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조희철 과장이 물류팀으로 발령 났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그날 아침, 그는 상자 하나에 짐을 정리해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누구도 배웅하지 않았다.
텅 빈 책상을 바라보던 제이는 잠깐 숨이 막혔다. 늘 종이컵을 올려두던 자리엔 둥근 얼룩이 남아 있었고, 의자 등받이에는 그가 즐겨 태우던 담배 냄새가 아직 옅게 배어 있었다.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위장이 조여들고, 숨이 잠깐 얕아졌다.
지난 생, 열이 39도까지 오르던 밤이 떠올랐다.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몸을 가누던 그 시간에도, 조희철 과장은 "이거 내일 아침 보고서니까 대충 정리해 놔"라는 말 한마디를 던지고 사라졌다. 그날 밤, 텅 빈 사무실엔 제이의 타이핑 소리만 홀로 울렸다.
마감이 겹치는 일을 서너 개씩 한꺼번에 던져놓고, 다음 날 아침이면 "이게 더 급하다"며 우선순위를 다 뒤집어놓던 사람. 주말에도 메신저 답장을 기본 예의라 우기며, 기획도 조사도 발표도 다 시켜놓고 결국 공은 자기가 가져가던 사람.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어금니를 한 번 꽉 물고 나서야,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
수정이 다가와 빈 책상을 흘끗 보며 말했다.
"속 시원하시겠어요. 저는 아직도 안 믿겨요, 그 사람 없다는 게."
"그러게요. 좀 낯설긴 하네요."
제이는 애써 웃으며 대꾸했다. 낯선 건 사실이었지만, 그 낯섦이 나쁘지 않았다.
조희철 과장이 사라진 자리에서, 제이의 입지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건 뜻밖의 사람이었다.
점심시간이 막 끝난 무렵, 로비에서 낯익은 얼굴이 제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영민이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지나가다 들렀어요. 라고 하면 안 믿겠죠."
이영민이 여유롭게 웃으며 다가왔다.
"연봉 세 배라는 제안이 좀 가벼웠나 봐요. 그럼 백지수표로 바꿀까요? 아니면, 일 얘기는 접어두고 그냥 저녁부터 같이 하든가."
주변을 지나던 직원 몇몇이 힐끔거리며 수군댔다. 제이는 그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이영민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대표님, 여기 저희 회사 로비인데요."
"알아요. 그래서 온 거예요.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로 진심이라는 뜻으로."
거침없는 태도였다. 제이는 그 능글맞은 여유 뒤에, 사업가로서의 날카로운 계산이 숨어 있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이 사람은 손해 볼 일은 절대 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직접 오실 정도면, 어지간히 급하신가 봐요."
"급한 건 아니고, 그냥 마음에 든 사람은 직접 챙기는 성격이라서요."
"근데 대표님 회사, 요즘 온라인 망 확장하시느라 자금 유동성이 빡빡하다고 들었는데. 신입사원 하나한테 연봉 세 배씩 줄 여유가 정말 있으세요?"
이영민의 표정이 순간 멈췄다.
"...그런 얘기가 벌써 밖으로 도나요?"
"업계가 좁잖아요."
이영민이 잠깐 제이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진짜 물건이네."
감탄 섞인 목소리였다. 신입사원 입에서 나올 만한 얘기가 아니었다.
"생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에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요."
"그 정도 대답이면 충분해요. 조급하게 굴 생각 없으니까."
이영민은 짧게 목례하고 로비를 빠져나갔다. 제이는 그 뒷모습을 보며 옅게 한숨을 쉬었다.
이영민이 로비까지 찾아왔다는 얘기는, 반나절도 안 돼 사내에 은밀히 퍼졌다.
퇴근길, 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준호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이 옆에 따라붙었다. 회사에서 늘 그렇듯, 흐트러짐 하나 없는 말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경쟁사 사장님이 회사 로비까지 찾아오다니, 우리 신입사원 인기가 너무 많아서 불안하네요."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준호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 공격적인 걸로 유명하긴 한데 남의 회사 로비까지 쳐들어올 줄은 몰랐네요. 원하는 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손에 넣는 타입이니까, 조심해요."
평소보다 훨씬 많은 걸 흘리고 있었다. 이 사람이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 아니라는 걸 제이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속내를 드러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질투가 그의 경계심마저 무너뜨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명함은 버리라고 했을 텐데."
"아직 안 버렸는데요."
제이가 웃으며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그럴 줄 알았어요."
준호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그 안에 숨은 조바심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저 그렇게 쉽게 안 흔들려요."
"알아요.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네요."
제이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두 사람 사이의 실랑이가, 어쩐지 싫지 않았다.
지하철역 입구에 다다르자, 준호가 걸음을 멈췄다.
"들어가요. 저는 반대 방향이라."
"네, 조심히 가세요."
준호는 짧게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제이는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그 뒷모습이 자꾸 신경 쓰였다.
조희철 과장이 떠난 자리에,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 채워지고 있었다.
TF 발령 소식이 기획팀에 퍼지자, 도일이 심각한 얼굴로 제이를 붙잡았다."제이 씨, 그거 진짜 가는 거예요? 실장님이 낙하산으로 데려가는 거라고 소문 안 좋게 도는데."걱정하는 척했지만, 말투 어딘가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지금이라도 기획팀에 남겠다고 하는 게 낫지 않아요? 괜히 나갔다가 자리 애매해지면...""저 그 정도로 무모하게 결정한 거 아니에요.""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도일이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제이 씨 위해서 하는 말이잖아요.""걱정해주셔서 감사한데, 이미 결정된 일이에요."제이가 담담하게 선을 그었다. 도일은 그 대답이 못마땅한 얼굴이었다."아니, 나는 그냥 제이 씨 앞길 걱정돼서 하는 소리인데."그 말을 듣는 순간, 제이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 하나가 불쑥 치고 올라왔다.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던 겨울이었다. 신제품 출시로 매일 야근이 이어졌고, 그날도 겨우 여덟 시에 퇴근해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찾아 유모차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현관문을 힘겹게 넘어서자, 집 앞에 배추 백 포기가 쌓여 있었다."저녁은 먹었냐"는 말도, "춥진 않았냐"는 말도 없었다. 도일은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다, 제이를 위아래로 한 번 훑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시어머니는 손목이 아프다며 입으로만 김장을 지휘했다."얼른 배추부터 씻어서 절여야지, 뭐 하고 서 있어."소금 그릇이 제이 앞으로 쑥 들이밀어졌다. 등에 업힌 일곱 달배기는 배가 고픈지 자지러지게 울었고, 몸은 마디마디 무너질 듯 아팠다.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 한 채 곧장 출근했던 후유증이 아직 남아 있었다.그날, 아무도 제이에게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기억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제이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욕을 뱉을 뻔했다. 대신 숨을 한 번 삼키고, 짧게 대꾸했다."제 앞길은 제가 알아서 챙길게요."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서린 냉기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도일은 순간 말문이 막힌 얼굴로 서 있었다.지난 생, 늘 방관만 하던 사람이 이번 생에는
실장실 문이 닫히자마자,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방금 전까지 회의실을 얼어붙게 만들던 그 냉정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준호가 넥타이를 살짝 늦추며 천천히 다가왔다. 걸음걸이 하나에도 여유가 묻어났다."거봐요. 노유경 과장 따라가지 말라고 했잖아요."낮은 목소리가 방금 전 회의실에서와는 전혀 다른 온도로 내려앉았다."그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잖아요."제이가 짧게 받아쳤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 방 안은 완전히 다른 세계 같았다."그러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세게 말릴 걸 그랬어요."준호가 책상에 살짝 걸터앉으며 팔짱을 꼈다. 넓은 창가로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책상 위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서류 뭉치와 명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정준호 실장.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을 풍경이었다."앉아요. 혼내려고 부른 거 아니니까."제이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자, 준호도 맞은편에 앉으며 시선을 똑바로 맞춰왔다."조마조마하긴 했습니다.""저 때문에요?""네. 근데 제이 씨가 노유경 과장한테 당할까 봐가 아니라."준호가 찻잔을 하나 내려놓으며 제이를 빤히 응시했다."그 기획안에 심어둔 덫을, 노 과장이 덥석 무는 순간 제이 씨 표정이 너무 무덤덤해서요."제이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무슨 말씀이세요?""모르는 척은. 실행 시점을 앞당긴 근거, 노유경 과장한테는 일부러 설명 안 해줬죠? 딱 오늘 같은 자리에서 저렇게 막히라고."정확한 지적이었다. 제이는 잠깐 말을 고르다, 결국 인정했다."...실장님은 다 알고 계셨네요.""덕분에 명분이 완벽해졌죠. 노 과장이 가로채려던 기획안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 오늘 임원들 앞에서 확실하게 드러났으니까."준호가 흡족하게 웃었다."경쟁사 채용 공고 추이까지 그 자리에서 바로 짚어내는 것도, 사실 다 계산에 있었던 거죠?""어느 정도는요.""어느 정도가 아니라 전부인 것 같은데."준호가 낮게 웃으며 덧붙였다."제이 씨, 처음부터 노유경 과장을 발판으로만
며칠 뒤, 노유경이 제이를 불러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이거, 오늘 오후에 전략기획실 쪽에 보고할 자료예요. 제이 씨가 정리해준 초안, 내가 좀 다듬었어요."제이는 서류를 넘겨보다 표정이 굳었다. 밤새 짜낸 핵심 아이디어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지만, 표지에는 노유경의 이름만 올라 있었다."이거, 제가 정리한 초안 그대로인데요.""내가 손을 좀 봤어요. 큰 틀은 비슷해도 디테일은 다르잖아요."노유경이 태연하게 넘겼다. 제이는 더 따지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얼굴을 붉혀봐야 얻을 게 없었다.어차피 이 사람 밑에 있는 것도 잠깐이야.곧 있을 TF 발표를 생각하면, 지금 이 정도 억울함은 감수할 만했다."제이 씨는 오늘 회의실 뒤에서 자료나 넘겨줘요. 발표는 내가 할 테니까."반박할 틈도 주지 않는 말투였다. 제이는 짧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대회의실, 상무를 비롯한 임원 몇 명이 이미 자리해 있었다. 제이는 노유경의 뒤편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수정도 그 자리에 배석해 있다가, 작게 속삭였다."이거 제이 씨 아이디어잖아요. 근데 왜 노 과장님이 발표해요?""괜찮아요. 지금은."제이가 짧게 답했다. 속은 편치 않았지만, 지금 얼굴을 붉힐 자리는 아니었다.마지막으로 문이 열리고, 새로 부임한 온라인 TF 실장이 들어섰다.슈트 차림의 준호였다. 큰 키에 곧은 어깨, 흐트러짐 하나 없이 넘긴 머리, 몸에 딱 맞게 떨어지는 짙은 슈트까지. 회사 밖 에서 마주치던 그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여기저기서 낮은 웅성거림이 새어 나왔다. 임원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회의실 구석에 서 있던 여직원들 사이에서도.냉정하게 정돈된 얼굴로, 그는 상석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노유경도, 다른 임원들도 정준호의 등장에 술렁였다."소개가 늦었습니다. 이번 온라인 사업 TF를 맡게 된 정준호입니다."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제이만이 그 목소리에 놀라지 않았다.발표가 시작됐다. 노유경은 매끄럽게 자료를 넘기며 설명
밤새 문자는 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제이는 평소보다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준호를 마주치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출근길 내내 생각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자리에 앉아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수정이 옆에서 몇 번이나 말을 걸었지만, 제이는 건성으로 대답했다."제이 씨, 오늘따라 넋 나가 있네요. 무슨 일 있어요?""아니에요. 그냥 잠을 못 자서."점심시간, 복도에서 그와 마주쳤다. 준호가 먼저 걸음을 멈췄다. 표정이 평소와 달리 딱딱했다."어제, 이영민 대표랑 거기서 뭐 하신 거예요?"연락이 없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화가 났다기보다, 눌러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스카우트 제안 때문에요. 회사 앞에서 막무가내로 붙잡으시길래, 어쩔 수 없이 따라갔던 거예요.""스카우트 제안 받는 자리치고는, 분위기가 너무 좋던데요. 한강 뷰까지.""제가 고른 자리 아니에요."제이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준호는 잠깐 말이 없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알아요. 그 사람 스타일이 원래 그래요. 근데 그거 말고, 저도 물어볼 게 있어요.""저도요."제이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물었다."정 실장이라는 거, 뭐예요?"준호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이영민 대표가 그러던가요.""네. 회사에서는 한 번도 못 들어본 호칭이라서요."준호는 잠깐 대답을 고르는 눈치였다. 복도에 사람이 지나가자, 그는 제이를 조용한 계단 쪽으로 이끌었다.비상계단 문이 닫히자, 준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제이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준호가 먼저 침묵을 깼다."정확히는, 원래 전략기획실 소속이에요. 직급도 실장이고요.""근데 왜 여기서는 신입사원으로...""위에서 내려보낸 거예요. 현장 경험 좀 쌓으라고. 그래서 이 팀에는 그냥 경력 짧은 사원으로 들어와 있는 거고, 아는 사람이 몇 없어요."애매하게 얼버무리는 답은 아니었다. 오히려 담백할 정도로 명확한 설명이었다. 제이는 그 말을 곱씹으며 준호를 바라봤다.
퇴근길, 회사 정문 앞에 낯선 은색 세단이 서 있었다.경적이 짧게 울렸다. 제이가 돌아보자, 선팅된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타시죠, 현제이 씨."이영민이었다. 여유로운 미소가 그대로였다."대표님, 죄송하지만 오늘은 좀 곤란한데요."제이가 곧바로 거리를 두며 대답했다."저 지금 많이 피곤해서요. 다음에 정식으로 미팅 잡으시면...""그럼 다음은 언제인데요? 계속 그렇게 미루기만 하고.""미루는 게 아니라...""여기서 계속 서 있으면, 내일 사내 게시판에 우리 둘 이름 나란히 올라갈 텐데."이영민이 말을 자르며 웃었다. 제이는 그 말에 멈칫했다. 주변을 지나던 직원 몇몇이 벌써 힐끔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실랑이가 더 길어지면, 그림이 더 이상해질 뿐이었다.제이는 잠깐 고민하다, 결국 차 문을 열었다."오래는 안 걸려요."단호한 선 긋기였다."글쎄요, 그건 제가 정하는 거고."이영민이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차 안에서, 제이는 창밖을 보며 머릿속으로 이영민이라는 사람을 다시 정리했다.몇 년 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마자 스포츠 신문 1면을 오르내리게 될 이름. 유명 배우들과 끊이지 않던 염문설. 지난 생, 뉴스에서 몇 번이나 스치듯 봤던 얼굴이었다.이 사람, 비즈니스로도 남자로도 위험 인물이야."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이영민이 운전하며 슬쩍 물었다."대표님 회사 얘기요.""거짓말은. 표정을 보니 딴 생각이던데."제이는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굳이 정정하지 않기로 했다.제이는 그 판단을 마음에 새기며, 표정을 다시 단정하게 가다듬었다.도착한 곳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창가 자리,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리에 앉고도, 제이는 수저를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용건만 간단히 하시죠, 대표님.""이렇게까지 선을 그을 일인가. 밥 한 끼 하자는 건데.""두 번째 뵙는 건데, 벌써 세 번째 만남을 만들고 계시네요."이영민이 낮게 웃었다."현제이 씨, 나를 무슨 뱀 보듯 보시는데. 내가 그렇게
노유경은 다음날 제이를 따로 불렀다.빈 회의실 문을 닫으며, 노유경이 여유로운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제이 씨, 나랑 같이 일해볼 생각 없어요?"예상 밖의 제안이었다."제 라인으로 들어와요. 이번 프로젝트, 내가 책임자로 서고 제이 씨가 실무 맡는 걸로. 위에다 얘기는 내가 다 해줄게요. 신입 혼자 치고 나가는 것보다, 든든한 뒷배 하나 있는 게 낫지 않겠어요?""제가 라인에 들어가면, 과장님한테는 뭐가 남아요?"제이가 담담하게 물었다."실적이죠. 제이 씨가 잘하면 나도 잘되는 거고. 서로 좋은 그림 아니에요?"말은 다정했지만, 그 안에 담긴 계산은 분명했다. 제이가 내는 성과를 자연스럽게 노유경의 이름 아래 두겠다는 뜻이었다. 참조란에 슬쩍 이름을 얹어두던 것도, 결국 이 그림을 위한 밑작업이었을 것이다.지난 생이었다면, 이 정도 제안에도 고마워하며 넘어갔을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산이 훤히 들여다보였다.이 사람이 원하는 건, 방패막이 자리를 팔아서 내 성과를 통째로 가져가는 거구나."영광이네요. 그렇게 하겠습니다."제이는 웃으며 대답했다."잘 생각했어요. 앞으로 잘해봐요, 우리."노유경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제이는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속으로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수정이 나중에 그 얘기를 듣고 놀란 얼굴을 했다."진짜 그러기로 한 거예요? 그 라인 밑으로 들어가면, 나중에 성과 다 뺏길 텐데.""알아요.""근데 왜..."수정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노 과장님 라인에 있으면, 신입인 제가 못 들어가던 자리에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잖아요. 상무님, 부사장님 라인 프로젝트까지."제이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노 과장님은 저를 발판으로 쓰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저도 노 과장님을 발판으로 쓰는 거예요. 서로 이용하는 거, 나쁠 거 없죠.""그래도 위험하지 않아요? 만약 그쪽에서 먼저 뒤통수치면...""그럼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죠."제이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