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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3화

Author: 코코넛 서고
진가이는 온몸의 떨림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이번에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수를 써서라도 예정임과의 연결을 끊어내려 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 사실을 다시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예정임은 끝내 진가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요즘 그의 침상에는 하루도 여자가 끊이지 않았지만 진가이가 주는 자극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다.

그는 침상에 기대어 진가이의 머리를 눌렀고 진가이는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절정의 끝자락에서, 그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여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나는 상왕비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고 믿지 않는다. 가서 대황자를 떠보거라.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진가이는 고개를 들고 몸에 남은 흔적과 수치를 지워내듯 차분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폐하께서 아직 대황자를 경계하고 계셔서 오랫동안 입궁조차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팔황자께서 그가 더 많은 걸 알아내시려면 뒤에서 한 번쯤은 힘을 실어주셔야 할 겁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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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을 거슬러   제1115화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한 번이라도 터지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존재는 바로 화친 공주였다. 상대가 분풀이를 하듯 공주를 죽이거나, 전장 한복판에 끌어내 모욕을 주는 일. 그런 일은 역사 속에서 셀 수 없이 반복되어 왔다.금수 대장공주는 줄곧 믿어왔다. 아버지는 자신을 두 나라의 관계를 이어주기 위해 보낸 것이라고, 자신이 시집온 이상 양국의 관계는 굳건해지고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리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진국이 전쟁을 일으킬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그녀의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그녀에게 있어 가장 절대적이고 신과 같은 존재였으니까.이미 성조 선제와 함께 묻혀버렸어야 할 비밀을 연기준이 지금 이 자리에서 드러내고 말았다.금수 대장공주는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채, 눈빛이 흐트러졌다.“방금 네가 한 말은 전부 거짓이라고 하거라.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다.”연기준은 그저 연민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황고모께서 짐의 조건을 받아들이신다면, 즉시 그들에게 손을 멈추게 하겠습니다. 요동의 도성도, 영토도 지킬 수 있습니다. 다만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지요. 허나 황고모께서 이를 거부하신다면 요동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황고모께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진국군이 성을 함락시키는 속도는 결코 만만하지 않으니까요.”말을 마친 연기준은 그대로 돌아섰다.막사를 나서자마자, 등 뒤에서 찢어질 듯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연기준, 꿈 깨! 네 황후도, 네 진국군도 모두 도성에 묻히게 될 것이다! 넌 너무 일찍 기뻐한 거야! 하하하하!”연기준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대로 말을 몰아 떠났다.*그 무렵, 단은설과 그녀의 협력자들은 이미 모두 붙잡혀 있었다.다만 봉한설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저 사람들, 연강호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냐?”연기준은 나무에 묶여

  • 시간을 거슬러   제1114화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진국군은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 이미 도성 코앞까지 이르고 있었다.금수 대장공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분노에 휩싸여 외쳤다.“연기준, 감히 본궁을 속이다니!”연기준은 평온한 표정으로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황고모께서도 짐을 속이시지 않았습니까? 진국군을 기습하라고 보낸 자들, 모두 정예 중의 정예였지요. 다만 짐이 한 수 위였을 뿐입니다.”금수 대장공주는 발걸음이 휘청이더니, 넋이 나간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한참 뒤, 분노로 일그러졌던 얼굴에 억지 웃음이 번졌지만 눈동자 깊은 곳의 패배감은 끝내 숨기지 못했다.“좋다… 참으로 좋다. 역시 연도현이 눈여겨본 사람답구나. 그 아이보다도 네 재능이 훨씬 뛰어나구나.”연도현의 이름이 언급되자 연기준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흔적은 금세 사라졌다.“열셋 째 황숙의 체면을 봐서라도 짐은 황고모와 죽고 죽이는 지경까지 가고 싶지 않습니다. 요동은 사람을 보내 진국 땅에서 날뛰던 메뚜기 떼를 소탕하고, 백성들에게 평안을 돌려주십시오. 또한 요동의 황제와 황후는 재해 속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수만의 진국 백성 앞에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 혼령을 위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 다섯 곳을 내어주고 앞으로 십 년간 요동 사람은 단 한 명도 진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하십시오. 그러면 이 일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헛된 망상이다!”금수 대장공주는 반생을 바쳐 진국을 굴복시키려 해왔다. 그런데 마지막에 맞이한 결과가 고작 이것이라니.이대로 궁으로 돌아간다면, 요동의 백성들은 더 이상 그녀를 믿지 않을 것이고 요동 후궁에서도 그녀가 설 자리는 사라질 터였다.“헛된 망상이라고요?”연기준은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털며 돌아섰다.“그렇다면 황고모께서는 요동이 완전히 진국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날을 기다리십시오. 그때가 되면 황고모의 최후는, 지금 짐이 제시한 조건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입니다.”연기준은 더는 협상의 여지를 두지 않고

  • 시간을 거슬러   제1113화

    그곳에 이르게 되면 자신은 결국 주인의 짐이 될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차라리 진국 황궁으로 돌아가 주인을 대신해 태자를 목숨 걸고 지키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주인 곁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연풍의 마음은 더욱 아렸고 놓아주기 어려워졌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반드시 주인보다 먼저 앞에 나서겠다고, 설령 주인을 대신해 죽게 된다 해도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봉한설의 말은 분명 연풍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그 깊은 무력감은 오히려 그를 더욱 성실하고 치열하게 움직이게 만들었다.그 변화는 연기준뿐 아니라, 어린 꼬막이조차 눈치챌 정도였다.*다음 날, 부생이 그들을 데리고 단은설을 찾으러 가자는 이야기가 나오자 연풍은 유난히 적극적으로 나섰다.“폐하, 저를 보내주십시오. 반드시 단은설을 데려오겠습니다.”연기준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럴 필요 없다. 단은설 곁에는 연강호가 남긴 사람들이 있다. 너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한설이에게 맡기거라.”말을 마친 뒤, 연풍의 낙담한 표정을 보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한설의 무공이 너보다 약할 수는 있어도 일불락을 상대하는 데는 훨씬 능하다.”그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는 언젠가 반드시 설산으로 가게 될 날이 떠올랐다. 그곳에 이르면 자신은 진짜 아무 쓸모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연풍은 다시 한 번 깊이 무너져 내렸다.하지만 연기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억지로 따라간다 해도, 그저 짐이 될 뿐이었다.그때, 꼬막이가 그의 가라앉은 기색을 눈치채고 다가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연풍 형님, 저랑 같이 가요. 부탁할 게 있습니다!”연기준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또 무슨 생각이냐?”꼬막이는 신비롭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대신 친척 좀 만나러 가야 합니다!”연기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꼬막이를 연풍에게 넘겨주었다.“잘 지키거라.”자신에게도 아직

  • 시간을 거슬러   제1112화

    검은 옷의 사내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그는 방금 연기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설마 너희가 일불락의 원수가 아니라는 것이냐? 그럴 리가…”봉한설이 담담히 말했다.“왜 그럴 리가 없습니까? 그들은 일불락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당신이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손을 쓰라고 부추긴 그 자야말로 진짜 일불락의 가장 큰 원수예요.”검은 옷의 사내는 눈을 크게 떴다.“아니, 그럴 리 없다. 그는 분명…”말을 반쯤 꺼내다 말고 그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지금의 나는 그도 믿지 못하겠고 너희도 믿지 못하겠다.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내지.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이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을 거다.”그 말을 마치자마자 검은 옷의 사내는 꼬막이를 연기준 쪽으로 던져 버렸다.연기준이 몸을 날려 받아냈다. 꼬막이는 공중에서 한 줄기의 호를 그리며 날아가 그대로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겼다.검은 옷의 사내가 달아나려 하자 암위들이 즉시 장검을 뽑아 들고 그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그때, 꼬막이가 다급히 외쳤다.“아아아, 잠깐! 아프게 하지 마세요!”그의 말에 암위들의 손길이 순간 멈칫했다.그 틈을 타 검은 옷의 사내는 꼬막이를 깊이 한 번 바라보더니 곧바로 몸을 날려 자취를 감췄다.짧지만 소란스러웠던 소동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꼬막이는 큰일을 겪고도 무사히 다시 연기준의 곁으로 돌아왔다.아이는 뒤늦게 가슴을 두드리며 중얼거린다.“아이고... 아기 심장 떨어질 뻔했습니다.”연기준이 곁눈질로 그를 흘겨봤다.“아까 보니 꽤 침착하던데.”꼬막이는 연기준의 어깨를 끌어안고 온몸의 힘을 빼듯 축 늘어졌다.“그건 다 속인 겁니다. 사실은 정말 무서워서 죽을 뻔했거든요.”그 말투를 듣고서야 봉한설은 그가 크게 다치지 않았음을 알았다.“왜 암위들한테 잡으라고 안 했습니까? 그자를 잡으면 줄기를 따라가서 뒤에 있는 가문까지 찾아낼 수도 있었을 텐데요

  • 시간을 거슬러   제1111화

    검은 옷의 사내는 잠시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연기준이 이렇게까지 빠르게 정답에 다다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순간, 그의 눈빛이 비통하게 일그러졌다.“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수령의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원수가 대대로 고통받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어느새 암위들이 조용히 그의 등 뒤로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연기준은 곁눈질로 그 움직임을 확인하고는 다시 시선을 거두어 오직 검은 옷의 사내만을 똑바로 응시했다.“너와 네 뒤의 가문은 여전히 일불락 수령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 헌데 선과 악도 가리지 못하고, 옳고 그름도 분별하지 못하지.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고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가린 그자가 바로 일불락 수령의 가장 큰 원수다.”그 말에, 검은 옷의 사내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입을 떼지 못한 채, 그저 눈을 크게 뜬다.“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그의 주의력은 온전히 연기준에게 쏠려 있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단 한마디라도 더 알아내고 싶다는 듯 초조하게 매달렸다. 그 탓에 손에 들어간 힘도 어느새 느슨해졌다.꼬막이의 목을 조이던 압박이 조금씩 풀리자 아이는 급히 숨을 몰아쉬며 몇 번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뒤에야 겨우 숨을 돌렸다.그러고는 아직 어린 목소리로 연기준의 말에 힘을 보탰다.“우리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여 할머니께서 그러셨거든요. 얼굴도 못 드러내는 그 사람은, 사람들 앞에 나설 낯이 없는 거래요. 일불락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얼굴만 보면 당장 죽여버릴 만큼, 대대로 잊지 못할 원수라고 했습니다.”여 할머니?검은 옷의 사내의 표정이 더욱 기이하게 일그러졌다.“어느 여 할머니를 말하는 것이냐?”꼬막이는 여전히 숨을 고르며 목을 매만졌다.“그냥 설산 안에 사는 그 여 할머니요! 입가에 검은 점 있는 그 할머니 말입니다!”그 순간, 검은 옷의 사내의 온몸이 굳어 버렸다.설산의 여 할머니라니?여족? 설장로? 입가의 검은 점…이 어린아이가 정말로 설장로를 안

  • 시간을 거슬러   제1110화

    말을 마치자마자 봉한설은 즉시 몸을 날리며 한 줄기 바람처럼 순식간에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뒷산.이미 연기준과 암위들이 검은 옷의 사내를 따라잡은 상태였다.그때쯤 꼬막이도 깨어났지만 사내의 어깨에 들려 있으면서도 조금도 겁을 먹은 기색이 없었다.까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다가 연기준이 따라붙은 것을 보자마자 양팔을 흔들며 외쳤다.“아버지! 저 여기 있습니다!”그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연기준도 이렇게 빠르게 위치를 특정하진 못했을 것이다.그 순간, 검은 옷의 사내는 꼬막이를 어깨에 멘 채 연기준을 경계 어린 눈빛으로 훑어보았다.“생각보다 빠르게 따라붙었군. 진국의 황제라더니, 듣던 것보다 훨씬 영리하네. 일불락 수령 일족의 후예라던데 사람 보는 눈은 그 조상보다 훨씬 낫군.”연기준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눈동자는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넌 일불락의 후손이구나.”물음이 아니라 단정이었다.“어느 부족 출신인지 밝혀라.”검은 옷의 사내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나를 이기면 그때 알려주지.”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순간, 공기 속에 수없이 많은 빙능이 맺혀들었다.날카로운 얼음조각들이 일제히 연기준을 향해 쏟아졌다. 연기준은 가까이 있던 암위의 검을 뽑아 들고 내력을 끌어올려 검을 휘둘렀다.앞뒤에서 부딪히는 힘에 의해 빙능은 공중에서 산산이 부서졌다.그 반동으로 검은 옷의 사내는 내력이 역류하여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그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너... 목족 무공을 쓸 줄 아는 것이냐?”그 말에, 연기준 역시 순간 멈칫했다.방금 그가 사용한 내력은 어릴 적 연도현이 가르쳐준 것이었다.그때는 그저 일반적인 내공보다 깊고 강하다고만 여겼을 뿐이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연도현은 이미 그의 출생을 알고 일찍이 일족과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일지도 모른다.연기준은 낮게 말했다.“아이를 놓거라. 같은 일불락의 후손이라면 서로 죽일 필요는 없을 텐데.”검은 옷의 사내는 잠시 놀란 기색을 보였

  • 시간을 거슬러   제444화

    “도둑?”어느 미친 도둑이 감히 장군부 안으로 들어오겠는가?시위들이 의아해하자 단안은 오히려 성질을 냈다.“다 너희들 탓이다. 내가 내 몸 하나 못 지킨다고 했더냐? 괜히 몇 겹으로 순찰을 돌리니 밖에서 보기엔 이 뜰 안에 무슨 희귀한 보물이라도 숨겨둔 것처럼 보이지 않겠느냐? 눈독 들이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겠다.”시위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 눈앞의 노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했다.“예… 그럼 물러가겠사옵니다.”“이놈들아!”단안이 그들을 다시 불러 세웠다.“뭐하러 멀뚱히 서 있느냐? 어서 도둑을 잡으러 가지 않고!

  • 시간을 거슬러   제419화

    연기준은 미간을 바짝 좁히며 결코 그녀를 놓아주고 싶지 않아 했다.“너는 정말로 본왕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서인경의 가슴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그토록 품어왔던 환상과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탓이었다.왕부에서 아이를 기르며 머무는 시간 동안, 그녀는 한때 진심으로 연기준을 믿었었다. 그러나 지금의 모든 것은 마치 전생과 한 치도 다르지 않게 되풀이되고 있었다.만약 전생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높은 담장 안에 갇혀 마지막 이별조차 하지 못하는 일만은 피하리라.그녀는 연기준의 품을 매몰차게

  • 시간을 거슬러   제439화

    언뜻 보니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었다.그 사내아이는 얼굴 윤곽이 연기준을 닮았지만 눈매와 입술선에는 서인경의 그림자가 스며 있었다. 두 사람의 흔적이 그대로 섞여 빚어진 작은 조각상 같았다.그의 머리에는 양 갈래로 작은 머리 뭉치를 묶어 올린 두 개의 꼬마 솜방울이 달려 있었고 두툼한 솜옷을 껴입어 마치 섣달그믐날의 복덩이 아기처럼 포동포동했다.작은 손에는 빨대를 꽂은 꼬막우유(旺仔牛奶: 1996년에 대만에서 상시한 우유)가 들려 있었고 아이는 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그 우유를 빨고 있었다.서인경을 본 순간, 꼬마의 눈이 별처럼

  • 시간을 거슬러   제440화

    어쩐지 그 말투가 마음에 걸렸다.아이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으나 그 속엔 철부지답지 않은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마치 어미가 힘을 내지 못하니 뱃속의 아이가 스스로 나서서 자신을 지켜야 된다는 듯한 태도였고 어린 생명이 짊어지지 말아야 할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이제 겨우 콩알만 한 태아가 이렇게 꿈속에서 그녀와 말을 나누고 있다니.서인경은 사방을 둘러보았다.“여긴 바깥이잖니. 만약 누가 오면 어찌 하느냐?”꼬마는 태연히 대꾸했다.“올 리 없습니다. 여긴 일불락의 옛터라 벌써 눈 속에 묻혀버린 곳이거든요. 여길 오려는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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