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수술 가운을 벗고 당직실에 돌아왔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인지라 사방이 조용했다. 몇 분 째 시현의 벼려진 메스가 손끝을 두드리고 있었다. 시침 소리 대신 메스가 피부를 툭, 툭 건드리는 소리. 정적 속에서 몇 번이고 메스 소리가 흩어졌을까. ‘미친 짓이야.’ 반역죄였다. 들키면 사형이다. ‘금방 잊혀질 거야. 잠깐 특이한 사람을 만나서 그런 거겠지.’ 칩을 빼버린 것도 단순한 충동이자 해프닝이었다. 도희의 감정 제어 칩까지 없애버린 건,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저 더 보고 싶어서. 그 눈빛이, 더 살아움직이는 걸 보고 싶어서. 망할 칩 따위가 도희를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목줄을 풀어주면 어떻게 될지 흥미롭기까지 했다. 도희의 저 눈빛이 폭발하면 어떻게 될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상을 했다. 그리고, 무언가가 틀어졌다. 시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그 안에서 이성의 막이 찢기듯 흔들렸다. “아…….” 눈에 닿지 않는 미소였다. -감정 수치 92%. 안정화 필요합니다. 동시에 드론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또 에러가 났다고……?” 당직실로 드론이 날아들며 경고음이 울렸다. -대상 0075. 감정 초과. 제어 불가. 안정화 프로토콜 가동합니다. 익숙한 기계음. 시현은 그 음성을 향해 천천히 총을 들었다. 탕- 한 번, 두 번. 확실히 하겠다는 무언의 태도. 망설임도 없었고 경고도 없었다. 드론이 폭발하며 공기 중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드디어 시현의 손끝을 두드리던 메스가 멈췄다. 시현은 목을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걷었다. 도희를 억누르고 시현을 묶어두던 얇은 칩. “에러 통제하느라 고생 많았어.” 그가 속삭였다. “이제 꺼져.” 날선 메스가 거침없이 피부를 갈랐다. 순간의 고통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피에 물든 손끝이 칩을 움켜쥐었다. 치익- 피와 기계음이 동시에 터졌다. 억눌러졌던 감정의 댐이 터지는 소리였다. 정제되지 않은 분노, 혼란, 광기, 쾌락, 충동. 목 뒤에서 그 모든 것이 붉게 흘러내리며 흰 가운을 적셨다. “안녕.” 그의 시선이 거울을 향하고 도희를 향했다.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검붉은 혈흔. 지금, 감정을 가진 병기가 세상에 풀려났다. *** 다음날, 시현은 다시 도희의 기록을 살폈다. 그러다 문득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N구역?” 어제는 분명 M구역 임무 수행 중이었는데. 하루 만에 근무지가 바뀐 것이다. ‘뭐야, 이게?’ 시현이 입술을 꾹 물었다. 다른 동료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다시는…… 안 오는 건가.’ 처음으로 같은 ‘에러’를 만났다. 내심 기다렸는데. 환자가 또 다쳐서 오는 건 좋은 일이 아니지만, 시현은 다친 도희의 모습마저도 눈에 거슬렸다. 그 가시 같은 거슬림이 목을 찔렀다. 감정 제어 칩을 없애버려서 그런 건지, 이상한 욕망이 마구 들끓는 기분이었다. 세상의 채도가 진해졌다. 그 파도 속에서 시현은 더욱 거침이 없어졌다. 시현은 모니터를 두드렸다. -근무지 변경 신청서. 섹터 2 M구역 제 4병동 외과 군의관 대위 백시현. 요청 변경지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현 근무지 : 섹터 2 M구역. 희망 근무지 : 섹터 2 N구역. 사유는……. 사유란에 도달한 시현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빠르게 타자를 쳤다. -사유 : 지속적 교차 배치를 통한 유연성 확보와 N구역과의 통합 작전으로 인한 상호 시너지 발생 기대. 표면상 완벽한 논리였다. 흠 잡을 곳도, 상부에서도 통과시켜줄 만한 빛깔 좋은 명분. 군더더기 없는 공문이었다. 그러나 시현의 속은 그 지루하기 그지없는 공문 데이터 쪼가리보다 더 깊고, 더 어두웠다. 오직 한도희가 이유였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전송 실패. Error Code : 403-BLOCKED.N7 접근이 제한된 사용자에 의해 해당 구역 배치가 차단되었습니다. 해당 요청은 자동으로 기록 및 감시 대상에 포함됩니다. ‘뭐야?’ 누군가 눈치챘다. 다 눈치채고서 미리 시현의 변경 요청을 막은 것이다. 설마 싶어 다른 구역으로 요청을 해보았지만, -현 근무지 M구역, 희망 근무지 A구역이 맞습니까? 문제가 없었다. 누군가 이미 알고 손을 써서 시현이 ‘그 여자’가 있는 구역에 발도 못 들이도록 조치한 것이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하루만에 바뀐 도희의 근무지, 요청 거부된 시현의 근무지 변경. ‘누가 나와 한도희 그 여자가 접촉하지 못하게 막고 있어.’ 시현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번졌다.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지.’ 그게 시현이 일으키는 오류였다. *** “본부장님, 요청하신 한도희 요원 근무지 변경 완료했습니다.” “그래, 위치 추…… 아, 추적기 망가졌지…….” 소연은 보고서를 받아들며 한숨을 쉬었다. 급한 불은 껐다. 하지만 잔불이 남아 번질 수 있는 상황. 이미 번졌을지도 모르고. “N구역 온 거 확실하지?” “네. 확인됐습니다.” “제일 가까운 병동에 바로 한도희 요원 추적기 삽입 진행시켜. 감정 제어 칩도 추가 삽입하라고 하고. 명분은 감정 통제 강화.” “알겠습니다.” N구역 병동에 명령이 내려졌다. 감정 제어 칩과 추적기를 재삽입하라는 소연의 명령. 결코 흔한 지시가 아니었다. 강력한 통제력을 갖고 있는 칩은 두 개씩이나 삽입할 필요가 없었다. 있었다 해도, 죽었다. 하나 이상의 칩을 심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인물들이었기에. 소연은 왠지 모를 초조함에 입술을 물어뜯었다. 도희는 돌아왔고, 다시는 시현과 만나지 못할 거고, 추적기와 칩도 다시 심을 거다. 아직 눈에 띄는 돌발 행동도 하지 않고 있고 심지어 도희의 감정 수치가 계속 안정되고 있다. 모든 게 소연의 뜻대로 흘러가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마음에 걸리는 건 그 7분. 시현과 도희가 접촉한, 고작 그 7분의 시간.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감도 안 잡혀 소연은 그야말로 경계 상태였다. 소연은 모니터를 두드렸다. 한 번의 명령어를 더 실행했다. -섹터 2 M구역 외과 군의관 대위 백시현. 잠재적 반역자 등급 격상. 탁- 여차하면, 둘 다 사살이었다. *** 시현은 혼자 고민 중이었다. 다시 못 만난다, 라. 그딴 건 시현의 머릿속엔 없다. 시현은 천천히 머릿속 사고 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N구역과 M구역의 거리, 혹은 그 보안을 뚫고 근무지를 변경할 수 있는 확률. 모든 생각의 끝에는 도희가 있었다. 다시 만나보고 싶은데, 무슨 수로 도희가 있는 N구역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시현의 높은 지능으로도 어려운 문제였다. SMD와 육군, 국가정보국 모두 들키지 않아야 했다. 특히 국가정보국. 엄청난 정보력과 보안을 가진 곳인데, 그곳을 상대로 인터넷을 뚫어낸다는 건 시현이라 해도 불가능한 문제. 시현은 천천히 메스를 매만졌다. 도희의 피부를 가른 그 메스였다. ‘여기서 N구역까지의 거리는…… 약 5km.’ 충분히 갈 수 있다. 들키면 사형이다, 하지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 시현의 가슴 주머니에 메스가 꽂혔다. 칩을 빼내서 그런가? 더욱 충동적이고, 거침이 없다. 도희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관심 없다. 시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움직였다. 생각을 끝내자 그는 병동 안을 망설임없이 걸었다. “선생님, 어디 가세요?” “G구역. 받아와야 할 게 있습니다.” “같이 가시죠.” “이도준 중위는 실험체 검수 한 번 돌려주세요.” 보조의가 같이 가자며 따라붙었지만 시현은 귀찮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보조의는 움찔했다. 평소에도 차가운 시현이었다. 말수 없고, 냉철하고. 의사들 사이에서 냉혈한으로 불리던 시현이었는데.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그의 눈빛은 차갑던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다, 다녀오세요.” 이윽고 보조의 옆을 지나친 시현의 창백한 손에 뭔가가 들려 있었다. 신분증이었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N구역으로 향하는 시현의 발걸음은 여전히 거침없다. 시현은 조금 놀라고 있었다. 그 여자 하나 보겠다고 무작정 남의 구역, 그것도 허락되지 않은 금지구역으로 간다니.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생생하게 감정이 느껴지는 미묘한 감각이 재미있었다. 설렘, 긴장, 흥분. 차례대로 시현을 스쳐 지나간다. 의료용 차량을 몰고 N구역 앞에 도달한 시현의 행동은 물 흐르듯 빨랐다. “안녕하십니까. 군의관 이도준 중위입니다.” 시현이 뻔뻔하게 가짜 신분증을 내보이며 말했다. “생체 안정화 키트가 필요합니다.” “저희 쪽에서는 보고가 올라온 게 없습니다.” 눈앞의 보안 요원이 시현을 막아서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긴급 수술입니다.” “그건 승인이 있어야 합니다.” 예상 외로 단호한 요원의 태도에 시현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그 여자를 만나고 싶다면 뚫어버려라. “긴급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 환자 살리는 일에 언제 일일히 승인을 받습니까?” “보고는 올리셨습니까?” 시현의 눈빛이 빛났다. 거짓을 위해 꾸며낸 눈빛이지만, 칩이 사라진 사람의 눈빛은 진실로 포장되었다. “좋습니다. 지휘부 연락 받고 싶으면 지금 하세요. 그 사이 환자 죽으면 N구역 쪽에서 책임져야 할 겁니다.” 시현의 말은 날카로웠다. 사무적이고, 차갑지만 동시에 위협적이었다. “…….” 시현의 눈은 단번에 요원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모를, 아주 작은 흔들림이었다. 결국 그는 시현에게 긴급 카드키를 내밀었다. 최대한 빨리 나오라는 말과 함께. 카드키를 받아든 시현이 피식 웃었다. 내 거짓말이 이토록 완벽하단 말인가?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보안 장치가 풀렸다. 침투, 또다시 침투. 완벽한 보안 시스템은 괴물 군의관 하나의 침투에 심장부까지 뚫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간단히 N구역 안으로 들어선 시현은 자연스럽게 행정관 모니터를 뒤졌다. 아무도 그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 간호사들, 의사들, 병동 관계자들 모두 그가 백시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모니터에서 시현은 도희의 기록을 찾아냈다. 조용한 암살자처럼, 그는 보면 안 되는 정보들을 너무나도 능숙하고 쉽게 찾아내고 있었다. ‘한도희…… 오늘 수술이 있어?’“놀이공원 가고 싶어.”“놀이공원? 갑자기?”거처에서 조용히 총기를 분해하다 다시 조립하기를 반복하던 도희였다.철컥, 철컥, 탁.다시 탁, 탁.절그럭.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도희가 만지는 총열과 그 부품들의 소리만 침묵을 채웠다.그녀는 혼자 있거나 심란할 때 강박처럼 총기 분해를 하곤 했다.모든 걸 풀어헤쳤다가 하나 둘 역순으로 조립하는 게, 마음을 정리해 나가는 것만 같아서였다.그런 도희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맥락도 없고 개연성도 없는 놀이공원.옆에서 메스를 닦던 시현도 어리둥절해 소독약을 묻힌 거즈를 툭 떨어트렸다.“응, 놀이공원. 가서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싶어. 롤러코스터도.”말이 안 된다는 걸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도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마지막 남은 총기 부품을 탁 쑤셔넣었다.철컥,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도희의 작은 목소리가 묻혔다.“못 타는 건 나도 알아.”하지만 강화인간인 시현의 귀에 그게 안 들리면 더 이상한 일이었다.***그날 밤, 시현이 앉은 모니터에는 좌표와 화살표가 빼곡했다.마냥 떠돌아다니던 시현에게 새로운 목적지가 생겼다.‘남쪽에 하나, 이 근처에 하나.’그가 찾는 것은 오늘 도희가 무심코 던졌던 그곳이었다.꿈과 환상의 나라.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다 죽어버려 콘크리트 황무지가 된 이곳에서 꿈과 환상이라니.그러나 시현은 손을 계속 움직였다.찾아낸 건 두 군데.은신처 바로 옆에 놀이공원이 하나 있었지만, 혁명군의 기지로 쓰이고 있었다.하루가 멀다 하고 폭탄 소리가 펑펑 터지던 곳이었다.거긴 패스.다른 곳은…….바쁘게 돌아다니던 시현의 눈동자가 한 점에서 멈췄다.점선과 파란 위치 아이콘이 가리키는 곳, 그 아래 숫자는 17min.한강을 건너면 보이는 곳이었다.‘여기다.’근처에는 호수와 강이 있고 복합쇼핑몰과 병원들까지.새로 거처를 잡을 후보지도 차고 넘치는 곳.‘군부대는 없지만…… 폐벙커와 기지가 많아. 여기서는 의약품을 챙길 수 있고 여기서는 생필품
시현과 도희는 산책 중이었다. 날씨가 좋았다. 잿빛이 된 거리와 달리 하늘은 쾌청했고 바람은 시원했으며 햇빛은 적당히 따뜻했다. 도시가 망가지든 말든, 나무와 풀은 제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낙엽이 굴러다니기 시작했고 단풍은 이파리를 따라 제 영역을 넓혔다. “단풍 봐, 벌써 날씨가 시원해졌나 봐.” “예쁘다.” “그치? 진짜…….” “단풍이겠냐.” 시현이 픽 웃으며 도희의 뺨에 입을 맞췄다. “너.” 도희의 얼굴이 단풍을 닮아갔다. “가, 갑자기 뭐래…….” “싫어?” 그리고 언제나 시현이 한 수 위였다. “싫으면…… 안 하고.” “누가 싫대?” “그럼, 좋아?” “……응.” 도희의 대답이 시현의 예상보다 훨씬 더 느리게 돌아왔다. “방금은 당황했을 뿐이야. 네가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해서.” 도도한 고양이가 오늘은 삐끗, 헛발질을 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뻔뻔하게 그의 팔에 팔을 걸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여전히 세상은 고요하고 폐허는 말없이 둘을 외면했다. “근데 여기 호수, 괜찮다. 벚꽃 피면 진짜 예쁠 것 같아.” 도희가 말했다. “다음 봄에도 오면 되지.” 다음 봄이라는 그 말에 도희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시현의 그 무거운 말 앞에 모두 삼켰다. 도희는 그저 시현의 손을 더 꽉 붙잡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도희…….” 시현이 도희를 부르려다 멈췄다. 불길하면서도 기괴한 소리에 시현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드론이야.” 시현의 목소리에 경계가 서렸다. 작게 소리가 들린 걸 보면 아직 저놈은 우릴 발견하지
“아으, 여기면 되겠지? 거리도 나쁘지 않고, 인터넷 되고.”버려진 한 기지.민기는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콜록거렸다.몇 시간을 돌고 돌아 드디어 인터넷이 되는 기지를 찾았다.근무 대기 신청을 해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 무기들을 챙겨 그는 정보국을 몰래 탈출했다.삼엄한 경비와 두꺼운 장벽이 버티고 있었지만 민기는 어찌저찌 그 장애물들을 전부 통과했다.사실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뭔가 부서졌던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고함을 쳤던 것 같기도 한데.결국 남은 건 팔에 묻은 콘크리트 가루와 흙먼지들.“아, 이거 귀한 건데 기스 났네. 이게 얼마짜린데, 하…….”탈출하면서 비싼 기기에 흠집도 났다.투덜거리던 민기가 대충 말아둔 모포 더미에 풀썩 주저앉았다.사사로운 정의감이나, 목숨을 건 탈출 따위의 같잖은 헛소리는 민기의 것이 아니었다.죽기를 각오한 건 맞지만, 그런 진지함을 가지고 이 낡아빠진 폐기지로 온 거라면 너무 우스울 것 같았다.“어디 보자…… 전원 버튼이…….”수석 해커를 괜히 단 그가 아니었다.기계라면 장난감 가지고 놀 듯 굴릴 수 있는 민기였다.OFF에서 멈춰 있던 글자가 ON으로 바뀌는 순간.-환영합니다. 재부팅을 시작합니다.이것저것 전선을 연결하고, 프로그램을 깔아놓자 그제야 민기는 거울을 보았다.거울에 쌓인 두껍던 먼지가 민기의 손길에 후두둑 떨어지자 그는 천천히 금속탐지기를 들었다.직접 해킹하고 개조한 탐지기였다.탐지기로 자신의 몸을 쓸어내자 탐지기가 곧 울렸다.목덜미에서 징징대던 탐지기는 귀 뒤로 올라가자 미친 듯이 울어재끼기 시작했다.정보국 요원이었던 민기조차도 몰랐던 칩의 위치.‘거기구나. 귀 뒤에.’거울 속 민기가 씩 웃었다.곧 그는 칼을 들었다.라이터로 칼을 소독한 후, 그는 고른 한숨을 내쉬었다.무겁지 않은 한숨이었다.“괜찮아.”내 궁극의 반항은 내 몸을 해킹하는 것.이제 돌아갈 수 없었다.그걸 잘 아는 민기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거침없이 칼로 피부를 도
국가정보국 심리연구본부.소연의 사무실.손이 초조하게 바빴다.키보드를 두드렸다가도 패드를 들었다가, 손톱을 딱딱 물었다.-1중대 2소대 전멸. 확인 생존자 없음. 수배자 시신 확인 실패.군부대들이 가져온 건 두 연놈의 시신이 아닌 차가운 실패의 데이터.그 둘의 허튼 총질에 엘리트 부대원들이 죄다 사냥당한 것이었다.‘아무리 그래도 피해는 입힐 줄 알았는데.’시신은커녕 피해를 입혔다는 보고조차 없었다.소연은 더 이상 무식한 방법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손톱을 찢던 소리가 일순간 멈췄다.본부가 적막에 뒤덮였다.‘안 되겠다. 무력으로는 감당 안 돼.’소연의 결론에서는 되찾은 평정이 짙게 깔렸다.보고서에서는 단순히 실패만 적혀 있던 게 아니었다.‘타깃 1이 먼저 공격을 개시하고, 타깃 2는 그 소리에 유인된 아군들을 후처리한다. 살상보다는 기능 상실 유도. 타깃 1이 간혹 성급하게 행동하나 타깃 2는 강화된 시야로 아군 공격을 차단하고…….’백시현, 한도희 그 둘의 공조는 소대 하나쯤은 전멸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폭탄은 약물의 독성을 퍼트리고 약물은 화약을 터트리는 이치.‘그러니 내가 뭘 해야겠어. 머리를 써야지. 둘이 다시는 못 만나게. 그게 힘으로 되겠어?’그것이야말로 소연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백시현, 한도희 둘 정보 다 긁어와. 쓸데없는 정보여도 돼. 입대하고 활동 시기까지 전부 다 싹싹 모아서 가져와.”소연이 명령을 내릴 때마다 말끝에 차가운 한숨이 뱉어졌다.그녀의 말에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요한 살의는 여전히 눈앞의 실패 보고서를 쏘고 있었다.소연의 입술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터졌다.이런 패배를 안겨준 놈들은 처음인지라 분노와 흥분이 뒤엉켜 난리를 부렸다.“최대한 빨리 드리겠습니다.”“그래.”두 수배자 때문에 전국이 비상사태에 돌입해 무장한 군대가 서울과 그 근방을 장악했다.이미 사살 당한 의심 인물들만 스무 명이 넘었다.위급한 상황이란 걸 너무나도 잘 아는 팀원들은
“으아악!”퍽-“아악!”“……허.”도희가 지켜보며 헛웃음을 지었다.그녀가 더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백시현, 그의 살육이 본색을 드러냈다.마취제와 독이 섞인 주사기를 목에 꽂아넣어 적의 신경을 끊었다.허리춤에서 꺼낸 수혈 튜브로 목을 조이며 숨을 틀어막고, 그 순간 뒤에서 기습하려던 다른 적을 가뿐히 피하며 메스로 동맥을 갈랐다.“컥! 여, 여기! 도와줘!”시현의 살인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마음껏 비명을 지르고 고통에 몸부림칠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그리고 그 시간 속 인간은 천천히 시드는 것이었다.피의 분수 한가운데 이질적인 그의 무표정이 차가운 죽음을 내렸다.손끝마다 둔탁한 총소리를 내는 도희와 사뭇 달랐다.정확하게 어딜 노려야 사람이 죽는지, 어딜 찔러야 사람이 불구가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시현의 몸놀림은 최소화되고, 깔끔한 움직임 한 번에 피가 튀었다.관절이 무너지고 근육이 찢기며 피가 역류했다.“뭐야, 내가 할 게 없잖아.”도희가 총을 집어넣었다.총 대신 꺼낸 칼날에 흥미어린 도희의 미소가 비쳤다.시현의 도구는 치료도, 죽음도 구분하지 않았다.“억!”또 한 줄의 동맥이 잘려나갔다.탕-튀어나오려던 마지막 비명은 도희가 가져가 버렸다.시현이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다면, 도희는 그저 파괴 그 자체였다.둘의 속도가 다르고 리듬도 달랐지만 단 한 번도 엇나가지 않았다.원래 그게 그들이 맞물리는 방법이라는 듯이.어느새 사방은 고요해졌다.바닥은 피로 질척거렸고 여기저기 급소가 잘려나간 시신들이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었다.먼지와 땀, 피가 섞여 공기가 불쾌하게 끈적거렸다.그러나 시현과 도희 둘 다 살갗 한 번 베인 흔적조차 없었다.완벽한 승리였다.쓰러진 적들의 시체를 하나, 둘 밟고 도희가 지나왔다.바람에 그녀의 옷이 펄럭였다.찢어진 군복과 옷이 길게 늘어져 휘날리고, 발목을 휘감았다.피와 살 위로 신성한 광기가 걸어왔다.“너 공주 같다.”“뭐?”도희가 귀를 의심했다.하지만 시현은
다음날 아침.도희의 시선이 조용했다.붉게 젖은 붕대로 향한 시선이 점차 확신으로 떠올랐다.“야. 나도 의술 배울래.”“뭐?”시현이 고개를 들었다.“너도 다칠 때가 있을 거 아니야. 너 혼자 치료하는 것도 무리일 거고. 나도 배워서 너 치료할 거야.”시현은 그 속에 숨은 진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그는 알면서도 괜히 물었다.“왜?”“너 다칠 수 있게 하는 것도, 고치는 것도 나 하나여야 되니까.”시현이 천천히 일어났다.시선은 완벽하게 도희를 조준하고 있었다.기괴하게 꺾인 사랑이 대답 안에 녹아들어 있었다.그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뜨거운 덩어리가 속에서 폐를 짓눌렀다.시현은 벌떡 일어나 자기 품 안에 도희를 옭아맸다.죽을 만큼 간절하게.“그거야. 그거야, 한도희.”그리고는 자비 없는 키스를 쏟아부었다.도톰하고 작은 입술을 물 때마다 도희가 움찔거렸다.부드러운 입술에 상처를 내면 도희는 시현을 더 꽉 끌어안았다.아픈 키스.도희가 좋아했던 열락.“도희야. 숨 막혀?”“조금.”그러나 시현은 배려해줄 생각이 없었다.“그럼…… 내가 네 숨까지 다 빼앗았다는 거지?”“뭐, 그렇지?”시현의 입꼬리가 솟았다.그 미소가 도희를 마취시킨 순간, 억센 힘이 그녀의 얼굴을 당겼다.도희의 숨이 턱 막혔다.시현 역시도 그녀의 입안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이 뚝 끊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런 건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