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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이 소금물 위로 엽전만큼 떠올랐다.
“워메, 딱 좋구먼.”
끝분이 함지 가장자리에 손을 얹었다. 달걀은 물에 잠긴 채 둥실 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새미는 숨을 들이켰다.
방금 전까지 새미는 궁 장고에서 쓰러져 있었다. 스물다섯 살 세자빈으로 일곱 해를 살고, 장독 앞에 미끄러져 넘어진 참이었다. 할머니 장맛이 나는 간장을 입에 댄 순간, 놀라서 손을 뻗었었다.
그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
“새미야. 왜 그러냐?”
끝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미는 눈을 깜빡였다. 소금물 함지, 장독대, 끝분의 굵은 손가락. 무명 끈으로 묶은 제 머리카락이 뺨에 붙었다. 손등에는 장독을 닦다 생긴 흉터 두 개가 있었다. 손이 작아 보였다.
새미는 손바닥을 펴고 손가락을 접었다. 하나, 둘, 셋. 손가락 마디가 다시 어렸다.
“할매.”
“왜.”
“오늘이 며칠이여?”
“아침부터 별소리를 다 하네. 장 담그는 날이지.”
끝분이 달걀을 건져 소금물에 다시 넣었다.
“그게 며칠이냐고.”
“2월 3일.”
새미는 함지 가장자리를 잡았다. 손끝에 차가운 물기가 묻었다. 2월 3일. 장 담그는 날. 금혼령 방이 붙기 전날도 아니었다. 바로 그날이었다.
“새미야, 얼굴이 허옇다. 어디 아프냐?”
“아녀.”
거짓말을 못 하는 혀가 먼저 나섰다. 새미는 말을 고쳤다.
“잠깐 놀랐어.”
“뭘 보고 놀랐는디?”
“달걀이 떠서.”
“달걀 뜨는 걸 오늘 처음 봤냐?”
끝분이 눈을 흘겼다. 새미는 대답 대신 함지 안을 들여다보았다. 달걀은 소금물 위에 엽전만큼 떠 있었다. 끝분은 한 손가락으로 달걀을 눌렀다가 놓았다.
그때 부엌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단밤이 메주 부스러기를 입가에 묻힌 채 장독대에 나타났다. 앞니 하나가 빠진 입으로 씩 웃었다.
“누나, 메주 더 있어?”
끝분이 고개를 돌렸다.
“밤톨아.”
단밤의 웃음이 바로 사라졌다.
“그거 먹었냐?”
“조금.”
“조금이 어느만큼인디.”
단밤이 양손을 벌렸다. 새미는 메주 광 쪽을 보았다. 메주 한 덩이가 모서리부터 뜯겨 있었다.
“그건 3년 뒤에 먹는 것이여.”
끝분의 말에 단밤은 남은 부스러기를 손바닥에 감췄다.
“배가 고팠어.”
“배고프다고 씨앗을 씹어 먹냐. 그건 장이 될 놈이여.”
“메주도 먹는 거잖아.”
“먹을 때가 따로 있당께.”
끝분이 손을 내밀었다. 단밤은 부스러기를 내놓지 않고 새미 뒤로 숨었다. 새미가 동생을 돌아보자 단밤은 입술을 오므렸다.
“누나, 할매가 나를 메주보다 아껴?”
“메주한테 물어봐.”
“메주는 대답 안 하잖아.”
“그러니 네가 더 낫지.”
새미가 단밤 손바닥을 펼쳤다. 메주 부스러기가 손금에 박혀 있었다. 단밤은 새미 손을 피해 달아나려 했지만, 끝분이 먼저 목덜미를 잡았다.
“손 씻고 와라. 그 손으로 독 만지면 안 된다.”
“내가 닦을게.”
새미가 나서자 끝분은 손을 놓았다. 단밤은 얼른 부엌으로 달려갔다. 발뒤꿈치가 흙바닥을 두드렸다.
새미는 동생이 사라진 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지난 생에도 단밤은 메주를 훔쳐 먹었다. 그때는 혼례를 치르느라 집에 없었다. 돌아왔을 때는 메주 광이 비어 있었다. 누구도 그날 일을 길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은 단밤이 부엌에 있었다. 앞니도 빠져 있었다. 새미는 제 손등을 쓸었다.
끝분은 함지에서 달걀을 꺼내 빛을 살폈다.
“새미야, 네가 소금물 좀 봐라. 장 담글 때 간이 틀어지면 독들이 다 투정을 해.”
“응.”
“그렇다고 네 맘대로 소금 더 넣지 말고. 달걀이 얼마나 떴는지 봐야 혀.”
새미는 함지 옆에 무릎을 꿇었다. 작은 나무 맛숟가락을 허리춤에서 꺼내 물을 떠 맛보았다. 짠맛이 혀끝을 지나 목으로 갔다. 새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소금이 더 들어가야 해.”
“얼마나?”
“한 줌은 아니고, 반 줌도 많아. 손가락으로 집어서 조금씩.”
끝분이 입꼬리를 내렸다.
“오늘은 네가 간을 봐라.”
새미는 소금을 집어 함지에 넣었다. 젓가락으로 물을 저은 뒤 달걀을 띄웠다. 달걀이 조금 더 올라왔다.
“이제 됐어.”
끝분이 달걀을 눌렀다 놓았다.
“그래. 엽전만큼 뜨네.”
끝분은 그때도 엽전만큼 떴다고 말했다.
새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독대 쪽으로 걸었다. 독은 세 줄로 놓여 있었다. 하나, 둘, 셋. 눈으로 세지 않아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았다. 앞줄 가운데 씨간장 독. 이름은 장부에만 적힌 게 아니었다. 끝분은 독마다 이름을 불렀고, 새미도 그 이름을 알았다.
씨간장 독은 오래된 독이었다. 할머니의 시어머니의 시어머니 때부터 이어 온 장이 그 안에 있었다. 새미는 독 앞에 멈춰 섰다. 뚜껑은 제자리에 있었고, 틈에 낀 짚도 가지런했다.
지난 생, 궁 장고에서 맛본 간장이 이 독의 맛이었다. 짠맛 뒤에 단맛이 왔다. 혀끝에 오래 남는 구수한 맛도 같았다. 그날 새미는 궁에서 그 맛을 알아보고 놀랐다. 손을 뻗다가 독 앞에서 넘어졌다.
눈을 뜨니 다시 이곳이었다.
“씨간장 독에 손대지 마라.”
끝분이 뒤에서 말했다.
“안 댔어.”
“눈으로만 봐도 독이 간질간질하겄다.”
“할매, 이 독에 든 장은 얼마나 묵었어?”
“그걸 네가 묻냐? 장부에 다 적혀 있잖여.”
“알아. 그냥 듣고 싶어서.”
끝분은 새미 옆에 섰다. 손등으로 씨간장 독의 어깨를 한번 쓸었다.
“우리 집 장은 오래됐어도 오늘 새로 담근 장하고 다르다. 묵은 건 묵은 대로 두고, 새 장은 새 장대로 살펴야 혀.”
새미는 독의 뚜껑을 보았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지난 생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궁에서 일곱 해를 살았다는 말도, 그곳에서 혼자였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할매.”
“왜 또.”
“나 오늘 이상한 꿈을 꿨어.”
끝분의 손이 독에서 멈췄다.
“무슨 꿈인디?”
“궁에 있었어. 장독 앞에 넘어졌는데, 장맛이 할매 거랑 똑같았어.”
“꿈에서까지 장을 먹었냐?”
“응.”
“배고팠나 보네.”
끝분은 더 묻지 않았다. 새미는 눈을 내리깔았다. 할머니는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말 대신 장독을 한 번 더 닦았다.
끝분이 수건을 건넸다.
“저 줄부터 닦아라. 독 뚜껑에 소금물 튀었어.”
새미는 수건을 받았다. 손가락이 끝분의 손가락에 닿았다. 온기가 있었다. 새미는 수건을 꽉 쥐었다.
“응. 닦을게.”
―
뒤뜰에서 장 담그는 손길이 오가는 동안, 단두식은 집 안에 없었다. 그는 장을 팔러 나갈 때마다 금방 오겠다고 했고, 그 말대로 돌아오는 날은 드물었다. 끝분은 아들이 어디 있는지 묻지 않았다. 물어봐야 답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새미는 장독을 하나씩 닦았다. 수건에 묻은 먼지를 털고 뚜껑 가장자리를 훑었다. 독마다 생김새가 달랐다. 입이 넓은 독, 어깨가 둥근 독, 뚜껑이 조금 기운 독. 새미는 어느 독이 어느 해 장인지 알아보았다.
“큰애기는 오늘도 뚜껑이 안 맞네.”
“그 독 뚜껑은 원래 그랬어.”
“울보는 소금기 묻었어.”
“어제 비 맞은 데가 그쪽이여.”
끝분은 새미가 가리키는 독을 살폈다. 새미가 수건을 건네자 끝분은 뚜껑을 들어 안쪽을 확인했다. 소금기가 희게 말라 있었다.
“맞네. 네 눈이 더 밝아졌구나.”
“꿈에서 장을 많이 봐서 그런가 봐.”
“장 꿈 꾸고 장 눈이 밝아졌으면, 그 꿈은 괜찮은 꿈이네.”
끝분은 뚜껑을 다시 덮었다. 새미는 그 말을 마음에 담았다. 새미는 꿈이라고만 말했다.
장독대 가장자리에 햇빛이 닿았다. 새미는 바닥에 흘린 소금물을 빗자루로 쓸었다. 손등의 흉터가 당겼다. 지난 생에는 이 손으로 궁의 장고를 오갔다. 한 번도 제 뜻대로 장을 담그지 못했다. 세자와 나눈 말은 손에 꼽았다.
독 앞에 서면 할 말이 많았는데, 사람 앞에 서면 목소리가 줄었다.
“새미야.”
끝분이 불렀다.
“응?”
“수건이 모자라면 말혀. 혼자 들고 낑낑대지 말고.”
“안 낑낑대.”
새미는 큰 독 뚜껑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끝분이 옆에서 바로 손을 보탰다.
“그러다 허리 나간다.”
“할매가 먼저 놓으면 내가 들어.”
“내 허리가 네 것보다 튼튼혀.”
“그럼 같이 들어.”
두 사람은 뚜껑을 제자리에 놓았다. 끝분은 손바닥으로 흙을 털었다. 새미는 장독대 끝을 살펴보다가 장부를 찾았다.
『물안장 장부』는 안채 안쪽에 놓여 있었다. 새미는 장부를 들고 나와 독의 이름과 담근 날을 확인했다. 한 줄씩 손가락으로 짚었다. 장독은 여든일곱 개였다. 집안의 살림이자 할머니의 시간이었다.
“할매, 장부에 씨간장 독은 따로 표시해 뒀네.”
“그 독은 빼먹으면 안 되니께.”
“여기 적힌 날짜가 맞아?”
“네가 보기엔 어떠냐?”
새미는 날짜와 독에 붙은 작은 표식을 번갈아 보았다. 장부의 먹은 오래됐고, 끝분의 글씨는 눌러 쓴 자국이 깊었다.
“맞아. 이 독은 이 자리에 있어야 해.”
“그려. 독이 자리를 옮기면 맛도 달라진다.”
끝분은 장부를 받아 들었다. 새미는 씨간장 독을 다시 보았다. 이 독을 지켜야 했다. 할머니도, 단밤도, 장부도. 지난 생에는 손을 뻗을 때마다 늦었다. 이번에는 늦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 단밤이 부엌에서 돌아왔다. 손은 깨끗했지만 입가에 메주 부스러기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새미가 손을 내밀었다.
“입.”
단밤은 입을 다물었다.
“입 벌려 봐.”
“안 먹었어.”
“입에 뭐 묻었는데.”
“먼지야.”
끝분이 장부를 덮었다.
“그 먼지가 메주 냄새가 나네.”
단밤은 혀로 입가를 훑었다. 새미는 웃음을 삼켰다. 끝분은 단밤의 이마에 묻은 흙을 털어 주었다.
“점심때까지 광에 들어가지 마라.”
“그럼 점심 먹고는?”
“점심 먹고도 안 돼.”
“그럼 언제 들어가?”
“메주가 될 때까지.”
“메주가 이미 메주잖아.”
“말대꾸는 잘하네.”
단밤은 새미 뒤에 숨었다. 새미는 장부를 끌어안고 동생을 가렸다. 끝분은 혼내는 손으로 단밤의 옷깃을 바로잡았다.
―
해가 올라오자 마을 어귀에서 사람들 말소리가 들렸다. 새미는 장독을 닦던 손을 멈췄다. 끝분도 수건을 내려놓았다.
“뭔 소리여?”
“관아에서 왔나 봐.”
대문 밖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소리가 났다. 새미는 손을 씻고 마당 쪽으로 갔다. 끝분은 뒤에서 따라왔다. 단밤은 부엌 문에 서서 앞니 빠진 자리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마을 어귀에 아전이 방을 붙이고 있었다. 종이를 펴고 풀을 바른 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벽에 눌러 붙였다. 바람이 종이 한쪽을 들추자 아전이 손바닥으로 다시 눌렀다.
“금혼령이 내려졌소. 혼인할 나이의 처녀는 집안에서 단자를 올리시오.”
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번졌다. 새미는 종이의 글자를 읽었다. 간택에 이름을 올리라는 내용이었다. 손끝이 식었다.
지난 생에도 이 방이 붙었다. 그날부터 일이 달라졌다. 새미는 간택에 나가 세자빈이 됐다. 친정은 궁에서 지내는 동안 빚에 눌리고 납품권 다툼에 밀려 문을 닫았다. 세자와는 같은 처소에 있으면서도 대화가 드물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새미야.”
끝분이 낮게 불렀다.
“집에 가자.”
“응.”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새미 쪽으로 모였다. 새미는 종이에서 눈을 떼고 발걸음을 옮겼다. 금혼령 방은 담 너머에서도 보였다. 끝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새미는 장독대 앞에 섰다. 바람에 옷자락이 흔들렸다. 앞줄 가운데 씨간장 독이 보였다. 그 옆으로 이름 붙은 독들이 줄을 맞춰 있었다.
“할매.”
“왜 그러냐.”
“나 간택에 안 나가고 싶어.”
끝분이 장부를 내려놓았다.
“그려. 네 맘이 그렇다면 그러면 되지.”
“집안에서 단자를 올리라고 했잖아.”
“방에 적혔다고 다 해야 쓰겄냐.”
“아부지가 빚도 있어.”
끝분은 대답하지 않았다. 새미는 손가락을 접었다. 하나, 둘. 장독 여든일곱 개. 빚 마흔 냥. 할머니. 단밤. 이번에는 어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생엔 간택에서 떨어질 거야.”
“떨어지고 싶으믄 떨어져라.”
끝분은 장부를 다시 펼쳤다.
“근디 거짓말은 하지 마라.”
새미는 입을 다물었다. 간택에 나가면 떨어지는 것부터 해내야 했다. 그 뒤에는 빚을 갚고 장독을 지켜야 했다. 하나씩 직접 풀면 됐다.
그때 대문이 벌컥 열렸다. 은가락지를 낀 염대길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단 서방 있소? 이달 그믐까지 마흔 냥이오.”
(1화 끝)
새미는 뚜껑에서 손을 뗐다. 끝분이 마른 천으로 손잡이를 한 번 더 닦았다.“이제 가야제. 궁에서 기다리겄다.”“할매가 먼저 가면 안 돼요. 오늘은 제가 가는 날이에요.”“독도 같이 가는디 내가 먼저 가면 어떻고 네가 먼저 가면 어떠냐.”끝분은 씨간장 독 앞에 섰다. 독의 입구를 둘러싼 흙은 단단했다. 독 옆면에는 오래된 손자국이 몇 겹으로 남아 있었다. 새미는 손바닥을 독에 댔다. 차가운 옹기가 손끝에 닿았다.새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독은 물안골 장독대에 있었다. 끝분의 시어머니가 그 시어머니에게서 받아 지킨 씨간장이었다. 지난 생에는 궁 장고에서 이 맛을 다시 만났다. 그때 새미는 독 앞에서 미끄러졌다. 이번에는 그 독을 제 손으로 궁에 들여놓으려 했다.마당에 첫눈이 내렸다. 한 점씩 떨어진 눈이 독 뚜껑과 새미의 무명 끈 위에 붙었다.“눈 온다.”밤톨이가 문밖에서 소리쳤다.“누나, 눈이 독에 들어가면 안 되지?”“뚜껑 닫았으니까 괜찮아. 너는 옷부터 챙겨 입어.”밤톨이는 이미 겉옷을 입고 있었다. 앞니 빠진 입을 벌리고 웃으며 빈손을 내밀었다.“내 옷은 다 입었어. 독을 받치면 돼.”“손부터 씻어. 옹기 잡을 거잖아.”밤톨이는 손을 내렸다. 뒤뜰에서 두식이 지게 끈을 조였다. 갓은 평소보다 반듯하게 썼지만, 새미가 보기엔 여전히 한쪽이 기울어 있었다.“아부지, 갓이 또 삐뚤어졌어요.”“그려? 오늘은 마음이 바빠서 그런가 보네.”“갓은 마음으로 쓰는 게 아니에요.”“그럼 손으로 고치면 되지.”두식은 갓을 바로잡고 지게를 내려놓았다. 지게 위에는 씨간장 독을 받칠 짚과 두꺼운 천이 놓여 있었다. 끝분이 천을 만져 보고는 두식의 손등을 탁 쳤다.“이거 너무 얇다.”“어머니, 독이 그리 무겁진 않잖유.”“네가 들어 봤냐?”“아직은 안 들어 봤슈.”“안 들어 봤으면 입부터 다물어라.”“예.”두식은 대꾸를 삼켰다. 밤톨이는 손을 씻고 돌아와 지게 옆에 섰다. 새미는 독의 아래쪽을 살폈다. 금이 간 곳은 없었다. 지게
새미는 기다림이 독 앞에 쪽지를 내려놓았다. 종이 끝이 바람에 들리지 않도록 장부로 눌렀다.“오늘 여는 날이오.”세자가 독 앞에 섰다. 쪽빛 도포의 소매를 걷은 손에 흙이 조금 묻어 있었다. 새미는 독 뚜껑을 살폈다. 가장자리에 마른 흙이 끼어 있었고, 손잡이에는 지난번 닦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오늘 여는 날이라고 하셨으면서, 벌써 열어 보셨습니까?”“아직 열지 않았소.”“그럼 이 흙은요?”“독을 옮길 때 묻었소. 뚜껑은 건드리지 않았소.”새미는 세자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 끝에도 흙이 묻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독을 옮기고 나서 손을 씻지 않은 모양이었다.“장독대에 들어오시기 전에 손부터 씻으셨어야죠.”“맞는 말이오.”세자는 그 자리에서 손을 털지 않았다. 새미가 바가지와 물그릇을 가져오자 두 손을 내밀었다. 새미는 물을 부었다. 손끝에 묻은 흙이 물그릇 밑으로 가라앉았다.“이제 됐소?”“손톱 밑도요.”세자는 손을 돌려 손톱 밑을 보여 주었다. 새미는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장독대에는 찬 공기가 남아 있었다. 볕이 닿은 독의 어깨는 조금 따뜻했고, 그늘에 놓인 독은 차가웠다. 기다림이 독은 가운데 줄 맨 끝에 있었다. 8개월 동안 뚜껑을 열지 않았다. 새미는 담근 날부터 장부에 날짜와 재료를 적었다. 그 뒤로는 독을 지나칠 때마다 뚜껑을 두드리지 않고 옆면만 살폈다.“3년 뒤에 같이 열자고 하셨잖아요.”“그랬소.”“그런데 오늘은 8개월 된 장을 열어도 된다고 하시는군요.”“3년을 기다리기로 한 건 장이었소. 오늘 맛을 보는 것까지 금한 건 아니오.”“말은 맞는데, 듣고 있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네요.”“그럼 내가 먼저 맛보겠소.”“제가 장을 담갔으니 제가 먼저 봐야죠.”“그대가 먼저 봐도 좋소.”세자는 대꾸를 더 잇지 않았다. 새미는 그 침묵을 받아 독 앞에 쪼그려 앉았다. 독을 열기 전에 주변부터 살폈다. 뚜껑이 비뚤어지지 않았고, 독의 입구도 깨끗했다. 새미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마른 천으로 뚜껑 가장자리를
새미는 강정 접시를 마루 가운데로 옮겼다. 접시 밑에 깐 종이가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 손끝으로 종이를 당기자 바삭한 부스러기가 손바닥에 묻었다.“이렇게 많이 준비할 필요는 없었는데.”“손님이 오신다면서요.”옆에서 찻물을 올리던 나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새미는 접시를 살폈다. 강정은 가지런히 놓였지만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쌀알이 큼직하게 붙은 것도 있고, 끝이 조금 부서진 것도 있었다.“모양이 달라도 맛은 같아요.”“그래도 마마께서 손수 놓으셨는데요.”“손님들이 모양을 세어 보러 오시는 건 아니잖아요.”나인은 웃음을 삼키며 주전자를 들었다. 뜨거운 물이 찻잔에 부어졌다. 새미는 찻잔을 받쳐 들고 김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강정에 묻은 조청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별궁 마당에서는 빗자루가 마른 잎을 쓸고 있었다. 매실나무 아래에는 잎 몇 장이 남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이 떨어졌고, 나인은 쓸고 새미는 잠시 뒤 다시 밟았다. 오늘은 그 정도 실수쯤은 그냥 두기로 했다.“오시는 분들이 곧 도착하실 겁니다.”“가희가 먼저 오면 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도강도 같이 왔으면 둘 다요.”“예, 마마.”새미가 강정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에 넣으려는 순간,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나인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손님이 오셨습니다.”새미는 강정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손끝을 옷에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희는 마루에 오르자마자 새미를 보고 두 손을 들었다.“새미야!”새미도 웃으며 앞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으려다 멈췄다. 가희의 손에 보자기가 들려 있었고, 새미의 손에는 찻잔이 있었다.“손부터 비워야겠네.”“그럼 이걸 받아.”가희가 보자기를 새미에게 건넸다. 새미는 찻잔을 나인에게 맡기고 보자기를 받았다. 도강이 뒤에서 가희의 겉옷을 받아 들었다. 도강은 새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마마,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두 사람 다 편히 들어오세요. 여기서는 그렇게까지 예를 차리지 않으셔도 돼요.”“그렇다고 마루에
“할매, 씨간장 독은 지게로 못 져.”끝분의 손이 독 뚜껑에 놓인 채 멈췄다. 두식은 막걸리 사발을 내려놓고 장독대 앞에 바짝 다가섰다. 새미는 아버지의 갓을 보았다. 갓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두식은 그걸 모르는 눈치였다.“못 지면 수레에 싣지.”“궁 문턱을 수레가 넘어가겄냐.”“그러면 내가 들면 되지.”“독을?”“씨간장 독은 안 되더라도, 작은 독은 들 수 있어유.”끝분은 두식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에 굳은살은 있었지만, 장독을 들어 본 손 같지는 않았다.“네가 장독을 들어 봤냐?”“장 지게를 졌잖유.”“그건 장 항아리 몇 개 실은 지게였고.”“그려도 등에 멨슈.”“항아리도 깨 먹었지.”두식은 입을 다물었다. 새미는 접시를 든 채 아버지를 살폈다. 지난번 같았으면 두식은 “금방 오께”라는 말만 남기고 마당을 빠져나갔을지 모른다. 오늘은 막걸리 사발도 내려놓았고 장독대에서 물러나지도 않았다.“그럼 내가 지게 대신 장독대를 지킬게유.”끝분이 고개를 돌렸다.“뭐라고?”“새미가 궁에 가면 물안장 독을 누가 살펴야 하잖유. 어머니 혼자 다 보기엔 힘에 부칠 테고. 내가 배우면 되지.”“장 담그는 것도 모르면서 뭘 지켜.”“그러니까 가르쳐 주시면 되잖유.”끝분은 한동안 두식을 바라봤다. 두식의 갓은 여전히 삐뚤어져 있었다. 새미는 웃음이 나오려는 입술을 다물었다.“내가 새미한테 장 담그는 법을 가르친 건 한두 마디가 아니여.”“나도 처음부터 배우면 되지.”“처음부터라면 메주부터다.”“그러면 메주부터 하겄슈.”“소금도 골라야 한다.”“고르면 되지.”“독도 씻고 말려야 혀.”“씻으면 되잖유.”“입은 잘 씻네.”“손도 씻을게유.”끝분이 독 뚜껑에서 손을 떼었다. 두식은 그 손짓을 허락으로 알아들었는지 소매를 걷었다.“지금부터 할까유?”“지금은 손님들 밥을 먹여야제.”“그럼 밥 먹이고 나서 배우면 되겠구먼.”“네가 밥을 먹이고?”“내가 상도 옮겼잖유.”“접시 하나 들고 전을 흘릴 뻔했지.”“안 흘렸
마당에 들어선 단새미는 먼저 장독대를 바라봤다.장독 87개가 제자리에 있었다. 그 앞에는 멍석이 깔렸고, 마당 한쪽에는 잔치 음식이 놓인 상이 길게 이어졌다. 떡과 전, 삶은 고기가 접시마다 담겼다. 부엌에서는 국 끓는 소리가 났고, 막걸리 사발이 상 위에 하나씩 놓였다.“새미야,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봐라.”끝분이 부엌 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새미는 치맛자락을 조금 걷어 잡고 다가갔다.“할매, 뭐 도와줄까?”“저짝 상에 전이 모자란다. 저것 좀 옮겨라.”“벌써 다 놨는데?”“다 놨다고 끝이냐. 먹는 사람 입이 한둘이 아닌디.”끝분은 새미 손에 접시를 얹어 주었다. 새미는 접시를 들고 상으로 갔다. 마당을 가로지르던 단두식이 그 앞을 막았다.“새미야, 오늘은 네가 손님이여. 일을 하면 쓰나.”“아부지가 방금 일하라고 하셨잖아.”“그려. 아까는 그랬슈. 지금은 내가 생각이 바뀌었어.”“전은 이미 들었는데.”“그러면 잘 들고 가면 되지.”두식은 딸 손에 든 접시를 받아 들었다. 접시를 너무 높이 들자 전 하나가 가장자리로 미끄러졌다. 두식은 다른 손으로 얼른 받쳤다. 그 동작이 제법 능숙해 새미는 눈을 깜빡였다.“아부지, 전 옮기는 법도 배웠어?”“내가 젊어서 말이여, 장터에서 접시를 한 손으로 열두 개씩 옮겼어.”새미는 접시를 내려다봤다. 전은 몇 장 없었다.“열두 개가 어디 있어?”“그때는 있었지. 오늘은 접시가 작아서 이만큼만 든 거여.”끝분이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두식아, 허풍도 상에 올릴 거냐?”“어머니, 오늘은 새미 시집가는 잔칫날이잖유. 기운 좀 내야지.”“기운은 네가 내고 전은 내가 부칠란다. 그거 놓고 얼른 움직여.”두식은 접시를 상에 놓았다. 이번에는 전이 미끄러지지 않았다. 끝분은 그 모습을 보고도 칭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엌으로 돌아가며 새 접시를 한 장 더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새미는 그 접시를 받아 상 끝에 놓았다. 전 냄새와 막걸리 냄새가 마당에 퍼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
삼간택 처소의 문이 열렸다. 새미는 무릎 위에 모은 손을 내려다봤다. 나무 맛숟가락은 허리춤에 있었다. 오늘은 그걸 꺼내 쓸 자리가 아니었다.윤보옥이 먼저 일어섰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중전 앞에 섰다. 고개를 숙이는 각도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중전마마께 청이 있습니다.”“말하라.”“삼간택에서 물러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옹원 일을 배우고 싶습니다.”방 안이 잠잠해졌다. 보옥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 자리가 싫어서 물러나는 것도, 세자를 원하지 않아서 물러나는 것도 아니라고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새미는 보옥이 제 선택을 고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보았다.중전은 보옥의 눈을 살폈다.“세자빈 자리를 마다하고 사옹원에 가겠다는 뜻이냐?”“그렇습니다.”“사옹원 일은 예법을 익히는 것과 다르다. 손에 물도 묻고, 장부도 살펴야 한다.”“알고 있습니다.”“그 일을 네가 원하느냐?”“제가 원합니다.”보옥의 대답은 망설이지 않았다. 손은 치맛자락을 잡지 않았다. 예법 시험에서 답을 읊을 때와 달리 고개를 뻣뻣이 세우지도 않았다.중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다. 네 뜻대로 하라. 오늘부터 사옹원에서 배우도록 하겠다.”보옥은 깊이 절했다. 다시 몸을 일으키자 새미와 눈이 마주쳤다.“새미.”보옥이 불렀다. 두 사람 사이에 호칭이 바뀐 뒤로도,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이름을 부른 적은 드물었다.“네가 고른 일이니까, 잘해.”“새미도 네가 고른 일을 하겠지.”“응.”“그럼 됐어.”보옥의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새미는 손가락을 세지 않았다. 대신 보옥이 절을 마치고 돌아서는 것까지 지켜봤다.보옥은 삼간택을 위한 자리에서 물러나 문 쪽으로 걸었다. 그 걸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보옥이 나간 뒤, 비어 버린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새미는 그 자리를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새미도 한때는 떨어지는 일만 바라봤다. 할머니와 장독을 두고 궁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빚을 갚고 집을 지키면 그다음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