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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Author: 강시아
연기준은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

“내 사전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다.”

너무 당당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쿨럭… 왜죠? 서로 좋게 갈라서면 되지,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몰고 가시는 겁니까?”

연기준이 말했다.

“난 이미 네 질문에 답을 했다. 이제 내 차례다. 넌 왜 굳이 이혼을 하려는 거지?”

서인경은 화가 치밀었지만 자신이 정한 규칙이기에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왕야께선 제게 마음이 없지 않습니까.”

서인경은 불만이 아닌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 것뿐이었지만, 연기준의 귀에는 다른 뜻으로 들렸다.

“내가 네게 마음이 없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갑자기 이혼이 하고 싶다는 건 마음에 둔 자라도 생겼다는 거냐?”

서인경은 저 얼굴에 침 뱉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건 두 번째 질문이군요. 대답을 거절하겠습니다.”

연기준은 그 모습을 보고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네 두 번째 질문의 답을 주지. 난 어릴 적에 선황을 따라 사냥을 자주 나갔었다. 그런데 어느날 멧돼지 한 마리가 내가 놓은 덫에 걸려든 적이 있었지. 아주 맷집이 좋은 아이라, 끌고 가기 쉽지 않았다. 녀석에게 끌려 진흙탕에 빠지기도 했지만, 난 끝까지 놓지 않았고, 녀석을 포획하는데 성공했어. 내게 이혼을 말하기 전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고 오지 그랬느냐. 나와의 혼인을 원했던 건 너다. 내가 널 풀어주지 않는 한, 네 스스로 내 왕부를 떠날 수는 없단 말이다.”

서인경은 머리가 어지러워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아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니까, 그 멧돼지가 바로 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다음 질문이 되겠군. 내 차례다. 정인이 생겼느냐?”

서인경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정말 괜찮은 처자였는데 왕야와 혼인하고 나서 모두가 혐오하는 광년이 되었지요. 참으로 어리석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저와 제 가족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연기준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질문에 답을 할 차례군. 넌 아니다.”

서인경은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건 또 무슨 소리지?’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넌 멧돼지가 아니란 말이다.”

‘하… 이 인간이!’

서연경은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일어나서 그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다.

“그게 어떻게 질문이 됩니까?”

연기준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궁금했던 건 다 물어봤고 네 질문에도 답을 주었으니 난 공무가 있어서 이만 나가보련다. 푹 쉬고 있거라.”

“안 됩니다! 이건 사기예요! 가지 마세요!”

서인경은 버선발로 침상을 내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건 공평하지 않죠. 제가 드린 질문 중에 두 질문은 무의식적인 반문이었습니다. 질문에 속하지 않는다고요!”

“전에 규칙을 정할 때는 그런 얘기 없었지 않나?”

서인경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지.’

그러자 그녀는 그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부군, 질문 하나만 하게 해주십시오. 네? 딱 하나만요. 하나면 됩니다, 제발요.”

연기준은 간드러진 그녀의 목소리에 온몸에 닭살이 다 돋는 듯했다.

“이… 일단 일어나서 얘기하거라.”

그럴수록 서인경은 더 힘을 주어 그의 다리를 껴안았다.

“싫습니다!”

“왕야, 변방에서 온 급보입니다.”

문밖에 선 연풍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 역시도 자신이 올 때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연기준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무엇이냐?”

서인경은 여전히 그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 물었다.

“그냥 궁금했습니다. 왕야께선 저보다 단은설을 먼저 만났지요. 저에게 마음도 없으면서 왜 저와의 혼인을 수락하신 겁니까?”

연기준이 대답하기 전에 그녀는 재빨리 한마디 덧붙였다.

“황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는 핑계는 대지 마십시오. 상왕께서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폐하께서도 왕야께 강요하지 않았을 테니깐요.”

한참을 침묵하던 연기준이 입을 열었다.

“그 전장에서 죽었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 서 장군과 부인께서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미끼가 되어 적군을 다른 곳으로 유인했기에 내게 역공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무렵, 서인경은 경성에 있었기에 소식을 접한 건 전쟁이 끝난 후였다.

‘이건 내가 몰랐던 사실인데….’

“그러니 네가 조용히 본분을 지키고 살아간다면 너와 네 가문은 내가 비호할 것이다. 알겠느냐? 이제 일어나거라.”

하지만 그는 단은설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인경은 힘없이 손을 놓았다.

연기준이 묵묵히 방을 나가려던 순간, 등 뒤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부모님께서 왕야를 구하기로 하신 이유는 당신이 대진국의 진국의 전신(

戰神: 전장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살아 계셔야 열국의 오랑캐들이 쉽게 이 나라의 변방을 침범하지 못할 테지요. 제 부모님은 군인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도 감수해야 하는 게 바로 그분들의 사명이지요. 그러니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평생의 행복을 희생하진 마십시오.”

연기준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찬바람이 불어오자 서인경도 머리가 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원하던 답을 얻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전생에 서씨 가문을 무너뜨린 배후에는 그 역시나 끼어 있었다.

그리고 가족과 모든 것을 잃은 원주인에게 휴서를 던지고 그녀를 감금한 사람도 그였다.

그가 조금 전 말한 심금을 울리는 절절한 말들이 우스워질 정도였다.

‘당신의 앞날에 비하면 서씨 가문의 은혜는 보잘것없는 것이었겠지.’

연기준이 떠난 이후, 평이가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 왜 바닥에 앉아계십니까?”

연기준만 없으면 평이의 목소리는 언제나 명랑했다.

서인경은 그런 평이의 부축을 받으며 물었다.

“맹국공부 쪽에서는 뭐 들려온 소식 없니?”

평이가 말했다.

“반 시진 전에 맹국공부에서 엄청난 답례품들을 가져왔어요. 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린다고요. 그리고 맹 소저께서 마마께 푹 쉬고 계시라고, 자신도 몸만 괜찮아지면 꼭 찾아뵙겠다는 말을 전했답니다. 다만, 범인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게 죄송스럽다고도 했어요.”

서인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람이 괜찮으면 된 거지. 상대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일을 꾸몄어. 맹은영이 범인의 얼굴을 못 봤을 거라는 예상은 이미 했어. 단씨 가문 쪽은 지금 어쩌고 있니?”

단씨 가문 얘기가 나오자 평이가 부루퉁한 얼굴로 답했다.

“그쪽은 모든 소문을 단절한 것 같았어요. 거리에 나가 알아봤는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거든요. 연풍이 인맥이 넓으니 그 사람에게 부탁했는데 글쎄 자신은 왕야의 명만 수행한다며 거절하는 거예요. 하, 그런 고집불통은 처음 봤습니다.”

서인경은 연기준을 꼭 닮은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왕야의 사람이다. 즉, 내가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

평이는 난로에 장작을 더하며 호언장담했다.

“그런 사람은 저희도 필요 없습니다. 소인이 직접 나가서 알아보겠습니다. 마마….”

대답이 들리지 않아 뒤돌아보니 서인경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하얀 피부에 빨간 입술, 축 늘어진 부드러운 머리카락, 잠자는 공주님처럼 참으로 어여쁜 모습이었다.

평이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주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 시각, 서재에서 연풍은 변방 급보를 전달한 후에 검은 면사포 하나를 연기준에게 건넸다.

“서왕부 뒷문 근처의 풀숲에서 발견했습니다. 서왕부의 시종에게 확인을 해보았는데 자신을 찾아왔던 자가 얼굴에 쓰고 있었던 게 맞다고 하였습니다.”

면사포에서는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연기준은 그것을 집어 코끝으로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연지의 향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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