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낮은 창가로 부드러운 햇빛이 길게 내려앉았다.따뜻한 커튼 틈 사이로 바람이 밀려들며 잔잔한 물결같이 먼지를 일으켰고,하연은 그 바람의 흐름에 따라 시선을 한참동안이나 고정해놓고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카페 한쪽, 조용한 구석 자리.취업 준비 스터디 그룹의 사람들이 모여 앉은 긴 테이블 위에는 두꺼운 취업 준비 교재들과 노트북, 그리고 녹아가는 얼음들만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들이 놓여 있었다.그 사이에서 하연은 말없이 주고받은 대화들을 적은 메모를 축약하며 정리하고 있었다.그녀의 눈동자는 또렷했고, 손끝은 정갈하게 움직였다.공책 위의 글씨들은 가지런했고, 말 한마디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하연 씨, 다음 면접 예상 질문은 이거예요.”옆자리 여학생이 질문지를 넘기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연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표를 준비했다."흠, 흠."목소리는 차분했고, 또렷했다.모두가 귀 기울이게 되는 톤이었다.“사실 예상 질문이나 그에 따른 답변을 떠올리기보다는 먼저 면접에 대해 각자의 시선으로, 각자의 경험에 빗대어 이해하려하는게 더 시급한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할 때 면접이라는 건 결국 심사관이 물어보는 질문에 답하는 기술이기 이전에,내가 생각했을 때, 내가 진짜 누군지를 스스로 정확히 말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거라고 생각 하거든요.내가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준비되어 있다면 어떤 질문을 받아도 나의, 나만의 생각을 말 할 수 있는 것일 테니까요.그러니까.. 면접 준비라는 건 나를 제대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인 거죠. 사실 살면서 자기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굳이 명상이나 나를 찾는 여행, 이런 거창하고 어려운 거 말고도 방법은 많다고 생각해요. 자기 전 5분씩이라도 폰 없이 멍하니 생각하기라던지, 뭐 그런 걸로요.”그 말을 들은 스터디원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막, 엄청 대단하다는 반응은 아니었지만, 인정과 존중이 섞인 무언의 시선들이 테이블 위에 쌓여갔다
다음 날.지원은 하연을 데리고 모델하우스를 찾았다.주말마다 열리는 분양 상담, 전단지에서 본 그 아파트였다.별다른 말 없이 데려왔지만, 하연은 금세 눈치를 챘다.“언니. 우리.. 여기 왜 왔어요?”지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웃었다.“그냥, 뭐.. 구경.꼭 여기가 아니어도 좋아...우리 둘이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산다는 상상.. 한 번쯤 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어색하게 표정이 굳었다.그러면서도 입꼬리는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고요한 모델하우스 안.아직 사람이 많지 않은 오전이라, 둘은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다.햇살이 흩날리는 주방, 넓지 않지만 온기가 깃든 거실,서로의 체온이 섞일 것 같은 침실.“이 방엔 언니 책상이 있겠네요.아니다, 아예 엄청 큰 책상 갖다두고 같이 작업실로 쓸까요? 컴퓨터도 두 개 사고?”하연이 말했다.지원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너 과제 팽개치고 딴짓할 때마다 내가 옆에서 잔소리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그건.. 언니가 항상 나 겁나 열심히 과제하다 잠깐 쉴때마다 방에 들어와서 그래요. 내가 얼마나 모범적인 대학생인데.”농담 같지만, 그 말들에는 분명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서로의 개인적인 일상이 아닌, 서로와 함께 하는 일상을 상상하는 대화는,그 자체로 사랑이 샘솟는 방식이었다.하지만 모든 사랑이 그러하듯,현실은 늘 조용히 사랑에 균열을 만들어냈다.*그날 저녁.하연은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외출했다.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지원은 오랜만에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업무 외에 지원과 가끔 연락하는 유일한 친구였다.“너, 요즘 많이 바쁜가 보네.""..회사 일 때문이지, 뭐. 요새 신경쓸 것들도 많아지고.""아, 그리고.. 그.. 하연이는 잘 있니? 인스타 보니까 이제 어른스럽고 예쁘더라.”지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응, 잘 지내.”“다행이네. 근데.. 그 애, 너한테 너무 의지하는 것 같아서. 대
“하연아.”지원은 말없이 앉아 있는 하연의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말 한마디 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하연은, 손에 식은 커피를 쥔 채 옆에는 식탁 위에 놓여있던 메모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지원의 필체로 조심스레 또박또박 적혀 종이에 깊게 눌린 말. 미안하지만, 시간을 더 달라는.결국, 저번과 하등 다를 것 없는 말.하연에게 어른스러움이란 결국 도망치고 숨는 거란다, 라고 치부를 밝히는 듯한 느낌에 지원은 마음 한켠이 턱하니 막힌 기분이었다.하연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지만 두 눈이 장마철 먹구름처럼 몰려온 감정 탓에 흐렸다.지원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단어 하나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지는 사이, 하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약속할 수 있어.내가 더 나아질게.더 나은 사람이 될게...부탁해.”지원의 말은 계획 없이 흘러나온 게 아니었다.밤새 뒤척이며 수십 번, 수백 번 마음속에서 다듬었던 문장.무너지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사랑이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가장 처음의 말.“무작정 기다리게만 하지 않을 거야. 우리라는 말이 무겁다는 거, 나도 알아. 그래서 더 천천히, 정확하게 가고 싶었어. 느리게 갈지언정 틀린 길을 가지는 않게, 그게 너를 힘들게 한다는 거 알고 있지만.. 이게 부족한 나의 최선인 것 같아.”하연은 고개를 돌려 지원을 바라보았다.같은 무표정이었지만.. 같지 않았다. 오히려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그 눈빛에는 단순한 서운함만 있는 게 아니었다.기다린 만큼 상처가 생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손을 놓지 않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복잡한 감정들이 엉켜 있었다.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솔직히 말하면요. 나는 영원히라도 기다릴 수 있어요. 다만, 언니가 정말 나를 따라오고 있는지,아니, 나랑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정도만 느낄 수 있으면 돼요.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죠?”그 말은 마치 실낱같은 희망처럼, 둘의 사이에서 공기에 감돌았다.지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의자를 돌려 하연을 향해 앉는 지원.“..그게 무슨 말이야?”지원이 천천히 되물었다.목소리에는 아직 긴장이나 경직이 없었다.하지만 그 물음에는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이 담겨 있었다.하연은 지원의 방 침대에 걸터앉았다.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놓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을 이었다.“..저번에 언니가 말했던 그 미래 있잖아요. 기다려달라고 했던 거. 혹시 그게.. 언제쯤이에요? 1년? 2년?”지원은 눈을 감았다.숨을 한 번 들이쉬고, 조용히 내쉬었다.지원은 말로는 미래를 말했지만,정작 그 말 속에는 구체적인 계획도, 실질적인 약속도 없었다.‘지금은 아니야.’‘조금만 더.’'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지도.'현실을 회피하고 싶었기에, 겁쟁이였기에, 하연에게 그런 말들만을 반복했을 뿐인 지원이었다.하지만 하연은, 아이같이 책임을 회피하는 지원보다, 그 막연한 말들에 속앓이하며 지원보다 어른스럽게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또한 버텨낸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사실 그걸 알면서도, 지원은 애처럼 도망가기만 할 뿐이었고.“내가..”하연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그냥 철없이 언니를 조르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그 미래가 정말 올 수 있는 건지, 나 혼자서 너무 불안해서요. 이러다 갑자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되버릴까봐요..”지원은 노트북을 조용히 덮었다.그 소리가 작게 ‘툭’ 하고 울렸다.그 뒤엔, 정적만이 따라왔다.눈을 꼭 감았다가 뜨는 지원.“..미안해.”지원이 말했다.“왜요? ..뭐가요?”하연이 고개를 들었다.“내가 그 말을 했을 땐, 너한테 희망을 주고 싶었는데.. 정작 나는, 그 희망을 책임질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 같아서.”하연은 입술을 깨물었다.표정은 담담했지만, 손가락은 조심스럽게 반대 손등 위를 긁고 있었다.“언니는.. 혹시, 나랑 진짜 함께 사는 미래를 진지하게 상상해 본 적 있어요?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현실에서 사는 상상을?”지원은 대답하지 못했다.말을 하려다 입
일요일 오후.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퍼지는 햇살이 거실 바닥을 제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커튼은 반쯤 드리워져 있었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투명하게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러그를 감쌌다. 세상은 마치 멈춘 듯이 조용했고, 거실 한가운데, 두 사람의 시간이 고요하게 이어지고 있었다.지원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두꺼운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하연은 지원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 한 손으로는 지원의 책을 들고있지 않은 손을 장난스레 만지작거렸다.조물조물 지원의 손을 놓아주지 않는 하연.“이거..”하연이 느릿하게 말했다.“언니 손가락 되게 야무진 거 알아요? 책 읽을 때나 글씨 쓸 때 보면 진짜 예뻐요. 손톱도 길고. 완전 어른 손. 주인 성격 따라가는 것도 아닌데 이렇다니.”지원은 여전히 시선을 책에서 떼지 않은 채, 손끝을 살짝 움직여 하연의 손바닥을 꾸욱, 찌르며 대꾸했다.“그래? 난 네 손이 더 부드럽고 예쁘던데. 귀엽고.”“에이, 뻥이잖아요.”하연이 입을 삐죽이며 툴툴댔다.“내 손은 그냥 애 손인데. 완전 고딩같음.”하연의 괜한 툴툴거림과 유치한 투정들은 수많은 사람들 중 지원에게만 들리는, 하연의 나 좀 놀아주세요, 아니면 언니 계속 귀찮게 할 거야, 라는 뜻임을 알기에지원은 그제야 옆에 둔 책갈피를 끼우고, 책을 덮으며 고개를 숙여 하연을 바라봤다. 하연의 머리칼이 햇살에 닿아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연의 뺨에 긴 머리카락이 걸려 있었고, 지원은 조심스럽게 그걸 천천히 귀 뒤로 넘겨주었다.“그래서 좋은 거야. 예뻐.”그 말에 붉어지는 얼굴로 하연은 눈만 깜빡였다.잠시 입꾹꾹이를 하다가,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표정으로, 소리 없이 웃었다.그리고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둘만의 조용한 대화, 낮게 가라앉는 웃음.아무 일도 없는 오늘이라는 이 하루는,아주 조금은 마치 기적같다고도 느껴질 정도로 평화로웠다.피식, 웃고 소파에 완전히 기대어 누워, 눈을 감는 지원. 감긴 두 눈 위를 조심스레 문지른다."아이고
시간은 지나 밤 11시가 조금 넘어,지원은 약속보다 더 늦게 집에 도착했다.복도에는 형광등 하나만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고,문을 열자 어두운 거실이 조용히 그녀를 반겼다.TV도 꺼져 있고,주방엔 미지근한 찻잔 하나.테이블 위엔 페이지를 접어놓은 책 한 권.누군가 잠시 기다리다 자리를 비운 듯한, 그런 분위기.지원은 조심스레 현관을 지나 방 문을 열었다.하연은 방안에서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잔잔한 클래식 선율이 이어폰 밖으로 아주 희미하게 흘러나왔다.그러다 이어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하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왔어요?”“..응. 미안, 늦었지.”하연은 천천히 귀에서 이어폰을 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니에요.재밌었어요?”지원은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가,말끝을 덜어내듯 대답했다.“그냥 뭐.. 시끄럽고 오래된 얘기.떠들어대는 게 온통 다 옛날 얘기뿐이더라.다 아저씨, 아줌마 됐다는 거지.”하연은 웃었다.그 웃음엔 익숙한 곡선이 담겨 있었지만,어딘가 축축하게 젖은 듯한 기운이 함께 있었다.햇볕 아래 말리지 못한 채 덜 마른 웃음.지원은 눈치챘다.하연이 묻지 않은 말들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그 조용한 방 안의 공기 속엔말하지 않은 감정이 더 많았다.“혹시 무슨 일 있었어?”지원이 조심스레 물었다.“아뇨. 아무 일도요. 언니 빨리 씻고 주무세요.”하연은 너무 빨리 대답했다.그 반응이 오히려 더 마음을 찔렀다.“..하연아.”지원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마치 발끝으로 조용히 무너진 벽 위를 걷는 사람처럼.하연은 고개를 떨구었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속마음처럼 낮고 단단한 목소리를 꺼냈다.“나도 알아요.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닐 수 없다는 거.평범한 새언니와 아가씨의 관계는, 더는 아니라는 거.”“..응.”“그런데.. 그래서 더 무서워졌어요.”지원의 숨이 멎었다.그 말 속엔 후회도, 원망도 없었다.단지 너무 맑아서 되려 슬픈 고백이었다.“언니가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