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마차를 탄 지 사흘째, 나는 드디어 바퀴 소리에도 표정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다.좋은 일은 아니다.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귀족 마차 안에서 허리를 세운 채 잠깐씩 기절하듯 졸고, 흔들릴 때마다 손잡이를 잡고, 창밖 경계석을 보며 지금쯤 어느 영지인지 가늠하는 생활에도 몸이 맞춰졌다.문제는 몸만 맞춰졌다는 점이다.머리는 계속 새 업무 환경에 던져진 신입이다.수도에서 벗어난 길은 점점 좁아졌고, 창밖의 공기도 달라졌다.관저 복도의 향 냄새 대신 젖은 흙과 말 땀 냄새가 먼저 들어왔고, 바퀴가 포장석을 벗어날 때마다 마차 바닥에서 둔탁한 진동이 올라왔다.멀리 낮은 언덕 사이로 회색 지붕들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레온이 말을 가까이 붙였다."공작님, 벨포르 영지 저택입니다!""봤어, 레온. 너무 자랑스럽게 말하지 마. 내가 처음 오는 사람 같잖아."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아니, 처음이 맞긴 하다.정확히는 이 몸이 아니라 내가 처음이다.그러니까 더 문제다. 외부에는 단 한 치도 그런 기색을 보이면 안 된다.레온은 다행히 다른 방향으로 감동했다."공작님께서 영지를 새롭게 바라보시겠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이해하지 말고 앞을 봐.""예!"그는 정말 앞을 봤다. 충성심이 과하면 해석력이 먼저 폭주한다는 사실을 지난 며칠 동안 배웠다.영지 운영 매뉴얼에는 없는 항목이지만, 체감상 아주 중요한 위험 변수다.저택은 수도 관저보다 낮고 넓었다.흰 석벽은 오래된 눈처럼 차분했고, 문루 양쪽의 깃발은 바람을 받아 무겁게 흔들렸다.마차가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쇠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울렸고, 뜰 가장자리의 하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사람 수가 많았는데, 많아도 너무 많았다.환영 인파인가.아니면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관찰하러 나온 내부 평가단인가.둘 다 가능해서 더 싫었다.마차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발판을 먼저 확인했다.사흘 전 팔꿈치 바깥쪽에 남았던 장갑의 온도 같은 건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정확히 한 번 떠올
아인하르트의 검 둘이 관저 밖에 선 지 사흘째, 소문은 드디어 수도의 거의 전부를 먹었다.다미안은 아침 차가 식기도 전에 보고서를 펼쳤다.종이 가장자리가 반듯했고, 잉크도 마른 지 오래라서 이건 새벽에 급히 적은 보고가 아니었다.밤새 들어온 것들을 정리하고, 지우고, 다시 눌러 쓴 결과물."수도 사교계 거의 전부입니다, 누님.""나머지는요?""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쪽 일겁니다."아, 그럼 전부네.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잡이를 놓는 동작은 이제 꽤 자연스러웠다.이 세계에 떨어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동작, 호칭의 순서, 집사에게 명령하는 건 몸에 붙기 시작했다.문제는 몸이 익숙해질수록 수도가 나를 더 빠르게 씹어 삼킨다는 점이다."헤르츠베르크 부인 쪽에서는요?""공식 절차라는 말을 받아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구애라는 말을 한 줄 더 붙였습니다.""부지런하시네.""부지런하신 건 누님도 마찬가지라는 평입니다. 달라진 공작, 움직이는 벨포르, 아인하르트의 보호를 받는 여자.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하나로 모이고 있습니다."다미안이 마지막 문장을 읽지 않고 덮었다.종이의 흰 면이 위로 올라오자 오히려 더 피곤했다.글자가 보이지 않는데도 머릿속에서 계속 굴러갔다. 구애. 보호. 달라진 공작.셋 다 내가 원해서 붙인 이름은 아니었다."영지로 간다."다미안이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지금 수도를 비우시겠다고요?""응. 수도의 입을 막을 수 없으면, 내 손이 닿는 곳부터 정리해야지.""소문을 피하는 걸로 읽힐 수 있습니다.""그러라 그래. 도망도, 회피도, 해명도 아니야. 그냥 내 영지로 가는 거야."내가 먼저 말해 놓고도 이상하게 숨이 가라앉았다.도망이라는 단어가 머릿속 어딘가에서 기웃거렸지만, 거기에 자리를 주지는 않았다.수도에 남아 모두의 입을 하나씩 막는 건 불가능했다.가능하지 않은 일을 붙잡고 버티는 건 전 질색이다."다미안, 넌 남아.""누님.""정보망 유지해. 헤르츠베르크 부인 쪽 반응, 황궁
다음 날 아침, 관저는 전날보다 조용했다.조용하다는게 좋은 일 이라는 건 아니다. 적어도 벨포르 관저에서는.하녀들이 발소리를 죽이고, 테오도어가 오늘 접견 명단을 평소보다 얇은 서류철에 끼워 올 때면 대개 밖에서 무언가가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이 세계에 떨어진 지 닷새째.이제 찻잔을 어디에 내려놓아야 하는지, 집사에게 어떤 순서로 명령해야 하는지, 다미안을 부를 때 굳이 정중한 호칭을 붙이지 않아도 되는지에는 조금 익숙해졌다.문제는 익숙해진 만큼 새로운 재난이 더 정교하게 찾아온다는 점이었다."공작님."테오도어가 문가에서 고개를 숙였다."아인하르트 기사단장 각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답신이 도착했다는 뜻입니까?""아닙니다. 각하 본인이십니다."'아, 제발.'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눌렀다.테오도어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얼굴이었고, 나는 공작다운 속도로 펜을 내려놓았다.공작다운 속도라는 게 실제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놀라서 펜을 떨어뜨리는 것보다는 나았다."응접실로 모셔요. 다미안에게도 바로 알리고.""예, 공작님."테오도어가 물러난 뒤에야 찻잔을 들었다. 차는 아직 따뜻했는데, 입 안으로 넘어가는 감각은 거의 없었다.서신 답신 대신 사람이 왔다.그것도 원작에서 감정 없는 검처럼 움직이던 세르주 아인하르트가, 예고도 없이, 벨포르 관저 응접실에.생각이 거기까지 닿자마자 속이 불편해졌다.응접실 문을 열었을 때 세르주는 이미 서 있었다.검은 망토 끝에 아침 안개가 얇게 묻어 있었고, 그는 장갑 낀 손을 검자루에서 조금 떨어뜨려 두고 있었다.칼을 뽑을 사람의 자세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들어오자 방 안의 무게중심이 그쪽으로 쏠렸다."벨포르 공작.""기사단장님. 예고 없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서신을 받았습니다."할 말 먼저, 설명은 나중. 세르주다운 순서였다."답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기록에 남길 답변은 별도로 올리겠습니다."그는 거기서 말을 끊고, 내 얼굴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오늘
소문으로 번질 뻔한 문제는 이틀 뒤, 관련 서류 몇 장으로 정리돼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황궁 홀에서 벌어진 일은 기록으로 남았고, 기록으로 남은 일은 소문이 되기 전에 용도를 정해야 했다.내 앞에는 외곽 병력 배치 보고서와 황궁 알현 기록 사본, 그리고 아직 봉하지 않은 공작 명의 서신지가 놓여 있다.잉크 냄새가 아침 차보다 먼저 올라왔다."다미안.""예, 누님.""아인하르트 기사단장에게 공작 명의 질의서를 보내. 내용은 관저 외곽 병력 운용 권한, 황궁 기록과의 충돌 여부, 필요 시 공식 답변 요청. 사적인 문장은 빼고."다미안의 펜 끝이 서류 위에서 멎었다."기사단장 각하께 직접 보내시는 겁니까?""직접이 아니라 공식 경로로."공식 서신, 공식 봉인, 공식 경로.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도 할 말은 하는 방식이었다.전 직장에서도 껄끄러운 상대와 일할 때는 메신저보다 메일이 나았다.여기서는 메일 대신 밀랍과 전령이 있을 뿐이고, 목이 날아갈 확률이 더 높을 뿐이다.다미안이 나를 보았다."누님, 그분을 피하시려는 거라면 서신도 접촉입니다.""알아. 그래서 더 공식으로 보내는 거야."사람이 오면 해석이 붙고, 시선이 오가면 이야기가 붙는다. 서신은 적어도 종이 위에서 멈춘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문구는 테오도어 집사님에게 정리받고, 봉인은 내 앞에서 찍어. 전령은 황궁 경유가 아니라 기사단 공식 접수처로 보내.""소문 관리까지 염두에 두신 겁니까?""평판 관리야."머릿속에서는 이미지 관리라는 말이 맴돌았지만, 밖으로 내보낼 단어는 아니었다.다미안은 다행히 더 캐묻지 않았다.이 집안 사람들이 가끔 귀족다운 척을 너무 잘해서 문제고, 가끔은 알아듣지 못해줘서 고맙다.서신은 그날 오후에 나갔다.자주색이 아닌 벨포르의 은보라 밀랍, 공작가 문장, 군더더기 없는 호칭.내가 의도한 메시지는 단순했다.벨포르는 절차를 따른다. 벨포르는 선을 넘지 않는다. 벨포르는 기사단장과 사적으로 엮일 생각이 없다.문제는 사
오후의 황궁 앞에서 레온 카스티야는 마차 발판을 지키고 있었다.붉은 머리에 갈색 눈, 기사답게 곧게 선 자세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내가 발을 내딛자마자 얼굴이 너무 밝아졌다는 점이었다."공작님! 벨포르 호위기사 레온 카스티야, 황궁 동행 명을 받았습니다!""레온. 목소리부터 낮춰.""예, 공작님! 낮추겠습니다!"전혀 작아지지 않았다.다미안이 서류철을 품에 안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저건 기도일까, 체념일까. 둘 다일 가능성이 높았다."공작님이 한 수 먼저 두신 덕에 저들이 손쓸 곳은 줄었습니다. 오늘 황궁에서는 모두가 공작님의 천재적인 전략을 보게 될 겁니다!"아니, 내가 한 건 급한 불 끄기였다.그것도 물이 아니라 젖은 수건을 던진 수준이다.그런데 이 기사 눈에는 내가 전장 지도를 펼쳐 놓고 제국의 판세를 뒤집은 사람처럼 보이는 모양이다."다미안, 홀에 들어가면 내가 먼저 말할게. 네가 서류를 맞춰서 꺼내.""예, 누님.""레온은 문 가까이. 누가 움직이면 막고, 말은 하지 마.""예, 공작님! 침묵까지 명예롭게 수행하겠습니다!"말하지 말라는데 대답부터 너무 컸다.황궁 홀은 대리석 바닥이 사람 목소리까지 차갑게 되돌려 주는 곳이었다.향과 오래된 금박 냄새가 섞여 있었고, 높은 창으로 들어온 빛은 바닥의 문양 위에서 얇게 갈라졌다.황제 제라드 폰 아르네스는 단 위에 앉아 있었다.회색 머리와 짙은 푸른 눈, 움직임이 적은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은 권력자는 더 피곤하다."공작.""예, 폐하.""보고하라."나는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고르고, 다미안이 건넨 필사본을 펼쳤다."폐하, 벨포르 가문 앞으로 제이황자 전하의 명의를 사칭한 문서가 유입되었습니다. 혐의를 받기 전에 먼저 고합니다. 필체, 봉인, 날짜. 세 가지 증거를 제출하겠습니다."홀 안에 일시적으로 정적이 맴돌았다."필체는 황궁 문서국의 정식 서기체가 아니며, 봉인은 제이황자궁의 밀랍을 썼으나 인장이 찍히지 않았습니다. 또한 날짜는 오늘이나, 해당 문서가
다음 날 오전, 서재의 잉크 냄새는 전날보다 옅었고 내 눈 밑의 피로는 전날보다 선명했다.장부와 찢긴 연대기를 나란히 두고 밤을 보낸 대가였다.공작가 침대는 비싼 만큼 푹신했지만,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굴러다니면 깃털 매트리스도 돌판이 됐다.문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들어와."말하고 나서 잠깐 멈췄다.'공작이면 들어오라가 맞나, 들어오십시오가 맞나.'다미안이면 반말이어도 되는 것 같은데, 문밖 사람이 다미안이 아닐 수도 있었다.다행히 문을 연 건 다미안이었다.그는 검은 가죽 서류철 하나를 들었고, 손끝에는 얇은 면장갑을 꼈다. 아침 인사보다 증거 보존이 먼저인 얼굴이었다."누님. 시종 방에서 발견했습니다."서류철이 책상 위에 놓였다.가죽이 나무에 닿는 소리가 작았는데, 이상하게 방 안의 공기가 그 소리에 맞춰 가라앉았다."찻잔을 올린 시종?""예. 침대 밑판 뒤쪽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너무 쉽게 발견됐습니다."그 말이 더 불쾌했다.잘 숨긴 물건은 찾는 쪽을 괴롭히지만, 너무 쉽게 찾히는 물건은 보는 사람의 신경을 찌른다.발견되라고 놓인 증거는 대체로 증거가 아니라 덫이다.나는 서류철을 열었다.첫 줄에 수신처가 적혀 있었다.벨포르.이름 하나가 아니라 가문 전체를 부르는 방식이다.그 아래에는 제이황자의 뜻을 받들어 병력 이동과 물자 지원을 준비하라는 문장이 이어졌고, 끝부분에는 봉랍이 붙어 있었다.문제는 그 봉랍이었다.붉은 밀랍은 굳어 있었지만, 인장 문양이 찍혀 있지 않았다.누군가 도장을 찍기 직전까지 준비해 놓고 멈춘 것처럼 표면만 매끈했다.'아, 미쳤네.'독이 든 차 다음은 반역 조작이야?이 세계 일정 담당자 있으면 면담 좀 하고 싶다.업무 분장표를 이렇게 짜면 현대에서도 노동부에 신고감이라고."완성 전이네.""예. 아직 황궁에 제출된 흔적은 없습니다.""제출되기 전에 우리 방에서 발견되도록 만든 거고."다미안은 내 쪽으로 시선을 들었다.대답은 없었지만 동의였다.이 남자는 "예"를 아끼는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