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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Author: 강시아
다과회 장소는 황후궁에서 이루어졌다.

서인경은 어화원(御花園: 황제의 정원)을 지나다가 멀리서 자색 망초를 걸친 여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곳에서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은 것으로 보였다.

“인경아….”

부름을 들은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원주인의 그리운 기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숙귀비는 할아버지인 서 노장군의 딸이자, 서인경에게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었다.

전생에는 원주인 때문에 황제의 눈 밖에 나서 부귀영화를 채 누리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고모님, 어찌 여기 서 계십니까? 얼마나 추운데요!”

숙귀비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를 걷어내니 초췌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쩌다 겨우 한번 궁에 오니, 얼굴 한번 보려고 기다렸다.”

서인경은 솟구치는 눈물을 억눌러 삼켰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숙귀비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황자가 엊그제 풍한에 걸려 돌보다 보니 잠을 설쳐서 그런다.”

곁에 있던 궁녀가 한마디 거들었다.

“귀비마마께서는 십오황자를 돌보시느라 이틀 밤낮을 뜬눈으로 보내셨습니다. 상왕비마마, 어서 저희 마마를 조금만 쉬시라고 설득하여 주십시오.”

서인경은 숙귀비의 차가워진 손을 꽉 잡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고모께서 건강하셔야 십오황자를 잘 돌보실 수 있습니다. 황자께서 앓고 계신데 고모님마저 쓰러지면 어찌하시려고요?”

그 말에 숙귀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을 쉬었다.

“다른 이에게 맡기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행히 열은 내렸고 태의도 며칠만 쉬면 회복된다 하더구나. 난 너무 걱정 말거라. 상왕이 네게 금족령을 내렸다 하던데, 너는 괜찮은 게냐?”

원주인은 늘 이렇게 가족들에게 걱정만 끼치는 존재였다.

서인경은 애써 활짝 웃으며 답했다.

“금족령이 아니라, 사실은 제가 단가의 외아들을 좀 때렸는데 그쪽의 보복을 걱정하셔서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사실은 잘 먹고 잘 잤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참말이냐?”

숙귀비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치였다.

“아버지도 경성에 안 계시는 이 시기에 너무 상왕과 다투지는 말거라. 고모는 네게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이구나.”

원주인이 한 일이 있으니 서인경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고모님, 안심하세요. 저 아주 잘 지낸답니다. 제게 해를 끼칠 자는 아무도 없어요. 오히려 궁에 계신 고모님과 십오황자가 걱정이지요. 며칠 전 폐하께서 또 공개적으로 십오황자를 치하하셨다 들었습니다.”

아들 얘기가 나오자 숙귀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황자가 글공부와 기마술, 사격술 모든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니 폐하께서도 날로 십오황자를 예뻐하시는구나.”

서인경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숙귀비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고모님도 홀로 높게 뻗는 나무가 비바람을 맞는다는 이치에 대해서 잘 아실 겁니다. 지금 여러 황자들 중, 대황자께서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계시고 황후께서 그분의 앞날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꾀하고 계시니, 태자의 자리는 거의 내정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 시기에 너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숙귀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서인경은 계속해서 말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감춰야 할 때는 감춰야 합니다. 십오황자의 비범함은 우리만 알고 있으면 그만이지요.”

숙귀비는 온실 속 화초가 아니었다. 귀비로 입궁하기 전에는 서가군을 따라 전쟁터에 나가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바로 서인경의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너무 걱정하진 말거라.”

그렇게 두 사람은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 때가 되자 서인경은 황후궁으로 향했다.

“고모님은 안 가시렵니까?”

“이미 황후께 양해를 구했다. 황자를 홀로 내 궁에 남겨두고 자리를 오래 비울 수는 없어.”

서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몸 조심하십시오. 나중에 또 뵈러 오겠습니다.”

그렇게 숙귀비와 작별한 서인경은 곧 황후궁에 도착했다.

궁문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관료 부인과 아씨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황후마마께서 특별히 대황자 전하까지 모셨는데 맹가의 아씨께서 몸이 안 좋다며 초대를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황후의 초대에 불응하다니, 참으로 건방지군.”

“맹 소저는 저번 사고로 몸이 심각하게 안 좋아져서 장차 회임도 하기 힘들 거라 합니다. 아마 대황자비의 후보가 바뀔 것 같군요.”

“쉿. 황후마마께서 오고 계시네.”

서인경은 고개를 들고 위쪽을 바라보았다.

대청 앞에서 두 여인이 황후를 조심스레 부축하며 걸어나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친모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친숙했다.

두 여인은 바로 단여월과 단은설이었다.

상인 출신이 황후의 신임을 사다니, 단씨 자매의 사교 능력은 실로 대단했다.

물론 그 중에는 원주인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이들 자매에게 귀족 부인과 아씨들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원주인이었다.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늑대에게 먹이를 던져서 키워준 꼴이라니. 멍청한 얼간이 같으니라고!’

황후는 대청 앞에 서서 상투적인 문안을 나눈 후, 꽃구경을 하라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자리를 뜨려는 서인경을 누군가가 불러세웠다.

“인경아, 혼자 왔니? 같이 둘러볼까?”

고개를 돌려보니 단은설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좋지. 그렇게 해.”

안 그래도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고민하던 서인경이었으니, 잘된 일이었다.

단은설은 여전히 친근한 척 굴었다.

“며칠 전에 너 괜찮은지 보려고 상왕부에 갔었다. 그런데 네가 아파서 사람을 못 만날 상황이라고 하더라고.”

서인경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내 부군의 서재로 간 거니?”

단은설은 황급히 주변 눈치를 살피며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왕비께선 아직도 저를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제가 왕야를 찾아간 것은 마마의 건강이 걱정되어서이기도 하고 이주 폭설 때문에 물자 조달 현황을 보고하러 갔던 것입니다. 왕비께선 평소에 이런 일에 관심이 없으니 잘 모르시겠지요. 근래 왕야께서 이 일로 골머리를 많이 앓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서인경은 안락한 삶만 즐기는 게으른 사람이라고 오해할 얘기였다.

신분을 따져도 연기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사람은 그녀였다.

그러나 굳이 이 상황에 단은설의 자작극에 협조해 줄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이번에는 단씨 가문에 국고의 돈이 흘러가게 둘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사람이 없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단은설이 뒤를 따르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인경아, 사람들은 저쪽에 있는데….”

“쉿.”

고개를 돌린 서인경은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난 저쪽으로 가지 않을 거야. 부군께서는 폐하와 나랏일을 논하신 이후에 황후궁에 식사를 하러 오신다고 하셨어. 부군을 맞으러 갈 생각이야.”

사랑에 눈이 먼 서인경이 할법한 얘기였기에 단은설은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는 매일 대놓고 상왕부를 찾을 수가 없었기에 그녀 역시 며칠이나 연기준을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서인경은 들뜬 얼굴을 하고 오솔길을 걸어갔다.

처음 입궁한 단은설은 길도 모르니 그녀의 뒤를 무턱대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서인경의 주변을 맴돌아야지 상왕을 만날 자격이 있었다.

이로 인해 오랜 시간 증오가 쌓이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단은설은 언젠가 서씨 가문을 완전히 짓밟아야 자신이 당당히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무턱대고 서인경을 따라 걷다 보니 아무도 없는 호숫가에 도착했다.

길 옆에는 두터운 눈이 쌓여 있고 호수도 얇은 얼음층이 끼어 있었다.

호숫가에 도착한 그녀는 느긋하게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녀는 나오기 전에 이미 난로를 손에 들고 있었기에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반면 단은설은 코끝이 얼어서 빨갛게 되어 있었다.

“여긴 어디야?”

단은설의 질문에 서인경은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사람도 없고 주변이 눈으로 덮여 있으니, 사람을 죽여 처리하기에 딱 좋은 곳이지 않니?”

순간 단은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 일부러 날 이쪽으로 유인해 온 것이냐?”

서인경은 대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왜 자꾸 내 부군의 곁을 맴돌아? 원망할 거면 너 자신을 원망하렴.”

불길한 예감이 든 단은설은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재빨리 뒤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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