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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Author: 높은 하늘
일주일 후.

“오늘 밤, 내가 어제 명함을 건네준 그 남자와 약속을 잡아 놨어.”

어젯밤 수현이 했던 그 말이 아침이 된 지금까지도 지아의 속을 꽉 조여오고 있었다.

오늘 밤, 지아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임신시킬 남자를 만나야 했다.

지아는 답답한 마음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만약 어머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화내지 않을까? 게다가… 아이가 수현 오빠를 닮지 않으면 어떡하지?”

지아는 진씨 가문의 혈통이 아닌 아이를 후계로 안겨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지아.”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잘생겼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절로 등을 곧게 펴게 만드는 낮고 묵직한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의 상사이자 아주버니, 준현이었다.

준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서류 한 묶음을 내밀었고, 지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이거 스캔해서 PDF 파일로 내 카카오톡으로 보내.”

준현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지아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약 5분쯤 지나자 준현의 휴대전화에서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렸다.

그는 즉시 화면을 확인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메시지를 읽는 것이 아니었다. 프로필 사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사진 속에는 지아와 그의 친동생 수현의 결혼식 모습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흰색 한국 전통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이었지만, 그 시선 깊은 곳에는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숨어 있었다.

한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지아는 몰래 준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노트북 화면에 완전히 집중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준현도 시야 끝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야 해…”

지아는 작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용기를 내어 준현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준현은 여전히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대표님…”

지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준현의 귀에는 충분히 들렸다.

“음?”

그는 여전히 노트북을 바라보며 짧게 대답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지아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제야 준현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뭔데?”

지아는 침을 삼켰다. 어젯밤부터 준비했던 말들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

“말해, 지아.”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에 그녀는 움찔했다.

“대표님… 오늘 하루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정말 오늘만요. 다음부터는 절대 부탁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준현은 책상 위에서 두 손을 맞잡고 손가락을 엮었다. 그리고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은 채 지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부탁이지?”

낮고 평평한 목소리였다.

짙은 눈썹이 살짝 모아졌다.

지아는 다시 한번 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오늘 퇴근 후에… 병원에 계신 할아버지를 뵈러 가고 싶어서요. 그래서 혹시 가족들에게 제가 야근한다고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준현의 눈이 즉시 가늘어졌다. 그 눈빛 속에는 웃음인지, 믿기 어렵다는 반응인지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전혀 안심이 되는 미소는 아니었다.

“입사한 지 고작 일주일 됐는데 벌써 나한테 거짓말을 시키려는 건가?”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비꼬는 듯한 말투였지만 철저히 절제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아는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대표님.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요. 꼭 찾아뵙고 싶습니다.”

준현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웃음을 억누르는 것 같기도 했고, 인내심이 바닥나 가는 것 같기도 했다.

“할아버지 얘기만 꺼내면 내가 마음이 약해질 거라고 생각한 건가?”

짙은 눈썹이 모아졌다. 그의 시선에는 분명한 못마땅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곧 지아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축 처진 어깨.

불안함에 떨리는 입술.

그 순간 준현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거의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해. 그럼...”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여전히 차갑지만 조금은 누그러진 듯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그는 마치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사람처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거라면.”

단호한 말이었다. 허락처럼 들리기도 했고, 그녀의 진심을 시험하는 경고처럼 들리기도 했다.

지아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미소는 기쁨과 씁쓸함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님.”

……

그날 밤.

진씨 가문의 식탁은 평소처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단 한 자리만 비어 있었다. 지아의 자리였다.

준현과 서영, 도현, 지호, 수현, 명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아무도 지아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명희가 입을 열었다.

“수현아, 지아는 어디 갔니?”

“아, 맞다. 어머니.”

수현은 놀란 듯 허리를 곧게 세웠다.

“깜빡했어요. 지아는 오늘 야근 때문에 늦게 들어온대요.”

“야근?”

명희는 그 말을 되뇌며 장남 준현을 바라보았다. 서영과 지호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준현에게 향했지만 당사자인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태연했다.

“야근이라면 상사는 왜 여기 있는 거지?”

명희가 장남에게 물었다.

준현은 시선을 들어 먼저 수현을 바라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수현은 즉시 시선을 내렸다.

“오늘은 업무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준현이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제수씨도 지난 일주일 동안 꽤 좋은 성과를 보여줬습니다. 신입에 경력도 없는데 말이죠.”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 밤은 업무이자 시험을 함께 맡겼습니다. 제 압박 속에서도 제대로 일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요. 앞으로도 제수씨가 감당해야 할 일은 끝이 없을 테니까.”

설명을 들은 가족들은 모두 납득한 듯 다시 식사를 이어 갔다.

명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편 수현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준현이 지아의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완전히 믿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

한편 그 시각.

지아는 남편이 예약해 둔 호텔 객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깔끔하게 정돈된 킹사이즈 침대 쪽으로 걸어가 가방을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코트를 천천히 벗었다. 그 아래에는 검은 레이스 란제리가 드러났다.

오늘 오후 회사에서 떨리는 손으로 갈아입었던 옷이었다.

남편이 직접 사 주고, 오늘 밤 입으라고 지시한 옷.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명령.

“괜찮아… 괜찮아, 지아.”

그녀는 가슴을 토닥이며 작게 속삭였다.

코트를 걸어 둔 뒤 메인 조명을 껐다. 방 안에는 침대 옆 스탠드 조명만 남아 그녀의 피부 위로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때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딸칵.

문 쪽에서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손잡이가 움직였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한 남자의 실루엣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어둠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지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오… 오셨나요?”

목소리는 떨렸고, 손바닥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시킨 대로 다 했어요. 입으라고 한 것도 입었고... 남편이 원한 대로 전부 준비했어요.”

남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걸어왔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그 그림자가 어두운 객실을 가득 채울 때까지.

“죄송해요. 제가 좀 어색해 보여도… 이해해 주세요. 다만 저는... 메인 조명은 켜지 않은 상태로 하고 싶…”

찰칵.

갑자기 객실 조명이 켜졌다.

바로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지아의 눈이 크게 뜨이며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아… 아주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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