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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너의 칸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9 07:00:00

오민재가 달라졌다.

처음엔 몰랐다. 측정실에서 나란히 앉아 샘플을 잴 때였다. 오민재가 캘리퍼스를 영점에 맞추고, 부품을 쟀다. 그리고 소리 내어 말했다.

"12.03. 확인."

나는 캘리퍼스를 든 손을 멈췄다.

다음 부품.

"12.04. 확인."

오민재는 나를 보지 않았다. 표에 숫자를 적고, 다음 부품을 집었다. 확인. 확인.

그날 오후 오민재가 올린 보고서는 내 보고서와 똑같았다. 항목 순서, 표의 모양, 맨 끝에 붙이는 한 줄 요약. 내가 삼 년 동안 써 온 방식을. 오민재는 원래 표를 가로로 그렸다. 색을 많이 썼다. 요약은 맨 앞에 두었다. 그게 오민재의 보고서였다.

이번 건 내 것이었다.

"민재 씨."

퇴근 무렵, 나는 오민재의 자리로 갔다.

"보고서 양식 바꿨어요?"

오민재가 얼굴을 붉혔다. 안경을 밀어 올렸다.

"아, 네. 대리님 거 보고…… 대리님처럼 하고 싶어서요. 대리님은 자료 안 보고도 다 보시잖아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대리님 하시는 거 다 따라 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요. 확인하는 거랑, 표 그리는 거랑."

나는 오민재를 보았다.

"부품은요? 요즘도 뒤집어 봐요?"

"……네?"

"3번 캐비티 찾을 때. 부품을 뒤집어서 안쪽 숫자를 봤잖아요. 요즘도 그렇게 해요?"

오민재가 머뭇거렸다.

"요즘은 잘…… 대리님은 안 뒤집어 보시잖아요. 그냥 보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냥 보려고 연습하고 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민재는 부품을 뒤집어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걸, 뒤집어서 찾는. 그게 오민재의 손이었다. 그 손을 내려놓고, 내 눈을 흉내 내고 있었다.

그리고 내 눈은 흉내 낼 수 없었다. 사 년이 없으면.

말해야 했다. 민재 씨는 민재 씨처럼 하라고. 그런데 그 말은 무슨 뜻일까. 민재 씨처럼이 뭔데요, 라고 물으면. 부품 뒤집는 거요. 그럼 그것만 하면 돼요?

또 칸이었다. 이번엔 오민재의 칸을 내가 적어 주는.

"……대리님?"

오민재가 나를 보고 있었다. 사무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은행잎이 거의 다 떨어진 가지 너머로.

가을 앞에서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멈췄다.

교문 앞이었다.

가을이 교문 기둥에 기대 서 있었다.

패딩을 입고. 도시락 가방을 들고. 내가 나타나자 몸을 떼고, 허리를 숙였다.

"오셨어요."

"……여기서 기다렸어요?"

"요 며칠은요. 오신다고 했으니까요. 보여 줄 거 있다고."

나는 가을을 보았다. 볼이 조금 패어 있었다. 지난번보다. 눈 밑이 다시 거뭇했다.

기둥의 표를 보았다. 날짜가 이어지다가, 한 칸이 비어 있었다. 여덟 줄 전부. 빨간 동그라미 없이. 그다음 날부터 다시 동그라미.

"하루 안 했어요."

가을이 말했다. 내 시선을 따라와서.

"아저씨가 안 해도 된다고 해서요. 무서웠어요. 하루 종일 교실 매트에 누워 있었어요. 씻지도 않고. 그리고 그림자를 봤어요. 진짜로. 발밑을. 3이었어요."

"……"

"다음 날 다 했어요. 여덟 칸. 그리고 봤어요. 3이었어요."

가을이 입술을 깨물었다.

"똑같았어요. 하든 안 하든. 그래서 더 모르겠어요."

나는 가을의 발밑을 보았다. 교문 위 해가 비스듬히 만든 그림자. 가장자리가 흐렸다. 3. 어쩌면 그보다 조금.

"가요."

내가 말했다.

"과학실로."

과학실은 3학년 2반 옆이었다.

실험대가 줄지어 있었다. 그 위에 비커와 플라스크가 멈춰 있었다. 누군가 전날 씻어 엎어 둔. 창가 선반에 식물 화분. 벽에 원소 주기율표. 그 옆에 누군가 손으로 만든 달력 한 장. 숫자를 하루씩 매직으로 지워 온. 맨 마지막 칸에 빨간 동그라미와 D-0. 그 옆에 작게, 다들 파이팅.

가을은 그 달력 앞을 지나며 눈을 주지 않았다.

교실 뒤쪽에 거울 두 개가 마주 서 있었다.

전신 거울. 바퀴 달린 받침. 둘 다 흰 천으로 덮여 있었다. 한 걸음 반쯤 떨어져서. 그 사이 바닥에 방석 하나.

그 도서관 3층 자료실. 나는 서가를 밀고 가구점에서 가져온 전신 거울 둘을 한 걸음 반 거리로 마주 세웠다. 담요로 덮어 두었다.

가을은 같은 거리에 세웠다. 공책을 읽기도 전에, 내가 세운 것과 같은 거리로.

사흘째에 스스로 생각해 낸 일이었다.

"들어가 볼래요?"

가을이 천을 걷었다. 하나, 그리고 다른 하나.

거울 두 개가 서로를 비추었다. 끝없이. 초록빛 복도가 안쪽으로, 안쪽으로.

가을이 거울 사이에 섰다. 나를 돌아보았다.

"아저씨도 들어올 수 있어요? 공책엔 머무는 사람 얘기만 있었는데."

"……해 볼게요."

나는 가을 옆에 섰다. 한 걸음 떨어져서. 거울 속을 보았다.

내 얼굴이 아니라, 어깨 너머로. 초점을 한 겹씩 뒤로. 수십 겹 안쪽.

어긋난 틈.

차가운 물을 한 겹 통과하는 느낌이 났다.

누런 빛이었다.

위아래로 끝이 없는. 부서진 서가들이 섬처럼 떠 있고, 종이 수만 장이 떠 있는. 발밑에 돌바닥 한 조각. 방 하나 크기.

사 년 만이 아니었다. 석 달 만이었다. 이쪽에서는. 아니, 몇 달 만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의 시간은 누구의 것인지 몰랐다.

그래도 알았다. 여기를.

나는 입을 열었다. 저절로.

"다녀왔습니다."

목소리가 퍼졌다. 끝없는 위로, 아래로. 그리고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왔습니다. 습니다.

메아리.

가을이 나를 보았다. 눈이 커져 있었다.

"……그것도 공책에 없었어요."

"안 적었어요. 이것도."

가을이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반쯤 부서진 서가. 선반 세 칸.

거기 노트들이 있었다.

맨 앞에 검은 표지의 공책. 머무는 이에게. 네 가지 말로. 가을의 말대로, 제일 반듯하게 꽂혀 있었다. 누군가 꺼냈다가 조심스럽게 도로 꽂은 것처럼.

그 옆에 실 묶음 책. 누렇게 바랜. 구멍 넷. 실 한 군데가 닳은.

필사 씨.

나는 그 앞에 섰다. 허리를 숙였다. 말없이.

가을도 옆에서 허리를 숙였다. 이번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거예요. 보여 주고 싶었던 거."

나는 필사 씨의 노트를 꺼냈다. 두 손으로. 가을에게 펼쳐 보였다. 세로쓰기. 붓글씨. 한자와 옛 한글.

"못 읽어요."

"제가 읽을게요."

나는 한 장씩 넘겼다. 첫째 날을 지나, 스무째 날 근처. 관아 서고. 거기 그 줄이 있었다. 두 달 걸려 풀었던.

"갓을 바로 쓰고 먹을 갈면, 그림자가 짙어진다."

소리 내어 읽었다. 메아리가 따라왔다.

"조선 사람이에요. 필사 씨라고 불렀어요. 저보다 먼저 여기 있었어요. 이게 이 사람 점검표였어요. 두 칸. 갓을 바로 쓴다. 먹을 간다."

가을이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읽지 못하는 글자들을.

"……두 칸이요?"

"네. 이 사람은 그랬어요."

나는 필사 씨의 노트를 제자리에 꽂았다. 먼지 안 앉은 빈자리에.

그리고 다음 것을 꺼냈다. 스프링 공책. 만화 캐릭터 표지. 영어.

"엠마네요. 미국 사람. 운전하다 들어왔어요. 뒷자리에 딸이 있었는데."

나는 중간쯤을 펼쳤다. 거기 있었다. 한 줄씩.

— Shower. Clothes. Eat. Write. Talk to Emma. Remember.

"씻는다. 입는다. 먹는다. 적는다. 엠마에게 말한다. 기억한다."

가을이 그 줄을 보았다. 영어는 읽을 수 있었다. 수능 영단어를 두 번 외운 아이였다.

"……Talk to Emma."

가을이 따라 읽었다. 작게.

"엠마는 없잖아요. 여기."

"없었어요. 그래도 매일 말했대요. 엠마 사진 보면서. 백사십이 일째부터는 엠마한테 스페인어를 배웠대요. 엠마가 선생님이었어요. 엠마 없는데."

가을이 공책의 그 줄을 손끝으로 쓸었다.

나는 다음 것을 꺼냈다. 가죽 표지. 데바나가리. 가로줄에 매달린 글자들.

"강가 씨요. 인도 사람. 갠지스 강가 새벽에 들어왔어요. 이 사람은 날을 세지 않았어요."

첫 장을 펼쳤다. 거기 적힌 문장을 나는 외우고 있었다.

"나는 날을 세지 않겠다. 대신 매일 하나의 말을 배우겠다."

단락마다 머리에 단어 하나. 물. 빛. 숨. 어머니. 기다림. 그리고 나.

나는 노트의 뒤쪽을 펼치지 않았다. 마지막 장은. 그건 아직 내가 읽을 장이 아니었다.

"금을 안 그었대요. 점검표도 없었어요. 매일 말 하나. 그게 이 사람 칸이었어요."

가을이 가죽 노트를 보았다. 그리고 필사 씨의 실 묶음을. 엠마네의 스프링 공책을. 그리고 맨 앞의 검은 공책을.

"벚꽃 씨는 매일 하이쿠를 썼어요. 일본 사람. 봄에 들어왔어요. 항해사 씨는 멈춘 별을 매일 쟀어요. 천 날 동안. 같은 숫자를."

나는 서가의 노트들을 하나씩 짚었다.

"다 달라요. 칸이."

가을이 나를 보았다.

"필사 씨는 갓이었고, 엠마네는 엠마였고, 강가 씨는 말이었고, 벚꽃 씨는 시였고, 항해사 씨는 별이었어요. 저는 셔츠였고요."

나는 검은 공책을 꺼냈다. 머무는 이에게. 점검표가 적힌 장을 펼쳤다. 여덟 칸.

"저는 이걸 이 사람들 거 보고 만들었어요. 그런데 베낄 수가 없었어요. 저한테는 갓이 없었고, 엠마가 없었으니까. 해인이 다려 둔 셔츠가 있었고, 서아 실내화가 있었고."

말이 목에 걸렸다. 그래도 했다.

"내 칸은 내 칸이었어요."

메아리가 돌아왔다.

내 칸이었어요. 칸이었어요. 었어요.

가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그러다 가을의 얼굴이 무너졌다. 교문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 무너질 뻔했던 그 얼굴. 입술을 깨물어 참았던. 이번엔 깨물지 않았다.

가을이 울었다.

소리 내어. 여기는 메아리가 있는 곳이었다. 가을의 울음이 몇 걸음 앞에서 삼켜지지 않았다. 끝없는 위로, 아래로 퍼졌다가, 돌아왔다. 백 며칠 동안 한 번도 멀리 가지 못한 소리가.

가을은 돌바닥에 주저앉았다. 도시락 가방을 끌어안고. 얼굴을 누빔 천에 묻고.

나는 옆에 앉았다. 두 걸음 떨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떠 있는 종이들 사이로 누런 빛이 흘렀다. 어느 서가 섬에선가 종이 한 장이 천천히 돌았다. 여기서는 흘렀다. 누군가의 손이 끝까지 쓴 것들이라서.

가을의 울음이 오래갔다. 메아리가 겹치고 겹쳐서, 나중엔 어느 게 울음이고 어느 게 메아리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초침을 보지 않았다.

한참 뒤에 가을이 말했다. 누빔 천에 얼굴을 묻은 채로.

"……그럼 제 칸은 뭐예요?"

"몰라요."

"또 몰라요?"

"가을 씨만 알아요."

가을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엉망이었다. 눈이 부었다. 코끝이 빨갰다.

"저 모르는데요. 제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공부만 했어요. 오답노트만 썼어요. 틀린 거 고치는 거. 그게 제 전부예요."

"……"

"엄마가 그랬어요. 가을이는 알아서 잘한다고. 손 하나 안 가는 애라고. 그래서 알아서 잘하려고 했어요. 여기서도. 아저씨 공책이 있으니까 알아서 잘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엄마.

가을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었다. 셋째 날 오답노트 귀퉁이 이후로.

가을의 손이 도시락 가방의 지퍼로 갔다. 손끝이 지퍼 손잡이에 닿았다.

멈췄다.

잡지 않았다. 손을 거뒀다. 가방을 다시 끌어안았다. 더 꼭.

나는 보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지퍼는 가을의 것이었다. 여는 것도, 열지 않는 것도.

가을이 일어서서 검은 공책을 집어 들었다. 내가 서가 위에 펼쳐 둔. 마지막 장을 넘겼다.

서아, 해인, 시계, 실내화. 그리고 맨 아래.

— 이우진. (이 이름은 내 것이니, 불러도 된다.)

가을이 그 줄을 오래 보았다.

"……봤어요, 이거. 처음 읽을 때."

"네."

"근데 앞에 부르지 말라고 쓰셨잖아요. 규칙이 먼저인 줄 알았어요. 예외는 틀리기 쉬우니까. 시험에서도 그래요. 예외 문제에서 제일 많이 틀려요."

가을이 공책을 서가에 도로 꽂았다. 제일 반듯하게.

그리고 나를 보았다. 눈이 부은 채로.

"……우진 아저씨."

메아리가 돌아왔다.

우진 아저씨. 아저씨. 씨.

가을이 불렀다. 공책의 규칙 말고, 공책의 예외를 골라서.

나는 대답했다.

"네, 가을 씨."

초침을 보았다. 마흔 바퀴를 넘고 있었다.

끝이 오고 있었다. 손끝부터.

"가을 씨. 거울 사이에 앉을 때요."

"네."

"다음엔 세지 말아 봐요. 삼천육백."

가을이 나를 보았다. 이번엔 얼마나요, 라고 묻지 않았다.

"……틀려도요?"

"세지 않으면 틀릴 것도 없잖아요."

가을이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그리고 아주 조금, 웃었다. 부은 눈으로.

사무실이었다.

해가 진 창밖. 은행잎이 거의 다 떨어진 가지. 오민재가 내 앞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경이 흘러내린 채로.

"……대리님?"

"응."

나는 숨을 한 번 쉬었다. 그리고 오민재의 책상 위를 보았다. 보고서. 내 방식으로 그린 세로 표. 맨 끝의 한 줄 요약.

"민재 씨. 이번 건 내 보고서 같아."

오민재의 얼굴이 빨개졌다.

"죄송……"

"아니. 잘 썼어. 틀린 데 없어."

오민재가 멈췄다.

"근데 나는 민재 씨 보고서가 더 좋았어. 가로 표. 색 많이 쓰고. 요약이 맨 앞에 있어서 선배가 첫 장만 보고도 알던 거. 그건 내가 못 해. 나는 끝까지 읽어야 알게 쓰거든."

"……"

"그리고 부품은 계속 뒤집어 봐. 나는 안 뒤집어. 못 뒤집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 방식이 아니야. 민재 씨 방식은 뒤집는 거야. 3번을 그걸로 찾았잖아."

오민재가 나를 보았다. 한참. 안경을 밀어 올리는 것도 잊고.

"……대리님처럼 되고 싶었는데요."

"나도 선배처럼 되고 싶었어. 입사하고 삼 년 동안. 안 됐어. 선배는 이마에 안경 올리고 보는데, 나는 그러면 안 보여."

오민재가 웃었다. 작게.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수첩을 꺼냈다. 방문 기록. 여덟 번째.

— 사무실. 민재 씨. 사십 분 남짓. 거울 속 거울. 필사 씨·엠마네·강가 씨·벚꽃 씨·항해사 씨. 가을이 울었다. 메아리.

그리고 그 아래.

— 가을이 이름을 불렀다. 우진 아저씨.

— 도시락 가방. 지퍼에 손이 닿았다가, 거둠.

수첩을 덮으려다 한 줄을 더 적었다.

— 칸은 적어 줄 수 없다. 보여 줄 수는 있다. 남의 칸이 전부 다르다는 것을.

그 주 금요일, 내가 무심코 적어 낸 종이 한 장이 상무실까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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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손님이요?""대학교수래."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나는 눈을 감았다.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뭐라고 하셨어요?""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너 뭐 했냐.""……수학 문제요.""수학 문제."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

  • 세상의 뒷면   76화. 개선안

    분기마다 한 장씩 내야 하는 종이였다.사내 개선 제안서. 전 직원 의무. 칸이 다섯 개. 현재 문제, 원인, 개선 방법, 예상 효과, 제안자. 내면 커피 쿠폰 한 장을 주고, 뽑히면 상품권을 주었다. 대부분은 마감 날 오후에 오 분 만에 썼다. 탕비실 커피 머신 위치를 바꾸자, 복사기 옆에 쓰레기통을 하나 더 두자.나도 삼 년 동안 그렇게 썼다. 마감 날 오후, 오 분 만에.그 분기 마감은 목요일이었다. 오후 다섯 시 반. 총무팀에서 메일이 왔다. 품질관리팀 이우진 대리님, 미제출.나는 빈 양식을 띄웠다. 현재 문제.측정실 벽 너머에서 가공 라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선반이 쇠를 깎는 소리. 그 라인에서 나온 부품은 바로 측정대로 온다. 뜨거운 채로. 깎을 때 난 열이 아직 남은 채로.나는 그걸 매일 보았다. 삼 년 동안은 그냥 보았다. 돌아와서는 보였다.쇠는 뜨거우면 늘어난다. 아주 조금. 그 조금이 공차의 절반을 먹는다. 뜨거울 때 재서 합격한 부품이, 식으면 줄어서 불합격이 된다. 거꾸로도. 라인은 그 오차를 잡으려고 매일 기계를 조금씩 고치고, 고친 기계는 다음 날 또 틀어지고. 생산팀은 그 때문에 야근을 했다. 매일.측정을 삼십 분만 늦추면 됐다. 식힌 다음에. 그리고 기준면을 하나 바꾸면. 지그가 부품을 잡는 자리를, 열이 가장 덜 가는 쪽으로.나는 다섯 칸을 채웠다. 칠 분 걸렸다. 커피 쿠폰 한 장.제출을 누르고, 퇴근했다.그 주 내내 머릿속엔 다른 것이 있었다. 누런 빛. 떠 있는 서가. 도시락 가방에 얼굴을 묻고 울던 가을. 우진 아저씨, 하고 부르던 목소리의 메아리. 그 종이 한 장은 커피 쿠폰과 함께 금방 잊었다.잊은 종이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다음 주 화요일, 생산팀 과장님이 측정실에 찾아왔다.손에 내 제안서를 출력해서

  • 세상의 뒷면   75화. 너의 칸

    오민재가 달라졌다.처음엔 몰랐다. 측정실에서 나란히 앉아 샘플을 잴 때였다. 오민재가 캘리퍼스를 영점에 맞추고, 부품을 쟀다. 그리고 소리 내어 말했다."12.03. 확인."나는 캘리퍼스를 든 손을 멈췄다.다음 부품."12.04. 확인."오민재는 나를 보지 않았다. 표에 숫자를 적고, 다음 부품을 집었다. 확인. 확인.그날 오후 오민재가 올린 보고서는 내 보고서와 똑같았다. 항목 순서, 표의 모양, 맨 끝에 붙이는 한 줄 요약. 내가 삼 년 동안 써 온 방식을. 오민재는 원래 표를 가로로 그렸다. 색을 많이 썼다. 요약은 맨 앞에 두었다. 그게 오민재의 보고서였다.이번 건 내 것이었다."민재 씨."퇴근 무렵, 나는 오민재의 자리로 갔다."보고서 양식 바꿨어요?"오민재가 얼굴을 붉혔다. 안경을 밀어 올렸다."아, 네. 대리님 거 보고…… 대리님처럼 하고 싶어서요. 대리님은 자료 안 보고도 다 보시잖아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대리님 하시는 거 다 따라 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요. 확인하는 거랑, 표 그리는 거랑."나는 오민재를 보았다."부품은요? 요즘도 뒤집어 봐요?""……네?""3번 캐비티 찾을 때. 부품을 뒤집어서 안쪽 숫자를 봤잖아요. 요즘도 그렇게 해요?"오민재가 머뭇거렸다."요즘은 잘…… 대리님은 안 뒤집어 보시잖아요. 그냥 보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냥 보려고 연습하고 있어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오민재는 부품을 뒤집어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걸, 뒤집어서 찾는. 그게 오민재의 손이었다. 그 손을 내려놓고, 내 눈을 흉내 내고 있었다.그리고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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