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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태평성대
강채원은 염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에요, 이준이 아버님. 전 병원에 들러야 해서요.”

박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가족분이 입원했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강채원이 어머니의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가 뇌경색 진단을 받았는데 치료비가 2백만 원 정도 부족하다면서 울먹였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2백만 원을 모으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부모님이 사업에 실패해 빚을 진 바람에 친척들마저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강채원도 다른 방법이 없어 월급을 가불해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다행히 박도현이 흔쾌히 가불해주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박도현이 강채원의 앞으로 다가갔다.

“마침 나도 병원에 친구를 만나러 가려던 참이었거든요. 가는 길이니 태워다 줄게요. 간 김에 가족분을 잘 봐줄 만한 의사도 알아봐 주고요.”

강채원이 멍한 얼굴로 박도현을 쳐다봤다.

박도현은 어느새 뒷모습만 보인 채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키가 훤칠한 데다 어깨가 넓고 허리가 잘록해서 전형적인 모델 체격이었다.

그녀의 고용주는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마음씨까지 따뜻했다. 게다가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이기도 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홀아비였다. 역시 세상에는 완벽한 인생이란 게 없었다.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요? 병원에 가야 한다면서요.”

갑자기 들려온 박도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강채원이 고개를 숙이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박도현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제산 병원에 도착했다.

강채원은 곧장 입원 병동으로 향했고 박도현은 응급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응급실 안, 흰 가운을 입고 금테 안경을 쓴 남자가 박도현을 보자마자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우리 박 변호사님을 여기까지 모셔 왔을까?”

박도현은 늘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었다. 평소 진료를 받으러 오라고 해도 몇 번이고 재촉해야 겨우 얼굴을 비추곤 했다.

박도현이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 말하려던 그때 남자가 먼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정력이 넘쳐서 감당이 안 되는 거야?”

그가 싸늘하게 쏘아보자 남자가 눈을 흘겼다.

“사실대로 말도 못 해? 내가 진작 여자 좀 만나고 다니라고 했잖아. 네 문제는 문제도 아니야.”

말을 마친 남자가 서랍을 열어 약병 두 개를 꺼내 박도현의 앞에 탁 내려놓았다.

박도현이 약병에 손도 대지 않고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필요 없어.”

그에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 그를 설레게 하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강채원과의 만남은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남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랑 잤어?”

박도현의 목소리가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니.”

“그럼 반응이 오는 누군가를 만난 거야?”

남자가 박도현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친구야, 드디어 정상적인 남자가 되었구나.”

심은별이 세상을 떠난 뒤 박도현의 곁에는 여자라곤 없었다. 그러다 보니 무려 7년 동안이나 정상적인 남녀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는 친구로서 곁에서 모든 걸 지켜봐 왔다.

박도현이 남자의 손을 쳐내려던 그때 멀리서부터 분노 가득한 고함 소리가 들려오더니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너희들 뭐야? 병을 치료한다는 핑계로 여기서 몰래 몹쓸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

박도현의 할아버지 박세중이 지팡이를 들고 박도현을 내리치려 하면서 두 눈을 부릅떴다.

“솔직히 말해. 은별이가 죽은 게 네놈 때문이지? 아이만 남기고 아내를 죽게 내버린 뒤 상우 이 녀석이랑 함께하려 했던 거야?”

육상우와 박도현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다.

박도현이 심은별과 결혼하기 전에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이 무성했다.

심은별이 나타나면서 박씨 가문의 체면도 회복되는 듯했다. 그런데 그녀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로 박도현은 7년 동안 홀로 지냈다. 먼저 떠난 심은별을 잊지 못해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박세중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두 사람의 계략일 줄이야.

“할아버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할아버지, 전 정말 억울합니다.”

박도현과 육상우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육상우가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 박도현이 재빨리 손을 뻗어 박세중의 지팡이를 붙잡았다.

그 시각 육상우는 박도현의 뒤에 서 있었다. 하지만 박세중의 눈에는 육상우가 박도현의 뒤에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박세중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억울해? 박도현, 지금 육상우를 감싸는 게 아니면 뭔데? 둘이 이런 짓을 벌이는 것도 모르고 걱정했다니. 무려 7년이나 나를 속이고 죄 없는 사람까지 해쳤어. 너희가 이러고도 사람이야?”

박세중은 말을 이을수록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가슴을 움켜쥐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모습을 본 육상우가 다급히 다가가 응급조치를 하려 했다.

그런데 박세중이 완강하게 그를 밀어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육상우를 쳐다보는 박세중의 두 눈에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혐오감이 서려 있었다.

박세중의 분노가 극에 달하려 하자 육상우가 다급하게 박도현을 재촉했다.

“계속 그렇게 멍하니 서 있기만 할 거야?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다며? 네가 마음에 둔 여자가 누군지 얼른 말씀드려. 나한테 억울한 누명을 씌우지 말고. 나 겨우 프러포즈에 성공했는데 내 결혼이 깨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남자를 좋아한다느니, 살인에 가담했다느니 하는 누명을 쓰고 살 수는 없었다.

박세중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아직도 거짓말이야? 내가 늙기는 했어도 멍청이가 된 건 아니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세중이 육상우를 홱 잡아끌어 박도현의 앞으로 다가가 단호하게 말했다.

“박도현, 오늘 제대로 짚고 넘어갈 거니까 똑바로 말해. 우리 집안에 너처럼 도덕도 없고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망나니는 필요 없어.”

박세중은 손자를 끔찍이 아꼈다. 오늘 아침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김에 박도현의 약도 챙겨 가려 했다.

그런데 박도현은 그의 체면을 바닥에 짓밟아버렸다.

“박도현, 뭐라고 말 좀 해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설마 유부녀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

육상우도 이젠 정말 조급해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박도현은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강채원을 병원까지 데려다준 김에 육상우에게 자신의 상태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린 것뿐이었다.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처음에는 해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박도현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할아버지, 오해하셨어요. 전 남자한테 관심이 전혀 없어요...”

“그럼 여자한테는 관심이 있었어? 그동안 날 아주 철저하게 속였구나. 너무 실망이다, 박도현.”

박세중이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박도현에게 삿대질했다.

예전에는 손자가 드디어 이성에게 눈을 뜬 줄 알고 기뻐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박도현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할아버지, 대체 어디까지 상상하시는 거예요? 예전에는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고요. 그런데 이젠 만났어요. 바로 이준이의 과외 선생님 강채원 씨예요.”

박세중의 기세를 보아하니 오늘 당장 그와 육상우를 경찰서에 끌고 가고도 남을 판이었다.

그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강채원을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강채원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육상우와 박세중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과외 선생님? 언제 구했는데? 설마 사기당한 건 아니지?”

“정말 그 아가씨를 좋아하는 게 확실해?”

박세중이 질문을 하자마자 육상우의 손을 놓고 박도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박이준의 과외 교사라면 박세중도 본 적이 있었다. 피부가 희고 보드라웠으며 체구도 작고 가녀린 아가씨였다.

박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준이의 과외 선생님 얼굴이 딱 제 스타일이거든요.”

쾅.

무거운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향했다.

강채원이 문 앞에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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