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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웃는 얼굴의 칼

Author: 지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8 19:34:56

조희철 과장의 빈자리에, 새 과장이 발령 났다는 공지가 뜬 건 월요일 아침이었다.

이름은 노유경. 그날 오전, 사무실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새빨간 립스틱에, 어깨선이 또렷한 원색 재킷 차림이었다. 남자 직원들이 대부분인 사무실에서, 그 등장만으로도 시선이 확 쏠렸다.

"안녕하세요, 노유경입니다. 다들 반가워요."

인사부터 거침없었다. 부장이 뭐라 한마디 덧붙이려 하자, 노유경이 웃으며 말을 끊었다.

"저 소개는 제가 할게요, 부장님. 그런 건 본인이 직접 해야 제맛이잖아요."

부장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노유경은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수입 문구류와 향초, 체리 향 방향제를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화려한 소품들이 순식간에 책상 하나를 채웠다.

"조 과장님이 쓰시던 자리라 그런지, 담배 찌든 내가 좀 심하네요. 괜찮죠?"

부장을 똑바로 보며 던진 말이었다. 부장은 어색하게 웃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주변 몇몇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팀 전체가 그 한마디에 이미 절반쯤 넘어간 분위기였다.

 

자리를 잡자마자, 노유경은 곧장 제이에게 다가왔다.

"어머, 제이 씨 맞죠? 내가 이 회사에서 제일 만나보고 싶었잖아. 도토리월드 기획한 거, 진짜 대단하더라."

노유경이 제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 칙칙한 데서 우리 여직원들끼리 서로 의지하고 밀어줘야지. 안 그래요?"

손에 쥐여준 건 수입 초콜릿 상자였다.

"이거 하나 드세요. 앞으로 잘 지내봐요, 제이 씨."

제이는 웃으며 초콜릿을 받았지만, 손에 닿는 그 온기보다 먼저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지난 생에서도, 이렇게 다가온 사람일수록 뒤가 더 서늘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제이 씨 요즘 잘나간다는 얘기, 여기저기서 들었어요. 온라인 쪽 프로젝트도 주도적으로 하고 있다면서요?"

"주도적이라기보다는, 그냥 맡은 일 하는 거예요."

"에이, 겸손하기는."

노유경이 손을 한 번 더 꾹 잡았다 놓으며 웃었다.

이 사람, 조심해야겠다.

낯선 감각이었다. 지난 생, 조희철 과장은 몇 년을 겪어봐서 손금 보듯 알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노유경은 달랐다. 인사과 소속이라 팀을 함께한 적이 없었고, 그녀에 대해 아는 거라곤 늘 승진이 빨랐다는 소문 정도였다. 처음으로, 미래를 안다는 것이 아무 소용 없는 상대를 마주한 셈이었다.

 

오후, 노유경이 진행 중이던 도토리월드 연계 프로젝트 자료를 검토하겠다며 제이의 자리로 왔다.

"이거, 제이 씨가 짠 기획안 맞죠? 한번 볼게요."

커피 한 잔을 건네며 자료를 넘기는 손길이 여유로웠다. 몇 장 넘기던 손이 멈췄다.

"음... 정리는 진짜 깔끔한데."

노유경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눈은 서류를 매섭게 훑으면서도, 말투는 시종일관 나긋나긋했다.

"이 협력사 링크 삽입 조항, 원래 초안엔 있었는데 이번 버전에서 빼셨네요. 약관 위반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신 거예요?"

"네, 맞습니다."

"이거, 법무팀이랑 조율해서 확인한 거 맞아요?"

제이는 잠깐 멈칫했다.

"...아니요. 그건 아니고."

"근데 어디에도 이게 위반이라는 근거가 없는데. 저도 궁금해서 법무팀에 따로 물어봤거든요. 제이 씨가 물어본 적도 없다고 하던데, 그럼 이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노유경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눈빛만은 정확하게 제이를 겨누고 있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뭐, 미래에서 오기라도 한 거예요?"

가벼운 농담이었다. 하지만 제이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그럴 리가요. 그냥 조심스러운 성격이라서요."

제이는 애써 웃으며 넘겼다. 노유경도 더는 캐묻지 않고 웃어넘겼지만, 그 미소 뒤에 남은 의문까지 다 걷어낸 것 같지는 않았다.

노유경이 자료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신입치고 이 정도면 훌륭하죠. 제가 좀 더 다듬는 거 도와드릴게요. 같이 하면 더 좋은 결과 나올 거예요."

"...감사합니다."

제이는 짧게 답했다. 도와주겠다는 말이, 어쩐지 순수하게 들리지 않았다.

 

퇴근 무렵, 결재 라인 확인 메일이 왔다. 제이는 화면을 보다 미간을 좁혔다.

프로젝트 승인 요청 메일 참조란에, 어느새 노유경의 이름이 나란히 올라가 있었다.

수정이 옆에서 화면을 흘끗 보고 작게 속삭였다.

"저거... 원래 저기 노 과장님 이름 있었어요?"

"아니요."

제이는 짧게 답하고 화면을 닫았다.

"근데 왜 갑자기..."

"글쎄요. 도와주신다더니, 이런 식으로 도와주시나 봐요."

제이는 옅게 웃으며 대꾸했지만, 속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조희철 과장은 최소한 자기가 뭘 훔치는지는 알고 훔쳤다. 이 사람은 웃으면서, 훔친다는 자각조차 없이 자연스럽게 가져가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다가와 손을 잡던 그 순간과, 슬그머니 이름을 얹어놓은 지금 이 메일 사이의 거리가, 제이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그날 저녁, 휴대폰이 울렸다. 그 번호였다.

새로 온 과장님 얘기 들었어요. 어때요?

제이는 잠깐 고민하다 답을 적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좋은 사람인 척은 잘하시더라고요.

척이라는 단어를 쓰는 거 보니, 벌써 눈치채셨네요.

뭘요?

그 사람, 원래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니에요. 조심해요.

짧은 문장이었지만, 제이는 그 안에서 낯익은 무게를 느꼈다.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이 정도로 꿰고 있는 것도, 이 사람이 그냥 사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걸 제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조희철 과장이 남긴 자리에는, 훨씬 더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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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물다섯으로 돌아온 날, 그 재벌이 나를 찍었다   76. 숨겨야 했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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