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계속해라, 아리아 영애."
"감사합니다, 전하."
아리아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실버문 팩의 법에 따르면, 정혼자 간의 합의 혹은 한쪽의 명확한 의사 표명이 있을 경우 정혼 해제 절차를 밟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전하께 그 어떤 가문적 손실이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이 정혼을 깔끔하게 끝내는 것만을 원합니다."
세라피나는 속에서 솟구치는 당황스러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계획이 완전히 뒤틀리고 있었다. 아리아가 카시안에게 매달리다가 버림받아야 자신이 루나의 자리를 차고 들어갈 명분이 완벽해지는데, 아리아가 먼저 카시안을 차버리듯 파혼을 선언하다니?
세라피나는 급히 눈물을 글썽이며 아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언니... 어째서 그래? 카시안 님이 언니에게 무슨 실수를 하셨다고 그래? 전하께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셨는데, 이런 식으로 전하의 명예를 짓밟으면 어떻게 해... 내가 차라리 언니 대신 사과드릴게, 응?"
세라피나는 카시안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며 불쌍한 척을 연기했다.
그러나 아리아는 세라피나의 연극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제정신이 아닌 건 너겠지, 세라피나."
"뭐, 언니...?"
"내가 전하와 파혼을 하든 말든, 그것은 정혼 당사자인 나와 전하 사이의 문제다. 공작의 친딸이라 한들, 어머니의 루나 혈통도 잇지 못한 네가 감히 알파 킹 전하와의 대화에 끼어들어 사과를 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리아의 단호한 일갈이 응접실에 비수처럼 꽂혔다.
루나의 혈통을 잇지 못했다는 지적은 세라피나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세라피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항상 자신에게 온갖 좋은 것을 내어주던 아리아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언니...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세라피나는 눈물을 쏟아냈지만, 아리아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카시안의 시선이 아리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분노인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지독한 불쾌감이면서도, 동시에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흥미였다.
자신을 바라볼 때면 언제나 떨리던 눈빛의 여자가, 지금은 자신을 마치 거추장스러운 짐짝 취급하고 있었다.
"영애는... 내가 이 파혼서를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나?"
카시안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체구와 함께 알파의 짓눌릴 듯한 중압감이 응접실 전체를 뒤덮었다. 그는 아리아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카시안은 아리아의 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전생처럼 그녀를 지배하려는 알파의 본능이었다.
그러나 아리아는 카시안의 손길이 닿기 직전, 우아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카시안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카시안의 황금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전하와의 스킨십 또한 정혼 관계가 유지될 때나 유효한 것입니다."
아리아는 차갑게 선을 그었다.
"파혼서를 받아들이지 않으실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저라는 존재가 실버문 팩의 루나로서 부적합하다고 생각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은 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지혜로운 지배자의 당연한 선택입니다."
"지혜로운 선택이라?"
카시안이 실소에 가까운 바람 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영애를 루나로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고? 누구 마음대로 그런 단정을 내리지?"
"전하의 눈빛과 지금까지의 태도가 증명해 왔습니다."
아리아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더 이상 무의미한 감정 소비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파혼서의 검토는 전하께 맡기겠습니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리아는 카시안을 향해 완벽하고 절제된 귀족의 목례를 한 뒤,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아리아! 서라! 감히 어디를 가느냐!"
로제 공작이 소리쳤지만, 아리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검은 드레스 자락이 우아하게 흩날리며 응접실 문밖으로 사라졌다.
응접실 안에는 오직 서늘한 정적만이 남았다.
카시안은 찻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아리아의 붉은 인장이 찍힌 파혼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양장지를 집어 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감촉 너머로, 방금 전까지 이 서류를 쥐고 있던 아리아의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차가우면서도 고결한 라벤더 향이었다.
카시안의 손가락이 파혼서의 붉은 왁스 인장을 지그시 문질렀다.
'나를 버리겠다라?'
"사흘 전 밤에 나눈 대화는... 여전히 유효한가?"그것은 은밀하게 아리아만을 향해 던진 물음이었다. 파혼서에 서명하라는 그녀의 요구와,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카시안의 집착이 다시금 충돌하고 있었다.아리아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답했다."제 의지는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전하."카시안의 입가에 차가운 실소가 걸렸다."그 고집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참으로 기대되는군."카시안은 손을 들어 신전의 대사제에게 신호를 보냈다."대제전을 거행하라. 전 대 루나의 정통 적통인 아리아 영애가 제국 부족들의 안녕을 비는 첫 번째 성수를 단상에 올릴 것이다."대사제가 깊이 고개를 숙이며 백색 수정으로 만들어진 성수 잔을 아리아에게 내밀었다.아리아는 성수 잔을 품에 안고 단상 중앙의 신성한 알타(祭壇)를 향해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바로 그 순간이었다.신전 좌측 귀족석 구석에 스파이처럼 숨어있던 세라피나가 품 안에서 붉은 마석 조각을 움켜쥐었다. 세라피나의 눈동자에 핏발이 서며 미친 듯한 광기가 터져 나왔다.'죽어라, 아리아! 온 제국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피를 토하고 망신당해라!'세라피나가 마석에 자신의 피를 한 방울 떨어뜨리며 흑마법 주문을 나직하게 읊조렸다.콰르르릉—!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아리아의 몸에 심어둔 저주는 아직 유효합니다! 매개체만 발동시키면 그 계집의 영혼을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알고 있다. 그 매개체는 원래 너희 어머니가 공작가 지하 보물고 근처에 숨겨두었던 것. 아리아가 순혈의 힘을 완벽히 되찾기 전에 그 저주를 폭발시켜야 한다.]마석 너머의 음성이 은밀하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사흘 뒤, 실버문 팩의 고대 대제전이자 대강당 신전 의식이 열린다. 그 자리에는 제국의 모든 영주들과 원로원, 그리고 알파 킹이 참석한다. 아리아가 제국의 정식 대리인 자격으로 신전 단상에 오르는 순간, 매개체의 마인을 터뜨려라.]"신전 단상에서요...?"세라피나의 눈이 광기로 크게 벌어졌다.[그렇다. 제국의 신성한 단상 위에서 순혈 루나의 영혼이 흑마법에 오염되어 발작을 일으키고 피를 토하게 만들어라. 그렇게 된다면 완벽하게 각성했다던 루나의 권능은 사술로 오인받을 것이며, 원로원은 아리아를 영구히 격리할 것이다.]"그러면... 카시안 님도 그 계집을 버리겠군요!"세라피나의 입가에 흉측한 미소가 걸렸다.[영혼이 오염된 루나는 알파 킹조차 품을 수 없다. 네가 일을 완벽히 성공시킨다면, 공작가의 권력과 루나의 자리는 다시 네 것이 될 것이다.]"감사합니다, 수장님! 목숨을 바쳐 거행하겠습니다!"세라피나는 붉은 마석을 품에 깊숙이 집어넣으며 미친 듯이 쿡쿡 웃었다.&nb
어머니의 일기장에 적혀 있던 경고대로라면, 이 저주는 태아 시절부터 아주 미세한 양의 주석과 검은 마석 조각을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인체에 침투시킨 고대의 사술이었다.어머니가 계부인 로제 공작과 재혼한 이후, 혹은 그 이전부터 공작가 내부에 둥지를 틀고 있던 정체불명의 세력.아리아의 자색 눈동자가 밤하늘의 은빛 달처럼 날카롭게 반짝였다."루시."아리아가 나직하게 부르자, 방 문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 루시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부르셨습니까, 아리아 영애님?""내일부터 저택 내에 거주하는 모든 하인들과 하녀들의 소지품, 그리고 세라피나의 처소로 반입되는 물품 일체를 기사단을 동원해 전수 조사해라."루시는 뜻밖의 명령에 순간 눈을 커다랗게 떴으나, 이내 단호한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명령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혹시 특정하여 찾아야 할 물건이 있으십니까?""검은 칠이 된 마석 조각이나, 은밀한 향이 나는 주술용 약초 용기다. 그 어떤 작은 것 하나라도 발견된다면 즉시 베른 기사단장에게 보고하고 물건을 압수해라.""알겠습니다, 영애님."루시가 물러나자, 아리아는 책상 위에 놓인 어머니의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저주를 해제하기 위한 방법은 단 두 가지. 하나는 알파 킹이 지닌 정화 마력을 통해 영혼의 결합을 이루어 저주를 상쇄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저주를 발동시키고 유지하는 '매개체(촉매)'를 찾
"손 치우십시오, 카시안 전하."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손 끝에서 은빛 루나 마력이 폭발하듯 피어오르며 카시안과의 거리를 차갑게 벌렸다."내 몸에 무엇이 서려 있든, 그것은 전하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관여할 바가 아니라고?"카시안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알파의 흉포한 기압이 방 안의 가구들을 흔들었다."네 몸 안에 사악한 흑마법 저주의 뿌리가 내려앉아 있다! 이 저주는 순혈 루나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결국엔 영혼을 파괴하는 고대의 사술이야! 그런데도 내가 모른 척하라는 말이냐?"카시안은 자신의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강렬한 보호 본능과 분노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그는 지금까지 그 어떤 여인에게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리아가 위험에 처해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의 영혼이 흑마법에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이성이 마비될 정도의 거대한 불안감이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어째서지...?'카시안은 제 가슴을 쥐어짜듯 통증을 느꼈다.마치 오래 전부터 아리아를 지키지 못했다는 뼈저린 후회가 가슴 깊은 곳에서 깨어나 그를 옥죄고 있는 듯한 환각이었다.그러나 아리아는 그의 눈빛 속에서 일렁이는 불안과 후회를 차갑게 외면했다."전하께서 걱정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아리아는 책상 위에 봉인된 파혼서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지목했다.
깊은 밤.달빛조차 먹구름에 가려 서늘한 어둠만이 내려앉은 아리아의 침실.아리아는 책상 위에 어머니의 일기장을 펼쳐놓고 흑마법 저주에 관한 고대 문양들을 분석하고 있었다. 방 안에는 은은한 라벤더 향 초가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바로 그때였다.창문 너머로 미세한 바람 소리와 함께, 낮게 깔린 묵직한 기압이 방 안의 공기를 조여왔다.아리아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회귀 후 완벽하게 각성한 순혈 루나의 영적 감각은, 이 저택 전체를 옥죄어오는 압도적인 알파의 아우라를 정확히 감지해 냈다.스스스...테라스 창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칠흑 같은 제복 차림, 사자의 갈기처럼 날리는 검은 머리칼, 그리고 어둠 속에서 붉은 황금빛으로 번뜩이는 눈동자.알파 킹 카시안이었다.그는 저택의 모든 경비망과 기사단의 감시를 비웃듯 완벽하게 뚫고, 아리아의 가장 사적인 공간인 침실로 무단 침입해 있었다.아리아는 깃펜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의자에 기댔다. 조금의 당황함이나 두려움도 없는 서늘한 태도였다."황실의 지배자께서 밤마다 여인의 침실을 담 넘어 들어오는 것이 고귀한 늑대 부족의 전통입니까, 카시안 전하?"아리아의 차가운 목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아리아의 입가에 차가운 실소가 머물렀다."전액 몰수 및 지급 거절이다."아리아는 깃펜을 들어 서류 위에 거침없이 빨간 빗금을 그었다."가문의 자산을 사사로이 유용하고 팩의 신성을 모독한 자들에게 지급될 가문의 돈은 단 한 닢도 없다. 공작과 세라피나에게 생계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식사와 의복만을 제공하고, 그 외의 모든 사치스러운 지원을 차단해라.""명령대로 거행하겠습니다!"재정관과 하인장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이제 의붓아버지와 세라피나의 수족을 완벽하게 묶었다.'아리아는 손가락으로 찻잔을 천천히 더듬으며 자색 눈동자를 깊게 빛냈다. 전생에서 그들은 아리아의 자산을 갉아먹으며 그녀를 기생충처럼 취급했었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는 그 관계가 완벽하게 뒤집혔다. 그들은 아리아가 내어주는 자비 없이는 저택 안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었다.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 깊숙한 곳에서 놋쇠 열쇠를 꺼내 들었다."베른 기사단장.""예, 영애님!""나를 따라오십시오. 어머니께서 남기신 '은빛 달의 보물고'로 갈 것입니다.""알겠습니다!"베른 경의 호위를 받으며, 아리아는 저택 지하 깊은 곳으로 향했다.축축하고 음습한 지하 통로를 지나자, 거대한 고대 마법으로 봉인된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 대 루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