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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국밥

Penulis: Jino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10-20 07:00:00

바람이 없었다. 똑딱.

교문이 아니었다.

지붕이 있었다. 반투명한 플라스틱 지붕. 그 아래로 좁은 통로가 길게 뻗어 있고, 양옆으로 가게들이 다닥다닥. 천막, 좌판, 빨간 고무 대야, 플라스틱 바구니. 형광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

시장이었다.

나는 통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

생선 가게. 얼음 위에 고등어와 갈치가 은빛으로 누워 있었다. 주인이 방금 물을 뿌린 모양이었다. 대야에서 쏟아진 물줄기가 공중에서 굳어 있었다. 유리 막대처럼. 물방울 몇 개가 갈치 비늘 위에 떠 있었다.

맞은편 어묵 가게. 커다란 사각 냄비에 꼬치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 위로 김이 피어오르다 멈춰 있었다. 하얀 솜뭉치처럼. 냄비 위 한 뼘에 걸려서.

그 옆 전 가게. 넓은 철판 위에 기름이 끓다 멈췄다. 방울방울 부풀어 오른 채로. 동그랑땡 하나가 뒤집히다가 공중에 떠 있었다. 뒤집개 끝에서 반쯤 떨어져.

전부 아침이었다. 늦가을 아침 여덟 시 칠 분의 시장. 장사를 막 시작한. 채소 가게 앞 소쿠리에 쪽파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누군가 새벽에 다듬어 놓은. 가격표가 매직으로. 한 단 삼천 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통로 저편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하얀 것이. 천장의 형광등 아래서. 피어올라서, 흩어지고, 또 피어올라서, 흩어지는.

김이었다.

흐르는.

나는 그 김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

통로 끝 가까이, 오른쪽. 간판이 낡은 작은 가게. 돼지국밥. 유리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앞에 가마솥 두 개가 가스 화구 위에 올라 있었다. 하나는 김이 멈춰 있었다. 솥뚜껑 틈에서 새어 나오다 굳은 하얀 솜뭉치.

다른 하나에서 김이 흘렀다.

솥 앞에 가을이 서 있었다.

교복 치마 위에 가게 앞치마를 두르고. 붉은색.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긴 나무 주걱으로 솥을 젓고 있었다. 천천히. 바닥을 긁듯이. 머리는 낮게 묶어 올리고. 실핀 두 개.

가게 문 옆 벽에 못이 하나 박혀 있었다. 거기 도시락 가방이 걸려 있었다. 연분홍. 꽃무늬. 지퍼가 닫힌 채로.

가을이 나를 보았다.

주걱을 멈추지 않았다. 고개만 돌렸다.

"우진 아저씨. 오셨어요."

"……네."

"잠깐만요. 이거 지금 저으면 안 되는 때라서. 바닥 눌어붙어요."

가을이 다시 솥을 보았다. 주걱이 솥 바닥을 한 바퀴 돌았다. 김이 흔들리며 피어올랐다. 형광등 아래로. 시장 지붕 쪽으로. 흩어졌다.

냄새가 났다.

곁에 가서야. 바람이 없으니까. 가을의 솥 가까이, 한 걸음 안에서만.

뼈를 오래 곤 냄새. 뽀얗고, 조금 비리고, 따뜻한. 대파 냄새. 마늘.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사 년 동안 이 세상의 냄새는 내가 만든 것밖에 없었다. 내가 끓인 라면. 내가 지은 냄비밥. 내가 구운 못생긴 케이크. 로비 탁자의 녹차.

이 냄새는 가을이 만들었다.

가을이 불을 줄였다. 화구의 손잡이를 돌려서. 파란 불꽃이 작아졌다. 흔들리지 않는 불꽃. 이 세상의 불꽃.

그리고 주걱을 솥 가장자리에 걸쳐 놓고, 나를 돌아보았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삼천육백 안 셌어요."

가을이 말했다. 인사 대신.

"아저씨가 세지 말아 보라고 하셔서. 그다음 날부터 그냥 앉았어요. 두 거울 사이에."

"……어땠어요?"

"처음엔 무서웠어요. 세지 않으니까 얼마나 앉았는지 모르겠고. 딴생각이 막 났어요. 영단어가 나오고, 칠판에 적은 규칙이 나오고, 공책이 나오고. 그거 다 쫓아냈어요. 딴생각 나면 틀리는 거니까."

가을이 솥을 보았다.

"그러다 사흘째인가. 쫓아내다가 지쳐서 그냥 뒀어요. 영단어가 오면 오고, 규칙이 오면 오고. 그랬더니 이상한 게 왔어요."

"뭐가요."

"냄새요."

가을이 솥뚜껑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새벽 다섯 시 냄새요. 우리 집 냄새. 엄마 가게가 새벽 다섯 시에 문 열거든요. 엄마는 네 시에 나가요. 불 올리려고. 저는 자다가 그 냄새에 깨요. 엄마가 가게에서 한 솥 끓여서, 첫 그릇은 집에 들고 와요. 제 아침으로. 그게 매일이었어요. 고등학교 삼 년 동안."

가을이 말을 멈췄다.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놓았다.

"두 거울 사이에서 그 냄새가 났어요. 진짜 난 건 아니고요. 여긴 냄새가 안 나니까. 근데 났어요. 그래서 일어나서 여기 왔어요."

"여기는……"

"시장이요. 집에서 좀 걸어요. 학교 뒤로 내려가서. 엄마 가게는 아니에요."

그 말이 빨랐다. 도시락은 안 먹어요, 할 때처럼.

"엄마 가게는 안 가요."

나는 묻지 않았다.

가을도 더 말하지 않았다. 솥뚜껑을 조금 열었다. 김이 확 피어올랐다. 흘러서.

"여기 사장님 국밥은 제가 몇 번 먹어 봤거든요. 엄마 거랑 비슷해요. 그래서 여기 뼈랑 솥 빌렸어요. 계산대에 돈 놨어요."

가을이 가게 안쪽을 가리켰다. 계산대. 낡은 금전등록기 옆에 동전과 지폐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그 아래 오답노트 한 장을 찢어 접은 쪽지.

나는 다가가 보았다. 손대지 않고.

— 사장님, 돼지뼈 한 봉지, 대파 세 단, 마늘 한 줌, 솥 하나 빌립니다. 솥은 씻어서 돌려놓을게요. 모자라면 다음에 더 놓을게요. 부추는 옆 가게 거 조금. 옆 가게 사장님께도 말씀 좀 전해 주세요. 송가을.

글씨는 반듯했다. 그런데 오답노트의 글씨와 조금 달랐다. 끝이 둥글었다. 마지막 이름 석 자는 특히. 누군가에게 보내는 글씨였다. 공책을 베낄 때의 글씨가 아니라.

거기서 나는 문구점 계산대에 이천 원을 놓았다. 옹기 가게에 메모를 남겼다. 옹기 여섯 개 가져갑니다. 둘은 깼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우진.

가을은 그걸 공책에서 읽었을 것이다. 오래 가질 건 값을 치른다.

그런데 이 쪽지는 공책에 없는 말투였다. 옆 가게 사장님께도 말씀 좀 전해 주세요. 아무도 없는 시장에서. 전해 줄 사람이 없는데.

가을은 이 시장 사람들을 알았다. 새벽마다 엄마 심부름으로 오던.

"얼마나 끓였어요?"

"몰라요."

가을이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무언가를 모른다고 말하면서 웃는.

"엄마는 뼈를 밤새 곤대요. 그래서 저도 밤새 끓이려고 했는데, 여긴 밤이 없잖아요. 그래서 잠을 기준으로 했어요. 불 올리고 자고, 일어나서 물 붓고, 또 자고. 세 번 잤어요. 세 번째 일어났더니 국물이 뽀얘졌어요."

가을이 국자로 국물을 떴다. 하얗고 뽀얀. 김이 국자 위에서 피어올랐다. 흘렀다.

"이거 보세요."

가을이 국자를 들어 올려 옆 솥의 멈춘 김 옆에 댔다. 사장님의 솥. 솥뚜껑 틈에서 새어 나오다 굳은 하얀 솜뭉치. 그 옆에서 가을의 국자 위 김이 흔들리며 올라가, 멈춘 김을 지나쳐, 지붕 쪽으로 흩어졌다.

"제가 끓인 건 김이 가요. 사장님 건 안 가고."

"……가을 씨 손으로 끓였으니까요."

"공책에 있었어요. 내 손에 든 것은 흐른다."

가을이 국자를 내렸다. 국물을 도로 솥에 부었다. 천천히.

"근데 공책 보고 한 건 아니에요. 끓이다 보니까 알았어요. 김이 가는 거. 그리고 나중에 생각났어요. 아, 공책에도 있었지."

나는 가을을 보았다.

공책 보고 한 게 아니에요.

그 말이 가게 안에 오래 남았다. 김처럼. 흘러가지 않고.

"드실래요?"

가을이 뚝배기를 하나 꺼냈다. 가게 선반에서. 두 손으로. 거기 밥을 조금 담고, 뜨거운 국물을 두 번 부었다 따라 내고, 세 번째에 가득 부었다. 삶은 고기 몇 점을 얹었다. 부추를 한 줌. 새우젓 종지를 옆에.

토렴이었다. 밥을 국물로 데우는. 어디서 본 적이 있었다. 부산 출장 때 선배를 따라 들어간 국밥집에서.

"엄마가 이렇게 해요. 세 번."

가을이 뚝배기를 가게 안 테이블에 놓았다. 스테인리스 테이블. 플라스틱 의자. 나는 앉았다. 가을은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 솥 옆에 선 채로 나를 보았다.

숟가락을 들었다.

방문자는 먹을 수 있을까. 그 도서관에서 그분은 녹차를 두 손으로 들고 김이 흩어지는 걸 보시며 말씀하셨다. 맛은 없구나. 그래도 따뜻하다.

국물을 떴다. 입에 넣었다.

뜨거웠다.

그리고 맛이 났다.

진한 국물. 조금 싱거운. 뼈 맛이 깊은데, 간이 덜 된. 새우젓을 조금 넣었다. 짠맛이 퍼졌다. 부추의 매운 향이 코로 올라왔다.

나는 한 숟가락을 더 떴다. 또 한 숟가락.

해인은 국을 잘 못 끓였다. 된장국은 늘 짜고, 미역국은 늘 싱거웠다. 그래서 우리 집 국은 대부분 어머니가 주신 것이었다. 해인은 그게 늘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해인의 짠 된장국이 좋았다. 그 짠맛이 해인이었으니까.

이 싱거운 국물은 가을이었다.

가을이 나를 보고 있었다. 오답노트를 채점받는 얼굴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얼굴. 그런데 빨간 펜을 기다리는 얼굴은 아니었다.

"……어때요?"

"맛있어요."

"진짜로요?"

"진짜로. 조금 싱거워요. 그래도 맛있어요."

가을이 웃었다. 코로. 흥.

"엄마 거랑 달라요. 저도 먹어 봤는데. 새우젓을 얼마나 넣는지 몰라서. 엄마는 눈대중으로 해서요. 한 번도 안 재요. 제가 물어보면, 적당히, 그래요. 적당히가 얼마냐고 하면 먹어 보고 넣으래요."

가을이 솥을 보았다.

"그땐 그 말이 제일 싫었어요. 적당히. 정답을 안 알려 주는 거 같아서."

나는 숟가락을 멈췄다.

"……지금은요?"

가을이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솥에서 김이 올라갔다. 흘러서. 형광등 아래를 지나, 반투명한 지붕에 닿아, 흩어졌다.

"지금은 모르겠어요. 진짜로요."

나는 뚝배기를 다 비웠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사 년 동안 냄비 바닥의 누룽지까지 긁어 먹던 버릇으로. 숟가락을 뚝배기 옆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가을이 빈 뚝배기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앞치마 끈을 고쳐 매는 손이 조금 빨라졌다.

나는 가을의 발밑을 보았다.

형광등 아래 그림자가 가을의 발에서 가게 바닥으로 짧게 떨어져 있었다. 가장자리가.

또렷했다. 교실에서보다. 먹물이 번지던 테두리가 조금 모여 있었다. 2.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오늘 그림자 봤어요?"

"봤어요. 진짜로. 일어나서 제일 먼저. 2요."

가을이 자기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가을이 발을 조금 움직였다. 그림자가 따라왔다. 반 박자 늦지 않게. 가을이 두 번 더 움직여 보았다. 왼발, 오른발. 확인하듯이. 측정실의 나처럼.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국 끓인 날부터 조금씩 짙어졌어요. 이상하죠. 점검표는 그대로인데. 국 끓이는 건 점검표에 없는데."

"……"

"이것도 칸에 넣을까 생각했어요. 아홉째 칸. 국 끓인다."

가을이 주걱을 집어 솥을 한 번 저었다.

"근데 안 넣을래요."

"왜요?"

"넣으면 또 숙제가 될 것 같아서요. 매일 끓여야 되고. 안 끓이면 빈칸이고. 빈칸이면 그림자 옅어질까 봐 무섭고."

가을이 주걱을 솥 가장자리에 걸었다.

"그냥 끓이고 싶을 때 끓일래요. 냄새 나면."

나는 가을을 보았다.

사 년 동안 나는 그걸 몰랐다. 점검표에 칸을 늘렸다. 여섯, 일곱. 여덟째 칸도 칸으로 만들었다. 이름 없는 칸. 칸이 없으면 무너질 것 같아서.

가을은 칸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스스로.

"그것도 좋네요."

내가 말했다. 가을이 나를 보았다.

"좋아요? 공책에 없는 건데요."

"그러니까 좋아요."

시장 통로 저편을 보았다. 무심코.

생선 가게의 얼음. 그 옆 냉장 진열대의 유리. 형광등 불빛이 비쳐 하얗게 번진.

그 유리 속, 통로 끝에.

그것이 서 있었다.

멀리. 시장 입구 쪽. 통로의 가장 먼 끝. 가을의 등 뒤를 향해 서 있었지만, 한 걸음 거리가 아니었다. 통로 하나만큼. 수십 걸음.

교실에서는 등 뒤였다. 지금은 저기였다.

나는 셋까지 셌다. 넷. 다섯.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를 보지 않았다. 여전히.

가을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솥을 보고 있었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지금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저만큼이면. 가을이 언젠가 스스로 볼 것이다. 그리고 셀 것이다. 몇 걸음인지.

"아저씨는 오늘 뭐 때문에 막혔어요?"

가을이 물었다. 솥을 저으며. 아무렇지 않게.

나는 멈췄다.

"……숙제 하나요."

"숙제요?"

"한 줄 써 오라는 숙제. 못 쓰고 있어요."

가을이 주걱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눈이 동그래졌다.

"아저씨가요? 한 줄을요?"

"네."

"무슨 숙제인데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웃었다. 가을도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이번엔 소리 내어. 몇 걸음 앞에서 삼켜지는 웃음이었다. 그래도 들렸다.

"한 줄이면 적당히 쓰세요."

가을이 말했다.

"먹어 보고 넣으래요. 엄마가."

초침이 서른 바퀴 가까이 돌았을 때, 손끝이 당겨졌다.

"가요?"

"네. 곧."

가을이 솥의 불을 껐다. 파란 불꽃이 사라졌다. 솥에서 김이 조금 더 올라가다가, 가늘어졌다.

가을이 벽의 못에서 도시락 가방을 내렸다. 손잡이를 쥐었다. 지퍼는 닫힌 채로.

"다음엔 새우젓 더 넣어 볼게요."

"네."

"엄마 거 맛 날 때까지."

가을이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작게. 거의 안 들리게.

"……엄마 거 맛이 뭐였는지, 까먹기 전에."

서재였다.

스탠드 불빛. 서른한 번째 장의 복사본. 한 교수의 빨간 동그라미. 여백에 번진 잉크 점.

나는 볼펜을 들었다. 그 점 옆에 적었다.

— 이 줄은 보였습니다. 왜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같이 먹어 보고, 넣어 주십시오.

적고 나서 웃었다. 먹어 보고, 넣어 주십시오. 한 교수가 이걸 보면 뭐라고 할까.

지우지 않았다.

그리고 수첩을 펼쳤다. 방문 기록. 아홉 번째.

— 서재. 한 교수 숙제. 삼십 분. 시장. 돼지국밥. 가을이 끓임. 김이 흐름. 토렴 세 번. 조금 싱거움.

— 엄마 가게는 안 간다. (묻지 않았다.)

— 그림자 2. 가을이 직접 봄.

— 칸에 안 넣는다. 끓이고 싶을 때 끓인다. (가을이 정함.)

— 그것: 통로 끝. 수십 걸음.

그리고 맨 아래에, 가을의 마지막 말을 적으려다 멈췄다.

엄마 거 맛이 뭐였는지, 까먹기 전에.

그 줄은 적지 않았다. 적으면 무거워질 것 같았다. 대신 기억했다.

그 주 토요일, 한 교수의 연구실에 처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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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손님이요?""대학교수래."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나는 눈을 감았다.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뭐라고 하셨어요?""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너 뭐 했냐.""……수학 문제요.""수학 문제."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

  • 세상의 뒷면   76화. 개선안

    분기마다 한 장씩 내야 하는 종이였다.사내 개선 제안서. 전 직원 의무. 칸이 다섯 개. 현재 문제, 원인, 개선 방법, 예상 효과, 제안자. 내면 커피 쿠폰 한 장을 주고, 뽑히면 상품권을 주었다. 대부분은 마감 날 오후에 오 분 만에 썼다. 탕비실 커피 머신 위치를 바꾸자, 복사기 옆에 쓰레기통을 하나 더 두자.나도 삼 년 동안 그렇게 썼다. 마감 날 오후, 오 분 만에.그 분기 마감은 목요일이었다. 오후 다섯 시 반. 총무팀에서 메일이 왔다. 품질관리팀 이우진 대리님, 미제출.나는 빈 양식을 띄웠다. 현재 문제.측정실 벽 너머에서 가공 라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선반이 쇠를 깎는 소리. 그 라인에서 나온 부품은 바로 측정대로 온다. 뜨거운 채로. 깎을 때 난 열이 아직 남은 채로.나는 그걸 매일 보았다. 삼 년 동안은 그냥 보았다. 돌아와서는 보였다.쇠는 뜨거우면 늘어난다. 아주 조금. 그 조금이 공차의 절반을 먹는다. 뜨거울 때 재서 합격한 부품이, 식으면 줄어서 불합격이 된다. 거꾸로도. 라인은 그 오차를 잡으려고 매일 기계를 조금씩 고치고, 고친 기계는 다음 날 또 틀어지고. 생산팀은 그 때문에 야근을 했다. 매일.측정을 삼십 분만 늦추면 됐다. 식힌 다음에. 그리고 기준면을 하나 바꾸면. 지그가 부품을 잡는 자리를, 열이 가장 덜 가는 쪽으로.나는 다섯 칸을 채웠다. 칠 분 걸렸다. 커피 쿠폰 한 장.제출을 누르고, 퇴근했다.그 주 내내 머릿속엔 다른 것이 있었다. 누런 빛. 떠 있는 서가. 도시락 가방에 얼굴을 묻고 울던 가을. 우진 아저씨, 하고 부르던 목소리의 메아리. 그 종이 한 장은 커피 쿠폰과 함께 금방 잊었다.잊은 종이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다음 주 화요일, 생산팀 과장님이 측정실에 찾아왔다.손에 내 제안서를 출력해서

  • 세상의 뒷면   75화. 너의 칸

    오민재가 달라졌다.처음엔 몰랐다. 측정실에서 나란히 앉아 샘플을 잴 때였다. 오민재가 캘리퍼스를 영점에 맞추고, 부품을 쟀다. 그리고 소리 내어 말했다."12.03. 확인."나는 캘리퍼스를 든 손을 멈췄다.다음 부품."12.04. 확인."오민재는 나를 보지 않았다. 표에 숫자를 적고, 다음 부품을 집었다. 확인. 확인.그날 오후 오민재가 올린 보고서는 내 보고서와 똑같았다. 항목 순서, 표의 모양, 맨 끝에 붙이는 한 줄 요약. 내가 삼 년 동안 써 온 방식을. 오민재는 원래 표를 가로로 그렸다. 색을 많이 썼다. 요약은 맨 앞에 두었다. 그게 오민재의 보고서였다.이번 건 내 것이었다."민재 씨."퇴근 무렵, 나는 오민재의 자리로 갔다."보고서 양식 바꿨어요?"오민재가 얼굴을 붉혔다. 안경을 밀어 올렸다."아, 네. 대리님 거 보고…… 대리님처럼 하고 싶어서요. 대리님은 자료 안 보고도 다 보시잖아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대리님 하시는 거 다 따라 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요. 확인하는 거랑, 표 그리는 거랑."나는 오민재를 보았다."부품은요? 요즘도 뒤집어 봐요?""……네?""3번 캐비티 찾을 때. 부품을 뒤집어서 안쪽 숫자를 봤잖아요. 요즘도 그렇게 해요?"오민재가 머뭇거렸다."요즘은 잘…… 대리님은 안 뒤집어 보시잖아요. 그냥 보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냥 보려고 연습하고 있어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오민재는 부품을 뒤집어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걸, 뒤집어서 찾는. 그게 오민재의 손이었다. 그 손을 내려놓고, 내 눈을 흉내 내고 있었다.그리고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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