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노유경은 다음날 제이를 따로 불렀다.
빈 회의실 문을 닫으며, 노유경이 여유로운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제이 씨, 나랑 같이 일해볼 생각 없어요?"
예상 밖의 제안이었다.
"제 라인으로 들어와요. 이번 프로젝트, 내가 책임자로 서고 제이 씨가 실무 맡는 걸로. 위에다 얘기는 내가 다 해줄게요. 신입 혼자 치고 나가는 것보다, 든든한 뒷배 하나 있는 게 낫지 않겠어요?"
"제가 라인에 들어가면, 과장님한테는 뭐가 남아요?"
제이가 담담하게 물었다.
"실적이죠. 제이 씨가 잘하면 나도 잘되는 거고. 서로 좋은 그림 아니에요?"
말은 다정했지만, 그 안에 담긴 계산은 분명했다. 제이가 내는 성과를 자연스럽게 노유경의 이름 아래 두겠다는 뜻이었다. 참조란에 슬쩍 이름을 얹어두던 것도, 결국 이 그림을 위한 밑작업이었을 것이다.
지난 생이었다면, 이 정도 제안에도 고마워하며 넘어갔을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산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이 사람이 원하는 건, 방패막이 자리를 팔아서 내 성과를 통째로 가져가는 거구나.
"영광이네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잘 생각했어요. 앞으로 잘해봐요, 우리."
노유경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제이는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속으로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수정이 나중에 그 얘기를 듣고 놀란 얼굴을 했다.
"진짜 그러기로 한 거예요? 그 라인 밑으로 들어가면, 나중에 성과 다 뺏길 텐데."
"알아요."
"근데 왜..."
수정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노 과장님 라인에 있으면, 신입인 제가 못 들어가던 자리에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잖아요. 상무님, 부사장님 라인 프로젝트까지."
제이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노 과장님은 저를 발판으로 쓰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저도 노 과장님을 발판으로 쓰는 거예요. 서로 이용하는 거, 나쁠 거 없죠."
"그래도 위험하지 않아요? 만약 그쪽에서 먼저 뒤통수치면..."
"그럼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죠."
제이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수정은 잠깐 말을 잃은 얼굴로 제이를 바라봤다.
"제이 씨, 가끔 진짜 무서워요."
"칭찬으로 들을게요."
제이는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노유경이라는 강력한 칼을 등에 업고, 스스로 호랑이 굴로 걸어 들어가는 셈이었다. 다만 이번엔, 누가 누구의 발판이 될지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퇴근길, 휴대폰이 울렸다. 준호였다.
노 과장 라인에 들어갔다는 얘기, 들었어요. 지금 시간 돼요? 회사 근처 바에서 봐요.
문자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뜻 같았다. 제이는 잠깐 고민하다 답을 보냈다.
어디로 가면 돼요?
주소 보낼게요. 조용한 데예요.
바는 회사에서 골목 두 개를 지나야 나오는, 간판도 작은 곳이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낮은 재즈가 흐르고, 테이블 몇 개만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준호는 구석 자리에 먼저 앉아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신경 쓰여서요."
제이가 자리에 앉자, 준호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노유경 라인에 들어갔다는 얘기, 진짜예요?"
"네."
"왜요? 뒤통수 맞을 수도 있는 거 알면서."
목소리에 평소와 다른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제이는 잔을 매만지며 담담하게 답했다.
"알아요. 근데 그 사람 등에 업고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있어요. 저 혼자서는 못 들어가는 자리요."
"그 자리, 굳이 지금 들어가야 해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준호는 잠깐 말이 없었다. 술잔을 내려다보다,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 일, 계산은 다 끝내놓고 움직이는 거죠?"
"그게 나쁜 거예요?"
"아니요. 그래서 더 신경 쓰이는 거예요."
솔직한 말이었다. 제이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노유경, 그 사람 보통내기 아니에요. 나중에 등 돌릴 사람이라는 거."
"알아요. 근데 그런 사람일수록, 먼저 판을 읽고 움직이는 쪽이 유리해요."
"그 판, 혼자 다 짊어지지 않아도 돼요. 저도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아직은,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제이는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준호는 더 캐묻지 않고, 그저 술잔을 한 모금 마셨다.
"제이 씨."
준호가 잔을 내려놓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제이 씨가 이런 식으로 판을 짤 때마다, 옆에서 지켜만 봐야 하는 게 생각보다 신경 쓰여요."
"...몰랐어요, 그렇게까지."
"티 안 내려고 노력했으니까요."
준호가 옅게 웃었다. 하지만 눈빛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제이 씨한테 저는 뭐예요? 그냥 가끔 문자하고, 가끔 밥 먹는 사람?"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제이는 잠깐 대답을 고르다, 솔직하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근데, 계속 신경 쓰이는 사람인 건 맞아요."
"신경 쓰인다는 게, 좋은 쪽으로요, 나쁜 쪽으로요?"
"그건... 아직 정리 안 됐어요."
"정리될 때까지 기다릴게요. 대신 너무 오래는 말고."
"그 정도면 됐어요, 일단은."
준호가 손을 뻗어 제이의 손등 위에 가만히 얹었다.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이런 일 벌일 거면, 적어도 저한테는 미리 말해줘요. 몰래 혼자 뛰어들지 말고."
"...알겠어요."
제이는 그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바 안의 낮은 조명 아래,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다.
늦은 시각, 바를 나서며 준호가 제이를 바래다주겠다고 나섰다.
"택시 잡아드릴게요."
"괜찮아요, 저 혼자 가도."
"알아요. 그냥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요."
그 말에 제이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능청스러움과 진심이 반반 섞인 말이었다.
택시가 잡히기까지,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별다른 말 없이 밤거리를 바라봤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오늘 불러내서 미안해요. 이런 얘기, 문자로는 한계가 있어서."
"아니에요. 덕분에 정리가 좀 됐어요."
"무슨 정리요?"
"그건 비밀이에요."
제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준호도 더 캐묻지 않고 따라 웃었다.
택시가 도착했다. 제이가 올라타려는 순간, 준호가 짧게 덧붙였다.
"조심히 들어가요. 그리고, 다음엔 진짜 데이트로 불러낼게요. 이런 일 때문 말고."
제이는 창문 너머로 손을 살짝 흔들며 웃었다.
바 안에서 나눈 짧은 대화 하나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퇴원 날 아침, 제이는 병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보며 짐을 정리했다. 며칠 동안 머물렀던 병실이지만, 막상 떠나려니 묘한 아쉬움과 후련함이 동시에 밀려왔다."몸은 좀 어떠세요?"준호가 그녀의 짐가방을 대신 들며 물었다."많이 가벼워졌어요, 정말로."제이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컨디션도 아주 좋고요. 이렇게 빨리 퇴원할 줄은 몰랐어요."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회복도 예상보다 빨랐다. 퇴원 후 몇 가지 생활 수칙을 지키고, 정기적인 추적 검사만 잘 받으면 된다는 의사의 말에, 제이는 그제야 마음 깊이 안도할 수 있었다.간호사가 마지막 퇴원 서류를 건네주며 몇 가지 주의사항을 다시 한번 짚어주었다. 준호는 그 하나하나를 꼼꼼히 메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를 넘기는 그의 손끝에는 조금의 소홀함도 없었다."당분간 무리한 운동은 피하시고, 식사도 천천히 규칙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물은 충분히 드시는 게 좋고요."간호사가 웃으며 덧붙였다."보호자분이 더 열심히 들으시네요."준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메모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병원 로비를 지나 정문을 나서는 순간, 제이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전생에서는 이 문을 이렇게 걸어 나가지 못했다.병원 냄새와 약 봉투, 점점 짧아지던 의사의 말. 그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 제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혼자 병실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던 그 마지막 계절도. 아무도 손을 잡아주지 않았던, 서늘하고 외로운 시간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제 발로 이렇게 걷고 있었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왜 그러세요?"준호가 걸음을 멈춘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스쳤다."아니에요."제이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그냥, 이 순간이 새삼 감사해서요."병원을 나서는 길, 봄바람이 부드럽게 두 사람을 스쳤다."오늘은 집에 가서 쉬셔야 합니다."준호가 단호하게 말했다."드레스 한 벌 보는 것도 안 돼요?"제이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안 됩니다.""한 시
수술실 앞, 제이는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이동 침대에 누워 있었다.형광등 불빛이 눈부시게 그녀의 얼굴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금방 끝날 겁니다."준호가 그녀의 손을 마지막으로 꽉 잡으며 말했다.그의 목소리는 애써 담담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저 하나도 안 무서워요, 정말로."제이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아직 마취 전이라 정신은 또렷했다."오히려 준호 씨가 더 많이 긴장한 것 같은데요.""티가 많이 납니까."준호가 멋쩍게 웃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 가만히 입을 맞추며 나직이 속삭였다."수술실 밖에서, 결과 나올 때까지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고 기다리겠습니다.아무 걱정 말고, 편안하게 다녀오세요."간호사가 다가와 이동 침대를 조용히 밀기 시작했다.바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복도에 나직이 울렸다. 제이는 마지막으로 준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금방 다시 만나요."수술실 문 안으로 침대가 들어섰다.밝은 조명 아래, 마스크를 쓴 의료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낯선 기계음과 소독약 냄새가 사방을 채웠다. 마취과 의사가 그녀의 팔에 조심스럽게 주삿바늘을 꽂았다."숫자를 거꾸로 세어보실래요? 열부터요.""열, 아홉, 여덟……."의식이 흐려지는 건 순식간이었다.여섯을 채 세기도 전에, 제이의 눈꺼풀이 힘없이 감겼다.그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어렴풋이 들려온 기계음만이 희미하게 귓가에 맴돌았다.얼마나 지났을까. 제이는 서서히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마취가 덜 풀린 몸은 여전히 무겁고 나른했다.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리자, 낯선 회복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수술을 마친 환자들이 병실 등급과 상관없이 잠시 함께 머무는 공용 공간이었다.커튼으로 구획된 침상들 사이로, 흐릿한 형체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그녀의 침상 바로 옆,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한 남자였다.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채, 지친
건강검진 예약일 아침, 제이는 준호와 함께 서둘러 병원을 찾았다.이른 시간이었지만, 대기실에는 벌써 여러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긴장하지 마세요."준호가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매년 이맘때쯤 받던 거잖아요.""긴장 안 해요, 정말로요."제이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하지만 그녀의 손끝은 미세하게 차가웠다.회귀 전, 이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를 맡을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마흔다섯의 나이로 마주했던 그 진단명, 그리고 이미 손쓸 수 없었던 그 순간이.그때는 증상이 나타나고도 한참을 미루다가, 결국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병원을 찾았었다.이번 생에서는 다를 거라고, 그녀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매년 거르지 않고 검진을 받아온 것도, 결국 그 오래된 두려움 때문이었다.간호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는 옅게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진료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조금씩 무거워졌다."다녀올게요.""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준호가 그녀의 손을 놓아주며 답했다.그의 시선이 그녀가 진료실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그 문을 향해 있었다.내시경 검사가 끝난 뒤, 의사가 화면을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흐릿한 모니터 화면 위로 위 내벽의 사진들이 여러 장 떠 있었다."위 안쪽에서 작은 병변이 하나 발견됐습니다."제이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익숙한 그 단어가, 오래된 두려움을 순식간에 되살렸다."조직검사를 진행해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크기나 위치로 봤을 때 초기 단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다행히 증상이 거의 없으셨는데도 이렇게 일찍 발견하신 게, 정말 다행입니다.보통은 이런 초기 병변은 스스로 알아채기가 쉽지 않거든요."제이는 화면 속, 작게 표시된 그 병변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손끝이 저릿하게 떨려왔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대기실로 나온 준호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다가왔다."어떻게 됐
다음 날 아침 일찍, 제이는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몇 번이고 내려다보았다.어젯밤의 기억이 여전히 꿈결처럼 느껴졌다.창밖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반지 위에 부딪혀 은은하게 빛났다."실감이 안 나요."그녀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준호가 그녀 옆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조심스럽게 건네며 옅게 웃었다."저도 그렇습니다. 몇 번이나 연습했는데도, 막상 그 순간이 되니 머릿속이 하얘지더군요.""연습까지 하셨어요?"제이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럼요.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대사를 맞춰봤는지 모릅니다.그런데도 막상 당신 얼굴을 보니까, 준비했던 말은 다 어디로 가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그냥 말하게 되더군요."준호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제이는 그 모습이 우스워 웃음을 터뜨렸다."준호 씨도 그렇게 긴장할 때가 있으시네요. 평소엔 그렇게 침착하시더니.""당신 앞에서는, 늘 그렇습니다."그날 오후, 두 사람은 정 회장의 본가를 함께 찾았다.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정지훈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부쩍 자주 이 집을 드나드는 그였다."저희,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준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 회장과 정지훈의 시선이 동시에 두 사람에게 향했다.제이가 왼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반지가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정 회장의 눈이 커졌다."이거…….""어제, 제가 청혼했습니다."준호가 담담히 말했다."제이 씨가, 받아주셨고요."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정 회장의 얼굴에 오랜만에 보는, 환한 웃음이 번졌다.그의 주름진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드디어……."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드디어 좋은 소식을 듣는구나.요즘 이 늙은이한테 이런 기쁜 소식이 연달아 찾아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지훈이가 돌아온 것도, 회사가 이렇게 자리 잡은 것도, 이제 너희 둘까지,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정지훈도 환하게 웃으며
며칠 뒤 어느 토요일 저녁, 준호에게서 갑작스러운 문자가 왔다.오늘 저녁 일곱 시, 회사 앞으로 나와줄 수 있습니까. 편하게 입고 나오세요.제이는 그 짧은 메시지를 몇 번이고 다시 곱씹어 읽었다.평소와 다른, 묘하게 들뜬 듯한 문체였다.그녀는 옷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가장 편안하면서도 마음에 쏙 드는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며칠 전 밤길에서 그가 남긴 알 수 없는 말이, 하루 종일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약속 시간에 정확히 맞춰 회사 앞으로 나가자, 준호가 이미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었다.평소의 단정한 슈트 차림이 아니라, 캐주얼한 니트에 재킷을 편안하게 걸친 모습이었다.그런 그의 모습을 오랜만에 보는 것도, 새삼 반가운 일이었다."오늘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이렇게 나오라고 하시니까 좀 이상하잖아요."제이가 차에 오르며 물었다."가보시면 압니다."준호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그의 눈빛에는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살짝 스쳐 있었다.제이는 그런 그의 모습을 힐끗 살피며,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속으로 이런저런 짐작을 해보았다.차는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교외로 향했다.창밖으로 노을이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이 펼쳐졌다.한 시간 남짓 달린 끝에, 차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멈춰 섰다."여기는……."제이가 차에서 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언덕 위에는 작은 테이블 하나가 준비되어 있었다.은은한 조명과 촛불이 테이블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 저 멀리로 강물 위에 반짝이는 노을빛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꽃들로 소박하게 꾸며진 작은 화병도 놓여 있었다.준호가 이 모든 걸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신경 썼을지,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풍경이었다."준호 씨, 이거 다…….""당신이랑 처음으로 진짜 데이트를 했던 그날, 다음엔 더 특별한 곳으로 데려오겠다고 약속했잖아요."준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며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의 손끝이 평소보다 조금 더 뜨겁게 느껴졌다.
콜드체인 사업 정식 출범 한 달째, 사장실로 이번 달 실적 보고서가 올라왔다.제이는 보고서를 펼쳐 들고 한동안 말없이 숫자들을 훑어 내려갔다.재구매율, 평균 객단가, 배송 만족도까지, 모든 지표가 예상치를 웃돌고 있었다.창밖으로 화창한 오후 햇살이 사장실 안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사장님, 이 정도면 업계에서도 이례적인 수치입니다."기획조정실장이 흥분한 목소리로 보고를 이어갔다. 그의 손끝에는 두툼한 보고서 뭉치가 여러 장 들려 있었다."경쟁사들도 벌써 저희 방식을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마이크로 거점 시스템에 대한 문의가 벌써 여러 곳에서 들어오고 있고요.심지어 해외 유통사에서도 관심을 보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이 추세라면, 다음 분기 매출 목표도 상향 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네요."제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회귀 전 미래에서는 훨씬 나중에야 보편화됐던 방식이, 지금 이 시점에 벌써 시장의 표준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그녀가 갖고 있던 확신이, 이제 눈앞의 숫자로 증명되고 있었다.처음 이 사업을 밀어붙일 때 쏟아졌던 회의적인 시선들이, 이제는 감탄으로 바뀌어 있었다.그때 준호가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경제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이거, 오늘 아침 자 신문입니다."그가 신문을 조심스레 펼쳐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일면 머리기사에, 콜드체인 신선식품 배송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회사의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기사 아래로는 마이크로 거점 시스템을 도식화한 그래픽까지 크게 곁들여져 있었다."드디어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는 것 같아요."제이가 옅게 웃으며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이영민이 훔쳐 가려던 그 시스템이, 결국 이렇게 시장을 뒤흔들게 됐네요.그때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모든 게 다 당신 손끝에서 시작된 겁니다."준호가 그녀 옆에 앉으며 말했다."저는 그저, 옆에서 조금 거들었을 뿐이고요.""그렇게 겸손하게만 말씀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