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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개운하게 나온 박시온이 대충 어깨에 수건을 얹고 앉은 이시안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윽~ 머리는 제대로 말려야 해요.”
뚱한 목소리로 목덜미에 수건을 끼고 와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제 머리를 보고 하는 말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신경 쓰인다고요.”
그리고는 마음대로 다가와 제 목덜미에 있던 수건으로 머리를 닦았다.
그것은 우습게도 너무나도 익숙했다.
“야.”
“왜요.”
“넌 정말 틀림없는 박도윤의 아들일 거야.”
그 말에 박시온은 답지 않게 만난 이후, 처음 보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삼촌도 종종 그렇게 말했어요.”
“그게, 기뻐?”
“부모를 닮았다는 말을 싫어하는 자식도 있어요?”
그 말을 곱씹던 이시안이 흐릿한 기억을 떠올리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있을 걸.”
“아빠를 만나보고 싶어요.”
“엄마는?”
“물론. 하지만 짐작 가는 것이 없으니까… 아빠를 만나서 물어보는 수밖에 없어요.”
“그건 그렇네. 만나서 뭐하게? 왜 한지훈에게 맡겼냐고 한방 먹이게?”
장난스러운 물음에 한참을 말없이 머리를 조물조물 말리다 입을 열었다.
“나를 낳은 이유를 듣고 싶어서요. 그건 얼굴도 모르는 엄마도 그간 한 번도 만나러 오지 않았지만 사랑하니까 나를 낳지 않았을까 해서요.”
“무슨 뜻이야?”
“사람은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사랑을 갈구하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일지도 몰라요. 자식도 어찌 보면 사랑의 결과물일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저도 사람이니까… 어찌 되었든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중 일지도 모르는 거죠. 가령, 이성애는 아직 내게 너무 이르니… 가장 쉽고 원초적인 부모의 사랑을. 아, 그렇다고 삼촌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건 아니에요. 내가 알고 싶은 것과 조금 다른 종류일 뿐. 그러니 삼촌한테는 쓸데없는 말 하지 마세요.”
이시안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도무지 이 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려운 말만 잔뜩 하네.”
부지런히 움직이던 박시온의 손이 멈췄다.
“그러는 당신은요?”
“………?”
“당신은 ‘사랑’을 갈구한 적 없어요? 이런 내가 이상한 거야?”
순간적으로 그 앳된 얼굴에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겹쳐 보여 눈만 깜빡였다.
심장이 순간 멈춘 듯한 느낌이다.
순간적으로 겹쳐 보인 모습에 기분이 오묘했다.
“당신도 ‘병기’라고 불렸지만, 본질은 ‘사람’이잖아.”
분명 박시온이 말하고 있는데, 박도윤이 묻는 듯한 착각에 이시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 글쎄. 기억 안 나.”
슬프게도 사실이다.
***
"아니, 벌써? 나 내일 식사까지 준비했는데?"
"금방 올 게요."
왜 그리 급하게 아침을 먹는가 했더니, 빨리 이 여행을 지속하고 싶은 아이의 고집인 듯했다. 그리고 그 이시안이라고 할지언정 결국 그 남자의 얼굴을 빼닮은 박시온의 고집을 이길 수 없던 건지 피곤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살려달라고 외치는 듯했다.
"시온아, 시안이 잘 부탁해?"
"말할 상대가 바뀌고, 반대 아니야?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린 건가?"
"네. 맡겨 주세요. 돌아오는 길에 선물 사올 게요."
박시온의 맹랑한 대답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엄지를 추켜드는 서윤재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몇십 센티미터는 더 커진 박시온을 보며 괜히 울컥했다. 그런 서윤재를 보며 말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해 잘게 한숨을 쉬며 손을 흔들었다.
이시안이 뻐근한 목을 돌리며 '걱정 마.'라고 말하며 신나 총총걸음으로 향하는 아이의 뒤를 따랐다. 둘의 모습이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서윤재가 그제야 바닥을 구두로 쓱쓱 문지르며 애써 삼키던 말을 뱉었다.
"어휴, 내가 감히 너를 두고 그런 걸 걱정할까."
처음 한지훈에게 보고를 들었을 때는 걱정스러웠다.
그럼에도 제일 먼저 자신에게 보낸 것은 아마 이시안에 대한 '신뢰' 그리고 자신의 '판단'을 믿고 보낸 것이다.
다른 무엇이 빈틈을 노리고 이시안인척하는 것이라면? 여러모로 끔찍한 상황의 연속이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시안을 흉내 낼 수 있는 무언가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넷, 아니 다섯일 것이다. 하지만 그 다섯 명 중 그 누구 하나도 저 얼굴을 보면 다른 무언가라고 한들 제안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시안'을 흉내 내는 '무언가'라면 정말이지 잘 선택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니까.
"하. 이제부터인가."
일단, 자신이 두 눈으로 확인한 이시안은 진짜다.
너무나도 슬프게도 머리가, 몸이, 가슴이 그렇게 반응했다.
너무나도 귀여워 마지않는 사랑스러운 동생이 돌아왔다고.
"부디, 만날 수 있기를."
진심을 담아 고요하게 뱉은 말은 바람과 함께 묻혀 지나갔다.
자박자박 구둣발 소리가 점점 빠르고 요란스럽게 도심을 빠져나갔다.
"…… 미안해."숨 막히는 침묵은서윤재의사과로 깨졌다. 그제야서윤재의팔을 잡은이시안의손에 힘이 풀렸고, 한지훈이 애써 웃으며 둘 사이로 쏙 들어가 분위기를 전환해 보고자이시안의어깨를 둘러맸다."둘 다 머리 좀 식혀. 둘이 너무 예민하잖아~ 일 때문인가~?""그래, 그래. 좀 쉬자."이시안은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멍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고, 박도윤이 차마 그 손을 잡을 수 없어 멈칫하자, 한지훈이 대신 가겠다는 듯 손을 허공에서 흔들며이시안을따라갔다. 그리고서윤재도긴장이 풀린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죄송해요.""그건 내가 아니라시안이에게해야지.""……….""도윤아, 너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싸우는 애에게 스스로 죽겠다고 하는 건… 너무 심하잖아."서윤재의말에 박도윤은 잘못을 알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지금은 조금 진정하게 두고, 너 본부로 보내는 것도 내가 시안이랑 다시 이야기해 볼 게. 그러니까, 너도 진심으로 사과해. 알았지?""… 네."*****누가 저 모습을 보고 병기라고 할까?천막 틈 사이 쭈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는이시안은시간이 흘러도 어릴 적, 그이시안과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한지훈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머리를 긁적이
박도윤이 움찔했다.불과얼마 전에발견한 시체의 옷에서 나온 쪽지를 보고 샘플을 보냈었다. 그걸윤재이보다이시안이더 빨리 눈치챌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내가 잘못 본거라고 해. 그거 다른 사람이라고 하라고!"박도윤이얼어붙은듯, 대답하지 못했다. 눈이 동그래진 박도윤을 보며이시안의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적진 한가운데서 있는 것보다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에 맞출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널뛰었다."미쳤어? 무슨 생각이야? 그 송 효라고. 뭘 믿고보낸 거야!?""내가 약해서 의지 할 수 없으면… 내가 강해지면 의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겨우 입을 연 박도윤의 말은이시안이이해할 수 없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항상, 함께 있고 싶다는 소리야."요즘 늘 내던 짜증이나 화가 아닌, 덤덤하게 말하는 모습에이시안이잡은 팔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지금이시안의온몸을 지배하는 이 감정을 박도윤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나도 뒤가 아닌, 네 옆에서….""말이 되는 소리를 해!""………!""무조건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어!? 애초에 그 송 효가 진짜일 거라는 확신도 없어!""진짜가 아니면 단순히 피를 보낸 거야. 나도 나름대로 생각도 각오도 하고 보낸 거야."이시안이입을 틀어막으며고장 난듯이 멍하니 박도윤을 바라봤다.
송 효.전쟁이 막 시작될 때쯤,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는 전쟁을 이기게 해 주겠다며 실험체를받아 가서는인체공학으로 '병기'를 만들어 낸 개발 책임자.모두그를 송 박사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하지만 송 효는 마지막으로 김정우를 만들어 낸 1년 이후, 돌연 잠적했다. 그의 행방은 여전히 추적 중이지만윤재이도실마리를 잡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본부에서도 소수만 아는 그 이름이 주 학에게서 나오니 의아했다."요즘 부대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아. 송 효라는 사람이 제2의 병기를 만들기 위해실험 대상을모집한다고 샘플로 피를 모으고 있다나 봐.""뭐?"이시안이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주 학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닌, 송 효가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 믿을 수없다는 것에가까웠다."의도적인가? 이쪽은 그런 소문 없어. 있었다면 위에서 그냥 있었을 리 없어.""역시 그렇게 생각하지?""그 리스트, 알 수 있어?""사실이라면.""최대한 빠르게."주 학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려고 하자, 먼저 일어선이시안이주 학에게 손을 뻗었다. 기꺼이 그 손을 잡아 일어섰다.*****"야!!!빡도! 너도 들었지!?이씨완전 무리 중이라고!!! 걱정도 안 돼!? 그냥 네가 먼저 사과하라니까!?""…… 안돼. 지금 내가 먼저
"멋대로 행동하면서?"그 말에 퉁명스러운 표정을 했지만, 반박하지 않는 것에 화는 조금 누그러든 것 같아 한숨을 들이 쉬었다."그보다 뭐야~?시안이는전쟁이 끝나면 뭘 하고 싶길래, 새삼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말해주면 안돼~? 비밀로 할 게!""안돼. 저번에도 그렇게 말하고서는 말했잖아.""아니, 그건 네가 너무 귀여워서 어쩔 수 없었어. 말해주라. 이번엔 진짜로 비밀로 할 게."*****"큰 형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둘이 살벌하게들어간 지한 시간이 넘었어! 저러다 시안이고장 나면어쩔 거야~! 형님이 가서 말려 봐~!!!"정안용이꿈적하지 않는김상팔의 팔에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리자, 김상팔이 퍽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내가 말리면 시간이 더 길어질 거 같은데.""이거 완전 아내에게 꽉 잡혀 사는 힘없는 남편 아니야!?"정안용이가슴팍을퍽퍽 치며괜히 얌전히 있던 김상팔에게 소리치고는 맞은 편에 얌전히앉아 있던김정우의 얼굴을 꼬집으며 제 불안감을 표출한다는 명목으로 괴롭혔다."전 혼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거 위험한 행동이잖습니까.""그래.얼마 전의피로도 회복되지 않을 건데.""이게 전부 공주님 때문이다.하아~ 시안아, 힘없는 나를 용서해!""윽!"정안용이&
받은 쪽지의 글씨체는 분명윤재이의글씨체다.그래서 더욱 의심스러웠다.이시안의미간이 오만상으로 찌푸려지자, 오태성이 웃음을 꾹 참으며 폼을 잡았다."박도윤은 그곳에 있어.""…… 다른 의미로 놀라운데.""뭐?"박도윤과윤재이가친했냐고 물으면,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이시안이손아귀에 있는 쪽지를 강하게 쥐며 구겼다.지금 이 모든 상황이 여간 수상한 게 아니다. 지금이시안의머릿속에서 이 상황의 조각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조각이라면 박도윤의 여자가, 박시온의 엄마가윤재이와관련 있는 여자라는 것이라는 것.그것 하나뿐이다."화, 화 난 건 아니지? 난 사실만 말했을 뿐이야! 가게 엉망으로 만들면 안 된다!?"특히 지금 자신이 걸어온 이 여정이윤재이가만들어 놓은 것이란 찝찝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박도윤 성격에 자신의 아이를 한지훈에게 맡길 이유가 있나?이시안의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그것은 표정으로 드러났다."복잡해 보이네?"오태성이 술을 슬쩍 권하며 묻자,이시안은술잔을 툭 쳐버리고 의자에 앉았다."여러모로."오태성이 구레나룻을 긁적이며이시안을바라봤다. 그리고는이시안이툭 쳐버린 술잔을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뭐… 나도 살쾡
안으로 들어오자, 술집인 듯 여기저기 어지럽게 놓여있는 술병과 특이한 물건들에 박시온이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슬쩍 손가락으로 툭 건들이자, 남자가 혀를 차며 아무거나 만지지 말라고 한 소리 하려고 했지만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이시안의 시선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크흠.""말해. 너 뭐야? 재이의 지인?"아무리 생각해도 유추할 수 있는 건 그쪽뿐이었다."재이? 아아, 그래, 맞아. 그쪽도 재'희'처럼 '병기'인가?"남자는 선반에서 파는 것으로 보이는 술병을 들고 뚜껑을 따더니 입으로 쑤셔 넣었다. 알싸한 냄새가 너저분한 공간을 가득 메웠다."하여간에 귀신같은 놈이네. 내 이름은 오태성. 이 가게의 주인이지."이시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오태성을 바라봤다. 지저분한 머리와 정리되지 않은 수염을 긁적이며 술을 벌컥벌컥 마시는 모양은 윤재이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그런 이름 들은 적 없어. 윤재이는? 재이에게 직접 들어야겠어.""그건 곤란하네. 이야기가 통할 줄 알았는데, 너 아무것도 모르는 구나?"트림을 '꺽' 하는 모습에 뒤에 있던 박시온도 인상을 찌푸리며 흥미롭게 보던 책을 그대로 두고 슬금슬금 이시안의 뒤로 바짝 붙었다."재희 말로는 의심이 많을 거라더니… 진짜네. 일단 물어는 둘게. 저 애는 박도윤과 무슨 관계?""…… 아들… 인데요…….""진짜냐고."오태성이 입을 막으며 탄성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가게의 과자를 박시온에게 던지자, 과자를 받아 든 박시온은 의아하게 과자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