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리하르트는 다리를 꼰 채 비스듬하게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문소리에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하! 이미 내가 온 거 알고 있으면서 눈도 안 뜬다고?’ 거만한 모습에 기분이 팍 상했다. 파혼장에 황가의 도장마저 찍힌 마당에 더 이상 ‘예의를 차린 약혼녀’ 역할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수틀리면 당장에 ‘하트먼 기사단장 에스텔’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크흠!” 작게 헛기침 소리를 내 도착했음을 알렸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었다. 응접실로 들어온 것이 내가 아니라 다른 여인이었다면 대번에 눈을 뜨고 일어나 그 여인을 희롱했을 것이다. 황실의 명령으로 ‘진심 어린 사과’를 하러 온 주제에 아무리 그 ‘진심 어린 사과’에 진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무시하다니. ‘그렇다고 기죽을 줄 알고?’ 나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베딘, 돌아가지.” 리하르트는 내가 응접실을 나가려 하자 그제야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많이 변하셨군요, 소백작. 나는 그대가 여전히 얼굴을 붉히던 소녀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허튼소리. 리하르트 벨테레브, 나한테 사과하러 온 거 아니었습니까? 사람이 온 걸 알면서도 무시하는 게 사과하는 태도 맞습니까?” 날 선 시선에도 리하르트는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는 정말이지 천사 같은 외모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그러나 그뿐이다. 나는 저 천사 같은 모습 안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을 알고 있다. 그의 본모습은 자신보다 적게는 일곱, 많게는 열 살의 연상까지 주무르고 희롱하는 난잡함의 덩어리다. 다행이라면 내게만은 그 더러운 입맛이 돌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우리 둘 사이는 미지근한 기억과 더럽혀진 세월, 겨우 그것뿐이었다. 리하르트는 능글맞은 미소를 유지했다. “저는 고결하고 오만한 당신이 싫었습니다. 답답할 정도로 감춰놓은 지금 당신 옷차림처럼.” 손가락이 내 가슴께를 향했다. 그러나 그 손가락이 내게 닿을 일은 없었다. 탁! 까만 레이스 부채로 그의 손가락을 강하게 쳐냈다. “뭐 하는 짓입니까. 손가락이 이제 더는 필요치 않으신가 봅니다.” 날카로운 반응에 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럴 리가요.” 리하르트는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소파로 털썩 내려앉았다. 외모로 수작을 부리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 저열한 속내가 훤히 읽혀 불쾌했다. 나는 그가 몰고 온 끈적한 공기를 떨쳐내려 장갑 낀 손을 가볍게 털어냈다. “장난은 끝났습니다.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시면 황실에서 지정한 금액의 5배를 물게 될 겁니다.” 리하르트는 뭐가 그리 웃기는지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크큭, 푸후후흡!” 그의 웃음소리에 눈썹이 움찔 반응했다. 한참을 웃던 리하르트는 몸을 기울여 장난과 비아냥이 섞인 도발을 했다. “내 취향을 아시지 않습니까, 에스텔. 나는 다른 사내의 여인에게만 흥미가 동합니다. 제게서 벗어나시겠다니, 오히려 제 관심을 끌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가까워진 거리에 진한 초콜릿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불쾌감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개소리가 제법 길군요. 처음부터 당신의 그 천박한 관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답니다. 오늘 사과할 생각이 없으신 것 같으니, 다시 날을 잡아 오시거나 위자료의 5배를 뱉어내시지요. 아, 덧붙이자면.” 나는 부채 끝으로 리하르트의 단정한 턱끝을 툭 밀어 올리며 서늘하게 속삭였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그 더러운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위자료를 받기 전에 그 잘난 혓바닥부터 뽑아버릴 테니 명심하시길.” 리하르트는 우습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화사하게 미소지었다. “파혼장에 인장이 모두 찍힌 뒤 취하하는 방법을 아십니까? 파혼 조건이 완성되기 전에 우리가 결혼하는 것이랍니다. 이렇게 사과를 미루는 사이에 우리가 결혼하게 된다면 그 어떤 것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그 뻔뻔한 낯짝에 화가 치밀었다. 리하르트는 킬킬거리며 귓속말을 속닥이고 응접실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고, 그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낮고 끈적한 목소리가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 오만한 입술이 남기고 간 끔찍한 속삭임이. “그럼, 다음에 뵐 땐 침대 위에서 뵙지요, 소백작님.” * * * 리하르트의 따귀라도 쳤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로 얼굴을 구기고 응접실에서 나오자 복도 여기저기를 부산하게 뛰어다니는 시종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의 백작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소란이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베딘, 무슨 일인지 알아봐.” 집사장은 사용인 복도로 진입하려는 시종 하나를 붙잡아 상황을 확인했다. 시종과 베딘의 대화가 언뜻 귓가에 스쳤다. “출정…… 기사단이 돌아왔…….” 기사단이 돌아왔다는 소리가 들리자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것도 잠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깨닫고 얼굴이 굳어졌다. 아버지는 분명 서남부 평야의 문제를 해결하고 영지 시찰을 할 계획이었다. 못해도 세달이 걸릴 여정이었다. 그런데 불과 반나절 만에 백작저로 되돌아왔다는 것은 뭔가 큰 일이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떨리는 심정으로 복도를 벗어났다. 그 순간, 멍하게 서 있는 리하르트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하—. 저 인간은 왜 돌아가지도 않고 어슬렁거리고 있어?’ 왜 아직 백작저를 벗어나지 않았는지 짜증이 밀려왔다. 입구를 막고 서 있는 그를 거칠게 밀쳐내며 괜한 쓴소리를 뱉었다. “길 막지 말고 비키ㅅ……!” 말문이 턱 막혔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피가 차갑게 식는 것만 같았다. 분명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던 날이었다. 어젯밤 다수 올라온 경작지 이상 보고를 받았을 때도, 아침 출정식에 손을 흔들며 배웅하던 때에도 큰 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엔 웃으며 백작저를 떠났던 기사단이 피를 흘리고 서로서로 부축해 가며 되돌아오고 있었다. 일부는 들것에 실려, 또 일부는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된 채로. 문 앞에는 내가 가장 아끼는 여기사 로레나가, 팔이 반쯤 뜯겨 나가 덜렁거리는 상태로 피를 떨구며 서 있었다. 불현듯 뇌리에 아버지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불이라도 붙은 듯 타올랐다. “로레나! 백작님은?” “으으…….” 로레나는 짐승에게 잡아 뜯긴 듯한 팔을 부여잡은 채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애먼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우물거리는 대답 따위는 상관없었다.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저 멀리, 로던이 절뚝이는 다리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늦은 보고를 탓할 상황이 아니었다. 다리를 저는 그를 부관으로 보낸 것이 후회됐다. “젠장!” 나는 다급하게 리라와 하녀장을 불렀다. “리라, 하녀장! 가서 소독약 비치된 거 전부 들고 연무장으로! 부족하면 증류주 도수 높은 거 전부 가지고 와. 붕대랑 약초도! 붕대 부족하면 침구, 커튼도 전부 뜯어 와!” 멍하게 서 있던 하녀장과 리라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하르트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여전히 입구를 막고 서 있는 것을 보곤 다시 인상을 구겼다. 문 앞을 막고선 그를 거칠게 밀쳐냈다. 아직 백작가에 남아 있는 것도 불쾌한데 문 앞을 막고 서 있는 그가 괘씸했다. “비키시죠! 걸리적거리지 말고!” 그를 지나쳐 로레나에게 다가갔다. 그녀에게서 피 냄새와 풀잎의 냄새, 오물을 뒤집어 쓴것 같은 악취가 동시에 풍겼다. 한번도 맡아보지 못한 끔찍한 냄새였다. “윽!” 당장은 멈추지 않는 피부터 어떻게 해야만 했다. 뜯겨나간 팔을 지혈하려면 깨끗한 천이 필요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계절에 맞지않게 껴입은 내 드레스 뿐이었다. “하⋯⋯.” 노출을 줄여보고자 껴입은 드레스가 이런 쓸모를 갖게 될 줄이야. 나는 리하르트 옆에 서있던 호위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순식간에 빼 들었다. 검을 뺏긴 기사는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어안이 벙벙한지 ‘어어어어?’ 하는 소리만 연신 내고 있을 뿐이었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드레스 자락을 찢어내 긴 조각과 작은 조각으로 나누었다. “이 꽉 깨물어 아플 거니까.” 로레나의 입에 작은 천 조각을 구겨 제갈처럼 물렸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용맹한 나의 하트먼 기사가 어쩌다……. 뜯겨서 덜렁거리는 팔을 억지로 맞붙여 드레스 자락으로 동여매자 로레나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흐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에 애꿎은 입술만 짓씹었다. 그러나 더 해 줄수 있는것이라곤 없었다. “조금 기다리면 의사가 올 거야. 그때까지는 지혈이라도 해야 하니까 참아. 영지전이야? 어떤 가문이야? 문장 봤어? 어떤 멍청한 자식들이!” 솔직히 습격에 가까운 영지전을 벌였다 해도 하트먼의 기사들을 만신창이로 만들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가정이었다. 영지전을 일으켜 하트먼을 감당할 만한 곳을 따지자면 벨테레브와 에네스트, 시온뿐이었고 성군을 표방하려 애쓰는 황제가 예고없이 벌어진 영지전을 두고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감히 하트먼의 기사들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을만한 것이라곤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대답할 틈도 없이 질문을 쏟아내는 동안 로레나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끙끙댔다. 억눌린 신음의 끝에 로레나는 간신히 입을 열어 더듬거리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괴, 괴물이에요. 괴물! 여기저기 뼈가 튀어나와 있고 파란색 몸에 여기저기 문드러져 있는데 괴상망측한 괴물입니다. 브렛이…… 로랑이!” 겨우 말을 이어가던 로레나의 눈알이 뒤로 휙 까 뒤집어 졌다. 결국 까무러치는 로레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누이고 마구간 쪽으로 미친듯이 뛰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절대 부하들을 두고 도망치지 않는다. 기사단을 물리고 끝까지 남아 퇴로를 지키는 것이 바로 하트먼 백작의 주특기였으니 아직 괴물들의 앞에 서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시라도 빨리 아버지께 가야 했다. 마구간을 앞두고 구두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져 놓았다. 높은 굽을 신고 뛰는 것보다는 맨발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마구간 옆에서 건초를 쌓아올리던 마구간지기 한스가 눈에 들어왔다. “한스! 프레에라 데려와! 당장!” 다짜고짜 고함을 지르는 모습에 한스가 놀라 얼어붙었다. “아, 아가씨? 그 차림으로 말을 타시려고요?” 아버지가 다칠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줄 수 없었다. 조바심이나 맨발로 마구간에 들어가려는 찰나, 탁! 리하르트가 팔을 낚아챘다. “에스텔, 뭐 하시려는 겁니까?” 감히, 조금이라도 빨리 병력을 통제해 아버지께 가야 하건만! “소공작, 이거 놓으십시오.” 팔을 빼내려 했으나 아귀힘이 어찌나 단단한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를 노려봤다. 그러나 그는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평소의 그 능글맞은 장난기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오히려 미간을 구긴채 흥분한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타이르고 있었다. “못 놉니다. 여기사가 하는 말 못 들으셨습니까? 감정적으로 나섰다가 봉변이라도 당하시려고요?” 진지하고 서늘한 눈빛이 마치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았다. 평범한 사람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위압감이었다. 검제(劍帝)라 불리는 그를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물러설 수 없었다. “제가 봉변을 당하든 개죽음을 당하든 상관없잖습니까!” “우리 아직 파혼 전입니다. 제 약혼녀가 비명횡사하게 둘 수는 없지요.” “하! 그게 무슨!” 약혼녀라니. 5년 간의 약혼 중에 그가 나를 약혼녀라 칭한 것이 오늘이 처음이라는 것을 알까. 그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전장귀 로던이 다리를 절며 뛰어왔다. 평소라면 리하르트에게 목례라도 할 법 하건만 그가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인지 눈길이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엄습하는 불안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로던은 지팡이를 내려놓고 바닥에 엎드린 채 울부짖듯 고했다. “아가씨! 백작님께서 다치셨습니다.” “!!”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에필로그 ) 왜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파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진심어린 사과’라니. 해럴드의 작품임에 틀림없었다. 다시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하게되더라도 에스텔을 마주 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백작의 부상을 통보받은 에스텔의 손이 사시나무떨듯 떨렸다. 에스텔이 이토록 동요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었던가. 가슴이 지끈거렸다. 이것이 과연 우연히 일어난 일일까. 이것이 계략이건, 우연의 산물이건 맨발의 그녀가 흑빛이 되어버린 안색으로 거친 흙바닥을 걷게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언젠가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평생을 약속하게 되리라 꿈꾼적도 있었건만. “높은 구두보다는 나을 겁니다.” 나를 힐끔 돌아보는 그녀의 눈길엔 온기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불현듯 이것이 어쩌면 나의 아버지, 벨테레브 공작의 소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다급하게 손을 들어 호위 기사 레이를 불렀다. 레이가 쏜살같이 옆으로 와 예를 갖췄다. “레이, 무슨 일인지 알아봐. 은밀하게.” “예, 소공작님.” 비참하게도 이 순간 가장 의심스러운 자가 내 핏줄이라니. “이것이 빌어먹을 벨테레브의 소행만은 아니길…….”“레이야!” 내 다급한 부름에 문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짐승이나 다름없었던 리하르트가 내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레이야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울먹거렸다. “세상에, 도련님이 잠드셨잖아!” 하녀 하나가 내 옆으로 다가와 손짓을 섞어가며 물었다. “세상에, 부인, 뭘 하신 거예요? 대체 무얼 어찌하신 겁니까. 저희가 열 명이 넘게 달라붙어도 제어하지 못했는데…….” 시종들의 혼란스러운 눈빛에 그간의 팽팽했던 긴장이 무너지며 허탈한 헛웃음이 흘렀다. “아무 짓도 안 했어. 소공작은……그저 제 풀에 지쳐 잠들었을 뿐이야.” 내 대답에 사용인들의 눈이 존경심으로 반짝이는 것이 훤히 보였다. 레이야가 먹먹해진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내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차를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레이야는 내 손을 쓰다듬었다. 손길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리하르트를 힐끔 돌아봤다. 짐승처럼 헐떡이던 숨이 안정되고 있었다. 사용인들은 익숙한 듯이 움직였다. 의연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니 이런 상황을 여러차례 겪었을 것이다. 리하르트가 했던 말을 천천히 떠올렸다. 내성이 있다고 했던 말은 아마 거짓일 것이다. 레이야가 따뜻
대본성의 공작 부인 전담 시녀가 꽃꽂이 중인 공작 부인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공작 부인은 분노에 휩싸여 꽃 머리가 잘려 나가는 것도 모르고 가위질을 계속했다. “하하하. 리하르트가 왜 이렇게 속을 썩일까?” 알렉시스와 황제가 기사단에 심어놓은 끄나풀은 고작 여섯. 그중 두 명이 식을 올리기도 전에 리하르트 손에 죽임을 당했다. 하트먼 영애의 침실을 훔쳐보았다는 사유였다. 공작 부인은 남은 끄나풀들의 근무 일정을 조정하기 위해 부 기사단장에게 엄청난 돈을 쏟았다. 그렇게 겨우 끄나풀을 첫날밤 아비스에 밀어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네 명이 모두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공작 부인은 전지가위를 바닥으로 내던지며 물었다. “그래서 소공작이 기사들을 처리한 사유가 뭐라고 하더냐?” “소공작 독살 미수 혐의입니다. 소공작께서 직접 처단하셨고, 목숨에 지장이 없다고는 하나 독을 대량 들이마셔서 현재는 상태가 매우 좋지 못하시다고 합니다.” “고작 그런!” 리하르트는 최음향으로 앓고 있는 것을 독살 미수로 교묘하게 바꿔 끄나풀들을 전부 해치워버렸다. 공작 부인은 증오심이 깃든 그 파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어린 시절의 리하르트를 떠올렸다. “하……. 네가 구원해야 할 건 프레드잖니, 리키.” 으그극! 공작 부인의 손아귀에 꽃봉오리가 잔인하게 으스러졌다. 전담 시녀가 공포감에 손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늦은 밤, 소공작의 주도로 아비스의 호위가 한차례 바뀌었다. 그 후 온통 검은색으로 칠한 듯한 사람이 드디어 아비스 별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비스 별관을 지키던 사용인들은 이미 언질을 받아 익히 알고 있었다. 까만 가면에 까만 로브,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통 까만 차림의 사람이 아비스로 온다면 그건 틀림없이 프레데릭 공자라는 것을.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신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침실 문을 열자 실신해 있는 에스텔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얼굴에 늘어붙은 적갈색 가발을 벗어 까만 가면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활짝 열린 창으로 스며든 한기에 서늘해진 침실의 온도가 그제야 피부에 와 닿았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그녀의 옆에 누웠다. 에스텔은 옆에 다가온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온통 땀투성이에 비정상적으로 빠른 맥박, 높은 체온. 프레드는 지독한 열병을 앓는 그녀를 안으며 죄책감에 미간을 구겼다. 리하르트가 발 빠르게 사람을 보내온 것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끔찍한 상황을 제때 알지 못했을 것이다. ‘리키도 지금쯤 제정신이 아닐 텐데…….’ 프레드는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뒤 황제와 공작의 첩자들을 직접 청소하고 있을 리하르트에게 잠시나마 깊은 감사를 느꼈다.
쨍그랑!!손에 들린 잔이 바닥으로 힘없이 곤두박질쳤다.잔을 떨어뜨렸음에도 손이 처참할 정도로 떨렸다. 구석구석 예민한 곳까지 일깨우는 듯한 열감이 분노를 만나 순식간에 온몸을 집어삼킨 탓이다.흘러내린 독주에 치맛자락이 볼품없이 젖어 들었다.리하르트의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에스텔?”예민해진 감각은 작은 움직임조차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도발로 다가왔다.‘정신 차려야 해.’나는 바닥에 흩뿌려진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 날 선 고통으로 이 지독한 혼미함을 떨쳐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얼마 전 허벅지에 생긴 상처를 떠올렸다. 아문 지 얼마 안 되었으나 그 연한 살을 헤집는다면 그 어떤 곳보다 강한 고통을 줄 것이다.깨진 유리 조각을 향해 힘겹게 한 발짝 내디뎠다. 눈앞이 일렁이고 어지러웠다. 몸이 비틀, 하고 크게 휘청이자 어느새 다가온 리하르트가 내 허리를 단단히 휘감았다."하아…… 미치겠군. 당신의 그 가혹한 취향에 장단을 맞춰주기엔, 내 인내심이 그리 훌륭하지 못해서요."그의 뜨거운 입김이 목선을 타고 올라와 귓불을 아찔하게 스쳤다. 평소라면 기겁하며 그를 경멸하고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옷자락을 꽉 쥔 채 입술 틈새로 미처 다 삼키지 못한 야릇한 신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스루삐입니다. 한가위 명절을 맞이하여 연휴기간 업로드분을 선행하여 21~23일 총 3일간 연참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기간 : 9월 21~23일 (총 3일)대상 회차 : 22~27회차 (총 6회차)업로드 방식 : 1일 2회 연속 업로드정상 연재 복귀일 : 27일 연참은 본 연재 시간이 아닌 오후 6:03~6:05분에 업로드 되며 2회차분이 연속 업로드됩니다. 연참 이후 3일간 휴재, 27일부터 오전 6:41분에 정상연재 됩니다.풍요로운 한가위 보내세요 :)스루삐 올림.
“고, 공작 부인!” 잔뜩 상기된 얼굴로 공작 부인을 불렀다. 내 자존심을 짓밟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어떻게 똑같이 자기 뱃속으로 낳은 쌍둥이 아들에게 동생의 여인을 취하라고 말할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사고방식에 한마디하려는 찰나, 리하르트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만류했다. “공작 부인께서 아우 내외를 걱정하는 마음이 이리 깊으실지 몰랐습니다. 저 또한 아우가 소중하답니다. 걱정할 일은 만들지 않겠습니다. 들어가 쉬시지요.” “리하르트 벨테레브! 후—. 벨테레브는 손이 귀하다는 걸 명심하세요. 내 첫째 아드님 또한 결국엔 벨테레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공작 부인은 다시 서릿발이 날릴 것 같은 목소리로 경고하고 뒤돌아섰다.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리하르트의 팔을 거칠게 쳐냈다. “설마, 공작 부인의 명을 따르려는 건 아니겠죠?” “아마 이 공작저에 있는 모든 사람 중 그대의 티아라를 벗겨줄 사람은 저뿐일 겁니다. 제가 끝내 거절한다면 공작이 이 자리를 대신할 테니까요. 이 공작저에 남아 있는 벨테레브라곤 저와 아버지 둘뿐이니까요. 그래도 한때나마 약혼자였던 사람이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네? 그게 무슨!” 미치지 않고서야. 말도 안 되는 모욕이었다. 손이 귀한 벨테레브의 혈통을 잇기 위해서 나를 출산 도구처럼 사용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에겐 내 몸속에 자리 잡을 아이가 벨테레브의 피를 이었다면 그 아비가 누구든 상관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공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