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카시안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차갑게 식어있던 그의 황금빛 눈동자 속에서, 욕망과 알 수 없는 독점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신을 쫓아다닐 때는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지배욕과 호기심이, 그 파혼서 한 장으로 인해 카시안의 심장을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다.
카시안은 파혼서를 반으로 접어 자신의 품 안 깊숙이 넣었다.
"전하... 그, 그 파혼서는 당장 제가 폐기하겠습니다! 아리아 그 계집이 제정신이 아니어서..."
로제 공작이 안절부절못하며 다가오자, 카시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공작을 제압했다.
"치울 필요 없습니다, 공작."
카시안이 무심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파혼서의 수락 여부는 내가 결정합니다. 그리고..."
카시안의 시선이 아리아가 사라진 복도 끝을 향했다.
"오늘 영애의 태도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공작가의 적통 영애가 이토록 훌륭한 기품을 숨기고 있었을 줄은 몰랐군요."
세라피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카시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리아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명백한 '관심'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갈구하던 알파 킹의 시선이, 파혼을 선언하고 돌아선 아리아에게 완벽히 고정되어 있었다.
카시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응접실을 걸어 나갔다.
응접실의 무거운 목재 문이 닫히자마자 복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리아는 곧게 편 등줄기를 유지한 채 자신의 처소로 향해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스치는 검은 비단 드레스의 마찰음만이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방 안으로 들어선 아리아는 문을 닫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식은땀이 등에 차갑게 배어있었다. 겉으로는 완벽하게 여유롭고 서늘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회귀 직후 단단히 굳어있던 몸으로 최강의 알파 킹이 뿜어내는 기압을 정면에서 받아내는 것은 상당한 체력적 부담이었다.
'하지만 첫 단추는 잘 꿰어졌어.'
아리아는 차가운 물로 얼굴을 적신 뒤 거울을 바라보았다. 맑은 자색 눈동자 속에 전생의 무기력하고 위축되었던 자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카시안과의 파혼 선언은 단순히 그를 거절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실버문 팩 내에서 수동적이고 무능한 영애로 치부되던 자신이 판을 직접 뒤흔드는 주체로 올라섰음을 선포한 것이었다.
그때, 방 문이 거칠게 열리며 쾅 소리가 났다.
"아리아!"
로제 공작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뒤로 불쌍한 표정을 지은 세라피나가 눈물을 훔치며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공작은 짓눌린 성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네가 감히 미쳤구나! 알파 킹 전하 앞에서 파혼이라니! 네가 우리 가문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느냐?"
공작의 고함에 방 안의 하인들이 일제히 몸을 떨며 바닥에 엎드렸다. 전생의 아리아였다면 아버지가 지르는 고함에 놀라 눈물을 흘리며 잘못했다고 빌었을 터였다. 계부인 로제 공작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리아의 삶에서 큰 목표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아리아는 무심한 표정으로 의자에 깊숙이 기댔다. 다리를 우아하게 꼬고 앉은 아리아의 자색 눈동자가 의붓아버지를 차갑게 담아냈다.
"소리를 지르시기 전에 문부터 닫고 말하십시오, 공작님. 가문의 관리자가 영애의 방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소란을 피우는 모습이 하인들에게 보이면 가문의 위신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 뭐라고? 공작님?"
로제 공작은 딸의 입에서 나온 차가운 호칭에 언어장애라도 온 듯 입을 벙긋거렸다.
"그리고 가문을 망하게 하다니요. 도대체 무엇이 망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카시안 전하는 실버문 팩의 최고 지배자이시다! 네가 그분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당장 우리 공작가를 향해 보복이 들어오면 네가 무슨 수로 감당할 작정이냐?"
"보복이라니요?"
아리아의 입가에 옅은 실소가 머물렀다.
"공작님께서는 알파 킹 카시안 전하를 겨우 사사로운 감정으로 영지의 안위를 위협할 좀생이로 보시는 겁니까? 아니면 실버문 팩의 법도를 어기고 이유 없이 귀족 가문을 탄압할 무도한 군주로 보시는 겁니까?"
"그, 그건..."
공작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리아의 말은 법적 맹점을 완벽히 짚은 것이었다.
아리아는 빛나는 은빛 마력을 한 손에 쥔 채, 사색이 되어 바닥에 주저앉은 세라피나를 내려다보았다."세라피나. 너는 공작의 친딸이라 하나, 내 어머니의 순혈 루나 혈통은 단 한 조각도 이어받지 못한 미천한 혈순이다."아리아의 서늘한 일갈이 연회장을 짓눌렀다."어머니의 혈통을 잇지도 못한 네가 감히 어디서 루나의 신성을 논하고, 정통 적통인 나를 단죄하려 드느냐? 네가 저지른 가문 자산 유용 비리 영수증이 내 손에 들려있음을 잊었느냐?""아... 아..."세라피나는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아리아가 내뿜는 순혈 루나의 영적 기압이 그녀의 폐부를 죄어오고 있었다.귀족들 역시 아리아의 완벽한 각성에 소름을 느끼며 세라피나를 향해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진정한 루나의 혈통 앞에서 가짜가 나대다가 망신을 당한 꼴이었기 때문이다.로제 공작 또한 딸의 압도적인 권능에 눌려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렸다.아리아는 손을 거두어 마력을 차분히 거두어들였다.그리고 자리에 서 있던 알파 킹 카시안을 향해 돌아섰다.카시안은 아리아를 바라보는 눈빛이 완벽하게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열망이 전신을 흔들고 있었다.저 여자가 내 루나다.저 고결하고 매서운 여인이야말로 이 제국의 여왕이자, 자신이 평생을 바쳐 굴복시키고 소유해야 할 유일한 존재였다.&nb
카시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그는 슬그머니 아리아의 뒤에 서 있는 실버 앙상블 기사단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들이 차고 있는 검과 갑옷에서 피어오르는 강렬한 마법 기운은, 명백히 자신이 보물고에서 꺼내 보냈던 물건들이었다.카시안의 입가에 기괴한 미소가 번졌다."기사들의 무장이 아주 훌륭하더군. 내가 보낸 보물들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카시안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은밀한 목소리가 아리아의 귓가를 스쳤다."구애의 선물을 '파혼 보증금'으로 삼아 제 기사단을 무장시키다니. 영애의 대담함에는 매번 감탄하게 되는군.""전하의 오만한 선의를 가문의 실질적인 이익으로 환원했을 뿐입니다."아리아는 카시안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나직하게 대꾸했다."파혼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전하께서 저지르실지도 모를 추가적인 무례에 대한 정당한 담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담보라..."카시안의 황금빛 눈동자 속에서 흉포한 욕망이 타올랐다."내가 그 담보를 몰수하고 영애를 내 곁에 묶어두겠다고 한다면 어쩔 셈이지?""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아리아는 차갑게 입가를 올렸다."저는 오늘 이 연회장에서, 제국의 모든 귀족과 영주들이 보는 앞에서 정식으로 선언할 테니까요. 제 어머니의 정통 혈통과
"전하, 기사단장 베른이 이끄는 로제 공작가의 실버 앙상블 기사단이 성채에 도착했습니다."근위대장 녹스가 카시안의 귓가에 조용히 다가와 보고했다.카시안의 입가에 서늘한 호선이 그려졌다. 손가락 끝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지그시 문지르는 그의 전신에서, 참아왔던 흉포한 기대감이 일렁이기 시작했다."드디어 오셨군."그때였다.연회장 입구를 지키고 있던 황실 근위병들의 나팔 소리가 성채 전체를 울렸다.경쾌하게 퍼져나가는 나팔 소리와 함께,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육중한 은빛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가를 향해 쏠렸다.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장한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 들어오는 한 여인이었다."하아..."연회장 곳곳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그곳에 서 있는 여인은, 귀족들이 기억하던 무력하고 위축되어 있던 아리아 로제가 아니었다.아리아는 밤하늘의 칠흑과도 같은 딥 블루 비단 위에, 은실로 섬세하게 고대 루나의 문양이 수놓아진 최고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장식은 과하지 않았으나, 단정하게 올려 묶은 찬란한 은발 사이로 흘러내리는 라벤더 빛 오라가 그녀의 온몸을 고결하게 감싸고 있었다.단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걸이마다 완벽한 기품과 절제된 위엄이 번져 나왔다. 그것은 귀족의 우아함을 넘어선, 이 제국의 정점에 서 있는 지배자만의
기사들이 세라피나의 양팔을 거칠게 잡고 끌고 가자, 세라피나는 악에 받친 비명을 질러댔으나 아리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내부의 적들을 하나씩 마비시키고 세력을 정비하는 과정은 순조로웠다.그때, 저택 중앙 문가에서 황실의 인장이 찍힌 교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하인의 긴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리아는 조용히 찻잔을 들며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도착했군, 카시안.'카시안이 아리아의 파혼 선언에 응수하여 보낸 정면 돌파의 수였다.---다음 날 아침, 공작가의 집무실.황실에서 도착한 교지를 읽어 내린 로제 공작의 손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이... 이게 무슨 소리냐? 알파 킹 전하께서 사흘 뒤 열릴 팩 영주 회의에 아리아 너를 공작가의 유일한 대리인으로 지명하셨다니?"로제 공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참석하여 세라피나를 귀족들에게 알리고 카시안과의 접점을 만들려 했던 계획이 완벽하게 수포로 돌아간 것이었다.옆에 서 있던 세라피나 역시 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아버지! 이게 말이 돼요? 전하께서 어떻게 나나 아버지를 제쳐두고 언니만 지명하실 수가 있어요?"아리아는 두 사람의 비참한 반응을 차분하게 감상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무엇이 이상합니까, 공작님?"아리아의 자색 눈동
"감격할 필요 없습니다, 베른 경."아리아의 자색 눈동자가 차갑고 고결하게 빛났다."당신들은 전 대 루나이셨던 내 어머니께 맹세했던 충직한 기사들이다. 어머니의 재혼 상대라는 이유만으로 가문의 실권을 쥐고 기사단을 압박해 온 로제 공작의 행태는 엄연히 정상적인 가문 운영이 아니었다.""영애님...""나는 오늘 밤 이 자리에서 분명히 선언합니다."아리아는 손을 뻗어 어머니의 유품인 인장 반지를 베른 경의 앞에 내보였다."이 공작가의 진짜 주인은 전 대 루나의 혈통인 나 아리아입니다. 의붓아버지인 로제 공작도, 어머니가 재혼하여 낳은 이부동생 세라피나도 이 가문의 정통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베른 경과 간부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것은 가문 내부의 주도권 싸움을 공식화하는 아리아의 선언이었다."베른 경. 카시안 전하가 보낸 무구들로 기사단의 무장을 완벽히 갖추십시오. 그리고 공작가의 내부 경비 인력을 전부 당신들의 신뢰할 수 있는 기사들로 교체하십시오. 로제 공작이나 세라피나가 가문의 자산에 손을 대려 할 경우, 내 정식 명령서 없이는 손가락 하나도 대지 못하도록 통제하십시오.""명령을 받듭니다, 아리아 영애님!"베른 경은 망설임 없이 칼자루를 쥐며 고개를 숙였다."저희 실버 앙상블 기사단은 오직 순혈 루나의 혈통이신 아리아 영애님께만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기사들의 충성 맹세가 접견실을 묵직하게 채웠다.
"예, 전하... 영애께서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전하께 전달하라 명하셨습니다. 그 무구들과 마석들은 즉시 공작가의 직속 기사단인 실버 앙상블에 하사되어 무장 강화에 사용되었습니다."시종장의 떨리는 보고가 끝나자, 집무실 안에는 베일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녹스는 카시안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대리석 책상을 박살 낼 것이라 생각했다. 알파 킹의 오만한 호의를 전면으로 거절한 것도 모자라, 그 선물을 통째로 가로채 제 기사단의 사기를 올리는 무기로 삼아버린 것은 알파 킹의 권위에 대한 명백한 도발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어진 카시안의 반응은 녹스의 예상을 완벽하게 뒤흔들었다."하하... 하하하하!"카시안의 목구멍을 타고 거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웃음은 분노가 아니었다. 맹수가 기대치 않던 거대한 사냥감의 매서운 반격을 목격했을 때 느끼는, 지독하고 흉포한 희열이었다.카시안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완벽하군. 참으로 완벽해.""전하...?"녹스가 당황하여 카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카시안의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황금빛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있기는커녕, 타오르는 붉은 열기를 띠며 번뜩이고 있었다."보통의 영애들이라면 그 보석에 눈이 돌아가 내 발치에 엎드렸겠지. 혹은 내 압박에 두려워하며 눈물을 흘렸을 테고. 하지만 그녀는 내 호의를 단칼에 '파혼 보증금'으로 재정의해 버렸어. 나를 거절함과 동시에, 내 보물로 제 기사단을 장복하여 스스로의 무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