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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짖는 소리

Penulis: Jino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10-20 19:00:00

일요일 아침, 서아와 둘이 빵집에 가기로 했다.

해인은 밀린 빨래를 돌리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세탁기가 덜컹거렸다. 식탁에는 해인이 마시다 만 커피가 반 잔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마셨다. 식은 커피. 쓴맛이 혀 뒤에 오래 남았다.

"빵 사 오면서 우유도."

해인이 베란다에서 소리쳤다. 세탁기 소리를 넘어서.

"흰 우유. 서아 거 말고 큰 거."

"응."

"그리고 당신 거 소보로 말고 다른 거. 맨날 소보로만 먹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인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서아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겨 달라고 발을 내밀었다. 찍찍이를 붙여 주자 서아가 따라 했다. 찌익.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나는 가스레인지를 보았다. 꺼져 있었다. 문을 잠그고 손잡이를 한 번 당겨 보았다. 잠갔고. 서아가 옆에서 따라 했다. 잠갔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거울 앞에서 셋을 셌다. 서아가 옆에서 손가락을 폈다. 하나 둘 셋 많이.

문이 열렸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14층에서 타서 내려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흰머리를 짧게 자른 할머니. 누빔 조끼. 그리고 할머니 발치에 개 한 마리.

누런 털에 등 쪽만 조금 희끗한. 귀가 한쪽은 서고 한쪽은 접힌. 주둥이 둘레가 하얗게 센. 늙은 개였다.

서아가 내 다리 뒤로 숨었다. 바지 자락을 두 손으로 쥐고.

"……멍멍이."

"안 물어. 얘는 이빨도 몇 개 없어."

할머니가 웃었다. 개가 서아 쪽으로 코를 한 번 킁 했다. 서아가 바지 자락을 더 세게 쥐었다. 그런데 숨지는 않았다. 내 다리 옆으로 얼굴을 반만 내밀고 개를 보았다. 눈이 동그랬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서아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반은 숨고 반은 보고.

1층에서 문이 열리자 개가 먼저 나갔다. 천천히. 뒷다리가 조금 불편한 걸음으로.

단지 입구 벤치에 할머니가 앉았다. 개는 할머니 발치에 엎드렸다. 아침 햇볕이 드는 자리.

서아가 내 손을 끌었다. 벤치 쪽으로. 그러다 세 걸음쯤 앞에서 멈췄다.

"아빠. 서아 멍멍이 만지고 싶어."

"응."

"근데 무서워."

서아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둘 다 진짜인 얼굴로.

어젯밤이 떠올랐다. 시장의 시멘트 바닥. 노란 눈. 찢긴 귀 끝. 내 손등에 닿던 차갑고 축축한 코.

나는 벤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개에게서 한 걸음 반 떨어져서. 무릎을 보도블록에 대고. 할머니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만져 봐도 될까요."

"그럼. 얘는 사람 좋아해."

나는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말고 손등. 낮게. 개의 코 앞에 한 뼘 떨어뜨려서. 그리고 기다렸다.

개가 고개를 들었다. 코가 움직였다. 킁, 킁. 내 손등에 코를 댔다. 늑대처럼 차갑지는 않았다. 따뜻하고 말라 있었다. 늙은 코였다.

개의 꼬리가 바닥을 쳤다. 툭. 툭.

서아가 내 옆으로 왔다. 소리 없이. 그리고 내 옆에 똑같이 쪼그려 앉았다. 무릎을 보도블록에 대고. 타이츠 무릎에 흙이 묻었다.

서아가 주먹을 쥐었다. 작은. 그걸 내밀었다. 손등이 위로 가게. 내 손 옆에. 한 번도 가르쳐 준 적 없었다. 서아는 보고 있었다. 내가 하는 걸.

개가 서아의 주먹에 코를 댔다. 킁. 그리고 혀를 내밀어 한 번 핥았다.

서아가 얼어붙었다. 한순간.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기쁜 쪽으로.

"멍멍이가 서아 뽀뽀했어!"

할머니가 소리 내어 웃었다.

"애들 손이 달아서 그래. 과자 냄새 나서."

서아가 손바닥을 펴서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툴게. 손바닥 전체로 꾹꾹 누르듯이. 개가 눈을 감았다. 가만히 있었다.

"얘 이름이 뭐예요?"

"보리. 열네 살. 우리 영감 가고 나서는 얘가 나를 데리고 다녀. 아침마다 나가자고 문 앞에서 기다려."

할머니가 보리의 등을 쓰다듬었다. 손등에 검버섯이 몇 개. 손끝이 굽은.

"영감이 데려온 애야. 시장 앞에서 누가 박스에 넣어 놓고 팔던 걸. 나는 싫다고 했어. 개는 매일 봐야 되는데 누가 보냐고. 영감이 자기가 본다고 했지. 그러고 십삼 년을 봤어. 매일. 비 오는 날도."

할머니가 웃었다. 보리의 접힌 귀를 손가락으로 펴 주면서.

"영감 가고 나서 얘가 밥을 안 먹었어. 사흘. 문 앞에 엎드려서. 기다리더라고. 나는 얘한테 말할 수가 없잖아. 안 온다고. 그래서 그냥 옆에 앉아 있었어. 현관 바닥에. 사흘째 밤에 얘가 내 무릎에 턱을 올리더니 밥을 먹었어."

나는 할머니의 손을 보았다. 보리의 귀를 만지는.

"그 뒤로는 얘가 나를 봐. 매일."

"보리."

서아가 따라 했다. 그리고 개에게 말했다. 아주 진지하게.

"보리야. 서아는 두 살이야. 아니, 세 살."

"두 살 반."

"두 살 반이야."

보리가 꼬리를 한 번 쳤다. 툭.

빵집 가는 길에 파란 대문 집 담장 위에 치즈색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햇볕을 쬐며. 서아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냥이 출근!"

"응. 출근했네."

"냥이도 뽀뽀해?"

나는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아무 관심 없다는 얼굴로.

"……냥이는 뽀뽀 잘 안 해."

"왜?"

"모르겠어."

서아가 고양이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손등이 위로 가게. 담장이 너무 높아서 닿지 않았다. 고양이는 하품을 했다.

빵집에서 서아는 소보로빵을 골랐다. 계산대 앞에서 서아가 빵집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서아 멍멍이 뽀뽀했어요."

"어머, 좋았겠네."

"응. 보리야."

저녁에 서아가 해인에게 그 얘기를 다섯 번 했다. 식탁에서, 욕조에서, 이불 속에서. 멍멍이가. 서아 손. 뽀뽀. 보리. 열네 살. 할 때마다 조금씩 길어졌다. 다섯 번째에는 보리가 서아를 따라 빵집까지 왔다.

"보리가 따라왔어?"

해인이 물었다. 웃음을 참으며.

"응. 아니. 아빠가 손 이렇게 했어. 서아도 이렇게 했어."

서아가 주먹을 내밀었다. 손등이 위로 가게. 해인이 나를 보았다.

"……당신이 가르쳐 줬어?"

"아니. 서아가 봤어."

욕조에서 서아는 고무 오리를 물에 띄워 놓고 주먹을 내밀었다. 오리한테. 손등이 위로 가게.

"오리야, 킁 해 봐."

오리는 물 위에서 빙글 돌았다. 서아가 깔깔 웃었다. 해인이 욕조 옆에 쪼그려 앉아 서아 머리에 물을 부어 주며 웃었다. 나는 욕실 문간에 서서 수건을 들고 있었다. 김이 서린 거울에 우리 셋이 뿌옇게 비쳤다. 나는 세지 않았다. 김 때문에 셀 것도 없었다.

"아빠, 보리 내일도 있어?"

"아마. 할머니랑 아침마다 나온대."

"내일도 뽀뽀해?"

"보리가 하고 싶으면."

서아가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물방울이 속눈썹에 매달려 있었다.

"보리가 안 하고 싶으면?"

"그럼 안 해."

"그럼 서아가 기다릴게."

해인이 샤워기를 든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서아의 머리를 헹궜다.

서아는 곰 세 마리를 반쯤 부르다 잠들었다. 주먹을 쥔 채로.

서아를 재우고 나와서 식탁에 앉았다. 해인이 빨래를 개고 있었다. 수건. 서아 내복. 내 양말 짝을 맞추면서.

나는 그걸 보다가 말했다.

"우리 강아지 키울까."

해인의 손이 멈췄다. 양말 한 짝을 든 채로.

해인이 서아를 가졌던 봄이었다. 한강 둔치를 걸었다. 해인의 배가 막 불러 오기 시작할 무렵. 누군가 풀어 놓은 커다란 금빛 개가 해인에게 달려와 손을 핥았다. 주인이 죄송하다고 뛰어왔다. 해인은 괜찮다고,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개가 멀어지는 걸 보면서 말했다.

나 어릴 때 개 못 키웠어. 엄마가 새벽마다 시장에 나가서. 개는 누가 집에 있어야 된다고. 우리 애 걸으면 키우자. 꼭.

나는 말했다. 규정 확인해 볼게.

다음 날 관리 사무소에 전화해서 확인했다. 작은 개는 된다고 했다. 해인에게 말하지 않았다. 서아가 태어났다. 서아가 걸었다. 해인이 한 번 물었다. 나는 서아 조금 더 크면, 이라고 했다. 해인은 더 묻지 않았다.

미룬 이유를 나는 알았다. 규정 때문이 아니었다. 털 때문도, 소음 때문도 아니었다. 무서웠다. 매일 봐야 하는 무언가가 하나 더 생기는 게. 아프면 알아채야 하고, 말을 못 하니까 내가 먼저 봐야 하는. 서아 하나로도 매일 밤 숨소리를 세는 사람이었다. 나는.

확인의 왕은 확인만 하고 미뤘다. 삼 년을.

그리고 그 삼 년 사이에, 사 년이 끼어 있었다. 해인이 모르는.

해인이 양말을 내려놓았다.

"……당신이 먼저 그 얘기 하는 거, 처음이다."

해인이 웃었다. 잠깐. 정말로 좋아서 나온 웃음이었다. 나는 그걸 보았다.

그리고 그 웃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해인이 수건 한 장을 집어 반으로 접었다. 또 반으로. 모서리를 맞추면서.

"……지금은 말고."

"왜."

"강아지는 매일 봐야 돼."

해인이 수건을 개어 놓은 더미 위에 올렸다.

"밥 주고, 산책시키고. 아프면 알아채야 되고. 말을 못 하니까. 매일 거기 있어야 돼. 옆에."

"……"

"당신 요즘."

해인이 말을 멈췄다. 다음 수건을 집었다. 접지 않고 쥐고만 있었다.

"요즘?"

해인이 나를 보았다.

"……가끔 없어. 여기."

나는 대답하려고 했다.

있어. 여기 있어.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해인은 네 번 보았다. 식탁에서, 서재에서, 거실에서, 운동장에서. 내 눈이 없어지는 이 초를. 스톱워치로 잰 적도 있었다.

그럼 말해야 했다. 어디 가는지. 누가 거기 있는지. 사 년이 무엇이었는지.

나중에 말할게. 택시에서 그렇게 약속했다. 해인은 알았어,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나중이 언제인지, 나는 몰랐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는지도. 말하면 해인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도.

있다고 해도 틀리고, 말하지 않아도 틀렸다.

해인이 수건을 쥔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 앞에서.

멈췄다.

교문이었다.

반쯤 열린 철문. 입김들. 유난히 큰 하나.

기둥에 쪽지가 붙어 있었다. 투명 테이프로. 금들 옆에. 오답노트 한 장. 끝이 둥근 글씨.

쪽지 아래 흙바닥에 무언가가 찍혀 있었다. 둥근 자국 네 개와 그 앞의 작은 점들. 발자국이었다. 교문 앞을 한 번 지나간. 흙 위에 선명하게. 흘러서 남은.

가을이 그 자리를 피해서 쪽지를 붙인 모양이었다. 자국 둘레에 가을의 운동화가 조심스럽게 비켜 선 흔적은 없었다. 가을의 것은 흙에 남지 않으니까. 대신 쪽지가 딱 그 자국 위, 사람 눈높이에 붙어 있었다. 여기를 보라는 것처럼.

나는 초침을 보지 않았다. 읽었다. 빨리.

— 우진 아저씨.

— 늑대는 한참 있다 갔어요. 아저씨 가시고 나서도 불 옆에 계속 엎드려 있었어요. 제가 국을 한 그릇 떠서 바닥에 놔 줬는데 안 먹었어요. 냄새만 오래 맡았어요.

— 저는 솥 옆에 앉아 있었어요. 아저씨처럼. 한참요. 무서웠는데 좋았어요.

— 그러다 일어나서 통로 끝까지 걸어갔어요. 딸깍딸깍. 거기서 한 번 돌아봤어요. 저를요. 그리고 짖었어요. 한 번.

— 그 소리가 시장 끝까지 갔다가 돌아왔어요.

— 여기서 들은 첫 번째 남의 소리예요. 아저씨 목소리는 빼고요. 아저씨는 이제 남 아니니까.

— 그다음엔 없었어요. 아저씨처럼요.

— 교문 앞에 발자국 있어요. 아침에 금 그으러 왔다가 봤어요. 걔가 여기도 왔었나 봐요. 시장에 오기 전에. 저는 몰랐어요. 제가 여기 없을 때 누가 지나갔다는 거. 그래서 쪽지를 여기 붙여요. 아저씨 보시라고.

— 가을.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연필. 더 작게.

— 만질걸 그랬나. 모르겠어요.

손끝이 당겨졌다.

"……봐."

해인이 말했다.

수건을 쥔 채로. 목소리가 낮았다.

"방금도."

나는 해인을 보았다. 식탁. 개어 놓은 빨래. 내 양말 한 짝.

"이 초. 아니, 일 초 반."

해인은 스톱워치를 켜지 않았다. 휴대폰은 거실 소파에 있었다. 해인은 그냥 알았다. 칠 년 동안 내 얼굴을 본 사람이니까.

"……나중에 말할게."

해인이 한참 나를 보았다.

"알았어."

그 말은 택시에서와 같았다. 그런데 해인의 손이 수건을 꽉 쥐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지도록.

해인이 빨래를 마저 갰다. 말없이. 수건, 내복, 양말. 짝을 맞추고. 다 개고 나서 일어났다. 안방으로 가다가 문간에서 멈췄다.

"강아지 얘기."

"응."

"좋았어. 당신이 먼저 한 거."

해인이 들어갔다. 문을 반쯤 열어 둔 채로.

나는 식탁에 혼자 앉아 있었다.

첫 번째 남의 소리.

가을은 거기서 백 날 넘게, 이백 날 가까이 혼자였다. 제 발소리와 제 숨소리만 들으며. 가끔 내 목소리. 그리고 어제, 아니 가을의 날로는 며칠 전, 늑대가 짖었다. 한 번.

그 소리가 시장 끝까지 갔다가 돌아왔다고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먼저 사라졌으니까. 그래도 알 것 같았다. 멈춘 시장의 반투명한 지붕 아래로 굴러가는 소리. 셔터에 부딪혀 돌아오는. 가을이 솥 옆에 앉아서, 그 소리가 다 사라질 때까지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 년 동안, 한 번 소리를 들은 줄 안 적이 있었다. 도서관에 들어가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한밤중, 휴게실 소파에서. 아래층 어딘가에서 무언가 굴러가는 소리. 나는 벌떡 일어나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누가 있다고. 누가 왔다고.

아무도 없었다. 열람실 책상 위에서 내가 놓아둔 볼펜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내가 책상 끝에 걸쳐 놓은. 내 것이라서 흘러서 떨어진. 그 소리가 내 소리였다.

나는 그 볼펜을 주워 들고 한참 서 있었다. 계단참에서. 그리고 그날 밤 처음으로 소리 내어 해인을 불렀다. 대답이 없을 걸 알면서.

가을은 그런 밤을 몇 번이나 보냈을까. 그리고 이번엔 진짜였다. 발톱이 있고, 숨이 있고, 짖는.

만질걸 그랬나.

나는 수첩을 펼쳤다. 방문 기록. 열한 번째.

— 식탁. 해인의 말. 가끔 없어, 여기. 삼십 초쯤. 교문. 쪽지. 흙에 늑대 발자국.

— 늑대는 한참 있다 갔다. 국은 안 먹었다. 한 번 돌아보고, 한 번 짖었다.

— 여기서 들은 첫 번째 남의 소리. (가을)

— 만질걸 그랬나. (가을. 대답 못 함.)

그리고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방문 기록이 아니었다.

— 강아지. 지금은 말고. 매일 거기 있어야 돼.

펜을 내려놓았다.

적어 놓고 보니 둘이 닮아 있었다. 가을의 한 줄과 해인의 한 줄. 만질걸 그랬나. 매일 거기 있어야 돼. 둘 다 곁에 있는 일에 대한 말이었다. 하나는 거기서, 하나는 여기서.

나는 어느 쪽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베란다에서 세탁기가 멈춰 있었다. 부엌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졌다. 똑. 해인이 받쳐 둔 컵으로.

그로부터 보름쯤 뒤, 서아가 열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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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손님이요?""대학교수래."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나는 눈을 감았다.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뭐라고 하셨어요?""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너 뭐 했냐.""……수학 문제요.""수학 문제."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

  • 세상의 뒷면   76화. 개선안

    분기마다 한 장씩 내야 하는 종이였다.사내 개선 제안서. 전 직원 의무. 칸이 다섯 개. 현재 문제, 원인, 개선 방법, 예상 효과, 제안자. 내면 커피 쿠폰 한 장을 주고, 뽑히면 상품권을 주었다. 대부분은 마감 날 오후에 오 분 만에 썼다. 탕비실 커피 머신 위치를 바꾸자, 복사기 옆에 쓰레기통을 하나 더 두자.나도 삼 년 동안 그렇게 썼다. 마감 날 오후, 오 분 만에.그 분기 마감은 목요일이었다. 오후 다섯 시 반. 총무팀에서 메일이 왔다. 품질관리팀 이우진 대리님, 미제출.나는 빈 양식을 띄웠다. 현재 문제.측정실 벽 너머에서 가공 라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선반이 쇠를 깎는 소리. 그 라인에서 나온 부품은 바로 측정대로 온다. 뜨거운 채로. 깎을 때 난 열이 아직 남은 채로.나는 그걸 매일 보았다. 삼 년 동안은 그냥 보았다. 돌아와서는 보였다.쇠는 뜨거우면 늘어난다. 아주 조금. 그 조금이 공차의 절반을 먹는다. 뜨거울 때 재서 합격한 부품이, 식으면 줄어서 불합격이 된다. 거꾸로도. 라인은 그 오차를 잡으려고 매일 기계를 조금씩 고치고, 고친 기계는 다음 날 또 틀어지고. 생산팀은 그 때문에 야근을 했다. 매일.측정을 삼십 분만 늦추면 됐다. 식힌 다음에. 그리고 기준면을 하나 바꾸면. 지그가 부품을 잡는 자리를, 열이 가장 덜 가는 쪽으로.나는 다섯 칸을 채웠다. 칠 분 걸렸다. 커피 쿠폰 한 장.제출을 누르고, 퇴근했다.그 주 내내 머릿속엔 다른 것이 있었다. 누런 빛. 떠 있는 서가. 도시락 가방에 얼굴을 묻고 울던 가을. 우진 아저씨, 하고 부르던 목소리의 메아리. 그 종이 한 장은 커피 쿠폰과 함께 금방 잊었다.잊은 종이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다음 주 화요일, 생산팀 과장님이 측정실에 찾아왔다.손에 내 제안서를 출력해서

  • 세상의 뒷면   75화. 너의 칸

    오민재가 달라졌다.처음엔 몰랐다. 측정실에서 나란히 앉아 샘플을 잴 때였다. 오민재가 캘리퍼스를 영점에 맞추고, 부품을 쟀다. 그리고 소리 내어 말했다."12.03. 확인."나는 캘리퍼스를 든 손을 멈췄다.다음 부품."12.04. 확인."오민재는 나를 보지 않았다. 표에 숫자를 적고, 다음 부품을 집었다. 확인. 확인.그날 오후 오민재가 올린 보고서는 내 보고서와 똑같았다. 항목 순서, 표의 모양, 맨 끝에 붙이는 한 줄 요약. 내가 삼 년 동안 써 온 방식을. 오민재는 원래 표를 가로로 그렸다. 색을 많이 썼다. 요약은 맨 앞에 두었다. 그게 오민재의 보고서였다.이번 건 내 것이었다."민재 씨."퇴근 무렵, 나는 오민재의 자리로 갔다."보고서 양식 바꿨어요?"오민재가 얼굴을 붉혔다. 안경을 밀어 올렸다."아, 네. 대리님 거 보고…… 대리님처럼 하고 싶어서요. 대리님은 자료 안 보고도 다 보시잖아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대리님 하시는 거 다 따라 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요. 확인하는 거랑, 표 그리는 거랑."나는 오민재를 보았다."부품은요? 요즘도 뒤집어 봐요?""……네?""3번 캐비티 찾을 때. 부품을 뒤집어서 안쪽 숫자를 봤잖아요. 요즘도 그렇게 해요?"오민재가 머뭇거렸다."요즘은 잘…… 대리님은 안 뒤집어 보시잖아요. 그냥 보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냥 보려고 연습하고 있어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오민재는 부품을 뒤집어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걸, 뒤집어서 찾는. 그게 오민재의 손이었다. 그 손을 내려놓고, 내 눈을 흉내 내고 있었다.그리고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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