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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화

Author: 코코넛 서고
서인경은 천천히 거문고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의 손끝이 현에 채 닿기도 전에 경계심이 일었다. 거문고 현 위에는 화천세가 발라져 있었던 것이다.

약임과 동시에 독인 그것.

소량으로 사용하면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지만 오늘처럼 의도적으로 듬뿍 발라 놓은 거라면 분명 치명적인 독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즉사하는 것은 아니다. 약성은 3일 뒤 발동하여 의식이 멀쩡한 상태에서 칠규로 피를 쏟으며 말라죽게 된다. 죽는 모습은 극도로 참혹하고 흉측할 터, 그때쯤이면 증거는 이미 사라져 거문고가 원인임을 알아낼 수조차 없게 된다.

서인경은 이 거문고가 단 가에서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궁에서 미리 준비해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기 위해 누군가 엄청난 값을 치렀다는 사실이었다.

화천세는 본래 귀한 약초라 한 뿌리만 해도 은 백 냥은 족히 넘는다. 지금 발라진 양은 적어도 은 천 냥어치.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이토록 아낌없이 쓴 것을 보면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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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을 거슬러   제1095화

    서인경은 그의 걱정이 가득 담긴 말을 듣다가 그의 목을 감싸안고 스스로 다가갔다.부드러운 입술이 맞닿고 따뜻한 온기가 살짝 식은 숨결 위로 스며들었다.연기준은 그녀의 먼저 다가온 입맞춤을 조용히 받아들였다.드물게도 그에게서 거친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숨결은 점점 무거워지고 몸은 서서히 긴장으로 굳어갔다.서인경은 그의 변화를 또렷이 느꼈다. 짧은 입맞춤으로 갈증만 적신 채 몸을 떼려는 순간, 연기준의 손이 그녀를 다시 끌어당겼다.“불을 붙여놓고 먼저 빠지겠다는 것이냐?”서인경은 그의 눈동자 깊이 번진 욕망을 바라보며 묘한 만족감과 함께 작은 승리감까지 느꼈다.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여긴 별채입니다. 밖에 호위가 있잖아요.”하지만 연기준은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한 손을 들어 문 쪽으로 거칠게 휘둘렀다.거센 기류가 스치듯 지나가며 문이 굳게 닫혔다.곧이어 밖에서 연풍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모두 물러나거라. 오늘 밤은 폐하의 호위가 필요 없다.”문이 닫히고 암위들마저 물러나자 밤은 한층 더 고요하고 텅 비어 보였다. 창밖에서 울어대는 벌레 소리조차 유난히 크게 들렸다.그 사실을 떠올리자 서인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이러다 폐하의 체통을 다 잃는 거 아닙니까?”연기준의 웃음이 낮게 번졌다.“이런 부인을 둔 것이 내 가장 큰 위엄이지.”말이 끝나자, 그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서인경은 어느새 의자에서 물속으로, 다시 그의 품에 안겨 방으로 옮겨졌다.이미 밤은 깊어 있었다. 그녀는 그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넓은 외투 안에 감춰져 있었다.외투 속에서 두 사람의 몸은 얽혀 있었고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서인경은 본능처럼 그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밤하늘 가득한 별빛이 두 사람의 겹쳐진 그림자를 비추고 있었다.“연기준… 당신도, 우리 아들도 꼭 무사해야 합니다.”뜨거운 숨결이 그의 귓가를 스쳤다.연기준은 그녀를 더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그래.”두 시진 뒤에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었다면

  • 시간을 거슬러   제1094화

    그때 상대가 이상함을 눈치채면 후방 작전은 시작도 못 한 채 무너지고 만다.그 점을 생각해 서인경은 하나의 방책을 떠올렸다.*그날 밤, 서인경은 자신의 옷 한 벌을 꺼내 봉한설에게 내밀었다.“지난 1년 사이 많이 컸구나. 이제 키도 나랑 거의 비슷해졌어. 내 옷을 입고, 내 화장을 하고, 면사포까지 쓰면… 멀리서 보아도 쉽게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만약 싸움이 붙으면 어족의 기술을 조금 써서 연강호를 혼란스럽게 하거라. 최대한 시간을 끌면 된다.”봉한설은 임무의 무게를 느낀 듯 두 손으로 옷을 받아들었다.“황후 마마, 걱정 마세요. 반드시 신중하게 행동해서 최대한 늦게 들키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을 벌어드릴게요.”평이는 꼬막이를 안고 있다가 두 사람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덩달아 긴장했다.“황후 마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자신도 힘이 되고 싶었다.서인경은 그 순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너한테도 따로 맡길 일이 있다.”평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자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그녀를 단단하게 만들었다.“황후 마마께서 명하시면 반드시 해내겠습니다.”서인경은 한 장의 지도를 건넸다. 동쪽으로 팔십 리 떨어진 깊은 산림 지형도였다.그곳의 이름은 노무림. 그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홍주림이었다.지형은 복잡했고 지도 역시 몇 줄의 선으로만 간략히 그려져 있었다.서인경은 지도를 평이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병사 몇 명을 데리고 이곳에 가서 잠복해 있거라. 드나드는 사람들이 어떤 자들인지, 수상한 자는 없는지, 어느 정도 간격으로 나타나는지, 전부 기억해야 한다. 특히 다섯 살 이하 아이들이 드나드는지 반드시 확인하고. 갈 때는 거지로 변장하거라. 피난민처럼 꾸미고, 절대 신분을 들키면 안된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야. 반드시 제대로 해야 해.”연기준은 위치만 알아냈을 뿐, 그 안의 상황까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그를 따르든, 서인경을 따르든, 어느 쪽도 위험하기는

  • 시간을 거슬러   제1093화

    연기준은 자신의 친아들을 바라보았다.이 아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라나면 짊어져야 할 짐이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무거울지도 모른다는 것도.다만 그 책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아직 돌도 채 지나지 않은 아이인데.“좋아. 내일 아버지랑 같이 전장에 나간다. 무섭지 않느냐?”꼬막이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안 무섭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도와서 나쁜 놈들 다 때려눕힐 겁니다!”서인경은 차마 그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말리려는 순간, 연기준이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그 눈빛에는 분명한 뜻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가 언젠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길이다. 그리고 너도 느끼지 못했느냐? 우리는 이 아이를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다는 걸.”꼬막이는 또래 아이들과는 너무도 다른 점이 많았다.연기준은 그동안 그저 일불락의 혈통이 주는 특성이라고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서인경의 어린 시절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먹는 걸 좋아했고 놀기 좋아했으며 툭하면 울던 아이. 사람들과 다투기도 했고 군영에서 오래 지내며 몸을 단련한 뒤에는 장난기 가득한 소년처럼 변해 심지어 연기준과 싸운 적도 있었다.그녀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아이였다. 지금의 꼬막이처럼 비범함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이제야 깨달았다. 일불락의 후손이라 해서 모두 이런 건 아니었다.이 아이, 꼬막이만이 특별한 것이다.연기준의 가슴 한편이 조용히 조여왔다. 운명이 이 아이에게 무엇을 요구할지, 생각할수록 불안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지금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가르쳐야 한다. 특히 전장의 잔혹함과 생사의 무게를.서인경 역시 그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기에 더욱 제대로 알아가야 한다는 것도.꼬막이가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태어나기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일불락 유적 깊은 곳 그 온천에서, 꼬막이가 아니었다면 약왕곡까지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그 기억이 떠오

  • 시간을 거슬러   제1092화

    막 막사를 나서려던 맹경운은 장막을 들추려던 손을 조용히 거두었다.그래. 요동의 장수들을 상대하는 일이라면 그는 단 한 사람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일불락이라는 그 신비로운 곳이 얽혀든다면 얘기는 달라진다.예전에 들었던 그 기묘한 술법들이 떠올랐다. 오늘 서인경이 보여준 고술만으로도 자신을 꼼짝 못 하게 만들 수 있었다.여인을 전장에 내모는 건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진국의 황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막사 안.서인경 역시 연기준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연강호뿐만 아니라 후궁에서 도망친 단은설까지. 그 두 사람이 어떤 변수를 만들어낼지 모르니, 그게 가장 두려웠다.서인경의 표정이 가라앉자 연기준이 위로하려던 순간 옷자락이 살짝 당겨졌다.고개를 내리자,어느새 다가온 꼬막이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저도 아버지를 도와줄 겁니다!”연기준은 한 손으로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자기 팔 위에 앉혔다.“뭐라고?”꼬막이는 다시 한 번 진지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저도 아버지를 도와서 나쁜 사람을 때릴 겁니다!”서인경이 웃으며 말했다.“정말 엄마의 든든한 아들이네. 헌데 싸우는 건 어른들이 하는 일이야. 조금 더 크면 그때 전장에 나가자. 알겠지?”꼬막이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팔소매를 걷어 올렸다. 가느다란 팔을 드러내며 주먹을 힘껏 휘둘렀다.“저 혼자서 둘도 때릴 수 있습니다! 그 호... 뭐라고 하는 사람도 제 상대는 안 돼요!”서인경은 그저 장난으로 여기고 웃으며 받아주었다.“우리 꼬막이가 그렇게 강해? 이 어미는 왜 몰랐을까?”꼬막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잔뜩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여 할머니께서 말했습니다. 어머니한테는 말하면 안 된다고요. 그 호 아저씨가 어머니를 괴롭히면 그때 말하라고 했어요.” 그 말에 서인경과 연기준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서인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여 할머니?”꼬막이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설산에 있는 여 할

  • 시간을 거슬러   제1091화

    요동에서 학살당한 마을의 이름은 동욱촌.햇살처럼 밝고 아름다운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폐허로 변해 있었다. 눈에 들어오모든 풍경은 홍수에 휩쓸린 뒤 남겨진 재해뿐이었다.금수 대장공주는 화담 장소를 바로 그 동욱촌으로 정해 두었다.“언제나 기억하게 만들겠다는 거지. 진국의 병사들이 그들의 백성을 학살했다는 걸 말이야. 일부러 우리가 죄를 뒤집어쓰게 하려는 수작이다.”연기준이 화담을 받아들이자 금수 대장공주는 다시 한 통의 서신을 보내왔다.그 안에는 화담의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시간은 내일 정오. 장소는 동욱촌.서인경은 서신을 접어두고 연기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꼬막이와 축국을 하며 놀고 있었고 이 일 따위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은 듯 보였다.“동욱촌 학살 명령을 내린 위영과 그 일에 가담한 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연기준은 축국을 꼬막이에게 던져주고 아이가 공을 안고 멀어지는 걸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전부 비밀리에 감금해 두었다. 요즘 벌써 몇 차례나 자객들이 찾아왔어. 입막음을 하려는 거지.”그 말에 서인경은 별다른 놀람을 보이지 않았다.“우리가 위영 일당을 쥐고 있다면 그들을 내세워 죄를 뒤집어씌울 수도 있다. 그러면 금수 대장공주도 더는 트집을 잡기 어려워지겠지. 헌데 그들이 전부 죽어버리면 그 여자는 분풀이할 대상이 사라지니까, 오히려 더 대놓고 우리를 압박할 수 있어. 보니까 위영 일당도 이미 금수 대장공주에게 매수당한 게 분명하더구나. 이용할 만큼 이용하고 이제는 죽음마저 최대한 가치 있게 쓰려는 것이지.”자국 백성까지 죽일 수 있는 여자라니. 서인경은 새삼 그 여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내일, 위영을 어떻게 데려갈 겁니까? 연강호가 워낙 신출귀몰하니까, 괜히 사람을 데리고 나갔다가 그 자리에서 입막음 당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연기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위영은 데려갈 생각 없다. 그들을 살려두는 건, 전쟁이 끝난 뒤 공개 재판에 세워 진국의 배신자가 어떤 결말을 맞는지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 시간을 거슬러   제1090화

    서인경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그녀는 장 부장 곁으로 다가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의 갑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장 백부는 어릴 때부터 내 곁에 있지 않았느냐? 내가 사람을 속인 적이 있었느냐?”뜻밖의 다정함에 장 부장은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그는 서가군에 대한 충성이 깊었고 서 노장군을 아버지처럼 여겨왔다. 서인경을 보자마자 마치 제 딸을 보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그는 금세 설득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없지요. 황후 마마께서 무슨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마마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겉으로만 하는 말이었다. 누가 봐도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서인경은 그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장 부장은 그저 그녀를 달래고 있을 뿐이었다.서인경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셌다.셋, 둘, 하나.그 순간, 장 부장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몸에서 느껴지던 생기와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듯, 그는 텅 빈 눈으로 아무 기색 없이 서인경을 바라보고 있었다.서인경은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담담하게 명령했다.“가서, 저걸 먹거라.”순간, 장수들의 얼굴이 굳었다.장 부장은 아무 저항도 없이 의자 앞으로 걸어가더니 정말로 의자 팔걸이를 입에 물었다. 씹히지 않자 더 세게 물었고 이내 잇몸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이게… 장 부장, 대체 무슨 짓입니까?”“그거 놓으십시오! 그건 먹는 게 아닙니다! 제정신입니까?”“이상하네! 장 부장, 대체 왜 저러는 것인가?”“귀신 들린 것 같은데!”“설마 황후 마마의 말씀이 진짜였던 겁니까? 이게 바로 고충에 걸린 겁니까?”연기준은 한 손으로 꼬막이를 붙든 채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인경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서인경은 장 부장이 끝까지 물고 늘어질 기세를 보이자 충분하다 싶었는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은침 하나를 꽂았다.장 부장의 눈이 뒤집히며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서인경은 아무렇지 않게 은침을 거두며 말했다.“셋, 둘,

  • 시간을 거슬러   제601화

    서인경은 그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게 무슨 뜻인가?”맹은영은 오는 길에 맹경운이 해준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조목조목 얘기해 주었다.“단 가에는 자식이 셋 있습니다. 단여월은 대황자의 측비로 들어갔는데 다른 측비와는 늘 원수처럼 싸워댔지요. 한데 이상하게도 매번 밀리기만 하고 이기질 못했습니다. 그럼 단평안은요? 좋아하지도 않는 여인과 억지로 혼인한 것도 모자라 다리까지 다쳐 평생 일어설 수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단효산은 단평안에게 더는 기대하지 않고 이제 막 태어난 둘째 아들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 시간을 거슬러   제563화

    서인경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가 자신을 꼭 껴안게 내버려둔 채 귓가에 흩어지는 그의 뜨겁고 익숙한 숨결을 느꼈다.오랜 침묵 끝에, 연기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다.”그의 부주의함이 서인경에게 이토록 많은 고통을 안겨준 것이다. 그녀는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연기준이 잘못한 것은 없다고 느꼈다. 서인경은 천천히 돌아서서 두 손으로 연기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둘의 이마가 맞닿고 코끝이 스쳤다.“당신은 저한테 잘못한 게 없습니다. 이건 다 운명이 정해놓은 일일뿐이지요. 그러니 당신이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게

  • 시간을 거슬러   제562화

    예전에 서인경이 여러 번 화이를 요구했던 일을 연기준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이번에 아이를 낳는 그 순간에도, 그리고 일불락의 중대한 책임을 짊어진 때에도 연기준은 그녀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서인경이 그 일로 자신에게 원망을 품은 것은 아닌지, 혹여 다시 돌아올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지조차 그는 알지 못했다.연기준은 겉으로 태연한 듯 보였지만 망토 속에 감춰진 손은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단 한순간도 설산 입구를 떠나지 않았다.그는 너무도 그리웠다. 당장 서인경을 만나고 싶었다.곁에서 기다리던 연풍이 조심스

  • 시간을 거슬러   제595화

    “이 아이는 어느 댁의 자식이기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것입니까?”연기준이 살짝 다리를 들어 올리며 손끝으로 그 작은 덩어리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폐하의 열여덟째 공주다.”그는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공주가 이토록 어린데 돌보는 유모나 태감이 한 명도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아무리 돌려봐도 아이를 돌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인공산 뒤쪽에서 크고 작은 두 개의 머리가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연기준은 공주를 품에 안은 채 인공산을 돌아 그 둘 앞에 섰다.열다섯 째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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