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
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
"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
"손님이요?"
"대학교수래."
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
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
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
"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
나는 눈을 감았다.
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
"……뭐라고 하셨어요?"
"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
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
"너 뭐 했냐."
"……수학 문제요."
"수학 문제."
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
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 무릎 위에 누런 서류 봉투.
내가 보낸 봉투였다.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일어섰다. 빨랐다. 백팩이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이우진 씨?"
"네."
그 사람이 봉투에서 이면지 묶음을 꺼냈다. 뒤집어서, 도면이 보이게.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 번호. 회사 이름.
그리고 다시 뒤집었다. 내 글씨가 보이게.
"이거 누가 썼습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무언가를 참고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 이면지를 보았다. 쉰 장 넘게. 틀린 줄은 두 줄로 긋고. 첫 장에 짧게. 누군가 이어 주십시오.
숨길 수 있었다. 모른다고. 이면지는 누구나 가져간다고. 우리 팀에 복사기가 있다고.
숨기는 거랑 안 나서는 건 달라.
"제가 썼습니다."
그 사람이 숨을 내쉬었다. 길게. 그리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면지를 가슴에 안고.
"……다행이다."
"네?"
"못 찾을 줄 알았어요. 보름 동안 이것만 봤어요. 밤마다. 누가 썼는지 모르면 물어볼 데가 없잖아요."
그 사람이 안경을 벗어 니트 자락에 닦았다. 다시 썼다. 손을 내밀었다.
"한이라고 합니다. 수학과."
"이우진입니다. 품질관리팀."
한 교수의 손이 차가웠다. 긴장해서. 검지 손톱 끝에 하얀 가루가 끼어 있었다. 분필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칠판 앞에 서 있다 온 사람의 손.
그 도서관에서 흰 옷의 수학자가 떠난 뒤, 내 손금에 남아 있던 석판 가루가 생각났다. 짧게. 그리고 지나갔다.
선배가 시킨 커피가 왔다. 둘. 로비 카페에서.
한 교수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이면지를 탁자 위에 펼쳤다. 한 장씩. 빠르게. 원하는 장을 찾아서.
"여기요."
스물세 번째 장이었다.
"이 줄. 여기까지는 알려진 길이에요. 누가 어디까지 왔는지 다 논문에 있어요. 그런데 이 줄부터."
한 교수가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 줄에서 봉투 끝까지.
"여기부터 끝까지는 아무도 안 간 데예요. 제가 아는 한. 저는 그 첫 다섯 장 중에 한 걸음을 확인하는 데 열흘 걸렸어요. 밤마다. 맞았어요. 그다음 걸음은 아직 확인 못 했어요. 그런데 틀린 데를 못 찾겠어요."
한 교수가 나를 보았다.
"증명이 없어요. 한 줄도. 결론만 있어요. 여기서 여기로. 그다음 여기로. 계단을 건너뛰고 착지만 한 것처럼. 그런데 착지한 자리가 맞아요."
"……"
"어떻게 했어요?"
나는 커피 잔을 쥐었다.
"……보였어요."
한 교수가 멈췄다.
"보였다고요."
"네. 보였어요. 증명은 못 해요. 어떻게 보이는지도 설명 못 해요. 그냥 여기서 보면, 저기가 보여요."
This is not counting. This is seeing.
흰 옷의 수학자가 석판을 무릎에 올리고 한 말이었다. 셈이 아니라 봄이다.
한 교수가 나를 오래 보았다. 안경 너머로. 그 눈이 아주 조금 젖어 있는 것 같았다.
"……백 년쯤 전에."
한 교수가 말했다. 작게. 혼잣말처럼.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해요. 증명 없이 먼저 적는. 공책 가득. 나중에 사람들이 그 공책을 증명하느라 백 년을 썼어요. 아직도 쓰고 있고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나는 알았다. 석판. 팔꿈치의 회색 가루. 흰 천. 맨발. Beautiful.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전공이 뭐였어요?"
"기계공학이요. 수학은 교양으로만."
"그럼 이건 어디서 배웠어요?"
"……책으로요."
두 번째였다. 병원 로비에서 셀밤 씨에게 한 말. 거짓말이 아닌데 거짓말 같은.
한 교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웃었다. 믿지 않는다는 웃음이 아니었다. 더 묻지 않겠다는 웃음이었다.
"책으로요. 그래요. 저도 책으로 배웠어요. 사십 년 동안. 이만큼은 못 왔고."
한 교수가 이면지를 넘겼다. 스물두 번째 장. 스물세 번째 장 바로 앞.
"여기 이 줄 있죠. 알려진 길이 끝나는 자리."
"네."
"이십 년 전에 제가 여기서 멈췄어요."
나는 한 교수를 보았다.
"박사 끝나고 삼 년. 이 물음 하나만 붙들었어요. 여기까지 왔어요. 그리고 한 걸음이 안 났어요. 일 년을 더 앉아 있었어요. 안 났어요. 그래서 내려놨어요. 다른 걸 했어요. 논문 쓰고, 학생 가르치고, 교수 되고."
한 교수가 그 줄을 손끝으로 쓸었다.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보름 전에 학과 조교가 이 봉투를 제 책상에 올려놨어요. 교수님들께, 라고 써 있어서 아무도 안 가져간다고. 열어 보니까 첫 장에 이 물음이 있더라고요. 이십 년 전에 제가 내려놓은. 그리고 스물두 번째 장에 제가 멈춘 자리가 있고. 그다음 장부터."
한 교수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누가 거기서 걸어갔더라고요. 제가 못 간 데를."
그 도서관 해인의 창가 자리. 펼쳐진 수론 책. 여백에 연필로 Beautiful. 누군가 이 앞에서 멈춰서, 아름답다고 적었다.
이 물음 앞에서도 누군가 멈췄을 거라고, 나는 서점 바닥에 서서 생각했다. 이백 년 동안 여러 사람이.
그중 한 사람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흰 운동화를 신고.
"……교수님이 멈춘 자리까지 오셨으니까, 제가 거기서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건 책에 다 있는 거예요. 누구나 거기까진 와요."
"누구나 거기까진 안 와요."
한 교수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 안경을 벗었다. 이번엔 닦지 않았다. 손등으로 눈가를 한 번 눌렀다.
한 교수가 이면지를 모았다. 순서대로. 가지런히. 그리고 첫 장을 맨 위에 놓았다. 누군가 이어 주십시오.
"이거 보고 처음엔 화가 났어요."
"……네?"
"이름을 안 썼잖아요. 이걸 쓴 사람이 이걸 버린 줄 알았어요. 학과 사무실에 던져 놓고. 이렇게 귀한 걸. 그래서 찾았어요. 도면 번호로. 회사 대표번호로. 따지려고."
한 교수가 이면지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까, 버린 게 아니더라고요. 누군가 이어 달라고. 부탁하는 거더라고요."
나는 한 교수를 보았다.
"……네. 부탁이었어요."
"왜 이름을 안 썼어요?"
나는 대답을 골랐다.
"제 이름이 들어가면, 이게 제 것이 될 것 같아서요. 저는 여기까지밖에 못 왔어요. 끝은 못 봤어요. 끝을 볼 사람이 따로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이 제 이름을 보고 제 길을 따라오면, 제가 틀린 데서 같이 틀릴 거예요."
한 교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에 서고 싶지 않아요. 제가 앞에 서면, 사람들이 묻겠죠. 어떻게 했냐고. 저는 대답을 못 해요. 보였다고밖에."
"……수학에서 이름 없는 결과는 없어요."
한 교수가 말했다. 조용히.
"누가 했는지 모르는 증명은 믿지 않아요. 확인할 수가 없으니까.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까. 이게 아무리 맞아도, 이름이 없으면 학과 사무실 서랍에서 먼지만 쌓여요."
나는 이면지를 보았다. 서랍. 먼지.
도서관 3층 자료실 서가. 먼지 안 앉은 빈자리. 필사 씨의 노트가 꽂혀 있던.
"그럼."
내가 말했다.
"교수님이 확인해 주세요. 한 걸음씩. 교수님 방식으로. 증명을 붙여서. 저는 보이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확인은 교수님이 하시고요. 제가 틀리면 틀렸다고 해 주시고요."
한 교수가 나를 보았다.
"……그럼 이름은요?"
"그건 나중에요."
한 교수가 웃었다. 이번엔 크게.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돌아볼 만큼.
"이상한 사람이네, 이우진 씨."
"자주 들어요. 요즘."
정말이었다. 선배에게, 상무에게, 해인에게. 이상한 사람. 사 년 전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한 교수는 격주 토요일 오전에 한 시간씩 만나자고 했다. 학교 연구실에서. 나는 해인에게 물어보겠다고 했다. 한 교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내분한테요?"
"토요일 오전은 서아 문화센터 수업이 있어서요. 딸이요. 제가 데려가는 날이 있어요."
한 교수가 한참 나를 보다가, 또 웃었다.
"수업 없는 토요일로 하죠."
한 교수가 백팩을 멨다. 일어서려다 멈췄다. 내 손목을 보았다.
"태엽 시계네요."
"네. 할아버지 거요."
"요즘 태엽 시계 차는 사람 드문데. 매일 감아요?"
"네. 스무 번."
"스무 번."
한 교수가 그 말을 되뇌었다. 수를 들은 사람처럼. 그리고 이면지 봉투에서 한 장을 꺼냈다. 서른한 번째 장.
"마지막으로 하나만요."
한 교수가 그 장의 가운데를 짚었다. 한 줄에서 다음 줄로 넘어가는 자리.
"여기요. 여기서 여기로 넘어간 거. 여기가 제일 궁금해요. 이건 계단 하나가 아니라 층 하나를 건너뛴 거예요. 한 줄이라도 좋으니까 왜 이렇게 되는지 써 줄 수 있어요? 다음에 만날 때까지. 이유를. 한 줄만."
나는 그 자리를 보았다.
서른한 번째 장. 기억났다. 서재. 새벽 한 시. 서아의 많이, 가 벽에 붙어 있던 밤. 그 줄에서 그다음 줄이 그냥 보였다. 계단이 아니라,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기 있는 방처럼.
"……써 볼게요."
"한 줄만요."
한 교수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도 허리를 숙였다. 한 교수가 로비 회전문을 밀고 나갔다. 백팩이 흔들렸다. 흰 운동화가 보도블록 위를 빠르게 걸어갔다.
측정실로 돌아오자 선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뭐래."
"……제가 푼 수학 문제가 맞대요. 반쯤."
선배가 멈췄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다 고개를 들었다.
"대학교수가 서울에서 한 시간 걸려서 와서, 맞대?"
"반쯤이요."
선배가 한참 나를 보더니, 이마의 안경을 내려 썼다. 다시 올렸다. 다시 내려 썼다.
"야. 근데 그걸 왜 회사 이면지에 했냐. 도면 번호 박힌 걸로. 그거 보안 교육 때 걸리면 너 경위서야."
"……폐기본이에요."
"폐기본이어도."
선배가 혀를 찼다. 그리고 웃었다. 코로. 흥.
"다음부턴 집에서 연습장 사서 해. 연습장 하나에 천 원이다."
그날 저녁 식탁에서 해인에게 말했다. 대학교수가 찾아왔다고. 내가 보낸 수학 종이를 들고.
해인은 숟가락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한참.
"당신 그거 보냈어? 이름도 없이?"
"응."
"그런데 찾아왔어?"
"이면지 뒷면에 회사 도면이 있었어."
해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밥알이 튈 뻔했다. 서아가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당신이? 확인의 왕이? 뒷면을 안 봤어?"
"……응."
"사 년 치 확인을 다 어디다 쓰고."
해인은 그 말을 하고 나서 멈췄다. 사 년. 자기가 한 말에 놀란 얼굴로. 나도 멈췄다. 해인은 아직 그 사 년이 무엇인지 몰랐다. 녹음 파일 속의 천오백일. 금. 이름.
해인은 더 묻지 않았다. 서아의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어 주었다.
그날 밤 서재에서 서른한 번째 장의 복사본을 폈다.
한 교수가 두고 간. 그 자리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한 교수의 동그라미.
그 옆 여백에 한 줄을 쓰려고 볼펜을 댔다.
왜 이렇게 되는지.
나는 그 줄을 보았다. 그리고 다음 줄을 보았다. 둘 사이가 보였다. 분명히. 저기서 여기로 오는 길이. 그런데 그 길을 말로 옮기려고 하면, 첫 발을 어디에 디뎌야 할지 몰랐다. 길이 보이는데 발자국이 없었다.
한 교수는 발자국을 원했다. 한 걸음씩. 따라올 수 있는.
선배도 그랬다. 불량을 보는 눈, 첫째 둘째 셋째.
가을도 그랬다. 공책에 적힌 대로 하면 되는 거죠.
오민재도. 대리님처럼 하고 싶어서요.
모두 발자국을 원했다. 그리고 나는 발자국을 줄 수 없었다. 내가 걸어온 게 아니라, 보였을 뿐이니까.
아니. 걸어왔다. 사 년을. 그 사 년이 발자국이었다. 그건 한 줄에 적을 수가 없었다.
"……당신 또 서재야?"
해인이 문틈에 서 있었다. 잠옷 위에 카디건.
"응. 조금만."
"한 교수님인가 하는 분 숙제?"
"응. 한 줄만 써 달래."
"한 줄?"
"응. 한 줄."
해인이 웃었다.
"당신이 한 줄로 끝낸 적이 있었나. 칠 년 동안. 문자도 세 줄씩 보내는 사람이."
해인은 들어오지 않았다. 문을 반쯤 열어 둔 채로 돌아섰다.
"한 시 전엔 자. 선배님이 또 나한테 문자 하시기 전에."
발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서른한 번째 장을 다시 보았다. 빨간 동그라미. 한 교수의 동그라미. 가을의 오답노트처럼. 빨간 펜.
한 줄.
볼펜 끝이 여백에 닿아 있었다. 잉크가 작은 점으로 번졌다. 점이 조금씩 커졌다.
이유는 거기 있었다. 보였다. 손에 잡히지 않았다.
써야 했다. 한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쓸 수 없었다.
볼펜 끝의 점이 번지다가.
멈췄다.
일요일 아침, 서아와 둘이 빵집에 가기로 했다.해인은 밀린 빨래를 돌리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세탁기가 덜컹거렸다. 식탁에는 해인이 마시다 만 커피가 반 잔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마셨다. 식은 커피. 쓴맛이 혀 뒤에 오래 남았다."빵 사 오면서 우유도."해인이 베란다에서 소리쳤다. 세탁기 소리를 넘어서."흰 우유. 서아 거 말고 큰 거.""응.""그리고 당신 거 소보로 말고 다른 거. 맨날 소보로만 먹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인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서아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겨 달라고 발을 내밀었다. 찍찍이를 붙여 주자 서아가 따라 했다. 찌익.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나는 가스레인지를 보았다. 꺼져 있었다. 문을 잠그고 손잡이를 한 번 당겨 보았다. 잠갔고. 서아가 옆에서 따라 했다. 잠갔고!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거울 앞에서 셋을 셌다. 서아가 옆에서 손가락을 폈다. 하나 둘 셋 많이.문이 열렸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14층에서 타서 내려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흰머리를 짧게 자른 할머니. 누빔 조끼. 그리고 할머니 발치에 개 한 마리.누런 털에 등 쪽만 조금 희끗한. 귀가 한쪽은 서고 한쪽은 접힌. 주둥이 둘레가 하얗게 센. 늙은 개였다.서아가 내 다리 뒤로 숨었다. 바지 자락을 두 손으로 쥐고."……멍멍이.""안 물어. 얘는 이빨도 몇 개 없어."할머니가 웃었다. 개가 서아 쪽으로 코를 한 번 킁 했다. 서아가 바지 자락을 더 세게 쥐었다. 그런데 숨지는 않았다. 내 다리 옆으로 얼굴을 반만 내밀고 개를 보았다. 눈이 동그랬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서아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반은 숨고 반은 보고.1층에서 문이 열리자 개가 먼저 나갔다. 천천히. 뒷다리가 조금
한 교수의 연구실은 이공관 사 층 복도 끝에 있었다.토요일 오전 열 시.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문에 붙은 이름표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내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발소리 들었어요. 토요일엔 이 층에 아무도 안 와서."한 교수가 흰 운동화를 신고 서 있었다. 회색 니트 소매에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책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인 방이었다. 창가에 말라 가는 화분 하나. 칠판은 지우개 자국으로 뿌옜다. 한 교수가 의자를 하나 비워 주었다. 의자 위에 쌓여 있던 논문 더미를 바닥으로 옮기면서.한 교수는 서른한 번째 장 복사본을 먼저 폈다. 빨간 동그라미 옆, 여백의 내 글씨. 같이 먹어 보고, 넣어 주십시오.한 교수가 그 줄을 한참 보다가 웃었다. 소리 내어. 안경이 콧등으로 미끄러질 만큼."이게 무슨 수학이에요."그러고는 칠판 앞으로 갔다. 분필을 쥐고, 한 걸음씩 적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보았다. 틀리면 말했다. 거기 아니에요. 한 교수는 왜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지우고 다시 적었다. 흰 운동화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한 시간이 금방 갔다.한 교수가 분필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의 분필 가루를 바지에 닦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이우진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네.""이우진 씨 눈에 보이는 거요. 저도 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보여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한 교수가 기다렸다. 그러다 먼저 웃었다."그렇겠죠. 알면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죠. 숙제로 할게요. 저도, 이우진 씨도."한 교수가 칠판 모서리를 분필로 톡톡 쳤다. 세 번. 그리고 칠판 한구석에 작게 적었다. 어떻게 보이는가.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이십 년 전에 제 지도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바람이 없었다. 똑딱.교문이 아니었다.지붕이 있었다. 반투명한 플라스틱 지붕. 그 아래로 좁은 통로가 길게 뻗어 있고, 양옆으로 가게들이 다닥다닥. 천막, 좌판, 빨간 고무 대야, 플라스틱 바구니. 형광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시장이었다.나는 통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생선 가게. 얼음 위에 고등어와 갈치가 은빛으로 누워 있었다. 주인이 방금 물을 뿌린 모양이었다. 대야에서 쏟아진 물줄기가 공중에서 굳어 있었다. 유리 막대처럼. 물방울 몇 개가 갈치 비늘 위에 떠 있었다.맞은편 어묵 가게. 커다란 사각 냄비에 꼬치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 위로 김이 피어오르다 멈춰 있었다. 하얀 솜뭉치처럼. 냄비 위 한 뼘에 걸려서.그 옆 전 가게. 넓은 철판 위에 기름이 끓다 멈췄다. 방울방울 부풀어 오른 채로. 동그랑땡 하나가 뒤집히다가 공중에 떠 있었다. 뒤집개 끝에서 반쯤 떨어져.전부 아침이었다. 늦가을 아침 여덟 시 칠 분의 시장. 장사를 막 시작한. 채소 가게 앞 소쿠리에 쪽파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누군가 새벽에 다듬어 놓은. 가격표가 매직으로. 한 단 삼천 원.아무도 없었다.그런데.통로 저편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하얀 것이. 천장의 형광등 아래서. 피어올라서, 흩어지고, 또 피어올라서, 흩어지는.김이었다.흐르는.나는 그 김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통로 끝 가까이, 오른쪽. 간판이 낡은 작은 가게. 돼지국밥. 유리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앞에 가마솥 두 개가 가스 화구 위에 올라 있었다. 하나는 김이 멈춰 있었다. 솥뚜껑 틈에서 새어 나오다 굳은 하얀 솜뭉치.다른 하나에서 김이 흘렀다.솥 앞에 가을이 서 있었다.교복 치마 위에 가게 앞치마를 두르고. 붉은색.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긴
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손님이요?""대학교수래."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나는 눈을 감았다.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뭐라고 하셨어요?""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너 뭐 했냐.""……수학 문제요.""수학 문제."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
분기마다 한 장씩 내야 하는 종이였다.사내 개선 제안서. 전 직원 의무. 칸이 다섯 개. 현재 문제, 원인, 개선 방법, 예상 효과, 제안자. 내면 커피 쿠폰 한 장을 주고, 뽑히면 상품권을 주었다. 대부분은 마감 날 오후에 오 분 만에 썼다. 탕비실 커피 머신 위치를 바꾸자, 복사기 옆에 쓰레기통을 하나 더 두자.나도 삼 년 동안 그렇게 썼다. 마감 날 오후, 오 분 만에.그 분기 마감은 목요일이었다. 오후 다섯 시 반. 총무팀에서 메일이 왔다. 품질관리팀 이우진 대리님, 미제출.나는 빈 양식을 띄웠다. 현재 문제.측정실 벽 너머에서 가공 라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선반이 쇠를 깎는 소리. 그 라인에서 나온 부품은 바로 측정대로 온다. 뜨거운 채로. 깎을 때 난 열이 아직 남은 채로.나는 그걸 매일 보았다. 삼 년 동안은 그냥 보았다. 돌아와서는 보였다.쇠는 뜨거우면 늘어난다. 아주 조금. 그 조금이 공차의 절반을 먹는다. 뜨거울 때 재서 합격한 부품이, 식으면 줄어서 불합격이 된다. 거꾸로도. 라인은 그 오차를 잡으려고 매일 기계를 조금씩 고치고, 고친 기계는 다음 날 또 틀어지고. 생산팀은 그 때문에 야근을 했다. 매일.측정을 삼십 분만 늦추면 됐다. 식힌 다음에. 그리고 기준면을 하나 바꾸면. 지그가 부품을 잡는 자리를, 열이 가장 덜 가는 쪽으로.나는 다섯 칸을 채웠다. 칠 분 걸렸다. 커피 쿠폰 한 장.제출을 누르고, 퇴근했다.그 주 내내 머릿속엔 다른 것이 있었다. 누런 빛. 떠 있는 서가. 도시락 가방에 얼굴을 묻고 울던 가을. 우진 아저씨, 하고 부르던 목소리의 메아리. 그 종이 한 장은 커피 쿠폰과 함께 금방 잊었다.잊은 종이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다음 주 화요일, 생산팀 과장님이 측정실에 찾아왔다.손에 내 제안서를 출력해서
오민재가 달라졌다.처음엔 몰랐다. 측정실에서 나란히 앉아 샘플을 잴 때였다. 오민재가 캘리퍼스를 영점에 맞추고, 부품을 쟀다. 그리고 소리 내어 말했다."12.03. 확인."나는 캘리퍼스를 든 손을 멈췄다.다음 부품."12.04. 확인."오민재는 나를 보지 않았다. 표에 숫자를 적고, 다음 부품을 집었다. 확인. 확인.그날 오후 오민재가 올린 보고서는 내 보고서와 똑같았다. 항목 순서, 표의 모양, 맨 끝에 붙이는 한 줄 요약. 내가 삼 년 동안 써 온 방식을. 오민재는 원래 표를 가로로 그렸다. 색을 많이 썼다. 요약은 맨 앞에 두었다. 그게 오민재의 보고서였다.이번 건 내 것이었다."민재 씨."퇴근 무렵, 나는 오민재의 자리로 갔다."보고서 양식 바꿨어요?"오민재가 얼굴을 붉혔다. 안경을 밀어 올렸다."아, 네. 대리님 거 보고…… 대리님처럼 하고 싶어서요. 대리님은 자료 안 보고도 다 보시잖아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대리님 하시는 거 다 따라 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요. 확인하는 거랑, 표 그리는 거랑."나는 오민재를 보았다."부품은요? 요즘도 뒤집어 봐요?""……네?""3번 캐비티 찾을 때. 부품을 뒤집어서 안쪽 숫자를 봤잖아요. 요즘도 그렇게 해요?"오민재가 머뭇거렸다."요즘은 잘…… 대리님은 안 뒤집어 보시잖아요. 그냥 보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냥 보려고 연습하고 있어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오민재는 부품을 뒤집어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걸, 뒤집어서 찾는. 그게 오민재의 손이었다. 그 손을 내려놓고, 내 눈을 흉내 내고 있었다.그리고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