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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메주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4 06:16:48

염대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마루에 올랐다. 은가락지가 나무 바닥에 닿아 딱 소리를 냈다. 그는 엉덩이를 내려놓고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끝분이 장부를 덮었다.

“남의 집 마루에 털썩 앉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소?”

“빚 받으러 왔는데 대문 밖에 서 있을 수는 없지 않소?”

“빚쟁이는 발이 안 아프고, 장 담그는 사람은 손이 안 아픈 줄 아나.”

끝분은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새미는 마루 끝에 섰다. 염대길이 종이를 펴는 손을 보았다. 은가락지가 종이 모서리를 눌렀다.

단두식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아부지는 장 팔러 나갔어.”

새미가 말했다.

“그럼 아가씨라도 들으시오. 이달 그믐까지 마흔 냥. 약속한 돈이오.”

염대길은 종이를 새미 쪽으로 밀었다. 새미는 다가가 글을 읽었다. 빚진 돈과 날짜가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두식의 이름이 있었다. 글씨가 삐뚤었지만, 아버지 이름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이자 얘기는 없네요.”

“그믐까지 갚으면 그렇소.”

“그믐을 넘기면요?”

“그때 가서 정해야지.”

“정해진 게 없는 돈을 빌려주셨다는 말씀이네요.”

염대길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을 야무지게 하는구려. 단 서방도 아는 내용이오.”

“아부지가 아는지 제가 물어본 게 아니에요.”

끝분이 새미를 돌아보았다. 새미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장독을 넘겨주기로 했던 날도 이 무렵이었다. 그때는 집에 없었다. 혼례를 앞두고 정신없이 지내다가 뒤늦게 들었다. 장독 몇 개를 빚 대신 넘겼다는 말에 새미는 마루에 앉아 종일 장부를 붙들고 있었다.

그날부터 빈 독이 생겼다. 끝분은 빈 자리를 보지 않는 척했고, 두식은 술기운에 “금방 메울 수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그 말을 듣지 않을 생각이었다.

“단 서방이 오면 말하시오. 기한은 그믐이라고.”

염대길이 종이를 접으려 했다. 새미가 종이 위에 손을 얹었다.

“잠깐만요.”

“왜 그러시오?”

“기한이 그믐이라고 적혀 있는지 확인하려고요.”

염대길은 손을 멈췄다. 새미는 종이를 다시 펼쳐 아래쪽을 살폈다. 약속한 날짜는 있었지만, 장독이나 다른 물건으로 갚는다는 말은 없었다.

“여기엔 돈으로 갚는다고 적혀 있어요.”

“돈을 못 갚으면 물건으로 갚을 수도 있지.”

“그건 아부지가 동의해야 하잖아요.”

“그렇소.”

염대길은 종이를 거둬들였다.

“내가 단 서방과 이야기하겠소. 아가씨가 나설 일은 아니오.”

“우리 집 장독은 제 일도 돼요.”

끝분이 무릎 위에 놓은 손을 폈다. 새미는 할머니의 손가락 마디를 보았다. 장독 뚜껑을 들고, 소금물을 저으며 굳은 손이었다. 마루 끝에는 닦다 만 독 뚜껑이 놓여 있었다.

“장독은 장을 담그는 데 쓰는 것이여. 빚 막으라고 쌓아 놓은 돌덩이가 아니당께.”

끝분이 말했다.

“장독이야 팔면 다시 사면 되지 않소?”

“그 독이 몇 해를 버텼는지 알고 하는 소리여?”

“값은 쳐 드리겠소.”

“값으로 안 되는 게 있어.”

염대길은 입을 다물었다. 새미는 그의 은가락지에 눈길을 주었다. 저 손가락이 물안장 장독을 몇 개나 세어 봤을까. 아마 한 번도 세지 않았을 것이다.

대문 밖에서 지게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났다. 두식이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갓은 옆으로 기울었고, 도포 자락에는 흙이 묻었다.

“아이고, 염 주인. 여기 계셨슈?”

“단 서방, 마흔 냥이오. 그믐까지.”

“그려, 그려. 내 귀가 멀쩡하니 그 말은 들었슈.”

두식은 지게를 마당에 내려놓았다. 염대길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돈은 마련했소?”

“그게 말이여. 장이 잘 팔리면 금방이지유.”

“잘 팔리는 장이 있소?”

“우리 장은 맛이 좋으니께. 도성 사람들 입맛이 늦게 알아보는 거지유.”

“그 입맛이 그믐 전에 알아보겠소?”

“알아볼 거유. 내가 젊어서 말이여, 장사판을 한참 누볐는데…….”

“아부지.”

새미가 불렀다.

두식은 말을 멈추고 딸을 보았다. 새미는 한 걸음 다가섰다. 아버지는 염대길 앞에서 괜찮은 척 웃고 있었다. 입꼬리만 올라가고 눈은 자꾸 마당으로 달아났다.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어.”

“뭘 안다는겨?”

“장독으로 갚겠다고 하실 거잖아.”

두식의 입이 벌어졌다. 염대길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두드렸다.

“아직 그렇게 말한 적은 없소.”

“그러면 다행이고요.”

새미는 염대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장독은 못 드려요. 장으로 갚을 거예요.”

“장으로?”

“장 담그는 집이잖아요. 장을 팔아 돈을 마련할게요.”

“그믐까지 돈을 마련하겠다?”

“네.”

그 말은 참말이었다. 마련할 수 있는지까지는 장담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독을 넘기지 않겠다는 건 참말이었다.

염대길은 새미의 얼굴을 살폈다.

“간택에 이름을 올린다지?”

끝분이 먼저 대꾸했다.

“누가 그랬소?”

“마을 어귀에 방이 붙었잖소. 이 집에 나이 찬 처녀가 있는 것도 알고.”

“방 붙었다고 다 이름 올리는 건 아니여.”

“세자빈이 되면 마흔 냥쯤이야 금방 갚을 텐데.”

두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빠르게 끄덕여서 갓이 더 기울었다.

“그렇지유. 세자빈 장인 되면 빚쯤이야.”

새미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부지.”

“아니, 내가 될 수 있다는 건 아니고. 새미가 말이여, 사람이 또 야무지고 장맛도 잘 보잖어. 간택에서 알아줄 수도 있지.”

“저는 안 나갈 거예요.”

두식의 입이 닫혔다. 끝분이 수건을 접었다. 염대길은 다시 종이를 펴서 무릎 위에 놓았다.

“안 나간다고 정했소?”

“네.”

“집안 빚이 걸렸는데?”

“그믐까지 갚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새미는 염대길을 똑바로 보았다. 간택에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떨어질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염대길 앞에서 장독을 내놓겠다고 하지 않는 것부터 해야 했다.

“내가 여기서 장사 얘길 들으러 온 건 아니오.”

“그럼 빚 얘기만 하고 가시면 돼요.”

“단 서방이 답해야 할 일이지.”

“아부지는 장독을 넘기지 않을 거예요.”

두식이 헛기침했다.

“내가 언제 넘긴다고 했슈?”

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염대길은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믐까지요. 그 날짜는 바뀌지 않았소.”

“들었어요.”

“단 서방, 따님 말만 믿고 있으면 곤란하오.”

“내가 믿는다고 했슈?”

두식은 어색하게 웃었다. 염대길은 그 웃음에 대꾸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갔다. 나가기 전 새미를 돌아보았다.

“장으로 돈을 만들 수 있으면 만들어 보시오.”

“그럴게요.”

“말만으로는 장독이 안 차오.”

“알아요.”

염대길은 대문을 닫고 나갔다. 은가락지가 문틀에 스치며 짧은 소리를 냈다.

두식은 마당에 선 채 염대길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끝분은 닦던 수건을 다시 들었다.

“아부지, 지게부터 안으로 들여.”

“그려.”

두식은 지게를 들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새미야, 네가 참 야무지게 말했어.”

“장독 넘기지 말라고 한 거야.”

“그것도 야무지게 한 거지.”

“아부지는 넘기려고 했어?”

“내가 언제.”

새미는 두식의 얼굴을 보았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자기한테 불리한 말을 꼭 필요한 만큼만 했다.

“빚 갚을 방법 생각해 봐.”

“생각하고 있슈.”

“뭘 생각했는데?”

“그믐까지 장이 잘 팔리는 방법.”

“그건 방법이 아니라 바람이잖아.”

“바람도 불어야 장이 마르지.”

끝분이 마루에서 말했다.

“헛소리는 장독에나 해라.”

두식은 웃으며 지게를 들었다. 이번에는 안채 쪽에 세웠다. 새미는 빚 문서가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마루에 종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끝으로 쓸자 거친 나무가 만져졌다.

―

해가 낮아질 무렵, 끝분은 메주를 묶을 짚을 꺼냈다. 마루 옆에 메주가 놓였고, 짚이 한 줌씩 풀렸다. 새미는 장독 뚜껑을 닦던 수건을 털어 놓고 끝분 옆에 앉았다.

“이걸로 묶으면 돼?”

“짚을 너무 세게 당기지 마라. 메주가 으깨진다.”

“아까는 밤톨이한테 먹지 말라더니, 이제는 메주가 다칠까 걱정하네.”

“먹는 것도 다칠 수 있당께.”

끝분은 메주를 짚 위에 놓고 양끝을 당겼다. 손가락이 짚을 감아 묶었다. 매듭은 단단했지만 메주 모서리는 눌리지 않았다.

새미도 짚을 집었다. 손가락으로 매듭을 만들다가 짚 끝이 빠져나왔다.

“손목에 힘을 빼야 혀.”

“힘을 빼면 안 묶이잖아.”

“힘은 주되, 성질은 빼라.”

“그게 더 어려워.”

끝분이 웃었다. 새미는 다시 매듭을 지었다. 이번에는 짚이 제자리에 걸렸다.

“됐어?”

“됐네.”

끝분은 메주를 들어 흔들어 보았다. 짚이 풀리지 않았다. 새미는 묶인 메주를 받아 들었다. 따뜻한 부엌 냄새가 옷에 남아 있었고, 메주에서는 익은 콩 냄새가 났다.

“얘 이름은 뭐여?”

“메주 이름도 붙여?”

“독마다 이름을 붙이는데, 메주라고 못 붙일 건 뭐 있냐.”

끝분은 메주를 살폈다.

“큰애기.”

“왜 큰애기야?”

“덩치가 제일 크잖여.”

끝분은 그 메주를 옆에 놓았다. 다른 메주를 집어 들었다. 모서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건 고집쟁이.”

“모양이 삐뚤어서?”

“반듯하게 눌러도 제 모양대로 굳었으니께.”

새미는 메주를 내려다보며 매듭을 만졌다. 독에 이름을 붙일 때는 끝분이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면 그 독을 살필 이유가 하나 더 생기는 것 같았다.

단밤이 부엌 문턱에 나타났다. 손을 등 뒤에 감추고 있었다.

“밤톨아, 손 보여 줘.”

“깨끗해.”

“손부터 보여 줘.”

단밤은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깨끗했다. 손톱 밑에도 메주 부스러기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안 먹었네.”

“이름 지어 주면 안 먹을게.”

“뭘?”

“메주. 내 이름 붙은 메주는 안 먹을 거야.”

끝분이 코로 숨을 내쉬었다.

“네가 메주를 먹는 건 이름이 없어서가 아니여.”

“그래도 이름 붙이면 더 안 먹을 수 있어.”

“그럼 네 이름은 밤톨이로 하자.”

“그건 원래 별명이잖아.”

“네 이름이 또 있냐?”

단밤은 새미를 보았다.

“누나는 내 이름 붙여 줄 거야?”

새미는 일부러 잠깐 생각하는 척했다.

“이름이 뭔데?”

“밤톨이.”

“그건 할매가 붙여 줬잖아.”

“누나가 더 좋은 이름 붙여 줘.”

“그럼 먹보.”

단밤은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이름 아니야.”

“메주 부스러기 먹는 애한테 어울리는데.”

“나 이제 안 먹어.”

끝분은 짚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럼 다음 이름은 얌전이로 허자.”

“그것도 싫어.”

“고집쟁이는 어때?”

“그건 메주 이름이잖아.”

“너도 닮았는디.”

단밤은 입을 다물었다. 새미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끝분은 메주를 하나 더 짚으로 묶었다.

“이건 울보.”

“안 우는데?”

“아까 혼났을 때 눈물이 고였잖여.”

“그건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

“그 먼지가 메주 냄새가 나더라.”

단밤은 새미를 올려다봤다.

“누나, 할매가 나를 메주보다 아껴?”

“메주는 3년 뒤에 먹을 거고, 넌 지금 밥을 먹잖아.”

“그게 무슨 대답이야?”

“할매한테 물어봐.”

단밤은 끝분에게 다가가 치맛자락을 잡았다.

“할매, 나를 메주보다 아껴?”

끝분은 매듭을 당기며 대답했다.

“메주는 장이 되고, 너는 사람이 되니께 더 살펴야지.”

단밤은 그 말을 듣고 새미를 보았다.

“그럼 나도 메주가 되면 더 아껴?”

“그럼 장독에 넣어 두고 3년 기다려야 혀.”

끝분이 말하자 단밤은 치맛자락을 놓았다.

“나는 사람이 좋을래.”

“그러면 손 씻고 와.”

단밤은 부엌으로 달려갔다. 새미는 묶인 메주를 차례로 놓았다. 짚이 풀리지 않도록 매듭 끝을 다시 확인했다. 끝분은 메주를 한 개씩 들며 이름을 불렀다. 큰애기, 고집쟁이, 울보. 단밤이 문밖에서 손 씻는 소리가 났다.

그 이름들을 듣자 새미는 목 안쪽이 단단해졌다. 지난 생에는 이런 소리가 궁에 없었다. 그곳의 장독들은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장고의 문을 열고 들어가도 새미를 부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세자와 나눈 말도 손에 꼽았다.

세자는 매번 정중했고, 새미도 정중했다. 둘 사이에 놓인 말은 짧았다. 장맛을 묻고, 수라에 올릴 것을 고르고, 처소에 들었다 나왔다. 그게 전부였다.

한 번은 저녁이었다. 세자가 새미 앞에 멈춰 섰다. 말을 꺼내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새미는 그때 물러서야 하는 줄 알고 먼저 고개를 숙였다. 세자는 더 말하지 않았다.

새미는 그날 무슨 말을 들을 수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묻지도 못했다.

“새미야.”

끝분의 목소리에 새미가 눈을 들었다.

“매듭이 또 풀린다.”

새미 손에 든 메주에서 짚 한 줄이 빠져나와 있었다. 새미는 짚을 다시 감았다.

“미안. 딴생각했어.”

“그럴 때도 있제.”

끝분은 새미의 손을 보았다.

“손에 힘이 들어갔네.”

“괜찮아.”

“괜찮은 손은 짚을 끊지 않아.”

새미는 손을 폈다. 손바닥에 짚 자국이 남았다.

“할매는 메주 이름 지을 때 뭐가 제일 먼저 보여?”

“그냥 보이는 걸 부르는 거여.”

“사람도 그래?”

끝분은 새미를 바라보다가 메주를 다시 집었다.

“사람은 이름보다 마음을 먼저 봐야지.”

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끝분은 짚을 당겨 매듭을 묶었다. 이번에는 메주가 기울지 않았다.

―

밤이 되자 두식은 마당에 앉아 지게의 끈을 고쳤다. 낮에 염대길 앞에서 했던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끈이 낡아 군데군데 해져 있었다. 두식은 짚을 한 줄씩 엮으며 코로 숨을 뱉었다.

새미는 안채에 앉아 종이를 펼쳤다. 쓰던 공책은 아니었다. 장부를 적을 때 쓰고 남은 종이였다. 작은 나무 맛숟가락을 옆에 놓고 붓을 들었다.

종이 위에 먼저 적었다.

『간택에서 떨어지기』

새미는 글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음 줄을 썼다.

『빚 마흔 냥 갚기』

마지막 줄에는 오래 손을 멈췄다. 장독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앞줄 가운데 씨간장 독, 그 옆의 큰애기, 고집쟁이, 울보. 장부에 적힌 이름과 담근 날도 떠올랐다.

『장독 여든일곱 개 지키기』

새미는 붓을 내려놓았다. 셋이면 충분했다. 간택은 떨어지면 됐다. 빚은 장을 팔아 갚으면 됐다. 장독은 집에 두면 됐다.

쉽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밖에서 두식이 헛기침했다.

“새미야, 자냐?”

“아직.”

“오늘 염 주인 앞에서 말한 거 말이여.”

“응.”

“네가 장을 팔아 마흔 냥을 만든다고 했잖어.”

“그믐까지요.”

“그게 쉽지 않어.”

“알아.”

“그럼 간택에 나가 보는 건 어떠냐. 세자빈 장인이 되면 빚 걱정은 없을 테니께.”

새미는 붓을 세웠다. 종이에 먹이 떨어지지 않도록 붓끝을 들어 올렸다.

“세자빈이 되면 집에 못 있어.”

“그건 그렇지.”

“할매 혼자 장독을 봐야 해. 밤톨이도 있고.”

“나도 있잖여.”

“아부지는 장 팔러 다니잖아.”

두식은 잠깐 말이 없었다. 바깥에서 짚 끈을 잡아당기는 소리가 났다.

“그믐까지 마흔 냥을 어떻게든 마련해야지.”

“그려. 나도 알아.”

새미는 공책을 덮었다. 두식은 들어오지 않았다. 새미는 손가락으로 종이 모서리를 눌렀다. 지난 생에 두식은 빚을 갚으려고 장독을 내주었다. 그때는 새미가 막을 수 없었다. 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두식의 손이 장독으로 가기 전에 막아야 했다.

밤은 길게 흘렀다. 새미는 공책을 베개 밑에 넣고 누웠다. 밖에서는 두식이 지게 끈을 만지는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 소리가 멎은 뒤에도 새미는 눈을 감지 못했다.

―

2월 4일 아침, 끝분은 부엌에서 죽을 데웠다. 새미는 마루에 나와 장부를 펼쳤다. 독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상태를 확인했다. 밤새 바람이 불었지만 뚜껑은 그대로였다.

끝분은 새미 옆에 앉아 메주를 묶은 짚을 살폈다.

“큰애기는 잘 묶였고.”

“응.”

“고집쟁이도 괜찮고.”

“응.”

“울보는 매듭이 느슨하네.”

새미가 울보를 들어 올렸다. 짚을 다시 당겨 묶자 메주가 손바닥에 단단히 걸렸다.

“이제 됐어.”

“이름 지어 주니 더 잘 보게 되지?”

“그런가 봐.”

부엌에서 밤톨이가 물었다.

“누나, 밥 먹어?”

“먹어.”

“메주도 밥 먹어?”

끝분이 부엌 쪽을 향해 말했다.

“메주는 밥 안 먹는다!”

“그럼 왜 콩으로 만들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새미는 메주를 내려놓고 웃었다. 끝분은 웃지 않는 얼굴로 짚을 정리했다. 그렇지만 입가가 조금 풀렸다.

두식은 마당에서 지게를 멨다. 어제보다 끈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지게 위에는 팔 장이 없었다. 그는 안채 문턱에 서서 끝분을 보았다.

“어머니, 장독 열 개만 내놓으면 염 주인한테 말이 통할 것 같유.”

끝분이 손에 든 짚을 멈췄다. 새미는 장부를 덮었다. 두식은 지게끈을 고쳐 쥐었다.

“빚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혀. 독을 다 내놓는 것도 아니고, 열 개만…….”

새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식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부지, 그 독 열 개 내놓으믄 나 시집 안 가요. 아니, 원래도 안 가요.”

(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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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미는 기다림이 독 앞에 쪽지를 내려놓았다. 종이 끝이 바람에 들리지 않도록 장부로 눌렀다.“오늘 여는 날이오.”세자가 독 앞에 섰다. 쪽빛 도포의 소매를 걷은 손에 흙이 조금 묻어 있었다. 새미는 독 뚜껑을 살폈다. 가장자리에 마른 흙이 끼어 있었고, 손잡이에는 지난번 닦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오늘 여는 날이라고 하셨으면서, 벌써 열어 보셨습니까?”“아직 열지 않았소.”“그럼 이 흙은요?”“독을 옮길 때 묻었소. 뚜껑은 건드리지 않았소.”새미는 세자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 끝에도 흙이 묻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독을 옮기고 나서 손을 씻지 않은 모양이었다.“장독대에 들어오시기 전에 손부터 씻으셨어야죠.”“맞는 말이오.”세자는 그 자리에서 손을 털지 않았다. 새미가 바가지와 물그릇을 가져오자 두 손을 내밀었다. 새미는 물을 부었다. 손끝에 묻은 흙이 물그릇 밑으로 가라앉았다.“이제 됐소?”“손톱 밑도요.”세자는 손을 돌려 손톱 밑을 보여 주었다. 새미는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장독대에는 찬 공기가 남아 있었다. 볕이 닿은 독의 어깨는 조금 따뜻했고, 그늘에 놓인 독은 차가웠다. 기다림이 독은 가운데 줄 맨 끝에 있었다. 8개월 동안 뚜껑을 열지 않았다. 새미는 담근 날부터 장부에 날짜와 재료를 적었다. 그 뒤로는 독을 지나칠 때마다 뚜껑을 두드리지 않고 옆면만 살폈다.“3년 뒤에 같이 열자고 하셨잖아요.”“그랬소.”“그런데 오늘은 8개월 된 장을 열어도 된다고 하시는군요.”“3년을 기다리기로 한 건 장이었소. 오늘 맛을 보는 것까지 금한 건 아니오.”“말은 맞는데, 듣고 있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네요.”“그럼 내가 먼저 맛보겠소.”“제가 장을 담갔으니 제가 먼저 봐야죠.”“그대가 먼저 봐도 좋소.”세자는 대꾸를 더 잇지 않았다. 새미는 그 침묵을 받아 독 앞에 쪼그려 앉았다. 독을 열기 전에 주변부터 살폈다. 뚜껑이 비뚤어지지 않았고, 독의 입구도 깨끗했다. 새미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마른 천으로 뚜껑 가장자리를

  • 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   78화. 강정

    새미는 강정 접시를 마루 가운데로 옮겼다. 접시 밑에 깐 종이가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 손끝으로 종이를 당기자 바삭한 부스러기가 손바닥에 묻었다.“이렇게 많이 준비할 필요는 없었는데.”“손님이 오신다면서요.”옆에서 찻물을 올리던 나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새미는 접시를 살폈다. 강정은 가지런히 놓였지만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쌀알이 큼직하게 붙은 것도 있고, 끝이 조금 부서진 것도 있었다.“모양이 달라도 맛은 같아요.”“그래도 마마께서 손수 놓으셨는데요.”“손님들이 모양을 세어 보러 오시는 건 아니잖아요.”나인은 웃음을 삼키며 주전자를 들었다. 뜨거운 물이 찻잔에 부어졌다. 새미는 찻잔을 받쳐 들고 김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강정에 묻은 조청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별궁 마당에서는 빗자루가 마른 잎을 쓸고 있었다. 매실나무 아래에는 잎 몇 장이 남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이 떨어졌고, 나인은 쓸고 새미는 잠시 뒤 다시 밟았다. 오늘은 그 정도 실수쯤은 그냥 두기로 했다.“오시는 분들이 곧 도착하실 겁니다.”“가희가 먼저 오면 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도강도 같이 왔으면 둘 다요.”“예, 마마.”새미가 강정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에 넣으려는 순간,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나인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손님이 오셨습니다.”새미는 강정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손끝을 옷에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희는 마루에 오르자마자 새미를 보고 두 손을 들었다.“새미야!”새미도 웃으며 앞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으려다 멈췄다. 가희의 손에 보자기가 들려 있었고, 새미의 손에는 찻잔이 있었다.“손부터 비워야겠네.”“그럼 이걸 받아.”가희가 보자기를 새미에게 건넸다. 새미는 찻잔을 나인에게 맡기고 보자기를 받았다. 도강이 뒤에서 가희의 겉옷을 받아 들었다. 도강은 새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마마,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두 사람 다 편히 들어오세요. 여기서는 그렇게까지 예를 차리지 않으셔도 돼요.”“그렇다고 마루에

  • 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   77화. 대추차

    “할매, 씨간장 독은 지게로 못 져.”끝분의 손이 독 뚜껑에 놓인 채 멈췄다. 두식은 막걸리 사발을 내려놓고 장독대 앞에 바짝 다가섰다. 새미는 아버지의 갓을 보았다. 갓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두식은 그걸 모르는 눈치였다.“못 지면 수레에 싣지.”“궁 문턱을 수레가 넘어가겄냐.”“그러면 내가 들면 되지.”“독을?”“씨간장 독은 안 되더라도, 작은 독은 들 수 있어유.”끝분은 두식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에 굳은살은 있었지만, 장독을 들어 본 손 같지는 않았다.“네가 장독을 들어 봤냐?”“장 지게를 졌잖유.”“그건 장 항아리 몇 개 실은 지게였고.”“그려도 등에 멨슈.”“항아리도 깨 먹었지.”두식은 입을 다물었다. 새미는 접시를 든 채 아버지를 살폈다. 지난번 같았으면 두식은 “금방 오께”라는 말만 남기고 마당을 빠져나갔을지 모른다. 오늘은 막걸리 사발도 내려놓았고 장독대에서 물러나지도 않았다.“그럼 내가 지게 대신 장독대를 지킬게유.”끝분이 고개를 돌렸다.“뭐라고?”“새미가 궁에 가면 물안장 독을 누가 살펴야 하잖유. 어머니 혼자 다 보기엔 힘에 부칠 테고. 내가 배우면 되지.”“장 담그는 것도 모르면서 뭘 지켜.”“그러니까 가르쳐 주시면 되잖유.”끝분은 한동안 두식을 바라봤다. 두식의 갓은 여전히 삐뚤어져 있었다. 새미는 웃음이 나오려는 입술을 다물었다.“내가 새미한테 장 담그는 법을 가르친 건 한두 마디가 아니여.”“나도 처음부터 배우면 되지.”“처음부터라면 메주부터다.”“그러면 메주부터 하겄슈.”“소금도 골라야 한다.”“고르면 되지.”“독도 씻고 말려야 혀.”“씻으면 되잖유.”“입은 잘 씻네.”“손도 씻을게유.”끝분이 독 뚜껑에서 손을 떼었다. 두식은 그 손짓을 허락으로 알아들었는지 소매를 걷었다.“지금부터 할까유?”“지금은 손님들 밥을 먹여야제.”“그럼 밥 먹이고 나서 배우면 되겠구먼.”“네가 밥을 먹이고?”“내가 상도 옮겼잖유.”“접시 하나 들고 전을 흘릴 뻔했지.”“안 흘렸

  • 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   76화. 막걸리

    마당에 들어선 단새미는 먼저 장독대를 바라봤다.장독 87개가 제자리에 있었다. 그 앞에는 멍석이 깔렸고, 마당 한쪽에는 잔치 음식이 놓인 상이 길게 이어졌다. 떡과 전, 삶은 고기가 접시마다 담겼다. 부엌에서는 국 끓는 소리가 났고, 막걸리 사발이 상 위에 하나씩 놓였다.“새미야,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봐라.”끝분이 부엌 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새미는 치맛자락을 조금 걷어 잡고 다가갔다.“할매, 뭐 도와줄까?”“저짝 상에 전이 모자란다. 저것 좀 옮겨라.”“벌써 다 놨는데?”“다 놨다고 끝이냐. 먹는 사람 입이 한둘이 아닌디.”끝분은 새미 손에 접시를 얹어 주었다. 새미는 접시를 들고 상으로 갔다. 마당을 가로지르던 단두식이 그 앞을 막았다.“새미야, 오늘은 네가 손님이여. 일을 하면 쓰나.”“아부지가 방금 일하라고 하셨잖아.”“그려. 아까는 그랬슈. 지금은 내가 생각이 바뀌었어.”“전은 이미 들었는데.”“그러면 잘 들고 가면 되지.”두식은 딸 손에 든 접시를 받아 들었다. 접시를 너무 높이 들자 전 하나가 가장자리로 미끄러졌다. 두식은 다른 손으로 얼른 받쳤다. 그 동작이 제법 능숙해 새미는 눈을 깜빡였다.“아부지, 전 옮기는 법도 배웠어?”“내가 젊어서 말이여, 장터에서 접시를 한 손으로 열두 개씩 옮겼어.”새미는 접시를 내려다봤다. 전은 몇 장 없었다.“열두 개가 어디 있어?”“그때는 있었지. 오늘은 접시가 작아서 이만큼만 든 거여.”끝분이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두식아, 허풍도 상에 올릴 거냐?”“어머니, 오늘은 새미 시집가는 잔칫날이잖유. 기운 좀 내야지.”“기운은 네가 내고 전은 내가 부칠란다. 그거 놓고 얼른 움직여.”두식은 접시를 상에 놓았다. 이번에는 전이 미끄러지지 않았다. 끝분은 그 모습을 보고도 칭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엌으로 돌아가며 새 접시를 한 장 더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새미는 그 접시를 받아 상 끝에 놓았다. 전 냄새와 막걸리 냄새가 마당에 퍼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

  • 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   75화. 떡국

    삼간택 처소의 문이 열렸다. 새미는 무릎 위에 모은 손을 내려다봤다. 나무 맛숟가락은 허리춤에 있었다. 오늘은 그걸 꺼내 쓸 자리가 아니었다.윤보옥이 먼저 일어섰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중전 앞에 섰다. 고개를 숙이는 각도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중전마마께 청이 있습니다.”“말하라.”“삼간택에서 물러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옹원 일을 배우고 싶습니다.”방 안이 잠잠해졌다. 보옥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 자리가 싫어서 물러나는 것도, 세자를 원하지 않아서 물러나는 것도 아니라고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새미는 보옥이 제 선택을 고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보았다.중전은 보옥의 눈을 살폈다.“세자빈 자리를 마다하고 사옹원에 가겠다는 뜻이냐?”“그렇습니다.”“사옹원 일은 예법을 익히는 것과 다르다. 손에 물도 묻고, 장부도 살펴야 한다.”“알고 있습니다.”“그 일을 네가 원하느냐?”“제가 원합니다.”보옥의 대답은 망설이지 않았다. 손은 치맛자락을 잡지 않았다. 예법 시험에서 답을 읊을 때와 달리 고개를 뻣뻣이 세우지도 않았다.중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다. 네 뜻대로 하라. 오늘부터 사옹원에서 배우도록 하겠다.”보옥은 깊이 절했다. 다시 몸을 일으키자 새미와 눈이 마주쳤다.“새미.”보옥이 불렀다. 두 사람 사이에 호칭이 바뀐 뒤로도,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이름을 부른 적은 드물었다.“네가 고른 일이니까, 잘해.”“새미도 네가 고른 일을 하겠지.”“응.”“그럼 됐어.”보옥의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새미는 손가락을 세지 않았다. 대신 보옥이 절을 마치고 돌아서는 것까지 지켜봤다.보옥은 삼간택을 위한 자리에서 물러나 문 쪽으로 걸었다. 그 걸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보옥이 나간 뒤, 비어 버린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새미는 그 자리를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새미도 한때는 떨어지는 일만 바라봤다. 할머니와 장독을 두고 궁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빚을 갚고 집을 지키면 그다음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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