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폐원각에서 돌아온 뒤, 이헌은 연화의 거처를 강녕전 안으로 옮기라 명했다.
연화는 내관들이 자신의 짐을 나르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소인이 여기서 계속 지내야 합니까?”
“영성대군을 잡을 때까지.”
“밤에도요?”
“밤이 가장 위험하지 않으냐.”
연화의 시선이 침전 안을 훑었다.
침상은 하나였다.
“소인은 바닥에서 자면 됩니까?”
“내가 너를 바닥에 재울 것 같으냐?”
“그럼 전하께서 바닥에서 주무십니까?”
이헌이 기가 막힌 얼굴로 연화를 바라봤다.
“어째서 내가 바닥에서 자야 하지?”
“침상이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붉게 물든 붕대가 백소화의 발치에 떨어졌다.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백소화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허리를 숙여 붕대를 집었다.“어제 다친 궁녀의 것이라 말씀드렸지요.”그녀가 뒤에 서 있던 궁녀를 불렀다.궁녀가 소매를 걷자 손목에 길게 베인 상처가 드러났다. 상처에는 백단고가 두껍게 발려 있었다.백소화는 붕대를 궁녀의 손목에 대 보였다.“아침에 약을 갈아 주다가 소매에 들어간 모양입니다.”준비된 듯 빈틈없는 설명이었다.연화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소인이 잘못 짐작했습니다.”“승은상궁께서는 늘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의심합니까?”“요즘 궁에서 이상한 일이 많았습니다.”“그렇다고 후궁의 몸에서 나는 향까지 맡아 가며 캐묻는 것은 무례하지요.”백소화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신분이 달라졌는데도 수라간 궁녀이던 시절과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연화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옷은 전보다 좋아졌습니다.”“옷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그럼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정말 알아듣지 못한 얼굴이었다.백소화가 말문이 막힌 사이 공주가 고개를 돌려 웃음을 삼켰다.이헌은 연화의 어깨를 감싸 제 옆에 세웠다.“대군이 궁 안에 있는 상황이다. 연화의 의심은 당연하다.”“전하께서는 또 승은상궁의 편만 드시는군요.”“내 사람이니 내가 편을 드는 것이 이상하냐?”백소화의 얼굴이 굳었다.연화가 이헌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소인이 잘못한 것은 맞습니다.”“잘못 짐작한 것과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다르다.”이헌은 단호했다.“연화에게 사과를 받았으면
82화. 오늘도 너다연화가 침전으로 들어서자 문이 닫혔다.이헌은 침상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왜 그리 늦었느냐?”“늦지 않았습니다. 부르시자마자 왔습니다.”“문밖에서 한참 서 있었지 않으냐.”“백소화 숙의마마께서 보고 계셔서…….”연화는 말끝을 흐리며 이헌의 맞은편에 앉았다.“오늘은 그분의 첫날밤이 아닙니까?”“그런데?”“소인을 부르시면 화가 나실 것 같습니다.”“내가 누구와 밤을 보낼지 숙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그런 뜻은 아니지만요.”연화의 시선이 이헌의 허리로 향했다. 자신이 준 낡은 주머니가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정교하게 수놓은 금실 허리띠는 보이지 않았다.그것을 확인한 뒤에야 답답했던 속이 조금 풀렸다.이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무엇을 보았느냐?”“아무것도 아닙니다.”“내 허리만 한참 보았으면서?&rdq
“민서령과 백소화, 두 사람을 전하의 후궁으로 택한다.”대비의 발표가 끝나자 두 여인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두 사람은 같은 말을 했지만 표정은 달랐다.민서령에게는 긴장이 묻어났고, 백소화의 입가에는 감추지 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대비는 두 사람을 종이품 숙의로 책봉하겠다고 알렸다.후궁이 되지 못한 후보들은 아쉬움을 감춘 채 차례로 물러났다.연화는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을 바라봤다.민서령과 눈이 마주치자 작게 웃어 보였다. 민서령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백소화는 달랐다.그녀는 책봉을 축하받자마자 연화 앞에 섰다.“그동안 승은상궁께서 전하를 가까이에서 모셨다고 들었습니다.”“예.”“앞으로 전하를 모시는 법을 많이 알려 주십시오.”공손한 말투였지만 뜻은 분명했다.이제 자신이 후궁이 되었으니 연화는 아래에서 시중을 들라는 것이었다.연화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어떤 것을 알고 싶으십니까?”“전하께서 좋아하시는 차와 음식부터요.”“차는 따뜻한 것을 좋아하십니다.”“그건 누구나 알지 않습니까.”“너무 뜨거운 것은 싫어하십니다.”백소화의 미소가 희미하게 굳었다.“음식은요?”“드시기 편한 것을 좋아하십니다.”“구체적으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묻는 것입니다.”연화는 이헌을 돌아봤다.“무엇을 좋아하십니까?”뜰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이헌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그동안 내 곁에 있으면서 그것도 모르느냐?”“전하께서는 약과도 먹을 만하다고만 하셨습니다.”“아직도 그 일을 마음
다음 간택 절차는 후보들이 직접 만든 물건을 바치는 것이었다.민서령은 약초를 넣어 만든 향낭을 올렸다.“심신을 안정시키는 향을 넣었사옵니다.”대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백소화는 금실로 용을 수놓은 허리띠를 내놓았다. 비단 위의 용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정교했다.“전하를 생각하며 한 땀씩 수놓았사옵니다.”이헌은 허리띠를 한번 내려다본 뒤 내관에게 넘겼다.“솜씨가 좋구나.”짧은 칭찬이었지만 백소화의 얼굴이 밝아졌다.그녀의 시선이 연화에게 향했다.“승은상궁께서도 전하께 올릴 물건을 준비하셨습니까?”연화는 손에 들고 있던 약과를 내려다봤다.“소인은 간택 후보가 아닙니다.”“그래도 전하의 곁에 계시니 무언가 보여 드릴 솜씨가 있을 것 아닙니까.”백소화의 말에는 가시가 숨어 있었다.연화는 잠시 고민하다 소매 안을 뒤졌다.나온 것은 작은 주머니 하나였다.“이것이라도 드리겠습니다.”이헌이 주머니를 받아 열었다. 안에는 약과 두 개와 밤 세 알이 들어 있었다.“이게 무엇이냐?”“배고프실 때 드시라고 챙긴 것입니다.”“나를 생각하며 준비한 것이냐?”“원래 소인이 먹으려고 챙겼습니다.”백소화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전하께 올릴 물건을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니군요.”“그래도 지금은 드리고 싶습니다.”연화의 대답에 이헌의 입가가
폐원각에서 돌아온 뒤, 이헌은 연화의 거처를 강녕전 안으로 옮기라 명했다.연화는 내관들이 자신의 짐을 나르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소인이 여기서 계속 지내야 합니까?”“영성대군을 잡을 때까지.”“밤에도요?”“밤이 가장 위험하지 않으냐.”연화의 시선이 침전 안을 훑었다.침상은 하나였다.“소인은 바닥에서 자면 됩니까?”“내가 너를 바닥에 재울 것 같으냐?”“그럼 전하께서 바닥에서 주무십니까?”이헌이 기가 막힌 얼굴로 연화를 바라봤다.“어째서 내가 바닥에서 자야 하지?”“침상이 하나뿐이지 않습니까.”“둘이 누우면 된다.”연화는 잠시 침상의 크기를 가늠했다.“조금 좁을 듯합니다.”“지난번에는 잘만 잤다.”“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습니다.”“오늘은 정신을 없게 만들어 주랴?”이헌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자 연화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식사는 어디서 합니까?”“여기서.”“간식도 나옵니까?”“네가 궁금한 것은 그것뿐이냐?”“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이헌은 더 묻기를 포기하고 연화의 허리를 끌어당겼다.폐원각에서 부딪힌 곳을 확인하려는 손길에 연화가 움찔했다.“아픕
“오랜만이구나, 조카야.”영성대군은 포위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여유로웠다.이헌은 연화의 앞을 가로막았다.“숙부께서는 십팔 년 전에 죽었다.”“네 아비가 그리 만들었지.”“선왕께서는 역모를 일으킨 아우를 벌하셨을 뿐이다.”영성대군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역모라.”그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왕좌를 차지한 자가 패한 자에게 붙이는 편리한 이름이지.”강무영이 검을 겨눴다.“궤변은 옥에 들어가서 늘어놓으십시오.”“강무영.”영성대군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십팔 년 전에도 네가 내 앞을 막았지.”“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그때도 같은 말을 했다.”강무영의 턱이 굳었다.영성대군은 다시 이헌을 바라봤다.“나를 만나고 싶었을 텐데, 어째서 반갑다는 인사조차 없느냐?”“죽은 줄 알았던 역적이 살아 돌아왔으니 반갑기보다는 번거롭구나.”이헌의 냉담한 대답에 영성대군이 웃음을 터뜨렸다.“선왕을 많이 닮았어. 특히 소중한 것을 잃기 전까지 태연한 척하는 모습이.”그의 시선이 이헌의 어깨 너머로 움직였다.연화는 이헌의 등 뒤에서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저 아이가 네 약점이더냐?”“소인은 약점치고는 힘이 셉니다.”연화가 불쑥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