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두식은 붙잡힌 소매를 내려다봤다. 새미의 손가락이 아버지 옷자락을 구겨 놓고 있었다.
“내놓는다고 한 건 아니여.”
“방금 내놓으면 말이 통할 것 같다고 했잖아.”
“그려. 말이 통할 것 같다는 말이었슈. 내놓는다는 말은 아니고.”
끝분이 짚을 내려놓았다.
“그 말장난으로 장독을 지킬 수 있겄냐?”
두식은 지게끈을 고쳐 쥐었다. 지게가 어깨에서 삐걱거렸다.
“어머니, 빚이 마흔 냥이잖유. 장독 열 개면 그중 얼마라도…….”
“독을 세어 봤냐?”
“안 세어 봤슈.”
“그럼 열 개가 얼마나 큰지 알겄냐?”
두식은 입을 다물었다. 새미는 아버지 소매를 놓지 않았다. 옷감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아부지, 장독은 돈이 아니야. 장을 담는 데 쓰는 거야.”
“그건 나도 알지.”
“알면 내놓겠다는 말 하지 마.”
“말만 한 거여.”
“말이 먼저 나가고 발이 따라 나가는 사람이 있잖아.”
두식이 헛기침했다. 끝분은 지게를 가리켰다.
“그 지게나 메고 장터에 가라. 독 이야기는 집에 두고.”
“오늘은 장 팔러 가는 게 아니고 동네에 볼일이 있어유.”
새미의 손이 소매에서 떨어졌다.
“무슨 볼일?”
“그냥 인사나 좀 하고 오려고.”
두식은 지게를 들었다. 지게 위에는 빈 광주리만 얹혀 있었다. 장을 팔러 가는 차림은 아니었다.
“아부지.”
“다녀오께.”
두식은 대문을 나섰다. 갓은 여전히 비뚤었고, 지게는 빈 채로 어깨에 걸렸다. 새미는 대문이 닫힐 때까지 서 있었다.
끝분이 짚을 주워 모았다.
“쫓아갈 거냐?”
“아니.”
“그럼 손부터 풀어라. 소매가 네 손에 잡혀 늘어났네.”
새미는 손가락을 폈다. 손바닥에 옷감 자국이 남았다.
“아부지는 장독을 넘길 생각 없어.”
“그렇겄지.”
“그런데 왜 자꾸 말이 달라져?”
“돈이 급하면 사람 말이 길어져. 길어진 말 안에 겁이 섞이고.”
끝분은 짚을 한 줌씩 가지런히 놓았다. 새미는 마루에 놓인 메주를 살폈다. 짚으로 묶인 큰애기는 단단했고, 고집쟁이는 모서리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울보의 매듭은 끝분이 아침에 다시 조여 놓았다.
“할매, 장부 좀 볼게.”
“장부는 왜?”
“독 이름이랑 담근 날을 다시 외우려고.”
“다 외우는디 뭘 또 외워.”
“혹시 빠뜨린 게 있나 보려고.”
끝분은 새미를 잠깐 바라보다가 안채로 들어갔다. 곧 『물안장 장부』를 들고 나왔다. 표지는 손때가 묻어 검게 닳았고, 모서리는 여러 번 접혔다 펴져 부드러웠다.
“손 씻고 봐라. 콩기름 묻히지 말고.”
“응.”
새미는 부엌에서 손을 씻었다. 물을 털고 돌아오자 끝분은 장부를 마루 가운데 놓았다. 새미는 옆에 앉아 책장을 한 장씩 넘겼다.
독 이름과 담근 날이 줄마다 적혀 있었다. 끝분의 글씨는 가지런하지 않았지만, 독 이름은 큼직했다. 큰애기, 고집쟁이, 울보. 이름 아래에는 메주를 넣은 날과 소금물을 부은 날이 적혔다. 어떤 줄에는 맛을 본 기록도 있었다.
새미는 손가락으로 줄을 따라갔다.
“큰애기는 소금이 조금 세네.”
“그때 소금이 덜 말랐어.”
“그러면 올해는 간을 봐서 물을 더 넣어야겠네.”
“혀로 먼저 보고 정해라. 장부만 믿다간 장이 삐친다.”
“장도 삐쳐?”
“그럼. 사람만 삐치는 줄 아냐.”
끝분은 새미가 짚은 줄을 손톱으로 눌렀다. 장부에 남은 자국이 손톱 아래로 희미하게 이어졌다.
새미는 다음 쪽을 넘겼다. 그러다 손이 멈췄다.
한 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종이가 끊겨 있었다. 찢긴 가장자리가 들쭉날쭉했다. 종이가 오래돼 저절로 떨어진 모양은 아니었다. 새미는 손가락을 대지 않고 끊긴 자리를 바라봤다.
“할매.”
“왜 그러냐.”
“여기 한 장이 없어.”
끝분의 손이 짚 위에서 멈췄다.
“어디가?”
새미는 장부를 조금 돌려 보여 주었다. 끊긴 자리 앞뒤에는 독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앞쪽에는 씨간장 독의 기록이 있었고, 뒤쪽에는 다른 독의 담근 날이 이어졌다.
“이 사이에 있던 장이 없어.”
끝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자리를 보았다.
“쥐가 먹었제.”
“종이가 이렇게 반듯하게 찢어져?”
“쥐도 이빨이 있응께.”
“가장자리가 반듯한 데도 있고, 뜯긴 데도 있어.”
“쥐 이빨이 고르진 않지.”
끝분은 장부를 덮으려 했다. 새미가 책장 끝을 가볍게 눌렀다. 붙잡지는 않았다. 그저 종이가 더 접히지 않게 손끝을 댔다.
“무슨 기록이 있었어?”
“오래된 장부여. 별일이 다 적혔겄지.”
“씨간장 독 기록이 이어지는 자리야.”
“독 이름이 이어진다고 다 중요한 건 아니여.”
끝분은 장부를 빼앗지 않았다. 손을 거둔 뒤 짚을 다시 만졌다.
“그럼 이 한 장만 없어진 건 이상하잖아.”
“쥐가 하필 거기서 배가 불렀는갑지.”
끝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지만, 짚을 꼬던 손이 잠깐 멎었다. 새미는 그 손을 보았다. 손가락 마디에는 굳은살이 두껍게 박여 있었다. 장독 뚜껑을 들고 메주를 만지며 생긴 굳은살이었다.
새미는 더 묻지 않았다. 할머니가 대답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지금 대답을 끌어낼 수 없었다. 그래도 찢긴 자리는 눈에 남았다.
“그러면 장부는 내가 다시 정리할게.”
“정리할 게 있냐?”
“독 이름하고 담근 날을 한 번 더 맞춰 볼래.”
“장부를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독이 싫어한다.”
“독도 싫어하는 게 많네.”
“사람하고 똑같여.”
끝분은 장부를 새미 쪽으로 밀어 주었다. 새미는 빠진 장을 다시 살폈다. 종이 끝에 먹물이 조금 남아 있었다. 글자 한 획인지, 종이에 스민 얼룩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장부에는 말이 없었다. 그래도 찢긴 자국은 오래전 누군가 급히 책장을 뜯어낸 손을 남기고 있었다.
―
2월 6일, 새미는 마루에서 단자에 쓸 종이를 펴 놓았다. 금혼령 방에 적힌 대로라면 집안에서 혼인할 나이의 처녀가 이름과 사주를 올려야 했다. 끝분은 부엌에서 메주를 살폈고, 단밤은 마당에서 장독 뚜껑을 닦았다.
“누나, 이 종이에 뭐 써?”
단밤이 뚜껑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내 이름이랑 사주.”
“사주는 먹는 거야?”
“아니.”
“그럼 왜 써?”
“간택에 올릴 단자래.”
단밤은 종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앞니가 빠진 자리가 보였다.
“누나가 세자빈 되는 종이야?”
“아니. 이름을 올리는 종이야.”
“이름 올리면 세자빈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쉽게 되면 다들 종이 한 장씩 쓰겠지.”
새미는 붓을 들었다. 사주를 적을 칸이 비어 있었다. 태어난 때와 날짜는 틀리지 않게 써야 했다. 새미는 기억을 더듬어 한 글자씩 적었다.
단밤이 붓끝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그거 틀리면 어떻게 돼?”
“모르겠어.”
“틀리면 혼나?”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일부러 틀리면?”
새미는 붓을 내려놓았다. 장부의 찢긴 자국이 떠올랐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끝분의 말도 함께 떠올랐다. 새미는 사주를 적은 줄을 다시 읽었다. 맞게 썼다.
“일부러 틀리면 거짓말이지.”
“거짓말하면 할매한테 혼나?”
“혼나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지.”
“누나는 거짓말하면 배 아파?”
“왜 배가 아파?”
“내가 거짓말하면 배가 아프던데.”
단밤은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전날 메주 부스러기를 먹고 혼났을 때도 배가 아프다고 했었다. 새미는 동생의 손목을 잡아 배에서 떼었다.
“너는 메주 먹고 배 아픈 거야.”
“그럼 거짓말을 많이 하면 배가 더 아파?”
“그건 네가 직접 확인하지 마.”
단밤은 입을 오므렸다. 새미는 붓을 다시 들었다. 단자에 이름을 적었다. 단새미. 글씨가 조금 기울었다. 새미는 종이를 돌려 다시 읽었다. 이름도 사주도 사실이었다.
사실대로 적으면 간택에 이름이 올라갈 터였다. 이름이 올라가면 초간택에 나가야 했다. 나가서 떨어지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을 해야 떨어질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지난 생의 초간택에서 중전은 후보들에게 질문을 했다. 새미는 그 자리의 향과 마루의 차가운 감촉까지 기억했다. 질문은 3개였다. 답하는 동안 새미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입을 열 때마다 다른 후보들의 옷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이 있었다. 집안에서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냐는 물음도 있었다. 마지막에는 세자빈이 되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때 새미는 답을 골라 말하지 않았다. 궁에 들어간 뒤에는 그 말을 자주 떠올렸다. 좋은 답을 하려고 애썼지만, 답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몰랐다.
이번에는 답을 바꾸면 될까. 간택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면 떨어질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면 끝분이 실망할 터였다. 새미는 붓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접었다. 하나, 둘. 생각이 늘어날수록 손가락이 더 굽었다.
“누나.”
단밤이 작은 소리로 불렀다.
“왜?”
“궁에서 떨어지는 방법 알아?”
“궁에 안 가 본 네가 어떻게 알아?”
“누나는 가 봤잖아.”
새미는 단밤을 바라보았다. 동생은 장독 뚜껑을 닦던 수건을 손에 들고 있었다. 눈은 종이에 가 있었지만, 질문은 새미를 향했다.
“꿈에서 봤어.”
새미는 짧게 말했다. 지난 생을 남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단밤은 새미가 꿈 이야기를 할 때마다 세부를 캐묻지 않았다. 대신 꿈에서 본 일이 먹을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물었다.
“꿈에서는 어떻게 떨어졌어?”
“아직 생각 중이야.”
“밥을 3그릇 먹고 트림을 해.”
새미는 붓을 쥔 손을 멈췄다.
“뭐라고?”
“간택에서 떨어지는 법. 밥을 3그릇 먹고 트림을 크게 하면 되지.”
“그럼 예법을 못 지킨다고 생각하겠네.”
“응. 바로 떨어질 거야.”
단밤은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새미는 입술을 다물었다. 동생의 작전은 간단했다. 간단한 작전이 좋은 작전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궁에서는 밥을 몇 그릇이나 줘?”
“모르지.”
“그런데 3그릇을 먹으라며.”
“누나가 먹을 수 있잖아.”
“밥을 많이 먹는다고 꼭 트림이 나오는 것도 아니야.”
“그럼 연습해야지.”
단밤은 마당으로 달려가 부엌 쪽을 향했다.
“할매, 볶은 콩 있지?”
“왜 찾는디?”
“누나가 궁에서 떨어지는 연습하게.”
새미는 단자 위에 손을 얹었다.
“그 말은 하지 마.”
이미 끝분이 부엌에서 나왔다. 손에는 작은 냄비가 들려 있었다.
“뭔 연습이여?”
단밤이 새미를 가리켰다.
“밥을 3그릇 먹고 트림하는 거.”
끝분은 새미를 보았다. 새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시킨 건 아니야.”
“그럼 누가 시켰는디?”
“밤톨이가 생각했어.”
“나는 궁에 가는 사람이 아니니께 괜찮아.”
끝분은 냄비를 마루에 놓았다. 안에는 볶은 콩이 담겨 있었다. 콩 냄새가 따뜻하게 올라왔다. 새미는 냄비를 내려다봤다.
“이걸 먹고 트림 연습하라고?”
“밥보다 콩이 낫지 않냐?”
“할매까지 왜 그래.”
“궁에서 밥을 3그릇이나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겄지. 콩 조금 먹어 보고 정해.”
단밤은 냄비에 손을 뻗었다.
“내가 먼저 먹어 볼게.”
끝분이 단밤의 손등을 가볍게 쳤다.
“뜨겁다.”
단밤은 손을 입김으로 식혔다. 새미는 콩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바삭한 껍질이 이 사이에서 부서졌다. 고소한 맛 뒤에 짠맛이 조금 남았다.
“소금은 많이 안 넣었네.”
“간식이니께.”
끝분도 콩 하나를 집어 먹었다. 단밤은 두 개를 한꺼번에 집으려다 끝분의 시선을 보고 하나만 골랐다.
“누나, 먹고 트림해 봐.”
“콩 하나 먹고 무슨 트림이 나.”
“하나, 둘, 셋.”
단밤은 새미가 먹을 때마다 숫자를 세었다. 새미는 콩을 3개 먹었다. 기다려도 아무 일도 없었다. 단밤은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내가 해 볼게.”
“너는 아까 메주를 먹어서 안 돼.”
“메주는 어제 먹었어.”
“그래도 그만 먹어.”
“그럼 콩은?”
“콩은 먹어도 돼.”
끝분이 냄비를 새미 쪽으로 밀었다. 단밤은 새미가 콩을 하나 더 집는 걸 지켜봤다. 새미는 천천히 씹었다. 콩 껍질이 혀에 닿았다. 새미는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작은 트림이 나왔다.
단밤이 손뼉을 쳤다.
“됐다!”
“이게 궁에서 떨어질 정도로 큰 소리는 아니잖아.”
“더 먹으면 커지지.”
“그건 떨어지는 연습이 아니라 배 아픈 연습이야.”
“궁에서는 배 아프면 바로 집에 보내 줄까?”
“그럴 리가 없지.”
단밤은 잠깐 생각했다. 그러고는 새미의 옆구리를 보며 물었다.
“그럼 3그릇 먹고 트림한 다음에 배 아프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이야.”
단밤은 손에 쥔 콩을 내려다봤다.
“배 아픈 건 아니어도 아프다고 하면 거짓말이네.”
“응.”
“그럼 누나는 못 하겠다.”
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해서 떨어질 수 있다면 쉬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종이에 사주를 적을 때부터 이미 거짓말은 막혔다. 초간택에서 입을 열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끝분이 냄비를 새미와 단밤 사이에 놓았다.
“떨어지는 게 꼭 소리를 내야 떨어지는 건 아니여.”
“그럼 어떻게 해?”
“그건 네가 알아낼 일이지.”
끝분은 부엌으로 돌아갔다. 단밤은 콩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이번에는 트림을 만들려 하지 않고 천천히 씹었다.
새미는 단자에 적은 이름을 다시 보았다. 이름과 사주는 모두 사실이었다. 종이를 접으려다 멈췄다. 초간택에서 들었던 질문 3개가 하나씩 떠올랐다. 가장 귀한 것. 집안에서 지킬 것. 빈궁이 된 뒤 할 일.
답을 미리 정해 두면, 거짓말 없이도 떨어질 수 있을까.
새미는 종이를 덮지 않았다.
―
2월 8일, 두식은 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지게를 내려놓았다. 이번에도 지게에는 장이 없었다. 대신 갓이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집 밖에서 누군가에게 자랑을 하고 온 사람의 차림이었다.
“아부지, 어디 갔다 왔어?”
“동네 한 바퀴 돌았슈.”
“장 팔러 간 건 아니네.”
“오늘은 팔 게 없었잖여.”
두식은 지게끈을 풀었다. 새미는 장부를 앞에 두고 종이에 독 이름을 옮겨 적고 있었다. 빠진 장을 빼고도 적을 내용은 많았다. 끝분은 새미 옆에서 메주를 뒤집었다.
두식은 마루에 앉아 손바닥으로 무릎을 쓸었다.
“사람들이 뭐래?”
새미가 물었다.
“뭘 말이여?”
“우리 딸이 간택에 나간다는 말.”
두식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누가 그래?”
“아부지가 다녀온 데가 어디였는지 물었어.”
“그냥 아는 사람들 있는 데 갔지.”
“거기서 뭐라고 했는데?”
두식은 갓을 벗어 무릎에 올렸다.
“우리 새미가 글도 알고 장맛도 잘 보니께, 혹시 간택에 들면 잘할 거라고 했슈.”
“간택에 들면 잘할 거라고?”
“그렇지.”
“간택에 나간다고 말한 거네.”
“그게 꼭 나간다는 말은 아니지.”
“사람들이 알아듣기엔 나간다는 말이야.”
두식은 갓의 비뚤어진 테를 손가락으로 바로잡았다.
“사람들이 먼저 물어봤어. 새미가 방 붙은 거 보고 후보로 나가느냐고.”
“그래서?”
“나도 모른다고 했지.”
새미는 종이 위에서 붓을 들었다.
“그리고?”
“네가 아직 정한 게 없다고 했슈.”
“그다음은?”
“장맛이 좋다는 말도 했고.”
끝분은 메주를 뒤집던 손을 멈췄다.
“그 말은 사실이니께.”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건 아니유.”
두식은 끝분을 힐끗 보았다. 끝분은 다시 메주를 손질했다. 새미는 장부에 옮긴 독 이름을 확인했다. 큰애기, 고집쟁이, 울보. 글씨를 한 줄씩 읽다가, 장부의 찢긴 자국을 다시 떠올렸다.
“아부지, 내가 간택에 나갈지 안 나갈지는 내가 정할 거야.”
“그려.”
“사람들한테 내가 세자빈이 될 거라고 말하지 마.”
“그런 말은 안 했슈.”
“세자빈 후보라고도.”
두식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새미는 붓끝을 종이에서 떼었다.
“말을 잘못하면 집안 사람들 기대가 커져. 내가 떨어져도 헛소문이 남고.”
“그럴 수 있지.”
“그리고 빚 갚는 일은 간택이랑 따로 생각해야 해.”
“그믐까지 마흔 냥을 마련해야 하니께.”
두식은 이번에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지게끈을 무릎 위에 놓고 매듭을 만졌다.
“내가 장독을 넘길 생각은 없슈.”
“아까는 열 개면 말이 통할 것 같다며.”
“생각이 짧았어.”
새미는 아버지 손을 보았다. 지게끈은 여러 번 고쳐 묶은 자국이 있었다. 두식은 매듭을 풀었다가 다시 묶었다.
“장 팔아서 갚을 거유. 쉽지는 않겠지만.”
“장터에서 하루에 얼마쯤 팔려?”
“그날그날 다르지.”
“대강이라도.”
“잘 팔리면 3냥 안팎이유. 안 팔리면 손에 쥐는 게 별로 없고.”
새미는 종이 귀퉁이에 ‘3냥’이라고 썼다. 그믐까지 남은 날을 셀 수는 있었지만, 매일 장이 다 팔린다는 보장은 없었다. 셈만으로 해결되는 빚은 아니었다.
“그럼 어디에 팔았는지, 얼마나 팔았는지 적어 둬.”
“장사를 하면서?”
“응. 대강이라도 적어야 다음에 뭘 바꿀지 알아.”
두식은 붓을 바라봤다.
“내가 글씨가 좋지는 않은디.”
“숫자만 적어도 돼.”
“숫자도 삐뚤어.”
“내가 읽으면 돼.”
두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미가 종이를 밀어 주자, 두식은 붓을 들었다. 숫자를 적으려다 먹을 너무 많이 묻혀 종이에 둥근 점을 만들었다.
“그건 장값이 아니라 먹물값이야.”
“처음이라 그런겨.”
“내일도 해.”
두식은 종이를 뒤집어 새로 썼다. 이번에는 붓끝을 가볍게 눌렀다. 숫자 하나가 비뚤게 적혔다. 새미는 읽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돼.”
“그려. 내가 젊어서 장사판을 돌아다닐 때는 숫자 없이도 장사가 됐슈.”
“그땐 빚이 없었어?”
“있었지.”
“그럼 숫자를 적었어야지.”
두식은 입을 다물었다. 끝분이 메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말로 갚을 빚이면 내가 대신 갚아 주겄다.”
“어머니는 장이나 담그셔유.”
“그러니께 네가 숫자를 적어.”
끝분은 새미 앞에 장부를 끌어당겼다. 새미는 옮겨 적은 기록을 장부와 맞춰 보았다. 담근 날이 맞는지 하나씩 확인했다. 장부에는 줄이 이어져 있었지만, 한 곳만 비어 있었다. 찢긴 자국을 지나 다음 독 이름으로 이어지는 자리였다.
새미는 손가락 끝으로 그 가장자리를 훑었다. 종이 섬유가 솟아 있었다. 오래전에 뜯긴 자리인지 최근에 뜯긴 자리인지 알 수 없었다.
“할매, 이 장부는 언제부터 쓴 거야?”
“오래됐지.”
“할매가 어릴 때부터?”
“내가 어릴 때 쓴 건 아니여.”
“그럼 할머니가 쓰기 시작한 거야?”
끝분은 대답하지 않고 장부를 살폈다. 새미는 찢긴 자리에서 눈을 떼었다.
“그쪽 기록만 없으면 독 이름을 맞추기 어려워.”
“독은 여기 다 있잖냐.”
“기록하고 지금 독을 맞춰 보는 거야.”
“네가 독을 못 알아볼 리가 있냐.”
“독은 알아봐도 언제 담갔는지는 장부를 봐야 해.”
끝분은 장부의 바깥쪽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종이가 눌려 납작해졌다. 두식은 옆에서 새미가 쓴 단자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그 종이는 다 썼어?”
“이름이랑 사주만 적었어.”
“간택에 낼 거냐?”
새미는 단자에 손을 올렸다.
“아직 몰라.”
“네가 안 나가고 싶다고 했잖여.”
“응.”
“그럼 안 내면 되지.”
“방에는 집안에서 단자를 올리라고 돼 있어.”
“방이 우리 집까지 들어와서 종이를 쓰라던?”
두식은 말하고 나서 제 말이 우스웠는지 코를 한 번 문질렀다. 새미는 웃지 않았다.
“안 내면 집안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그런가.”
“내면 간택에 나가야 할 수도 있고.”
“그렇지.”
“그래서 고민하는 거야.”
두식은 갓을 무릎에서 내려놓았다. 그는 새미가 적은 이름을 보았다. 손을 뻗지는 않았다.
“네가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고 어머니가 말했잖여.”
“할매는 그렇게 말했어.”
“나도 그 말에 반대는 안 해.”
새미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두식은 잠시 눈을 맞추다가 다시 장부로 시선을 옮겼다.
“다만 네가 정한 일은 네가 해야지. 내가 대신 말해 줄 일은 아니고.”
“아부지가 동네에서 대신 자랑했잖아.”
“그건 미안하네.”
두식은 천천히 말했다. 새미는 그 말이 변명보다 나았다. 아버지는 갓을 들고 테를 한 번 더 눌렀다.
“다음부터는 말하지 않을게.”
“세자빈 후보라고도?”
“그 말도 안 하겠슈.”
끝분이 장부의 찢긴 자리를 손가락으로 덮었다. 새미가 그 손을 보았다. 끝분은 손을 바로 치우지 않았다.
“할매.”
“왜.”
“이 장 한 장에는 무슨 독 기록이 있었어?”
끝분은 장부를 덮었다. 책장이 맞닿는 소리가 마루에 짧게 났다.
“그 장 한 장은 묻지 마라. 니 몫이 아니여.”
(3화 끝)
새미는 뚜껑에서 손을 뗐다. 끝분이 마른 천으로 손잡이를 한 번 더 닦았다.“이제 가야제. 궁에서 기다리겄다.”“할매가 먼저 가면 안 돼요. 오늘은 제가 가는 날이에요.”“독도 같이 가는디 내가 먼저 가면 어떻고 네가 먼저 가면 어떠냐.”끝분은 씨간장 독 앞에 섰다. 독의 입구를 둘러싼 흙은 단단했다. 독 옆면에는 오래된 손자국이 몇 겹으로 남아 있었다. 새미는 손바닥을 독에 댔다. 차가운 옹기가 손끝에 닿았다.새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독은 물안골 장독대에 있었다. 끝분의 시어머니가 그 시어머니에게서 받아 지킨 씨간장이었다. 지난 생에는 궁 장고에서 이 맛을 다시 만났다. 그때 새미는 독 앞에서 미끄러졌다. 이번에는 그 독을 제 손으로 궁에 들여놓으려 했다.마당에 첫눈이 내렸다. 한 점씩 떨어진 눈이 독 뚜껑과 새미의 무명 끈 위에 붙었다.“눈 온다.”밤톨이가 문밖에서 소리쳤다.“누나, 눈이 독에 들어가면 안 되지?”“뚜껑 닫았으니까 괜찮아. 너는 옷부터 챙겨 입어.”밤톨이는 이미 겉옷을 입고 있었다. 앞니 빠진 입을 벌리고 웃으며 빈손을 내밀었다.“내 옷은 다 입었어. 독을 받치면 돼.”“손부터 씻어. 옹기 잡을 거잖아.”밤톨이는 손을 내렸다. 뒤뜰에서 두식이 지게 끈을 조였다. 갓은 평소보다 반듯하게 썼지만, 새미가 보기엔 여전히 한쪽이 기울어 있었다.“아부지, 갓이 또 삐뚤어졌어요.”“그려? 오늘은 마음이 바빠서 그런가 보네.”“갓은 마음으로 쓰는 게 아니에요.”“그럼 손으로 고치면 되지.”두식은 갓을 바로잡고 지게를 내려놓았다. 지게 위에는 씨간장 독을 받칠 짚과 두꺼운 천이 놓여 있었다. 끝분이 천을 만져 보고는 두식의 손등을 탁 쳤다.“이거 너무 얇다.”“어머니, 독이 그리 무겁진 않잖유.”“네가 들어 봤냐?”“아직은 안 들어 봤슈.”“안 들어 봤으면 입부터 다물어라.”“예.”두식은 대꾸를 삼켰다. 밤톨이는 손을 씻고 돌아와 지게 옆에 섰다. 새미는 독의 아래쪽을 살폈다. 금이 간 곳은 없었다. 지게
새미는 기다림이 독 앞에 쪽지를 내려놓았다. 종이 끝이 바람에 들리지 않도록 장부로 눌렀다.“오늘 여는 날이오.”세자가 독 앞에 섰다. 쪽빛 도포의 소매를 걷은 손에 흙이 조금 묻어 있었다. 새미는 독 뚜껑을 살폈다. 가장자리에 마른 흙이 끼어 있었고, 손잡이에는 지난번 닦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오늘 여는 날이라고 하셨으면서, 벌써 열어 보셨습니까?”“아직 열지 않았소.”“그럼 이 흙은요?”“독을 옮길 때 묻었소. 뚜껑은 건드리지 않았소.”새미는 세자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 끝에도 흙이 묻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독을 옮기고 나서 손을 씻지 않은 모양이었다.“장독대에 들어오시기 전에 손부터 씻으셨어야죠.”“맞는 말이오.”세자는 그 자리에서 손을 털지 않았다. 새미가 바가지와 물그릇을 가져오자 두 손을 내밀었다. 새미는 물을 부었다. 손끝에 묻은 흙이 물그릇 밑으로 가라앉았다.“이제 됐소?”“손톱 밑도요.”세자는 손을 돌려 손톱 밑을 보여 주었다. 새미는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장독대에는 찬 공기가 남아 있었다. 볕이 닿은 독의 어깨는 조금 따뜻했고, 그늘에 놓인 독은 차가웠다. 기다림이 독은 가운데 줄 맨 끝에 있었다. 8개월 동안 뚜껑을 열지 않았다. 새미는 담근 날부터 장부에 날짜와 재료를 적었다. 그 뒤로는 독을 지나칠 때마다 뚜껑을 두드리지 않고 옆면만 살폈다.“3년 뒤에 같이 열자고 하셨잖아요.”“그랬소.”“그런데 오늘은 8개월 된 장을 열어도 된다고 하시는군요.”“3년을 기다리기로 한 건 장이었소. 오늘 맛을 보는 것까지 금한 건 아니오.”“말은 맞는데, 듣고 있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네요.”“그럼 내가 먼저 맛보겠소.”“제가 장을 담갔으니 제가 먼저 봐야죠.”“그대가 먼저 봐도 좋소.”세자는 대꾸를 더 잇지 않았다. 새미는 그 침묵을 받아 독 앞에 쪼그려 앉았다. 독을 열기 전에 주변부터 살폈다. 뚜껑이 비뚤어지지 않았고, 독의 입구도 깨끗했다. 새미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마른 천으로 뚜껑 가장자리를
새미는 강정 접시를 마루 가운데로 옮겼다. 접시 밑에 깐 종이가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 손끝으로 종이를 당기자 바삭한 부스러기가 손바닥에 묻었다.“이렇게 많이 준비할 필요는 없었는데.”“손님이 오신다면서요.”옆에서 찻물을 올리던 나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새미는 접시를 살폈다. 강정은 가지런히 놓였지만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쌀알이 큼직하게 붙은 것도 있고, 끝이 조금 부서진 것도 있었다.“모양이 달라도 맛은 같아요.”“그래도 마마께서 손수 놓으셨는데요.”“손님들이 모양을 세어 보러 오시는 건 아니잖아요.”나인은 웃음을 삼키며 주전자를 들었다. 뜨거운 물이 찻잔에 부어졌다. 새미는 찻잔을 받쳐 들고 김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강정에 묻은 조청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별궁 마당에서는 빗자루가 마른 잎을 쓸고 있었다. 매실나무 아래에는 잎 몇 장이 남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이 떨어졌고, 나인은 쓸고 새미는 잠시 뒤 다시 밟았다. 오늘은 그 정도 실수쯤은 그냥 두기로 했다.“오시는 분들이 곧 도착하실 겁니다.”“가희가 먼저 오면 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도강도 같이 왔으면 둘 다요.”“예, 마마.”새미가 강정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에 넣으려는 순간,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나인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손님이 오셨습니다.”새미는 강정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손끝을 옷에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희는 마루에 오르자마자 새미를 보고 두 손을 들었다.“새미야!”새미도 웃으며 앞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으려다 멈췄다. 가희의 손에 보자기가 들려 있었고, 새미의 손에는 찻잔이 있었다.“손부터 비워야겠네.”“그럼 이걸 받아.”가희가 보자기를 새미에게 건넸다. 새미는 찻잔을 나인에게 맡기고 보자기를 받았다. 도강이 뒤에서 가희의 겉옷을 받아 들었다. 도강은 새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마마,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두 사람 다 편히 들어오세요. 여기서는 그렇게까지 예를 차리지 않으셔도 돼요.”“그렇다고 마루에
“할매, 씨간장 독은 지게로 못 져.”끝분의 손이 독 뚜껑에 놓인 채 멈췄다. 두식은 막걸리 사발을 내려놓고 장독대 앞에 바짝 다가섰다. 새미는 아버지의 갓을 보았다. 갓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두식은 그걸 모르는 눈치였다.“못 지면 수레에 싣지.”“궁 문턱을 수레가 넘어가겄냐.”“그러면 내가 들면 되지.”“독을?”“씨간장 독은 안 되더라도, 작은 독은 들 수 있어유.”끝분은 두식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에 굳은살은 있었지만, 장독을 들어 본 손 같지는 않았다.“네가 장독을 들어 봤냐?”“장 지게를 졌잖유.”“그건 장 항아리 몇 개 실은 지게였고.”“그려도 등에 멨슈.”“항아리도 깨 먹었지.”두식은 입을 다물었다. 새미는 접시를 든 채 아버지를 살폈다. 지난번 같았으면 두식은 “금방 오께”라는 말만 남기고 마당을 빠져나갔을지 모른다. 오늘은 막걸리 사발도 내려놓았고 장독대에서 물러나지도 않았다.“그럼 내가 지게 대신 장독대를 지킬게유.”끝분이 고개를 돌렸다.“뭐라고?”“새미가 궁에 가면 물안장 독을 누가 살펴야 하잖유. 어머니 혼자 다 보기엔 힘에 부칠 테고. 내가 배우면 되지.”“장 담그는 것도 모르면서 뭘 지켜.”“그러니까 가르쳐 주시면 되잖유.”끝분은 한동안 두식을 바라봤다. 두식의 갓은 여전히 삐뚤어져 있었다. 새미는 웃음이 나오려는 입술을 다물었다.“내가 새미한테 장 담그는 법을 가르친 건 한두 마디가 아니여.”“나도 처음부터 배우면 되지.”“처음부터라면 메주부터다.”“그러면 메주부터 하겄슈.”“소금도 골라야 한다.”“고르면 되지.”“독도 씻고 말려야 혀.”“씻으면 되잖유.”“입은 잘 씻네.”“손도 씻을게유.”끝분이 독 뚜껑에서 손을 떼었다. 두식은 그 손짓을 허락으로 알아들었는지 소매를 걷었다.“지금부터 할까유?”“지금은 손님들 밥을 먹여야제.”“그럼 밥 먹이고 나서 배우면 되겠구먼.”“네가 밥을 먹이고?”“내가 상도 옮겼잖유.”“접시 하나 들고 전을 흘릴 뻔했지.”“안 흘렸
마당에 들어선 단새미는 먼저 장독대를 바라봤다.장독 87개가 제자리에 있었다. 그 앞에는 멍석이 깔렸고, 마당 한쪽에는 잔치 음식이 놓인 상이 길게 이어졌다. 떡과 전, 삶은 고기가 접시마다 담겼다. 부엌에서는 국 끓는 소리가 났고, 막걸리 사발이 상 위에 하나씩 놓였다.“새미야,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봐라.”끝분이 부엌 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새미는 치맛자락을 조금 걷어 잡고 다가갔다.“할매, 뭐 도와줄까?”“저짝 상에 전이 모자란다. 저것 좀 옮겨라.”“벌써 다 놨는데?”“다 놨다고 끝이냐. 먹는 사람 입이 한둘이 아닌디.”끝분은 새미 손에 접시를 얹어 주었다. 새미는 접시를 들고 상으로 갔다. 마당을 가로지르던 단두식이 그 앞을 막았다.“새미야, 오늘은 네가 손님이여. 일을 하면 쓰나.”“아부지가 방금 일하라고 하셨잖아.”“그려. 아까는 그랬슈. 지금은 내가 생각이 바뀌었어.”“전은 이미 들었는데.”“그러면 잘 들고 가면 되지.”두식은 딸 손에 든 접시를 받아 들었다. 접시를 너무 높이 들자 전 하나가 가장자리로 미끄러졌다. 두식은 다른 손으로 얼른 받쳤다. 그 동작이 제법 능숙해 새미는 눈을 깜빡였다.“아부지, 전 옮기는 법도 배웠어?”“내가 젊어서 말이여, 장터에서 접시를 한 손으로 열두 개씩 옮겼어.”새미는 접시를 내려다봤다. 전은 몇 장 없었다.“열두 개가 어디 있어?”“그때는 있었지. 오늘은 접시가 작아서 이만큼만 든 거여.”끝분이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두식아, 허풍도 상에 올릴 거냐?”“어머니, 오늘은 새미 시집가는 잔칫날이잖유. 기운 좀 내야지.”“기운은 네가 내고 전은 내가 부칠란다. 그거 놓고 얼른 움직여.”두식은 접시를 상에 놓았다. 이번에는 전이 미끄러지지 않았다. 끝분은 그 모습을 보고도 칭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엌으로 돌아가며 새 접시를 한 장 더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새미는 그 접시를 받아 상 끝에 놓았다. 전 냄새와 막걸리 냄새가 마당에 퍼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
삼간택 처소의 문이 열렸다. 새미는 무릎 위에 모은 손을 내려다봤다. 나무 맛숟가락은 허리춤에 있었다. 오늘은 그걸 꺼내 쓸 자리가 아니었다.윤보옥이 먼저 일어섰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중전 앞에 섰다. 고개를 숙이는 각도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중전마마께 청이 있습니다.”“말하라.”“삼간택에서 물러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옹원 일을 배우고 싶습니다.”방 안이 잠잠해졌다. 보옥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 자리가 싫어서 물러나는 것도, 세자를 원하지 않아서 물러나는 것도 아니라고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새미는 보옥이 제 선택을 고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보았다.중전은 보옥의 눈을 살폈다.“세자빈 자리를 마다하고 사옹원에 가겠다는 뜻이냐?”“그렇습니다.”“사옹원 일은 예법을 익히는 것과 다르다. 손에 물도 묻고, 장부도 살펴야 한다.”“알고 있습니다.”“그 일을 네가 원하느냐?”“제가 원합니다.”보옥의 대답은 망설이지 않았다. 손은 치맛자락을 잡지 않았다. 예법 시험에서 답을 읊을 때와 달리 고개를 뻣뻣이 세우지도 않았다.중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다. 네 뜻대로 하라. 오늘부터 사옹원에서 배우도록 하겠다.”보옥은 깊이 절했다. 다시 몸을 일으키자 새미와 눈이 마주쳤다.“새미.”보옥이 불렀다. 두 사람 사이에 호칭이 바뀐 뒤로도,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이름을 부른 적은 드물었다.“네가 고른 일이니까, 잘해.”“새미도 네가 고른 일을 하겠지.”“응.”“그럼 됐어.”보옥의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새미는 손가락을 세지 않았다. 대신 보옥이 절을 마치고 돌아서는 것까지 지켜봤다.보옥은 삼간택을 위한 자리에서 물러나 문 쪽으로 걸었다. 그 걸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보옥이 나간 뒤, 비어 버린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새미는 그 자리를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새미도 한때는 떨어지는 일만 바라봤다. 할머니와 장독을 두고 궁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빚을 갚고 집을 지키면 그다음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