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3화

Author: 코코넛 서고
연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인이 알아봤는데 최상급 연지였습니다. 이런 걸 사서 쓸 능력이 있는 자는 황궁에 계신 분들을 제외하고는 고위 관료의 여식들이나 가능하겠지요. 왕비마마도 거기에 포함입니다.”

연기준은 왜 그 향이 이리도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기억해내고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전까지 서인경이 그의 앞에서 알랑거릴 때 자주 사용하던 연지였다.

“그럼, 그 사람이 자신이 죄를 저질러 놓고 자작극을 했다는 얘기냐?”

연붕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소인이 어찌 함부로 그런 불경한 추측을 하겠습니까. 이 연지를 샀던 사람들 중에 왕비마마와 사이가 안 좋은 규수들이 몇 있긴 했었지만, 맹국공가와 서왕부와는 사이가 좋은 사람들입니다. 굳이 오늘 같은 자리에서 일을 벌일 이유가 없지요.”

서인경에게 보복한다고 일을 꾸미기에는 맹국공가문과 서왕부 모두 만만찮은 상대였다.

연기준은 가볍게 책상을 두드리며 담담히 말했다.

“놈들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맹은영은 서왕부에서 죽고 상왕비는 살인죄를 뒤집어쓰겠지. 그러면 누구에게 가장 유리할 것 같으냐?”

그 말을 들은 연풍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왕비께선 처형을 피해가더라도 정비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을 겁니다. 그럼, 상대의 목적은 상왕비의 자리라는 말씀이십니까?”

연기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듣기로는 최근 대황자께서 단씨 가문과 자주 접촉하고 있다는데?”

“예. 황후께서는 단효산의 둘째딸인 단여월을 대황자의 측비로 추천했다고 들었습니다.”

순간 연풍의 안색이 급변했다.

“왕야… 그럼, 설마… 단씨 가문에서…!”

상왕비인 서인경과 대황자비로 내정된 맹은영.

하필 단씨 가문의 두 딸이 노리고 있는 위치였다.

연기준은 말없이 면사포를 연풍에게 도로 던져주었다.

“계속 주시하고 있거라.”

“예.”

그날 밤, 서인경은 단잠을 잤다.

눈을 뜨고 탕약을 마시고 나니 몸상태가 비로소 회복된 것 같았다.

그녀는 평이와 함께 갈아 만든 배즙을 마시며 정원에서 햇빛을 받았다.

“단씨 가문 쪽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어?”

평이는 배즙 한숟가락을 떠먹고는 말했다.

“단은설이 마마를 문안한다는 핑계로 왕부에 방문해서 왕야의 서재에서 한참을 있다가 방금 돌아갔습니다. 단여월은 대황자를 만나러 갔고요. 맹 소저가 앓아누운 이후로 대놓고 대황자 관저를 드나들고 있어요. 단평안은 아직 침상에서 못 일어났다고 합니다. 아마 외출을 하려면 최소 열흘은 필요할 듯 보여요.”

서인경은 시원한 배즙을 한 모금 마시고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평이 너 소식이 참 빠르구나?”

평이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두드렸다.

“소인만의 방법이 있습니다. 성안에 사는 노숙자 중 한명이 소인의 고향친구인데, 그들에게 만두를 사줬더니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서인경은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머리 좋네! 그 녀석들 죄다 침상에 눕혀 놓아야 좀 얌전해지려나?”

그러자 평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마마, 그들에게 복수하시려고요?”

“그래야 하지 않겠니?”

평이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마마를 살인범으로 몰아가려던 나쁜 놈들입니다. 당연히 갚아줘야죠!”

서인경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단씨 가문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상인 가문 주제에 서왕비의 생신연에 초대를 받았어. 배후에 적지 않은 관료 세력들이 얽혀 있을 게다. 사소한 보복으로는 그들의 근간을 흔들 수 없으니 천천히 구워삶는 수밖에.”

평이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어… 어떻게 말입니까?”

서인경은 햇살을 맞으며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후궁에 매화꽃이 필 시기가 곧 도래하겠구나. 황후께선 그때에 맞추어 다과회를 열 것이야. 단여월은 대황자의 측비로 간택되었으니 단씨 자매도 초대를 받을 테지.”

올해 황후는 각궁의 황자를 위해 황자비를 간택하느라 꽤 분주하게 보내고 있었다.

이런 다과회라면 황후의 눈에 들고 싶은 수많은 가문의 여식들이 앞다투어 참석할 것이다.

‘너희가 주목받기를 원한다면 소원대로 해주마!’

다음 날이 되자, 평이는 보따리 두 개를 메고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갔고, 서인경은 대놓고 대문을 나섰다.

관리인은 서인경이 황궁 다과회 때 입을 의복과 장신구를 준비하려는 줄 알고 평소처럼 그녀에게 은화 스무 냥을 건넸다.

“부족하시면 일단 왕부의 이름으로 외상을 달아두십시오. 소인이 나중에 가서 결산하겠습니다.”

서인경은 은화주머니를 받으며 머리를 굴렸다.

“내게도 매달 녹봉이 내려올 텐데?”

관리인이 답했다.

“마마의 매달 녹봉은 은화 열 냥입니다. 허나 왕부에서 생활하시는데 부족함이 없으시다면서 한 번도 그걸 받아가지 않으셨습니다.”

그 말에 서인경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돌아가서 계산 좀 부탁하네. 내가 왕부에 시집온 이후로 밀린 녹봉이 대략 얼마인지도 말이야. 이따가 돌아가면 평이를 보내 받도록 하겠네.”

관리인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마마, 혹시 생활비가 부족하십니까?”

서인경은 은화주머니를 흔들며 답했다.

“그래. 그러니 최대한 빨리 준비해 주시게.”

관리인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연기준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런 관리인의 걱정과는 별개로 서인경은 소비를 하러 밖에 나간 것이 아니었다.

평이가 미리 정리해둔 보따리 안에는 혼수품에서 골라낸 금은보화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죄다 팔아 은화로 바꾸고 관리인에게 받은 녹봉과 함께 놓아두었다.

서인경은 침상에 앉아 은화를 세며 이 세계로 건너온 이래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다과회 전날밤, 밤새 큰눈이 내렸다.

아침에 창문을 열었더니 온 세상이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평이는 장롱 앞에 서서 옷들을 꺼내 보며 고민을 토로했다.

“마마, 어떤 걸 입으면 좋을까요? 마마께서 근래 통 새옷을 마련하지 않아서 참 마땅치가 않습니다. 다른 집 아씨와 부인들은 의상점 의복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는데 말입니다.”

서인경은 창문을 닫고는 고개를 돌려 고민에 찬 얼굴로 서 있는 평이를 위로했다.

“오늘은 황후께서 각 궁의 황자들을 위해 비를 간택하는 날이다. 헌데 이미 혼인한 내가 그리 화려하게 차려입으면 괜히 미움만 살 것 아니더냐.”

평이는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무늬가 간단한 장밋빛 치마를 들며 물었다.

“마마, 이 옷은 어떠십니까?”

서인경은 고개를 저었다.

“매화꽃과 비슷한 색상인데 하필 지금이 매화철이니 적당하지 않아.”

평이가 흰색 옷을 들자 그녀는 또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입으면 흰눈과 일체가 되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할 게다.”

마지막으로 평이는 연하늘색 옷을 골랐다.

“그럼 이건 어떠신가요? 오늘 왕야께선 짙은 남색 의복을 입으셨으니 잘 어울리실 거예요.”

서인경은 그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며칠 그를 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혹시 네가 문을 걸어잠그고 안 열어줬니?”

평이는 의복을 내려놓고 장신구함을 열며 고개를 저었다.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이번 폭설로 이주에 재난이 닥쳐 왕야께서 많이 바쁘시다 들었습니다. 어제는 깊은 밤에 돌아오셨다가 서재에서 두 시진 주무시고 오늘 새벽에 다시 나가셨다 합니다.”

‘재난?’

원주인의 기억에 따르면 이번 폭설은 시작에 불과했다. 더 심각한 건 쌓인 눈이 녹으면서 발생한 혈흡충이라는 역병이었다. 이 역병은 이듬해 여름까지 지속되어 이주 일대에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흉년까지 들어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이때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가문이 단씨 가문이었다. 나라의 재난을 이용해 그들은 식량과 물자를 고가로 되팔아 떼돈을 벌었다. 그 재난을 계기로 단씨 가문은 진국 최고의 부호가 되었다.

순간 서인경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시간을 거슬러   제902화

    그 무렵,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온 후궁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황제는 벽돌 하나, 기와 한 장도 그냥 넘기지 않겠다는 듯 후궁을 거의 뒤엎다시피 뒤지고 있었다.그 와중에 서인경은 연기준의 품에 안겨 오랜만에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잤다.하늘이 환해지고 밖에서 갑옷이 부딪히는 쇳소리가 들려오자 서인경은 화들짝 눈을 떴다.“들킨 겁니까?”연기준은 그녀를 다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못 들어온다.”후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곳은 금기된 땅이라는 것을.태황태후의 명이 없이 감히 발을 들인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과연 잠시 뒤,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공기는 다시 고요해졌다. 희끗해진 하늘빛을 보던 서인경은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우리는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합니까?”연기준은 그녀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감아 돌리며 나른하게 웃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둘만의 시간을 좀 더 즐기면 안 되는 것이냐?”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서인경은 지금 상황에서 그가 정말 그런 여유를 부릴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연기준이 낮게 웃었다.“오늘 밤에 움직일 것이다. 황제를 끌어내리고 열셋 째 황자를 올리려 하는 데 어떠느냐?”피로 얼룩질 수밖에 없는 왕위 쟁탈전을 그는 마치 산책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서인경은 잠시 생각했다.“대황자가 황제가 된다면 저희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연무성은 너무 어려 황제가 된다고 해도 버티기 힘들겠지요. 그렇다면 열셋 째 황자가 그나마 나은 선택이긴 하지만 그 아이의 성품이 어떤지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연기준은 그녀의 머리끝을 손바닥에 굴리며 말했다.“성품이 어떻든 상관없다. 내가 올릴 수 있으면 다시 끌어내릴 수도 있거든.”그 말에 담긴 자신감은 허세가 아니었다. 서인경 역시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열셋 째 황자가 최선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다만 조정이 뒤집히는 순간마다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시체가 산처럼 쌓여왔다는 사실을

  • 시간을 거슬러   제901화

    하지만 상왕비를 굳이 가둔 것은 황후로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제가 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그녀조차 갈피가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상왕은 야랑국에서 죽었고 야랑국의 적통인 팔황자는 진국에서 죽었다. 그런데 열셋 째 황자는 느닷없이 호국호민의 영웅이 되어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황후는 늘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예감. 이 모든 일은 결코 우연일 리 없었고 마치 누군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짜 놓은 판처럼 보였다. 만약 정말 그 뒤에 조종자가 있다면 지금은 결코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니다.황후는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자. 산 위에 앉아 호랑이들이 싸우는 것을 관망하는 수밖에.이미 황후는 궁 밖으로 사람을 보내 대황자와 하선준 가문에 전갈을 전해 두었다. 요즘은 괜히 나서지 말고 조용히 지내며 절대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말이다.그런데 뜻밖에도 황제의 한 장 조서가 다시 그녀를 무대 앞으로 끌어냈다.태감이 조서를 읽고 나서 공손히 황후 앞에 섰다.“황후 마마,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금수 대장공주께서 후궁 생활이 지루하시다 하여 황후 마마더러 직접 모시고 궁 밖으로 나가 바람도 쐬고 겸사겸사 변복하고 민정을 살펴보라 하셨습니다.”황후는 나라의 어머니답게 단정한 자세를 유지한 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알겠다. 물러가거라.”“예.”태감이 물러난 뒤 황후는 고개를 돌려 궁녀에게 물었다.“어젯밤 냉궁에서 있었던 일, 특히 금수 대장공주와 관련된 부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보거라.”궁녀는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침에 들은 소문을 신이 나서 풀어놓았다.“냉궁에서 다섯 구의 시신이 나왔습니다. 그중 하나는 어른, 하나는 아이였는데 아이 쪽은 열다섯 째 황자로 확인되었습니다. 몸에서 떨어진 옥패가 증거였고 신비와 금수 대장공주도 직접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폐하께서 열다섯 째 황자를 말리려다

  • 시간을 거슬러   제900화

    시신이 금수 대장공주 앞을 지나갈 때, 그녀는 뒤에 서 있던 시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시녀는 의미를 알아차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한바탕 벌어진 대화재는 황제의 입에서 손쉽게 사고로 규정되었다.그날 새벽, 금위군은 후궁 전역을 샅샅이 수색했다.후궁에서는 모두들 알고 있었다. 열다섯 째 황자가 냉궁에 잘못 들어갔다가 불운하게 불에 타 죽었다는 것. 그런데도 황제가 무엇을 찾는 건지는 아무도 몰랐다.한순간에 궁 전체가 불안에 휩싸였다. 사람마다 얼굴이 굳었고 어디서든 긴장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열다섯 째 황자의 죽음을 두고 후궁에는 탄식이 가득했다.“후궁에서 어미 없는 아이는 오래 못 산다더니 과연 그렇구나.”“신 황귀비께서 아이에게 마음을 쓰지 않아서 그 애가 스스로 냉궁에 간 거 아니겠느냐?”이런 소문이 신 황귀비의 침전에까지 전해졌을 때, 마침 황제의 조서도 함께 도착했다. 황귀비 작호를 박탈하고 귀비로 강등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반성하며 석 달간 외출을 금하라는 명도 전해졌다.한때 가장 총애받던 궁전은 순식간에 숨 막히는 침묵에 잠겼다. 사람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궁녀는 분노에 차 컵을 집어 던질 뻔했다.“밖에서 떠드는 건 전부 개소리예요! 우리 마마가 열다섯 째 황자에게 쏟은 정성은 열일곱 째 황자와 열여덟 째 공주보다도 훨씬 컸는데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입만 살아서 떠들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다들 입이 썩고 배가 터질 거예요!”신 황귀비는 웃으며 그녀를 내보냈다.“사람들 말이야 마음대로 하게 두거라. 우리만 떳떳하면 그만이지. 어서 가서 차 한 잔 다시 끓여 오너라. 이 잔이랑 주전자는 값비싼 거니까 조심하고.”궁녀는 입을 삐죽이며 주인이 너무 착하다고 속으로 투덜대면서 나갔다.그때 운 유모가 작은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신 황귀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숙 언니만 세간의 헛소문을 믿지 않으시면 돼요.”운 유모는 그녀 옆에 앉았다.“저는 당연히 믿지 않습니다.

  • 시간을 거슬러   제899화

    신 황귀비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거의 후궁 전체가 다 들을 만큼 요란해졌다. 이미 한밤중이었지만 소란에 잠에서 깬 궁인들과 후궁들이 하나둘씩 나와 구경하기 시작했다.황제는 분노로 관자놀이의 핏줄이 불거졌다.“그만하거라!”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이게 무슨 소란이냐? 또 무슨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냐?”황제가 미처 막기도 전에 사람들 사이가 갈라지며 길이 열렸다. 금수 대장공주가 망토를 걸친 채 하품을 하며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본궁이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쪽이 시끄러워서 깼다. 두 후궁이 밤중에 질투 싸움이라도 벌인 줄 알았더니 황제와 신 황귀비였느냐? 두 사람은 또 무슨 연극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냐?”말을 하며 금수 대장공주의 시선이 바닥에 놓인 다섯 구의 시신으로 옮겨갔다.그녀는 일부러 놀란 듯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입을 가렸다.“어머, 사람이 죽었구나?”목소리는 과장됐고 표정은 지나치게 연극적이었다. 전장을 누비며 수없이 사람을 죽여 본 인물치고는 반응이 너무 요란했다.황제는 알고 있었다. 이 황고모는 또 구경꾼처럼 끼어들어 불난 집에 기름을 붓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이 일은 황제가 조금도 외국 세력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그는 급히 다가가 금수 대장공주의 팔을 붙잡았다.“황고모를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짐의 잘못입니다.””어서 황고모를 모셔 돌아가 쉬시게 하거라. 누구든 다시 황고모를 번거롭게 하면 곤장으로 다스린다!”내시가 막 다가가 부축하려는 순간, 금수 대장공주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방금 신 황귀비가 한 말을 들었다. 저 아이가 열다섯 째 황자라며? 저 옥패, 본궁도 며칠 전에 그 아이가 차고 있는 걸 봤거든. 그럼 옆에 있는 건 누구냐?”황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열다섯 째가 장난삼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우연히 화재를 만난 것입니다. 옆에 있는 건 아마 그를 말리려다 함께 불에 휩싸인 궁녀일 거예요. 사람을 보내 어느 궁에서 궁녀가 사라졌는지 조사하고

  • 시간을 거슬러   제898화

    냉궁 밖.황제는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서 있었다. 온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얼음처럼 차갑고 섬뜩했다. 반경 십 미터 안에는 측근 내시들 외에는 누구도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그는 눈앞에서 새까맣게 탄, 크고 작은 두 구의 시신이 잿더미 속에서 끌려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함께 타버린 네 마리 악어의 시체 조각까지 들려 나왔다.황제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말도 안 된다! 안에는 강물이 있지 않았느냐? 그렇게 물이 많았는데 어떻게 불이 날 수 있단 말이냐!”내시는 몸을 떨며 아뢰었다.“폐하, 신도 이유를 알지 못하옵니다. 불이 나기 직전, 안에 있던 물이 갑자기 전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악어 네 마리도 전부 타 죽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사라졌다?황제는 선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안의 물과 악어는 모두 연강호가 설산에서 함께 데려온 것이라고.겉보기엔 고인 죽은 물 같았지만 백 년이 지나도록 마르지도 않았고 썩지도 않았다. 보통 물이었다면 악어는 진작 죽었을 터였다.그렇다면 신비로운 설산의 물도 불에는 약한 것일까? 불을 만나면 그대로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황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물은 이미 서인경이 전부 약왕곡으로 옮겨 버렸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에도 네 마리 악어는 그 안에서 신나게 날뛰고 있었다.내시의 보고를 들을수록 황제의 분노는 더욱 치밀었다.“금위군은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 왜 첫 순간에 이곳을 봉쇄하지 않았느냐!”금위군 통솔자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냉궁은 본래 신의 관할 구역이 아니 옵니다. 폐하의 명이 없이는 감히 직무를 이탈할 수 없었사옵니다.”쿵!황제는 발길질로 그의 어깨를 세게 걷어찼다.“너희는 머리 달린 시체냐? 이 정도 융통성도 없어서야! 짐이 너희를 둔 게 무슨 소용이냐!”통솔자는 억울했지만 땅에 엎드린 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때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열다섯 째 황자! 혹시 그 아이인 것이냐?”“신 황귀비 마마

  • 시간을 거슬러   제897화

    희태비는 언제나 따뜻한 사람이었다.서인경의 마음속에서 그녀에 대한 존경은 더욱 깊어졌다.“그럼 태황태후께서 계속 어머님을 견제한 것도 혹시 어머님과 그 시녀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 아닐까요?”연기준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아닐 거야. 태황태후께서 알았다면 이곳을 이렇게 오랫동안 두려워하지도 않았겠지. 그녀가 모비를 싫어한 건 단순해. 그녀는 열셋 째 황숙에게 수많은 귀족 규수를 소개했지만 황숙 눈에는 늘 모비밖에 없었거든. 태황태후 눈에 모비는 나라를 망치는 요물 같은 존재였지. 열셋 째 황숙의 마음을 완전히 끊어내려고 한때는 그를 후궁 지하 밀실에 가둬 두고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모비를 잊게 만들려고 말이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다만, 황숙은 그 밀실에서 나온 뒤로 다시는 모비를 찾지 않았고 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서인경은 조용히 듣다가 문득 자신이 단은설의 침전 밀실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는 급히 품속에서 반달 모양의 옥패를 꺼냈다. 옥패에는 포효하며 달려가는 호랑이가 새겨져 있었다.달빛이 비쳐 서인경의 손바닥을 환하게 밝혔다.연기준의 시선이 옥패에 멈췄고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서인경은 옥패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며 물었다.“이거 압니까? 단은설 밀실에서 발견한 겁니다. 혹시 그 밀실이 예전에 열셋 째 황숙을 가둬 두었던 곳이 아니었을까요?”그 안에 있던 형구들을 떠올리자 서인경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태황태후가 아무리 미쳐 있었다 해도 설마 친아들에게까지 형벌을 가했을까?연기준은 옥패를 받아 달빛 아래서 한 번 더 살폈다. 확인한 뒤 그는 그것을 단단히 손에 쥐었다.서인경은 그의 반응이 이상해 보여 물었다.“이걸 압니까?”연기준의 검은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성조 선제 때, 흑갑군이라는 비밀 군대가 있었다. 오직 연 씨 황실에만 충성하는 군대지. 이건 그 흑갑군을 움직이는 호부다. 대대로 진국 황제에게만 전해졌고 오직 역대 황제만이 병권을 쥘 수 있었다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