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한 교수의 연구실은 이공관 사 층 복도 끝에 있었다.
토요일 오전 열 시.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문에 붙은 이름표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내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발소리 들었어요. 토요일엔 이 층에 아무도 안 와서."
한 교수가 흰 운동화를 신고 서 있었다. 회색 니트 소매에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
책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인 방이었다. 창가에 말라 가는 화분 하나. 칠판은 지우개 자국으로 뿌옜다. 한 교수가 의자를 하나 비워 주었다. 의자 위에 쌓여 있던 논문 더미를 바닥으로 옮기면서.
한 교수는 서른한 번째 장 복사본을 먼저 폈다. 빨간 동그라미 옆, 여백의 내 글씨. 같이 먹어 보고, 넣어 주십시오.
한 교수가 그 줄을 한참 보다가 웃었다. 소리 내어. 안경이 콧등으로 미끄러질 만큼.
"이게 무슨 수학이에요."
그러고는 칠판 앞으로 갔다. 분필을 쥐고, 한 걸음씩 적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보았다. 틀리면 말했다. 거기 아니에요. 한 교수는 왜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지우고 다시 적었다. 흰 운동화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한 시간이 금방 갔다.
한 교수가 분필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의 분필 가루를 바지에 닦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이우진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이우진 씨 눈에 보이는 거요. 저도 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보여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한 교수가 기다렸다. 그러다 먼저 웃었다.
"그렇겠죠. 알면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죠. 숙제로 할게요. 저도, 이우진 씨도."
한 교수가 칠판 모서리를 분필로 톡톡 쳤다. 세 번. 그리고 칠판 한구석에 작게 적었다. 어떻게 보이는가.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
"이십 년 전에 제 지도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수학은 보는 게 반이고 증명하는 게 반이라고. 저는 평생 증명하는 반만 했어요. 보는 반은 안 되더라고요.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한 교수가 웃었다. 안경을 벗어 니트 자락에 닦았다.
"그래서 궁금했어요. 반쪽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칠판의 그 한 줄을 보았다. 어떻게 보이는가. 한 교수의 글씨는 분필 가루가 날릴 만큼 꾹꾹 눌려 있었다.
연구실을 나설 때 한 교수가 문간에서 말했다.
"다음 주 말고 그다음 주요. 격주로 해요. 이우진 씨 딸 문화센터 없는 토요일로."
"……기억하셨네요."
"수학 하는 사람은 숫자는 기억해요. 사람 이름은 잘 까먹어도."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 물음을 쥐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보여요.
많이 보면. 아니었다. 사 년 동안 나보다 많이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처음 한 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래 앉아 있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래 앉아 있다고 다 보이는 게 아니었다.
보이던 날들을 떠올렸다. 분할 수가 처음 보이던 새벽. 흰 옷의 그분이 공책을 덮고 말씀하셨다. This is seeing. 그날 나는 수를 쫓아가지 않았다. 지쳐서 그냥 앉아 있었다. 그랬더니 수가 왔다.
쫓아가면 달아났다. 기다리면 왔다.
그걸 어떻게 문장으로 만들지. 한 교수에게. 이십 년 동안 쫓아간 사람에게.
버스가 흔들렸다. 창밖에 은행잎이 다 떨어진 가로수가 지나갔다.
그날 밤 서재에서 이면지 한 장을 폈다. 맨 위에 적었다. 보는 법. 그 아래에 한 줄을 적으려다 멈췄다. 줄을 그었다. 다시 적으려다 멈췄다.
안방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해인은 서아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스탠드 불빛만 켜진 서재에서, 나는 빈 줄을 보고 있었다.
알고 싶었다. 어떻게 기다리는지. 무엇을.
김이 흐르고 있었다.
시장이었다. 반투명한 지붕. 공중에 굳은 물줄기. 어묵 냄비 위의 멈춘 김. 그리고 통로 끝, 낡은 간판의 국밥집 앞에서 한 줄기 흐르는 김.
가을이 솥 앞에 서 있었다. 붉은 앞치마. 소매를 걷고. 실핀 두 개.
"우진 아저씨."
가을이 주걱을 멈추지 않고 고개만 돌렸다.
"오늘은 새우젓 한 숟가락 반이에요. 지난번보다 반 더."
"……엄마 거 맛이 나요?"
"아직요. 근데 가까워졌어요. 아마."
가을이 국자로 국물을 떠서 작은 종지에 담았다. 두 손으로 내밀었다. 나는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 지난번보다 짰다. 그래도 싱거웠다. 그 사이 어딘가였다.
"조금 더 가까워요."
"먹어 보고 넣으래요."
가을이 웃었다. 코로. 흥.
화구의 파란 불꽃이 솥 아래에서 타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불꽃. 가을이 붙인 불. 솥 가까이, 한 걸음 안에만 온기가 있었다. 나는 그 한 걸음 가장자리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딸깍.
소리가 났다.
통로 저쪽에서. 멀리. 딱딱한 것이 시멘트 바닥에 닿는 소리.
딸깍. 딸깍.
소리가 통로를 따라 굴러왔다. 멈춘 공기 속으로, 삼켜지지 않고. 시장 끝의 셔터에 부딪혀서 돌아왔다. 딸깍, 딸깍.
가을의 주걱이 멈췄다.
"……아저씨 발소리 아니죠?"
"아니요."
나는 앉아 있었다. 가을도 알았다.
소리였다. 가을의 것도, 내 것도 아닌.
그 사 년 동안 도서관에서 나는 소리를 모았다. 내 발소리. 내 숨. 볼펜 굴러가는 소리. 물시계의 똑. 전부 내가 낸 소리였다. 손님들이 오시면 손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사람의 소리였다.
짐승의 소리는 한 번도 없었다. 사 년 동안 단 한 번도. 새도, 개도, 모기 한 마리도. 매미는 가로수에 붙은 채 멈춰 있었고, 비둘기는 광장 위 공중에 떠 있었다. 날개를 반쯤 편 채로.
그런데 지금 무언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발톱으로.
소리가 가까워졌다. 딸깍.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다른 소리. 흐, 흐. 짧고 거친. 숨소리였다.
채소 가게 좌판 옆에서 그것이 나왔다.
회색이었다.
등이 짙은 회색이고, 배 쪽으로 갈수록 옅어지는. 털이 두껍고 거칠었다. 다리가 길었다. 가슴이 좁고, 옆구리에 갈비뼈 자리가 드러나 있었다. 굶은 몸이었다. 꼬리가 낮게, 곧게 내려와 있었다. 귀가 섰다. 왼쪽 귀 끝이 찢겨 있었다. 오래된 상처였다. 끝이 둥글게 아물어 있었다.
눈이 노랬다.
그것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톱이 바닥에 닿았다. 딸깍. 입에서 하얀 김이 나왔다. 숨이었다. 흩어졌다. 흘러서. 이 시장에서 가을의 솥 말고 처음 보는, 움직이는 흰 것.
"……개예요?"
가을이 속삭였다. 국자를 든 채로. 움직이지 않고.
"아니요."
개가 아니었다. 다리가 너무 길었다. 머리가 낮았다. 나를 보는 눈이 개의 눈이 아니었다. 사람을 몰라서 사람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 눈.
늑대였다.
나는 의자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무릎을 꿇었다. 시멘트 바닥에. 몸을 낮추었다. 늑대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턱 아래쯤을 보았다.
바닥이 차가웠다. 바지 무릎으로 냉기가 올라왔다. 그 사 년 동안 나는 손님들 앞에서 수없이 허리를 숙였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댄 적도 있었다. 그건 예였다. 이름을 대고, 내가 누구인지 밝히는.
지금은 달랐다. 이름을 댈 수 없는 상대였다. 낮아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곱 살 무렵이었다. 할아버지 공장 정문 경비실에 누렁이가 살았다. 목줄이 긴. 나는 처음 그 개를 보고 달려갔다가 이빨을 보았다. 울면서 할아버지 다리 뒤로 숨었다.
할아버지가 쪼그려 앉아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먼저 가지 마라. 눈 똑바로 보지 말고. 손바닥 말고 손등. 그리고 기다려. 개가 오게.
그날 누렁이는 한참 뒤에 왔다. 내 손등에 코를 댔다. 차갑고 축축했다. 나는 그 차가움을 오래 기억했다. 그 뒤로 개를 키워 본 적은 없었다.
해인은 개를 키우고 싶어 했다. 연애할 때부터. 서아를 가졌을 때도. 나는 늘 나중에, 라고 했다. 규정을 확인해 보고. 서아가 조금 더 크면. 확인할 게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생각이 무릎 위로 스쳐 갔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나는 그걸 붙들지 않았다. 늑대를 보았다.
늑대가 멈췄다. 솥에서 네댓 걸음 떨어진 곳에서.
코가 움직였다. 공중을 더듬었다. 솥 쪽으로. 냄새는 솥 가까이, 한 걸음 안에만 있었다. 늑대가 한 걸음 더 왔다. 또 한 걸음. 그 한 걸음 안으로 코끝이 들어왔다.
늑대가 멈췄다. 눈을 반쯤 감았다. 코만 움직였다. 뼈를 오래 곤 냄새. 대파. 마늘.
가을이 숨을 참고 있었다. 국자 끝에서 국물 한 방울이 떨어져 솥으로 돌아갔다.
늑대가 가을을 보았다. 국자를 보았다. 불꽃을 보았다.
이빨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도망치지 않았다.
늑대가 몸을 돌렸다. 화구 옆. 불꽃의 온기가 닿는 자리. 거기서 한 바퀴를 돌았다. 제자리에서. 그리고 엎드렸다. 앞발을 가지런히 뻗고, 그 위에 턱을 얹었다.
옆구리가 오르내렸다. 천천히.
"……아저씨."
가을이 속삭였다. 아주 작게.
"이것도 손님이에요?"
"……모르겠어요."
막힌 얼굴이 아니었다. 우리처럼 무언가에 막혀서 온 얼굴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되려는 참인 얼굴. 지금의 저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려는. 나는 그렇게밖에 볼 수 없었다.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말고 손등. 바닥 가까이. 늑대의 코에서 한 뼘 반 떨어진 곳에.
그리고 기다렸다.
늑대가 눈을 떴다. 내 손을 보았다. 한참.
초침이 돌았다. 한 바퀴. 나는 세지 않았다.
늑대가 고개를 들었다. 목을 길게 뺐다. 코끝이 다가왔다. 멈췄다. 다시 다가왔다.
닿았다.
차갑고 축축했다. 누렁이처럼. 그리고 그다음에 숨이 왔다. 따뜻한. 내 손등 위로. 흐, 하고.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 년 동안 그 도서관에서, 그리고 돌아와 여기 드나드는 넉 달 동안. 이 멈춘 세상에서 짐승의 숨이 내 손에 닿은 건 처음이었다. 사람의 숨도 아닌. 말이 없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늑대가 내 손등의 냄새를 오래 맡았다. 그리고 고개를 거두었다. 다시 앞발 위에 턱을 얹었다.
그게 다였다.
나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 자리에 두었다.
가을이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국자를 솥 가장자리에 걸치고. 솥 옆에서. 늑대와 두 걸음 떨어져서.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있었다. 꽉 쥐고.
"저는 못 하겠어요. 아직."
"안 해도 돼요."
"무서워서가 아니라요."
가을이 늑대의 옆구리를 보았다. 오르내리는.
"무섭기도 한데. 만지면, 가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요."
나는 가을을 보았다. 가을은 늑대를 보고 있었다.
그때 늑대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코로. 앞발 위에서 턱이 조금 들렸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가을이 입을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소리 없이.
"한숨 쉬어요, 얘. 사람처럼."
"……피곤했나 봐요."
"멀리서 왔나 봐요."
가을이 늑대의 발을 보았다. 발바닥 사이에 마른 흙이 끼어 있었다. 이 시장의 흙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흙도.
"아까 그 소리요."
가을이 말했다. 늑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딸깍, 딸깍. 처음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요. 여기 와서 그런 소리 처음 들어 봐서. 제 발소리 말고. 아저씨 목소리 말고."
"……"
"근데 무섭기만 한 게 아니었어요. 이상하죠."
가을이 조그맣게 웃었다.
"누가 온다는 소리잖아요. 그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을 말이 맞았다. 그 사 년 동안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소리가 그것이었다. 누가 오는 소리. 복도 끝에서, 계단 아래에서. 나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손님들은 소리 없이 그냥 거기 계셨다.
늑대의 발톱 소리는 멀리서부터 들렸다. 오는 동안 내내.
나는 무심코 통로 저편을 보았다.
생선 가게 옆 냉장 진열대 유리. 형광등 불빛이 하얗게 번진. 그 속, 통로의 가장 먼 끝. 시장 입구 쪽.
그것이 서 있었다.
지난번과 같은 자리였다. 수십 걸음. 가을의 등을 향해.
셋. 넷. 다섯.
늑대의 귀가 한 번 움직였다. 입구 쪽으로.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늑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가을은 늑대를 보고 있었다. 그걸로 되었다.
초침이 스무 바퀴를 넘었을 때, 손끝이 당겨졌다.
가을이 알아챘다. 내 얼굴을 보고.
"가요?"
"네. 곧."
"얘는요?"
가을이 늑대를 보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조금 겁먹은 얼굴로.
"아저씨 가면 저 혼자 얘랑 있어요. 어떻게 해요?"
"……모르겠어요."
가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다 웃었다.
"아저씨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네."
"근데 이상하게 괜찮네요. 모른다고 하니까."
가을이 솥의 불을 줄였다. 끄지 않았다. 늑대가 엎드린 자리까지 온기가 닿도록.
나는 늑대를 한 번 더 보았다. 앞발 위의 턱. 반쯤 감긴 노란 눈. 찢긴 왼쪽 귀 끝.
늑대는 나를 보지 않았다. 불을 보고 있었다.
서재였다.
스탠드 불빛. 이면지. 보는 법. 그 아래 그어 놓은 줄들.
안방에서 해인이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깨지는 않았다. 아무도 재지 않았다. 창밖이 아직 캄캄했다. 새벽 한 시 사십 분.
나는 손등을 코에 대 보았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늑대의 숨은 거기 남았다. 그 세상의 것이니까.
그래도 손등이 따뜻한 것 같았다. 기분 탓이었다. 알면서 오래 대고 있었다.
일어나서 안방 문 앞까지 갔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보았다. 해인이 모로 누워 있었다. 서아가 해인의 팔을 베고, 이불을 발로 차 낸 채로 자고 있었다. 작은 발바닥 두 개가 이불 밖에 나와 있었다.
서아의 숨소리가 들렸다. 새근, 새근. 해인의 숨소리도. 조금 더 길게.
흐르는 세상의 숨이었다. 나는 문간에 서서 한참 그 소리를 들었다. 들어가서 이불을 덮어 주지 않았다. 깨울까 봐. 그냥 들었다. 둘이 거기 있다는 소리를.
수첩을 폈다. 방문 기록. 열 번째.
— 서재. 한 교수의 물음. 이십 분 남짓. 시장. 새우젓 한 숟가락 반.
— 늑대. 회색. 왼쪽 귀 끝이 찢김. 불 옆에 엎드림. 도망치지 않음.
— 손등. 닿았다.
— 가을은 만지지 않았다. (가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 그것: 통로 끝. 그대로.
그리고 이면지로 돌아갔다. 보는 법. 줄 그은 자리들 아래에 한 줄을 적었다.
— 쫓아가면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면, 왔습니다. 제가 아는 건 그것뿐입니다.
한 교수에게 보낼 문장은 아니었다. 수학도 아니었다. 그래도 지우지 않았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서아가 엘리베이터에서 개를 만났다.
일요일 아침, 서아와 둘이 빵집에 가기로 했다.해인은 밀린 빨래를 돌리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세탁기가 덜컹거렸다. 식탁에는 해인이 마시다 만 커피가 반 잔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마셨다. 식은 커피. 쓴맛이 혀 뒤에 오래 남았다."빵 사 오면서 우유도."해인이 베란다에서 소리쳤다. 세탁기 소리를 넘어서."흰 우유. 서아 거 말고 큰 거.""응.""그리고 당신 거 소보로 말고 다른 거. 맨날 소보로만 먹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인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서아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겨 달라고 발을 내밀었다. 찍찍이를 붙여 주자 서아가 따라 했다. 찌익.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나는 가스레인지를 보았다. 꺼져 있었다. 문을 잠그고 손잡이를 한 번 당겨 보았다. 잠갔고. 서아가 옆에서 따라 했다. 잠갔고!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거울 앞에서 셋을 셌다. 서아가 옆에서 손가락을 폈다. 하나 둘 셋 많이.문이 열렸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14층에서 타서 내려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흰머리를 짧게 자른 할머니. 누빔 조끼. 그리고 할머니 발치에 개 한 마리.누런 털에 등 쪽만 조금 희끗한. 귀가 한쪽은 서고 한쪽은 접힌. 주둥이 둘레가 하얗게 센. 늙은 개였다.서아가 내 다리 뒤로 숨었다. 바지 자락을 두 손으로 쥐고."……멍멍이.""안 물어. 얘는 이빨도 몇 개 없어."할머니가 웃었다. 개가 서아 쪽으로 코를 한 번 킁 했다. 서아가 바지 자락을 더 세게 쥐었다. 그런데 숨지는 않았다. 내 다리 옆으로 얼굴을 반만 내밀고 개를 보았다. 눈이 동그랬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서아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반은 숨고 반은 보고.1층에서 문이 열리자 개가 먼저 나갔다. 천천히. 뒷다리가 조금
한 교수의 연구실은 이공관 사 층 복도 끝에 있었다.토요일 오전 열 시.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문에 붙은 이름표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내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발소리 들었어요. 토요일엔 이 층에 아무도 안 와서."한 교수가 흰 운동화를 신고 서 있었다. 회색 니트 소매에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책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인 방이었다. 창가에 말라 가는 화분 하나. 칠판은 지우개 자국으로 뿌옜다. 한 교수가 의자를 하나 비워 주었다. 의자 위에 쌓여 있던 논문 더미를 바닥으로 옮기면서.한 교수는 서른한 번째 장 복사본을 먼저 폈다. 빨간 동그라미 옆, 여백의 내 글씨. 같이 먹어 보고, 넣어 주십시오.한 교수가 그 줄을 한참 보다가 웃었다. 소리 내어. 안경이 콧등으로 미끄러질 만큼."이게 무슨 수학이에요."그러고는 칠판 앞으로 갔다. 분필을 쥐고, 한 걸음씩 적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보았다. 틀리면 말했다. 거기 아니에요. 한 교수는 왜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지우고 다시 적었다. 흰 운동화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한 시간이 금방 갔다.한 교수가 분필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의 분필 가루를 바지에 닦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이우진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네.""이우진 씨 눈에 보이는 거요. 저도 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보여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한 교수가 기다렸다. 그러다 먼저 웃었다."그렇겠죠. 알면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죠. 숙제로 할게요. 저도, 이우진 씨도."한 교수가 칠판 모서리를 분필로 톡톡 쳤다. 세 번. 그리고 칠판 한구석에 작게 적었다. 어떻게 보이는가.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이십 년 전에 제 지도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바람이 없었다. 똑딱.교문이 아니었다.지붕이 있었다. 반투명한 플라스틱 지붕. 그 아래로 좁은 통로가 길게 뻗어 있고, 양옆으로 가게들이 다닥다닥. 천막, 좌판, 빨간 고무 대야, 플라스틱 바구니. 형광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시장이었다.나는 통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생선 가게. 얼음 위에 고등어와 갈치가 은빛으로 누워 있었다. 주인이 방금 물을 뿌린 모양이었다. 대야에서 쏟아진 물줄기가 공중에서 굳어 있었다. 유리 막대처럼. 물방울 몇 개가 갈치 비늘 위에 떠 있었다.맞은편 어묵 가게. 커다란 사각 냄비에 꼬치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 위로 김이 피어오르다 멈춰 있었다. 하얀 솜뭉치처럼. 냄비 위 한 뼘에 걸려서.그 옆 전 가게. 넓은 철판 위에 기름이 끓다 멈췄다. 방울방울 부풀어 오른 채로. 동그랑땡 하나가 뒤집히다가 공중에 떠 있었다. 뒤집개 끝에서 반쯤 떨어져.전부 아침이었다. 늦가을 아침 여덟 시 칠 분의 시장. 장사를 막 시작한. 채소 가게 앞 소쿠리에 쪽파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누군가 새벽에 다듬어 놓은. 가격표가 매직으로. 한 단 삼천 원.아무도 없었다.그런데.통로 저편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하얀 것이. 천장의 형광등 아래서. 피어올라서, 흩어지고, 또 피어올라서, 흩어지는.김이었다.흐르는.나는 그 김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통로 끝 가까이, 오른쪽. 간판이 낡은 작은 가게. 돼지국밥. 유리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앞에 가마솥 두 개가 가스 화구 위에 올라 있었다. 하나는 김이 멈춰 있었다. 솥뚜껑 틈에서 새어 나오다 굳은 하얀 솜뭉치.다른 하나에서 김이 흘렀다.솥 앞에 가을이 서 있었다.교복 치마 위에 가게 앞치마를 두르고. 붉은색.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긴
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손님이요?""대학교수래."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나는 눈을 감았다.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뭐라고 하셨어요?""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너 뭐 했냐.""……수학 문제요.""수학 문제."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
분기마다 한 장씩 내야 하는 종이였다.사내 개선 제안서. 전 직원 의무. 칸이 다섯 개. 현재 문제, 원인, 개선 방법, 예상 효과, 제안자. 내면 커피 쿠폰 한 장을 주고, 뽑히면 상품권을 주었다. 대부분은 마감 날 오후에 오 분 만에 썼다. 탕비실 커피 머신 위치를 바꾸자, 복사기 옆에 쓰레기통을 하나 더 두자.나도 삼 년 동안 그렇게 썼다. 마감 날 오후, 오 분 만에.그 분기 마감은 목요일이었다. 오후 다섯 시 반. 총무팀에서 메일이 왔다. 품질관리팀 이우진 대리님, 미제출.나는 빈 양식을 띄웠다. 현재 문제.측정실 벽 너머에서 가공 라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선반이 쇠를 깎는 소리. 그 라인에서 나온 부품은 바로 측정대로 온다. 뜨거운 채로. 깎을 때 난 열이 아직 남은 채로.나는 그걸 매일 보았다. 삼 년 동안은 그냥 보았다. 돌아와서는 보였다.쇠는 뜨거우면 늘어난다. 아주 조금. 그 조금이 공차의 절반을 먹는다. 뜨거울 때 재서 합격한 부품이, 식으면 줄어서 불합격이 된다. 거꾸로도. 라인은 그 오차를 잡으려고 매일 기계를 조금씩 고치고, 고친 기계는 다음 날 또 틀어지고. 생산팀은 그 때문에 야근을 했다. 매일.측정을 삼십 분만 늦추면 됐다. 식힌 다음에. 그리고 기준면을 하나 바꾸면. 지그가 부품을 잡는 자리를, 열이 가장 덜 가는 쪽으로.나는 다섯 칸을 채웠다. 칠 분 걸렸다. 커피 쿠폰 한 장.제출을 누르고, 퇴근했다.그 주 내내 머릿속엔 다른 것이 있었다. 누런 빛. 떠 있는 서가. 도시락 가방에 얼굴을 묻고 울던 가을. 우진 아저씨, 하고 부르던 목소리의 메아리. 그 종이 한 장은 커피 쿠폰과 함께 금방 잊었다.잊은 종이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다음 주 화요일, 생산팀 과장님이 측정실에 찾아왔다.손에 내 제안서를 출력해서
오민재가 달라졌다.처음엔 몰랐다. 측정실에서 나란히 앉아 샘플을 잴 때였다. 오민재가 캘리퍼스를 영점에 맞추고, 부품을 쟀다. 그리고 소리 내어 말했다."12.03. 확인."나는 캘리퍼스를 든 손을 멈췄다.다음 부품."12.04. 확인."오민재는 나를 보지 않았다. 표에 숫자를 적고, 다음 부품을 집었다. 확인. 확인.그날 오후 오민재가 올린 보고서는 내 보고서와 똑같았다. 항목 순서, 표의 모양, 맨 끝에 붙이는 한 줄 요약. 내가 삼 년 동안 써 온 방식을. 오민재는 원래 표를 가로로 그렸다. 색을 많이 썼다. 요약은 맨 앞에 두었다. 그게 오민재의 보고서였다.이번 건 내 것이었다."민재 씨."퇴근 무렵, 나는 오민재의 자리로 갔다."보고서 양식 바꿨어요?"오민재가 얼굴을 붉혔다. 안경을 밀어 올렸다."아, 네. 대리님 거 보고…… 대리님처럼 하고 싶어서요. 대리님은 자료 안 보고도 다 보시잖아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대리님 하시는 거 다 따라 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요. 확인하는 거랑, 표 그리는 거랑."나는 오민재를 보았다."부품은요? 요즘도 뒤집어 봐요?""……네?""3번 캐비티 찾을 때. 부품을 뒤집어서 안쪽 숫자를 봤잖아요. 요즘도 그렇게 해요?"오민재가 머뭇거렸다."요즘은 잘…… 대리님은 안 뒤집어 보시잖아요. 그냥 보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냥 보려고 연습하고 있어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오민재는 부품을 뒤집어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걸, 뒤집어서 찾는. 그게 오민재의 손이었다. 그 손을 내려놓고, 내 눈을 흉내 내고 있었다.그리고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