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흑갑 기사의 정체는 한 사람의 얼굴로 끝나지 않았다.
오래된 시스템이 만들어낸 역할이었다.
레나르트는 그 역할을 오래 입었던 사람 중 하나였고,
마르텐은 스스로 그 역할을 다시 가져온 사람이었다.
마티아스는 여러 번호 부품을 이어 붙여 새벽회 작전에 사용했고,
그 이전에도 다른 착용자와 회수자가 있었을 것이다.
0번 개방안은 평의회에 바로 올라갔지만, 표결 전에 반대의견이 먼저 쏟아졌다.가장 큰 문제는 북쪽 검은 원 안에 있는 대형 백각종들이었다.귀환회랑을 열 경우 흰 뿔의 왕이 북쪽으로 들어가는 대신,동면 중인 다른 성체들이 남쪽으로 나올 수도 있었다.자연 지맥통로라는 사실은 양방향이라는 뜻이기도 했다.테사는 그 위험을 숨기지 않았다.현재 북쪽 개체들은 동면 상태에 가깝고 0번 안쪽 지맥 반응도 낮기 때문에당장 남하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차단문이 열리면 환경이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두 번째 문제는 흰 뿔의 왕이 아예 가지 않을 가능성이었다.가짜 왕핵과 오래된 왕핵 잔류가 계속 남아 있으면 열린 길보다 먹이가 강한 쪽을 선택할 수 있었다.세 번째는 새벽회였다.0번의 존재를 그들이 모르고
왕을 죽이는 것과 가두는 것 사이에 처음으로 세 번째 전술적 선택이 생겼다.신이 보장해준 길도 아니고, 성공이 확정된 기적도 아니었다.사람이 만들어놓은 장애물을 걷어내고, 그 뒤의 결과를 감당하는 선택이었다.0번 귀환회랑의 현재 상태를 확인하는 일은 황실 기록과 로스테 자료만으로 끝나지 않았다.북쪽 산맥 안쪽은 지도 자체가 오래됐고,사람이 직접 들어가 확인하는 데 며칠이 걸릴 수 있었다.압축된 시간 안에서 가장 먼저 쓸 수 있는 것은 백각종의 이동 흔적이었다.테사는 13번 역할이 풀린 뒤 흩어진 백각수 유생 가운데 북쪽으로 향한개체들의 경로를 다시 불러왔다. 대부분은 흰 뿔의 왕과 가짜 왕핵 주변을 맴돌았지만,네 마리만 다른 길을 골랐다. 그들은 먹이점이나 수확기 쪽으로 가지 않고북동쪽 능선을 넘은 뒤, 0번 지도와 겹치는 지맥 홈을 따라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0번 지도 끝에서 잡힌 여러 백각 대형종 반응이 처음부터 ‘또 다른 왕들’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테사는 새벽까지 세 차례나 생체값을 비교한 뒤, 현재 로스테 서쪽에서 움직이는 흰 뿔의 왕과 북쪽 검은 원 안의 반응들이 겉보기에는 비슷해도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고했다. 로스테의 왕은 지맥을 움직일 때마다 주변 왕핵 잔류를 크게 흔들었고, 뿔과 체내에서 소거 작용이 동시에 나타났지만, 검은 원 안의 생체들은 왕핵 잔류를 지우는 반응이 거의 없었다. 몸집은 일반 백각수보다 훨씬 컸고 성체임은 분명했지만, 왕이라 부를 만한 소거 중심체가 아니라 장기간 동면에 가까운 상태로 머물러 있는 대형 백각종 무리에 가까웠다.엘리시아는 테사의 설명을 끝까지 들은 뒤 지도에 붙어 있던 임시 명칭부터 수정하게 했다. “다른 왕이라고 쓰지 마세요. 지금 확인된 건 대형 백각종 세 마리 이상, 그리고 현재 활동 없음 정도죠?”“예. 개체 수는 더 있을 수도 있지만 깊이가 너무 멀어서 정확하지 않습니다.”“그럼 그것만 남기죠.”하겐은 0번과 로스테 사이의 거리를 재며 물었다. “마르텐 메모대로라면 지금 왕을 저쪽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는 뜻인가?”테사는 그 질문에도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0번이 길인지 시설인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현재 지도에서 검은 원 안쪽은 산맥과 지맥단층이 겹쳐서 일반 사람이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7번 전용지도에는 로스테에서 북부 관측지, 중앙고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0번까지 하나의 선이 이어져 있습니다. 회수선과 반대방향입니다.”“7번은 가져오기 위한 것, 0은 돌려보내기 위한 것.”베른하르트가 마르텐의 메모를 읽었다.그 문장만 보면 역할은 단순했다. 백각종을 관측지로 데려오는 회수선이 7번이라면, 관측이 끝난 개체를 다시 북부 깊은 곳으로 보내는 길이 0번이라는 뜻이었다. 문제는 팔십 년 동안 그 복귀선이 실제로 사용됐다는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오스카가 백각 관측사업 초기 문서를
흑갑 기사의 정체는 한 사람의 얼굴로 끝나지 않았다.오래된 시스템이 만들어낸 역할이었다.레나르트는 그 역할을 오래 입었던 사람 중 하나였고,마르텐은 스스로 그 역할을 다시 가져온 사람이었다.마티아스는 여러 번호 부품을 이어 붙여 새벽회 작전에 사용했고,그 이전에도 다른 착용자와 회수자가 있었을 것이다.‘검은 기사’라는 하나의 전설 뒤에 여러 사람의 선택과 서로 다른 책임이 숨어 있었다.그 구조를 밝히는 순간 누군가 한 명을 악마로 만들어 모든 죄를 넘길 수는 없게 됐다.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수사를 어렵게 만들면서도 더 정확하게 했다.해가 밝아오기 전 흰 뿔의 왕은 로스테 서쪽 왕로 끝에서 멈췄다.침전실 압력이 폐기수로를 통해 아주 조금씩 빠져나가면서도시 안쪽에서 올라오던 왕핵 잔
마르텐을 강제로 제압하면 철문 앞에서 몸싸움이 벌어진다.그가 마지막 장치를 이미 일부 풀어놓았을 가능성도 있었다.하겐은 무조건 붙잡으라고 명령하지 않고 현장 시설기사에게 물었다.“철문을 저 사람이 아니어도 열 수 있나?”“기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다만 지금은 안 여는 쪽이 낫습니다.”“닫힌 상태를 유지하려면?”“7번 인증판을 분리하면 됩니다.”마르텐이 바로 말했다.“분리하면 침전실 압력이 올라갑니다.”테사가 수치를 확인했다.거짓은 아니었다.7번 기본판은 이미 문에 연결돼 있었고,
마르텐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왕이 여기까지 오고 있습니까?”“당신이 확인할 사항이 아닙니다.”“오고 있군요.”그는 고개를 숙여 인증판을 보았다.“그럼 시간이 없습니다.”부대장이 한 걸음도 가까이 가지 않은 채 말했다.“무엇을 하려는지 설명하십시오.”“침전실을 엽니다.”“왜?”“안에 있는 걸 왕이 지우게 해야 합니다.”테사와 하겐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