈다.

  • 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344. 모르는 걸 하나로 우기지 않는 명철

    그 차이는 중요했다.생체낭이 고통받는 동물이나 사람을 그대로 봉인한 것이라면 구조 문제로 즉시 바뀌지만,현재 자료상으로는 조직을 배양해 만든 인공 생체재료에 가까웠다.그렇다고 함부로 파괴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십일 년 동안 대형 가짜 왕핵 안에서 왕핵·신성·황제계 잔류를 흡수했고,지금은 스스로 대사까지 하는 상태였다.테사가 원격 생체값을 비교한 결과, 내부에는 아직 단순하지만 독립된 순환이 있었다.박동이라고 보였던 것도 심장이 아니라 외피 안쪽 액체를 밀어내는 수축이었다.“생각하거나 기억하는 구조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신경반응이 없어요.”하겐이 물었다.“그럼 그냥 움직이는 주머니라고 봐도 되나?”

  • 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343. 번식체가 아닌 완충재라는 진실

    대형 가짜 왕핵에서 빠져나온 작은 생체가 북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뒤에도 로스테는 그것을 ‘알’이나 ‘새끼’라고 부르지 않았다. 외형만 놓고 보면 그렇게 오해하기 쉬웠다. 둥근 주머니 같은 몸 안에서 일정한 박동이 반복됐고, 외부 자극에 반응해 방향까지 바꾸고 있었으니 살아 있는 개체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십일 년 전 실험기록에서 그 구조는 번식체가 아니라 왕핵·성녀·황제계 잔류가 한꺼번에 흔들릴 때 과부하를 대신 흡수하도록 만든 완충 생체재료로 분류돼 있었다.테사는 밤새 복원한 설계도를 아침 회의탁자 위에 펼치며 가장 먼저 그 점부터 확인시켰다. “독립 생체로 분화할 수 있다는 문장 때문에 번식체처럼 읽히지만, 적어도 원 설계에는 생식기관이나 신경핵을 만드는 과정이 없습니다. 자율대사가 생길 수 있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장기간 에너지를 받아먹다가 스스로 순환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단순한 주머니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경고였던 것 같습니다.”하겐은 북부 이동선을 표시한 지도와 설계도를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그럼 저게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설명됩니까?”“아직은 아닙니다. 다만 무작위로 움직이는 건 아닙니다.”대형 가짜 왕핵이 있던 지맥 관문을 벗어난 생체낭은 눈밭을 직접 굴러가거나 기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하의 얕은 균열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몸이 스스로 땅을 파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 왕핵 과부하를 흡수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답게 잔류가 강한 틈을 찾아가면서,말랑한 외피가 지맥 사이의 빈 공간을 따라 밀려가는 방식이었다.흰 뿔의 왕은 그 이동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잡아먹으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보호한다고 부를 근거도 없었다.하겐은 전날부터 나온 추측들을 회의록에서 전부 지우게 했다. “왕이 새끼를 지킨다느니, 자기 알을 찾았다느니 그런 말은 성벽 위에서도 금지합니다. 확인 안 된 얘기 한 번 돌기 시작하면 오후엔 왕이 성녀님을 납치하러 왔다고 바뀝니다.”엘리시아는 말없이 그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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