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악녀 수칙: 내 편을 구하려면 내가 먼저 움직인다.
한나가 무릎 위의 손을 폈다.
“그럼 저도 같이 갈게요.”
“내일은 여기 있어.”
“하지만 아가씨 혼자…….”
“마부도 가고, 마차도 가. 혼자는 아니야.”
한나는 외출용 장갑을 보았다. 손끝이 아직 떨렸지만, 이번에는 앞치마를 쥐지 않았다.
나는 바느질 상자를 서랍 안에 넣었다.
“내가 없을 때 누가 또 부르면 아가씨가 기다리라고 했다고 해.”
“후작님께서 부르셔도요?”
“응. 그 말은 내가 했으니까 나한테 물으시면 돼.”
한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문을 열자 복도에 서 있던 하인이 몸을 바로 세웠다. 나는 내일 아침에 마차를 준비해 달라고 했다.
어디에 가느냐는 질문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아직 목적지를 집 안에 널리 알릴 생각은 없었다.
◐
4월 3일, 한나는 평소보다 일찍 내 외출복을 꺼냈다.
옅은 회색 치마에 장식이 적은 옷이었다. 소매 끝에는 어제 잘라 낸 실이 더는 걸리지 않았다.
나는 거울 앞에서 장갑을 끼었다. 한나는 단추를 채운 뒤에도 내 등을 한 번 더 살폈다.
“뒤에 뭐 묻었어?”
“아니에요. 잘못 잠근 데가 없나 봤어요.”
“없어. 이번엔 나도 확인했어.”
한나가 손을 내렸다.
화장대 위에는 작은 빵이 놓여 있었다. 어제 내가 밀어 주었던 접시였다.
“아침 드시고 가세요.”
“마차 준비됐지?”
“네. 그래도 조금 드실 시간은 있어요.”
내가 굶으면 한나가 또 자기 잘못으로 여길 얼굴이었다.
나는 빵을 집었다. 한나도 그제야 다른 빵을 하나 들었다.
말없이 씹는 동안 밖에서 마차 바퀴가 돌바닥을 밟는 소리가 났다.
서두를 필요는 있었다. 그렇다고 빵 하나를 먹을 시간까지 빼앗길 일은 아니었다.
◐
현관에는 집사가 서 있었다.
내가 계단을 내려가자 집사는 문을 열려던 하인을 물리고 직접 손잡이를 잡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아가씨?”
“브로치 찾으러요.”
집사의 손이 멈췄다.
“밖에서 찾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집 안은 어제 다 찾아보셨잖아요.”
“예. 다만 유품을 들고 나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알아보러 가는 거예요.”
집사는 열린 문 너머의 마차를 보았다.
“후작님께는 말씀드렸습니까?”
“제가 더 찾아보겠다고 어제 말씀드렸어요.”
거기서 더 물으면 아버지를 부르러 갈 수도 있었다.
나는 집사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막지는 않았다. 뒤에서 문을 닫는 소리만 들렸다.
마부가 발판을 내려 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나는 전당포가 모여 있는 거리의 위치를 말했다.
마부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그래도 묻지 않고 문을 닫아 주었다.
마차가 움직이자 무릎 위에 놓은 손이 흔들렸다. 나는 치마에 잡힌 주름을 폈다.
전생에도 브로치는 돌아왔다.
한나가 쫓겨난 뒤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보관함에 브로치를 넣었고, 저택에서는 더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나중에야 전당포에서 되찾았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거리인지, 어떤 간판이었는지도 기억했다. 그때는 한나가 정말 물건을 팔았다고 생각하고 싶어서 귀를 기울였다.
한나를 붙잡지 못한 일이 덜 잘못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참 편리한 머리였다. 내가 한 일보다 한나가 했을지도 모르는 일을 더 열심히 찾았으니까.
이번에는 그 기억을 제대로 쓸 차례였다.
◐
전당포 거리에는 아침부터 사람이 많았다.
작은 수레에 의자를 싣는 남자도 있었고, 보자기를 끌어안고 가게 앞에서 망설이는 여자도 있었다. 창문마다 시계와 잔, 촛대가 빽빽하게 놓여 있었다.
나는 마차 창으로 간판을 살폈다.
붉은 칠을 한 나무판. 모서리 하나가 떨어져 나간 곳.
찾던 가게는 거기에 있었다.
“여기 세워 주세요.”
마차가 멈췄다.
문을 열자 길 건너에서 낡은 상자를 내려놓던 사람이 내 쪽을 보았다. 저택 문 앞에서와는 다른 시선이었다.
옷을 한 번 보고, 마차를 한 번 보고, 다시 자기 할 일로 돌아갔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남의 옷 대신 내 할 일이나 보면 얼마나 편한가.
발판에 발을 얹으려는데 손 하나가 먼저 나왔다.
검은 장갑을 낀 커다란 손이었다.
나는 손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은회색 머리. 회색 눈. 오늘도 구경꾼보다 훨씬 눈에 잘 띄는 키.
“대공 전하?”
“발판이 기울었다.”
레녹스는 내 얼굴 대신 아래를 보았다.
마부가 황급히 다가와 발판을 확인했다. 한쪽이 돌 틈에 걸려 있었다.
나는 문 안쪽 손잡이를 놓고 레녹스의 손을 잡았다.
장갑 위로 손가락이 받쳐졌다. 내가 발판을 밟자 손이 조금 올라왔다. 끌어내리지는 않았다.
두 발이 바닥에 닿은 뒤에야 손을 놓았다.
“감사해요.”
“별말을.”
“그런데 왜 여기 계세요?”
“지나가던 길이다.”
레녹스의 왼쪽 귀에는 작은 은 귀걸이가 있었다.
손은 방금 나를 내려 준 자리에서 그대로 내려갔다. 귀걸이에 닿지 않았다.
나는 뒤쪽을 보았다.
오웬이 묶인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서 있었다. 길 건너에는 북부 문장이 달린 마차도 있었다.
정말 지나가던 길처럼 보이기는 했다.
“이런 거리도 지나가세요?”
“길이니까.”
“그렇긴 하네요.”
길이 길인 걸로 대공과 다툴 생각은 없었다.
오웬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에버린 영애. 오늘은 조금 더 일찍 뵙는군요.”
“저도 이렇게 자주 뵐 줄은 몰랐어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오웬의 대답은 유난히 빨랐다.
레녹스가 붉은 간판을 보았다.
“저기로 가나.”
“네.”
“같이 가지.”
나는 전당포 문과 레녹스를 번갈아 보았다.
혼자 들어가면 주인이 귀족 영애를 얕보고 말을 아낄 수도 있었다. 저택의 물건을 찾는다고 하면 집사에게 먼저 연락할 수도 있었고.
반면 이 사람과 들어가면 주인은 말을 아끼기 전에 목부터 마를 터였다.
“물건 찾는 데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괜찮다.”
“제가 나가 달라고 하면 나가 주실 거죠?”
“그래.”
나는 전당포 쪽으로 걸었다.
레녹스가 옆에서 걸음을 맞췄다. 오웬은 들고 있던 서류를 반대쪽 팔로 옮기며 따라왔다.
우리 마부는 마차 곁에 남았다. 표정이 아까보다 훨씬 편해져 있었다.
나보다 마부가 대공의 동행을 더 반겼다.
◐
전당포 문은 뻑뻑했다.
나는 손잡이를 한 번 당겼다가 안쪽에 쌓인 상자를 보았다. 문 바로 뒤에 놓인 상자가 문짝에 걸려 있었다.
계산대 안에서 주인이 급히 나왔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물건을 들이느라…….”
주인은 상자를 밀다가 내 뒤를 보았다.
손이 상자 모서리에 붙은 채 멈췄다.
“대, 대공 전하.”
레녹스는 대답 대신 열린 틈을 보았다.
주인은 상자를 번쩍 들어 옆으로 옮겼다. 조금 전에는 꽤 무거워 보였는데, 갑자기 잘 들렸다.
“안으로 드시지요.”
나는 먼저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손바닥만 한 거울부터 내 팔보다 긴 촛대까지 있었다. 은으로 된 접시는 따로 천을 깔아 올려 두었다.
주인은 계산대 뒤로 돌아가며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브로치를 찾으러 왔어요.”
나는 어머니의 브로치 모양을 설명했다.
가운데 보랏빛 돌 하나. 가장자리에 둘린 진주. 뒤쪽 고리 밑에 작게 새긴 에버린 가문의 문장.
주인은 앞의 두 가지를 들을 때까지 진열장을 보았다.
문장 이야기를 하자 시선이 계산대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그쪽을 보았다.
“있군요.”
“비슷한 물건이 들어오기는 했습니다.”
“볼 수 있을까요?”
“예. 다만 물건을 맡긴 분과의 거래가 있어서…….”
주인이 말을 멈췄다.
레녹스가 내 뒤에서 반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좁은 통로를 지나려던 손님에게 길을 비켜 준 것, 그게 다였다.
그런데 주인은 급히 계산대 아래를 열었다.
“우선 확인부터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작은 천 꾸러미가 나왔다.
주인이 천을 펼치자 보랏빛 돌이 드러났다. 진주 하나는 다른 것보다 색이 조금 옅었다.
어머니가 생전에 바꿔 끼웠다는 바로 그 진주였다.
나는 손을 뻗다가 멈췄다.
“뒤도 보여 주세요.”
주인이 브로치를 뒤집었다.
고리 밑에 작은 문장이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어머니가 떨어뜨려 생겼다는 흠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가 한나를 의심하는 동안에도 멀쩡히 남아 있던 물건.
나는 장갑 낀 손끝으로 천의 구겨진 곳을 눌렀다.
“맞아요. 저희 어머니 물건이에요.”
주인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돌아가신 에버린 후작 부인 말씀이십니까?”
“네.”
“저는 그런 사정을 모르고 받았습니다.”
“아직 아셨다고 한 적 없어요.”
주인은 앞치마에 손을 한 번 더 문질렀다.
레녹스가 계산대 위의 브로치를 보았다.
“없어진 물건인가.”
“어제요. 저희 집 서재에서 없어졌어요.”
주인은 급히 손을 뗐다.
브로치에서 물러나는 게 너무 빨라서 천 끝이 접힐 뻔했다. 내가 눌러 두었던 손으로 천을 다시 폈다.
“누가 가져왔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인은 선반에서 장부를 꺼냈다.
그 뒤에서 오웬이 낮게 중얼거렸다.
“전하 얼굴이 쓸모 있는 날도 있군요.”
나는 입술 안쪽을 살짝 물었다.
레녹스는 고개만 돌렸다.
“들린다.”
“좋은 뜻입니다.”
오웬이 서류를 고쳐 들었다.
나는 브로치를 보는 척했다. 웃으면 주인이 내가 이 상황을 즐긴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즐겁지는 않았다.
조금 시원하기는 했다.
◐
장부는 계산대에 놓일 만큼 컸다.
주인은 끈을 풀고 어제 거래한 쪽을 펼쳤다. 종이 모서리에 손가락이 두 번 미끄러졌다.
“여기 있습니다. 물건을 산 기록입니다.”
“맡아 둔 게 아니라 사신 거예요?”
“예. 처음에는 맡길까 물었는데, 바로 팔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되찾으러 올 약속은 없었겠네요.”
“없었습니다.”
나는 장부를 내 쪽으로 조금 돌렸다.
주인이 재빨리 덧붙였다.
“물건이 귀해 보여서 어디서 났는지 물었습니다. 정당하게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 받았다고요?”
“집안에서 준 것이라고…….”
주인의 시선이 레녹스에게 갔다.
레녹스는 계산대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팔짱도 끼지 않았고, 주인을 노려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주인은 다시 내 쪽을 보며 말을 끝냈다.
“자세히 묻지 않은 건 제 잘못입니다.”
“지금은 물어볼게요. 가져온 사람을 기억하세요?”
“기억합니다. 어제 일이니까요.”
“옷이나 생김새도요?”
“예. 직접 보면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나는 장부 위에 놓인 주인의 손을 보았다.
“그럼 그 사람 이름도 직접 썼어요?”
“본인이 적었습니다. 글씨를 쓸 줄 아는 사람에게는 직접 서명하게 합니다.”
주인은 거래가 적힌 줄 끝을 가리켰다.
나는 그쪽으로 눈을 옮겼다.
보기 전에 확인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이 브로치, 오늘 다른 사람에게 팔지는 말아 주세요.”
“물론입니다.”
“없어지면 곤란해요. 물건을 가져온 사람이 다시 와도요.”
주인의 눈이 커졌다.
“다시 가져가려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주지 말고 저택에 알려 주세요.”
나는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물건을 팔러 온 손님 하나가 진열장 앞에서 모자를 만지고 있었다.
주인을 윽박지른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이 사람에게는 거래 기록이 있었고, 내게 필요한 것도 그 기록이었다.
“확인하는 동안 다른 손님을 막을 생각은 없어요. 이 물건만 따로 보관해 주세요.”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레녹스가 브로치를 가리켰다.
“싸 두어라. 흠이 나지 않게.”
짧은 말이었다.
주인은 깨끗한 천을 새로 꺼냈다. 접힌 모서리가 진주에 닿지 않도록 한 번 더 고쳐 감쌌다.
나는 그 손을 보고 나서 장부로 눈을 돌렸다.
내가 마차에서 내릴 때 손을 받쳐 주었던 사람은 지금도 옆에 있었다. 말을 대신하지 않고, 내가 묻는 동안 기다렸다.
그건 생각보다 편했다.
◐
장부에는 어제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 물건 이름과 값을 적은 칸이 이어졌다.
진주 장식 브로치.
보랏빛 돌.
뒤쪽에 문장 있음.
대충 적어 둔 장부는 아니었다. 물건을 사들일 때 본 것을 차례로 남겨 놓았다.
나는 줄 끝의 서명을 읽었다.
한나의 이름을 찾으러 온 건 아니었다. 그래도 한나가 아니라는 걸 눈으로 확인하자 장갑 안에서 굽혔던 손가락이 펴졌다.
서명은 익숙했다.
전에 집사에게 전할 것이 있다며 저택에 찾아왔던 사람이었다. 현관에서 집사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고, 주방에 가서 먹을 것을 받아 가라고 했었다.
내가 계단을 내려오자 허리를 깊이 숙였던 얼굴도 떠올랐다.
나는 장부를 놓지 않은 채 물었다.
“이 사람이 직접 가져온 게 맞아요?”
“예. 제가 물건을 받고, 값을 치렀습니다.”
“옆에 다른 사람은 없었고요?”
“혼자 왔습니다.”
레녹스가 내 손끝을 보았다.
“아는 이름인가.”
나는 서명 아래 빈 곳에 손가락을 놓았다. 잉크에는 닿지 않았다.
집사는 어제 한나의 소지품부터 확인하자고 했다.
오늘 아침에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나는 장부를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이 기록, 베껴 가도 되죠?”
“예. 종이를 드리겠습니다.”
주인이 종이를 찾으러 몸을 돌렸다.
레녹스는 내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오웬도 이번에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는 이름을 다시 읽었다.
잘못 읽을 여지는 없었다.
“한나가 아니네요.”
“누군가.”
“저희 집 집사의 조카예요.”
(5화 끝)
악녀 수칙: 서약할 때는 손을 숨기지 않는다.덮어 둔 수첩 위로 햇빛이 들었다.나는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표지를 만졌다. 어젯밤 끼워 둔 쪽지 끝이 그대로 나와 있었다. 마지막 장도 아직 비어 있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아가씨, 일어나셨어요?”“응.”한나가 문을 열었다. 양팔에 연보라색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어제보다 눈이 조금 부었지만, 빗을 쥔 손은 멀쩡했다.“오늘은 잘 빗을 수 있겠어?”“네. 안 울 거예요.”“그건 해 보고 말해.”한나는 웃으면서 드레스를 의자에 펼쳤다.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을 열었다. 저택 앞에 마차가 서 있었다. 하인들이 마지막 상자를 실었고, 데릭은 현관 계단에서 장갑을 끼고 있었다. 턱이 말끔했다.잘 깎았네. 결혼식에 늦게 온 데다 수염까지 남아 있었으면 두고두고 말했을 것이다.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앉았다.한나가 머리를 빗어 올렸다. 핀을 꽂을 때마다 어디가 당기지 않는지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면서 접시에 놓인 브로치를 집었다.“이건 네가 달아 줘.”한나가 두 손으로 받았다.“식이 끝나면 바로 떼어 드릴게요.”“급하게 떼지는 말고. 옷에 구멍 난다.”드레스 가슴께에 브로치가 달렸다. 한나는 핀을 확인하고 손바닥으로 옷감을 가볍게 눌렀다.어머니의 면사포는 마지막이었다.상자에서 꺼냈을 때는 길어 보이더니 머리에 얹자 등 뒤로 고르게 떨어졌다. 한나가 끝을 펴 주는 동안 나는 왼손의 은반지를 만졌다.“장갑은요?”“서약할 때 벗을 거야.”“지금은 끼실 거죠?”“응. 고삐 잡으러 가는 건 아니니까.”한나가 장갑을 내밀었다.오른손을 넣기 전에 손바닥을 한번 폈다. 굳은살 위로 아침빛이 닿았다. 새삼 문지르지는 않았다. 없어져야 할 것도 아니었다.화장대 위 수첩은 작은 가방에 넣었다.한나가 문을 열고, 나는 치맛자락을 들어 계단을 내려갔다.아버지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내 옷을 보고는 콧수염 아래 입술을 다물었다. 한나가 뒤에서 면사포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아
악녀 수칙: 우는 사람에게는 빗을 맡기지 않는다.한나는 빗을 받아 들고 한 걸음 물러났다.“아직 아가씨 머리를 다 못 빗었는데요.”“네 눈부터 닦아.”“안 울었어요.”나는 한나를 봤다.한나도 나를 보다가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조금만요.”“조금 울어도 울긴 운 거야.”빗을 들고 돌아올 때부터 코끝이 빨갰다. 면사포 상자를 닫다가 눈을 훔치는 것도 봤다. 내가 거울만 보고 있는 줄 알았나 보다.한나는 내 뒤로 와서 풀린 머리카락을 모았다.“정말 조금만 더 하면 돼요. 이쪽이 아직 엉켜서요.”“그럼 그것만 풀고 앉아.”나는 빗을 돌려줬다.한나는 머리 끝부터 조심스럽게 빗었다. 익숙한 손이었다. 잡아당기지도 않았고, 엉킨 곳을 억지로 내리지도 않았다.문제는 빗질이 자꾸 멈춘다는 데 있었다.거울 속 한나가 입술을 꾹 누르고 있었다.“아프세요?”“아니.”“그러면 조금 더…….”말끝이 작아졌다.한나의 손이 내 머리 뒤에서 멈췄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을 뒤로 내밀었다.“빗.”한나는 이번에는 순순히 건넸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나를 의자에 앉혔다. 한나가 벌떡 일어나려 해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내가 앉으라고 했지, 벌 받으라고 했니?”“아가씨가 제 머리를 빗어 주시면 이상하잖아요.”“머리카락은 네 게 더 얌전해.”한나의 머리핀을 뺐다. 단단히 말아 올린 머리가 목 아래로 풀렸다. 한나는 두 손으로 무릎을 덮고 거울을 쳐다봤다.“왜 우는데?”“내일 결혼하시니까요.”“그건 알아.”“좋아서요.”나는 빗을 머리 끝에 댔다.“그런데 왜 사람 장례 치르는 얼굴이야.”한나가 웃다가 코를 훌쩍였다. 웃기는 데 성공했다고 보기엔 소리가 축축했다.손수건을 건네자 한나는 두 손으로 받았다.“아가씨가 북부로 가셔도 저를 데려가 주신다고 하셨는데, 자꾸 여기서 마지막으로 머리를 빗어 드리는 것 같아서요.”“내일도 빗어 줘야지.”“네.”“모레도.”한나가 손수건 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북부에서도. 거기
악녀 수칙: 남이 정한 색을 입지 않는다.“데려갈 거예요.”내 대답에 베른이 먹구름의 고삐를 고쳐 잡았다.“그럼 꽃 장식에 익숙해지게 해 둬야겠습니다.”먹구름은 제 결혼식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턱을 높이 들었다. 나는 검은 목을 두드렸다.“꽃은 먹는 게 아니야.”먹구름이 내 손바닥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레녹스 쪽으로 코를 돌렸다.“그쪽도 없대.”레녹스가 빈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먹구름은 기어이 주머니 끝까지 냄새를 맡았다. 사람 말을 믿지 않는 건 좋은데, 너무 철저했다.베른이 고삐를 당겨 검은 코를 떼어 놓았다.“옷을 물지 않는 연습도 해야겠네요.”“그건 꼭 해 주세요. 제 치마는 길어질 테니까.”레녹스가 나를 봤다.“정했나.”“아직요. 색부터 고르려고요.”“같이 가지.”“드레스 고르는 데도요?”“그래.”베른은 먹구름을 보고, 레녹스를 보고, 다시 고삐를 잡았다.“둘 다 아가씨가 가는 데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먹구름이 콧김을 뿜었다. 레녹스는 부정하지 않았다.나는 극장 계단을 내려가며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3월 30일, 드레스 가게의 창에는 하얀 옷이 걸려 있었다.치마를 풍성하게 벌리고 소매에는 고운 자수를 놓았다. 허리에 묶인 띠도 하얬다. 흠잡을 곳 없이 예쁜 옷이었다.내가 입고 싶은 옷은 아니었다.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한나는 내 망토를 받아 들었고, 레녹스는 문을 닫고 곧장 따라 들어왔다.주인의 시선이 레녹스에게서 멈췄다.“대공 전하께서도 함께 고르시나요?”“구경만 해요.”내가 먼저 대답했다.레녹스는 내 옆에 섰다.“필요하면 돕겠다.”“단추 잠그는 건 한나가 해 줘요.”“그럼 기다리지.”주인은 창가의 넓은 의자를 권했다. 레녹스가 앉으려다 내 쪽을 봤다.나는 가게 안쪽의 거울을 가리켰다.“저는 저기 있을 거예요.”레녹스는 의자를 조금 옮겼다. 거울이 잘 보이는 자리였다.한나가 내 망토를 접다가 웃었다.“전하, 제가 옷을 가리면
악녀 수칙: 마음에 드는 날은 내 것으로 삼는다.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레녹스가 내 장갑을 주워 들었다.나는 왼손을 내밀었다. 반지를 낀 채 장갑을 끼우려니 손가락 끝이 자꾸 안쪽에 걸렸다.“빼고 낄까.”“싫어요. 방금 꼈는데.”레녹스는 장갑 입구를 넓혀 줬다. 나는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은반지가 천 아래로 가려졌다.괜히 손등을 한 번 쓸었다.“내려가면 벗으면 되지.”“알아요.”“계속 만지길래.”나는 손을 내렸다가 다시 레녹스의 손을 잡았다.“이건 만져도 되잖아요.”“그래.”계단 아래에서 데릭이 우리를 올려다봤다.“차 식는다!”한나가 바로 데릭의 옆구리를 눌렀다. 오웬은 찻잔을 들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요리사는 접시 가운데에 과자를 더 쌓았다.나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갔다.레녹스도 손을 잡은 채 따라 내려왔다. 빈 의자는 바로 옆에 있었는데, 오웬이 굳이 두 의자를 조금 더 붙였다.“너무 가까운데요.”내 말에 오웬이 의자를 도로 밀려 했다.나는 먼저 앉았다.“옮기라는 말은 안 했어요.”오웬이 손을 거뒀다. 데릭은 차를 마시다 웃었고, 한나는 결국 손수건을 꺼냈다.레녹스가 내 앞에 과자 접시를 놓았다.나는 장갑을 벗고 은반지를 드러냈다.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 손에 붙었다.“차 식는다며.”데릭에게 말하자 그제야 다들 찻잔을 들었다.◐3월 28일, 수도로 들어가는 길은 북부보다 훨씬 질었다.바퀴가 물기 섞인 흙을 밟을 때마다 마차가 조금씩 기울었다. 나는 창밖의 길을 보다가 무릎 위에 올린 편지를 다시 펼쳤다. 어제 묵은 곳까지 달려온 수도의 전령이 건넨 편지였다.왕의 허락은 짧았다.『레녹스 발트하임 대공과 비올레타 에버린 영애의 혼인을 허락한다. 왕궁 정원을 예식 장소로 내주겠다.』끝에 찍힌 왕의 인장이 종이를 접어도 조금 튀어나왔다.그 밑에는 아버지의 편지가 있었다.왕궁 정원을 쓸 수 있다는 말보다 그쪽이 더 뜻밖이었다.『4월 1일은 어떠냐. 준비는 해 두겠다. 네가 싫다면 다른 날로
악녀 수칙: 좋은 일 앞에서는 괜히 도망가지 않는다.나는 먹구름의 고삐를 받아 들고 성 꼭대기를 다시 봤다.“몇 시에요?”“저녁 먹고.”“거기까지 올라가서 또 경주하자고 하시는 건 아니죠?”레녹스가 내 손에 감긴 고삐를 풀어 줬다. 먹구름이 갑자기 고개를 들면 손가락이 조일 만큼 감겨 있었다.“말은 두고 와라.”“그럼 제가 불리한데요.”“이길 필요 없다.”고삐가 손바닥에 느슨하게 놓였다. 레녹스는 마지막으로 내 손가락을 살피고 놓았다.나는 탑을 올려다보다가 물었다.“따뜻하게 입고 가면 돼요?”“그래. 바람이 분다.”“알았어요.”먹구름이 내 소매를 물었다. 당근이 남았다는 걸 기억하는 모양이었다.나는 소매를 빼내고 주머니를 뒤졌다. 레녹스는 먹구름이 당근을 다 먹을 때까지 옆에 서 있었다.“먼저 들어가셔도 되는데요.”“같이 가겠다.”“마구간 안까지요?”레녹스가 먹구름을 봤다.“싫어하나.”검은 주둥이가 레녹스의 빈손을 한 번 더 확인했다.“손님이 빈손으로 왔다고 좀 아쉬운가 봐요.”레녹스가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그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오늘은 충분히 먹었어요.”손이 순순히 내려갔다.먹구름만 몹시 불만스러웠다.◐3월 23일, 나는 저녁 식사를 평소보다 빨리 끝냈다.그렇다고 접시를 비우지도 않고 일어난 건 아니었다. 북부 요리사는 남은 음식을 보면 어디가 아픈지부터 물었다. 괜히 걱정을 살 필요는 없었다.문제는 옆자리에 앉은 데릭이었다.내가 수저를 내려놓자 데릭도 얼른 내려놓았다.“다 먹었어?”“응.”“배부르냐?”“그걸 왜 물어?”“그냥.”데릭의 접시에는 감자가 남아 있었다. 나는 접시를 가리켰다.“오빠는 더 먹어. 훈련하고 왔다며.”“나도 배부르다.”맞은편의 한나가 물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잔을 들지도 않고 입술만 꾹 누르고 있었다.오웬은 그 옆에서 빵을 뜯었다. 이미 다 먹은 빵을 다시 뜯을 수는 없어서, 손끝에는 작은 부스러기만 남았다.나는 셋을 차례로 봤다.“뭐 있어요?
악녀 수칙: 이겼으면 받고 싶은 것을 직접 고른다.나는 계단 앞에서 발을 멈췄다.오웬의 질문 뒤로 잠깐 조용해졌다. 집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고, 조금 뒤에는 발소리도 들렸다.나는 손수건을 주머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영애.”오웬이 복도 끝에서 나를 불렀다. 아까 들고 있던 서류는 없었다.“길을 물으러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맞아요. 먹구름이 달릴 만한 곳이 있나 해서요.”오웬은 내 얼굴을 보고 집무실 쪽을 한번 돌아봤다.“남쪽 들판에 길이 있습니다. 눈을 걷어 둔 곳인데, 상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고마워요.”“전하께서도 같이 가실 겁니다.”“제가 같이 가자고 안 했는데요.”오웬이 입을 다물었다.나는 웃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 뒤에서 오웬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길을 물었더니 동행부터 정해지는 성이었다.◐3월 22일 아침, 먹구름은 내가 들고 온 안장보다 주머니를 먼저 봤다.주둥이가 망토 옆을 꾹 눌렀다.“당근은 이쪽 아니야.”먹구름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치가 빨랐다. 처음 샀을 때부터 사람 말도 이만큼 잘 들었으면 베른의 허리가 덜 아팠을 텐데.나는 잘라 온 당근을 손바닥에 올렸다. 먹구름이 입술로 조심스럽게 집어 갔다.“오늘은 좀 달릴 거야.”남은 당근을 달라는 듯 고개가 더 내려왔다.“알았어. 준비부터 하고.”마구간 문이 열렸다. 찬바람을 따라 레녹스가 들어왔다. 두꺼운 망토 아래에 승마용 장갑을 끼고 있었다.“오셨네요.”“네가 간다기에.”“오웬이 벌써 동행을 정해 줬어요.”레녹스는 내 옆에 멈춰 섰다.“싫으면 여기 있겠다.”먹구름이 내 어깨 너머로 코를 뻗었다. 레녹스는 주머니에서 각설탕을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 검은 주둥이가 손바닥으로 향했다.나는 먹구름의 목을 가볍게 쳤다.“넌 좋겠지.”“너는.”레녹스는 각설탕을 먹이는 동안에도 나를 봤다.“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그럼 간다.”정하기 쉬웠다. 대공을 데리고 들판에 나가면서 결재할 종이도, 납득시킬 사람도 없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