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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개선안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9 11:00:00

분기마다 한 장씩 내야 하는 종이였다.

사내 개선 제안서. 전 직원 의무. 칸이 다섯 개. 현재 문제, 원인, 개선 방법, 예상 효과, 제안자. 내면 커피 쿠폰 한 장을 주고, 뽑히면 상품권을 주었다. 대부분은 마감 날 오후에 오 분 만에 썼다. 탕비실 커피 머신 위치를 바꾸자, 복사기 옆에 쓰레기통을 하나 더 두자.

나도 삼 년 동안 그렇게 썼다. 마감 날 오후, 오 분 만에.

그 분기 마감은 목요일이었다. 오후 다섯 시 반. 총무팀에서 메일이 왔다. 품질관리팀 이우진 대리님, 미제출.

나는 빈 양식을 띄웠다. 현재 문제.

측정실 벽 너머에서 가공 라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선반이 쇠를 깎는 소리. 그 라인에서 나온 부품은 바로 측정대로 온다. 뜨거운 채로. 깎을 때 난 열이 아직 남은 채로.

나는 그걸 매일 보았다. 삼 년 동안은 그냥 보았다. 돌아와서는 보였다.

쇠는 뜨거우면 늘어난다. 아주 조금. 그 조금이 공차의 절반을 먹는다. 뜨거울 때 재서 합격한 부품이, 식으면 줄어서 불합격이 된다. 거꾸로도. 라인은 그 오차를 잡으려고 매일 기계를 조금씩 고치고, 고친 기계는 다음 날 또 틀어지고. 생산팀은 그 때문에 야근을 했다. 매일.

측정을 삼십 분만 늦추면 됐다. 식힌 다음에. 그리고 기준면을 하나 바꾸면. 지그가 부품을 잡는 자리를, 열이 가장 덜 가는 쪽으로.

나는 다섯 칸을 채웠다. 칠 분 걸렸다. 커피 쿠폰 한 장.

제출을 누르고, 퇴근했다.

그 주 내내 머릿속엔 다른 것이 있었다. 누런 빛. 떠 있는 서가. 도시락 가방에 얼굴을 묻고 울던 가을. 우진 아저씨, 하고 부르던 목소리의 메아리. 그 종이 한 장은 커피 쿠폰과 함께 금방 잊었다.

잊은 종이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

다음 주 화요일, 생산팀 과장님이 측정실에 찾아왔다.

손에 내 제안서를 출력해서 들고. 모서리가 구겨져 있었다. 여러 번 접었다 편 모양이었다.

"이 대리. 이거 당신이 쓴 거 맞아?"

"네."

"이거 금요일에 라인 하나 시범으로 해 봤거든. 삼 일."

과장님이 종이를 흔들었다.

"불량이 반 넘게 줄었어. 반 넘게. 기계 조정을 한 번도 안 했어. 삼 일 동안. 우리 애들 금요일에 여섯 시에 퇴근했어. 이 년 만에."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잘됐네요."

"잘됐네요가 아니야, 이 사람아."

과장님이 웃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두드렸다. 세게. 두 번.

그날 오후 사내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다. 생산팀 누군가가. 품질팀 이 대리님 제안으로 오늘도 칼퇴합니다. 댓글이 서른 개 달렸다. 다음 날 아침엔 백 개. 누구냐고. 어떻게 생각했냐고. 우리 라인도 해 달라고. 원래 그런 사람이었냐고.

측정실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창 너머로 나를 보았다. 흘끗. 두 번 흘끗.

오민재가 신이 나서 댓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 대리님, 여기 누가 대리님 천재래요. 나는 그만 읽으라고 했다. 오민재가 입을 다물었다. 안경이 흘러내렸다.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옥상에서 나를 찾아와 옆에 섰다. 믹스커피를 들고.

"너 요즘 이상하다."

"……네."

"이상한데, 좋아. 근데 좀 무섭다."

선배가 커피를 홀짝였다.

"금요일에 상무님이 너 부르신다."

그날 오후 나는 가공 라인에 내려갔다. 시범 라인. 처음이었다. 삼 년 동안 측정실에서 부품만 받았지, 부품이 태어나는 자리에는 가 본 적이 드물었다.

기름 냄새. 쇳가루 냄새. 선반이 도는 소리. 나는 귀마개를 한쪽 넣었다.

라인 끝에 새 선반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나무로 짠. 가공을 마친 부품이 거기 줄지어 식고 있었다. 삼십 분. 부품마다 분필로 시각이 적혀 있었다. 누군가 손으로.

반장님이 나를 알아보았다. 쉰 넘은. 작업복 소매에 기름이 밴. 목장갑을 벗고 악수를 청했다. 손바닥이 거칠고 따뜻했다.

"품질팀 이 대리님이죠. 그 종이 쓴."

"네."

"그거 우리가 맨날 하던 말인데."

반장님이 웃었다. 이가 하나 금니였다.

"아침 거랑 오후 거랑 다르다고. 식으면 줄어든다고. 이십 년 동안 입으로만 했지. 종이에 적을 생각은 못 했어. 적어도 누가 들어 줄 줄 몰랐고."

나는 허리를 숙였다.

"그 말씀을 제가 들었어요. 측정실에서. 삼 년 동안."

반장님이 멈칫했다. 그러다 내 어깨를 두드렸다. 목장갑 낀 손으로. 작업복에 기름 자국이 묻었다. 나는 그걸 털지 않았다.

"그럼 반은 우리 거네."

"반이 넘어요."

반장님이 크게 웃었다. 선반 소리보다 크게.

금요일 오후 세 시.

본관 7층. 상무실. 창이 넓었다. 공장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굴뚝, 라인 지붕, 주차장, 은행나무. 잎이 다 떨어져 가지만 남은.

상무는 쉰 중반쯤 되어 보였다. 짙은 남색 양복.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책상 위에 내 제안서가 놓여 있었다. 형광펜이 칠해진.

"앉아요, 이 대리."

나는 앉았다. 허리를 펴고. 두 손을 무릎에.

"삼 년 차라고요."

"네."

"삼 년 동안은 이런 걸 안 냈던데. 지난 분기엔 탕비실 정수기 위치였고."

상무가 웃었다. 나도 웃으려고 했다. 잘 안 됐다.

"무슨 일 있었어요? 요즘."

"……쓰러졌었습니다. 여름에."

"들었어요. 그 뒤로 사람이 달라졌다고. 불량을 자료도 안 보고 잡는다고."

상무가 제안서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거 한 장으로 생산팀 라인 전체에 적용하면, 일 년에 얼마 아끼는지 알아요? 재료비, 야근 수당, 반품. 재무팀이 어제 대충 뽑아 봤는데."

상무가 숫자를 말했다. 나는 그 숫자를 들었다. 내 연봉의 몇 배쯤 되는.

"그래서."

상무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 대리한테 TF를 하나 맡기려고 해요. 공정 개선 TF. 이 대리가 팀장. 인원은 원하는 대로. 그리고 다음 달 전사 회의에서 발표 한 번. 사보에도 싣고. 우리 회사에 이런 사람 있다고. 과장 승진은 내년 심사 때 내가 직접 올릴게요."

나는 상무를 보았다.

과장.

사 년 전 나는 과장 승진이 무서웠다. 실패할까 봐. 롤러코스터처럼. 청혼처럼. 해인이 먼저 물어봐 줄 때까지 반지를 석 달 동안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사람.

지금 그 과장이 책상 건너편에서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내가 한 발도 떼지 않았는데.

전사 회의. 사보. 우리 회사에 이런 사람 있다고.

머릿속에서 교과서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You wanted to be seen knowing.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상무가 눈썹을 올렸다.

"생각할 게 있어요?"

"네."

"뭘요."

나는 대답을 골랐다. 오래. 상무가 기다렸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탁, 탁, 탁.

"그건 제가 찾은 게 아닙니다."

상무가 멈췄다.

"제가 쓴 건 맞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부품이 늘어난다는 건, 생산팀 분들이 매일 손으로 알던 겁니다. 아침 첫 로트랑 오후 로트가 다르다고. 제가 삼 년 동안 측정실에서 듣던 말이에요. 저는 그걸 종이에 옮겼을 뿐입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반쯤은. 나머지 반은 내가 본 것이었다. 사 년 동안 쌓인 무언가로. 증명하기 전에 먼저.

그 반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TF 팀장은 제가 아니라, 생산팀 과장님이 맡으시는 게 맞습니다. 라인을 제일 잘 아시니까요. 저는 측정 쪽을 맡겠습니다. 확인하는 쪽을요. 그리고 저희 팀 오민재 사원을 넣어 주세요. 데이터를 제일 잘 다룹니다."

"발표는?"

"과장님이 하시는 게 맞습니다."

"사보는?"

"……사보는 안 하겠습니다."

상무가 등을 의자에 기댔다. 나를 오래 보았다. 무언가를 재는 눈으로. 선배처럼. 신경과 의사처럼.

"이 대리."

"네."

"겸손도 지나치면 오만이에요."

그 말이 방 안에 떨어졌다.

나는 그 말을 받았다. 피하지 않았다.

미는 만큼 밀려난다. 창가 긴 책상의 그 사람이 말했다. 나는 그 사람 앞에서 아는 걸 떠벌렸다. 그리고 밀려났다.

지금은 아는 걸 감추고 있는 걸까. 그것도 미는 걸까. 감추는 척하면서, 사실은 감추는 나를 보이고 싶은 걸까.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래도 제가 앞에 서면, 다음 사람들이 찾을 자리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 이런 건 라인에 계신 분들이 매일 찾을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찾아 주기 시작하면, 다들 저한테 가져올 겁니다. 그리고 제가 틀리면, 아무도 모를 겁니다."

상무가 오래 말이 없었다.

창밖에서 공장 굴뚝이 흰 김을 뱉고 있었다. 바람에 흩어지며.

"……그 말은, 이십 년 전에 내 사수가 하던 말이랑 비슷하네."

상무가 웃었다. 조금 쓴웃음으로.

"좋아요. TF는 생산팀 과장이. 이 대리는 측정 책임. 오민재 사원 넣고. 발표는 과장이. 사보는 빼고."

"감사합니다."

"대신."

상무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과장 심사엔 올립니다. 그건 이 대리가 정할 일이 아니에요. 회사가 정할 일이지. 앞에 안 서겠다는 건 받아 줄게. 근데 한 일을 없던 걸로 해 줄 수는 없어요."

나는 상무를 보았다.

한 일을 없던 걸로 해 줄 수는 없다.

"……네."

상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스테인리스 문에 내가 흐릿하게 비쳤다. 하나, 둘, 셋. 아무것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생각했다.

지하 기계실의 그 사람. 무명옷, 걷어붙인 소매, 팔뚝의 화상 자국. 스스로를 쇤네라고 부르던. 잣대 꼭대기의 파란 구슬이 굴렀을 때 그 사람은 스스로 보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물시계는 내가 만들었다. 그 사람의 그림으로. 그 물시계가 흘렀다. 이 세상에서 흐르는 것이 생겼다. 내가 만들었다. 나는 그걸 숨기지 않았다. 검은 노트에 적었다. 떠날 때 옹기에 물을 가득 부어 두었다. 다음 사람이 보라고. 내가 없어도 흐르라고.

보이려고 한 게 아니었다. 쓰이라고 한 거였다.

규칙 13은 아는 것을 보이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는 것을 쓰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 차이를, 나는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 3층까지 내려오는 동안 처음 알았다. 알았다고 생각했다. 확인은 못 했다.

3층에서 내리자 오민재가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나를 보자 달려왔다. 안경을 밀어 올리며.

"대리님, 어떻게 됐어요? 팀장 되셨어요? 발표하세요?"

"아니. 생산팀 과장님이 팀장. 발표도 과장님."

오민재의 얼굴이 무너졌다.

"네? 왜요? 대리님이 쓰신 건데요."

"그리고 민재 씨가 TF 들어가."

오민재가 멈췄다. 입을 벌린 채로.

"……제가요?"

"데이터 제일 잘 다룬다고 했어. 상무님한테. 가로 표로 그려. 색 많이 써서. 요약 맨 앞에."

오민재가 한참 나를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푹 숙였다. 허리까지. 안경이 떨어질 뻔했다. 한 손으로 잡으면서.

"감사합니다."

"부품도 뒤집어 보고."

"네. 뒤집을게요. 전부."

오민재가 뛰어갔다. 선배 자리로.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3번 캐비티를 찾던 날처럼.

그날 밤, 해인에게 말했다.

식탁에서. 서아가 잠든 뒤. 해인이 귤을 까면서 들었다.

"잘됐네."

해인이 귤 한 조각을 내 입에 넣었다. 식빵처럼.

"근데 당신 얼굴은 왜 그래."

"……모르겠어. 잘한 건지."

"뭘."

"앞에 안 선 거. 내가 찾은 걸 다른 사람 이름으로 한 거."

해인이 귤을 까다 멈췄다.

"당신이 찾은 거 맞아?"

"반은."

"나머지 반은?"

"생산팀 사람들이 매일 하던 말이야. 아침 부품이랑 오후 부품이 다르다고."

"그럼 반은 당신 거네."

"응."

해인이 귤껍질을 식탁 위에 반듯하게 모았다.

"숨기는 거랑 안 나서는 건 달라."

나는 해인을 보았다.

"당신 지금 헷갈리는 거 같아서. 숨기는 건, 있는 걸 없다고 하는 거고. 안 나서는 건, 있는 걸 있다고 하되 앞에 안 서는 거야. 상무님이 한 일은 없던 걸로 못 한다고 했다며. 그럼 당신은 안 숨긴 거야. 안 나선 거지."

"……"

"우리 팀장님은 매번 나선다. 부하 직원이 딴 계약도 자기가 발표해. 그거 보면서 칠 년 동안 이를 갈았어. 당신은 그 반대를 한 거야. 헷갈릴 게 뭐 있어."

해인이 귤 한 조각을 더 내 입에 넣었다.

"근데 과장은 돼. 그건 해. 서아 유치원비."

나는 웃었다. 귤이 입안에서 터졌다. 시고 달았다. 해인이 모아 둔 귤껍질에서 냄새가 올라왔다. 식탁 위로, 거실로, 흘러서.

해인이 잠든 뒤, 서재에 들어갔다.

서랍에서 남색 책을 꺼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들. 그 사이에 끼워 둔 이면지 묶음. 쉰 장 넘게. 수의 길 끝까지 걸어간 기록.

길 끝에서 한 걸음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왔다. 누군가 멈춘 자리보다 몇 걸음 더. 그 몇 걸음이 이 종이들에 있었다.

이걸 서랍에 넣어 두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숨기는 것.

이걸 들고 어딘가에 가서, 제가 풀었습니다, 하면. 나서는 것.

그 사이 어딘가.

해인이 말했다. 있는 걸 있다고 하되, 앞에 안 서는 것.

나는 이면지 묶음을 정리했다. 순서대로. 틀린 줄은 두 줄로 긋고. 첫 장에 짧게 적었다. 이 물음에 대해, 여기까지 와 보았습니다. 끝은 보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이어 주십시오.

이름은 적지 않았다.

다음 날 점심시간, 회사 앞 우체국에 갔다. 누런 서류 봉투. 받는 곳은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의 수학과 학과 사무실. 인터넷에서 찾은 주소. 교수 이름은 쓰지 않았다. 수학과 교수님들께.

보내는 사람 칸을 비워 두었다.

창구 직원이 봉투를 저울에 올렸다. 보내는 분 주소 안 쓰시면 반송이 안 돼요. 괜찮습니다. 직원이 도장을 찍었다. 쾅.

봉투가 바구니로 들어갔다. 다른 봉투들 사이로.

흘러갔다.

나는 우체국을 나오며 가을을 생각했다. 칠판 가득한 내 문장들. 이 봉투 안의 이면지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될까. 베껴지는 답이 될까.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누군가 이어 주십시오, 라고 적었다. 이어 달라고. 베껴 달라고가 아니라.

그리고 그 이면지들의 뒷면에 무엇이 인쇄되어 있었는지는, 그때는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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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손님이요?""대학교수래."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나는 눈을 감았다.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뭐라고 하셨어요?""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너 뭐 했냐.""……수학 문제요.""수학 문제."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

  • 세상의 뒷면   76화. 개선안

    분기마다 한 장씩 내야 하는 종이였다.사내 개선 제안서. 전 직원 의무. 칸이 다섯 개. 현재 문제, 원인, 개선 방법, 예상 효과, 제안자. 내면 커피 쿠폰 한 장을 주고, 뽑히면 상품권을 주었다. 대부분은 마감 날 오후에 오 분 만에 썼다. 탕비실 커피 머신 위치를 바꾸자, 복사기 옆에 쓰레기통을 하나 더 두자.나도 삼 년 동안 그렇게 썼다. 마감 날 오후, 오 분 만에.그 분기 마감은 목요일이었다. 오후 다섯 시 반. 총무팀에서 메일이 왔다. 품질관리팀 이우진 대리님, 미제출.나는 빈 양식을 띄웠다. 현재 문제.측정실 벽 너머에서 가공 라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선반이 쇠를 깎는 소리. 그 라인에서 나온 부품은 바로 측정대로 온다. 뜨거운 채로. 깎을 때 난 열이 아직 남은 채로.나는 그걸 매일 보았다. 삼 년 동안은 그냥 보았다. 돌아와서는 보였다.쇠는 뜨거우면 늘어난다. 아주 조금. 그 조금이 공차의 절반을 먹는다. 뜨거울 때 재서 합격한 부품이, 식으면 줄어서 불합격이 된다. 거꾸로도. 라인은 그 오차를 잡으려고 매일 기계를 조금씩 고치고, 고친 기계는 다음 날 또 틀어지고. 생산팀은 그 때문에 야근을 했다. 매일.측정을 삼십 분만 늦추면 됐다. 식힌 다음에. 그리고 기준면을 하나 바꾸면. 지그가 부품을 잡는 자리를, 열이 가장 덜 가는 쪽으로.나는 다섯 칸을 채웠다. 칠 분 걸렸다. 커피 쿠폰 한 장.제출을 누르고, 퇴근했다.그 주 내내 머릿속엔 다른 것이 있었다. 누런 빛. 떠 있는 서가. 도시락 가방에 얼굴을 묻고 울던 가을. 우진 아저씨, 하고 부르던 목소리의 메아리. 그 종이 한 장은 커피 쿠폰과 함께 금방 잊었다.잊은 종이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다음 주 화요일, 생산팀 과장님이 측정실에 찾아왔다.손에 내 제안서를 출력해서

  • 세상의 뒷면   75화. 너의 칸

    오민재가 달라졌다.처음엔 몰랐다. 측정실에서 나란히 앉아 샘플을 잴 때였다. 오민재가 캘리퍼스를 영점에 맞추고, 부품을 쟀다. 그리고 소리 내어 말했다."12.03. 확인."나는 캘리퍼스를 든 손을 멈췄다.다음 부품."12.04. 확인."오민재는 나를 보지 않았다. 표에 숫자를 적고, 다음 부품을 집었다. 확인. 확인.그날 오후 오민재가 올린 보고서는 내 보고서와 똑같았다. 항목 순서, 표의 모양, 맨 끝에 붙이는 한 줄 요약. 내가 삼 년 동안 써 온 방식을. 오민재는 원래 표를 가로로 그렸다. 색을 많이 썼다. 요약은 맨 앞에 두었다. 그게 오민재의 보고서였다.이번 건 내 것이었다."민재 씨."퇴근 무렵, 나는 오민재의 자리로 갔다."보고서 양식 바꿨어요?"오민재가 얼굴을 붉혔다. 안경을 밀어 올렸다."아, 네. 대리님 거 보고…… 대리님처럼 하고 싶어서요. 대리님은 자료 안 보고도 다 보시잖아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대리님 하시는 거 다 따라 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요. 확인하는 거랑, 표 그리는 거랑."나는 오민재를 보았다."부품은요? 요즘도 뒤집어 봐요?""……네?""3번 캐비티 찾을 때. 부품을 뒤집어서 안쪽 숫자를 봤잖아요. 요즘도 그렇게 해요?"오민재가 머뭇거렸다."요즘은 잘…… 대리님은 안 뒤집어 보시잖아요. 그냥 보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냥 보려고 연습하고 있어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오민재는 부품을 뒤집어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걸, 뒤집어서 찾는. 그게 오민재의 손이었다. 그 손을 내려놓고, 내 눈을 흉내 내고 있었다.그리고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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