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여행지에서 마지막 아침을 맞이한 이솔은 아침 조식을 먹기 위해 숙소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를 둘러보며 지난 밤 사이의 어둠은 사라지고 인간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안전 여행해서 다행이다...”
이솔은 낮게 혼잣말을 하며 발걸음을 옮겨 식당으로 향했다.
백반 정식을 판매하는 식당에 들러 맛있는 음식을 먹은 후 다시 숙소로 돌아와 여행 가방을 챙겨 체크 아웃을 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이솔은 며칠 동안 주인 없이 비어 있었던 집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먼지를 털고, 빨래를 돌리고, 어질러진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다 보니 집 안에 다시 따뜻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청소를 끝낸 뒤에야 그는 소파에 푹 몸을 기대고, 여행 사진을 올려둔 SNS를 켰다.
알림이 잔뜩 쌓여 있었다. 댓글과 좋아요를 하나씩 확인하며, 어느새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이솔이 여행 중 유명한 명소 앞에서 찍은 사진 밑에 지율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좋은 시간 보낸 것 같아 제가 더 기분 좋네요. 김매니저, 내일 만나요.’
짧은 글귀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느낌이었다. 이솔은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자신은 어릴 때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원에서 자랐고, 그래서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준 존재가 하필이면 뱀파이어인 지율이라는 사실이 묘했다.
그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지율이 마음의 안식처 같은 존재 였다.
‘사장님은 내가 의지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실까?’
이솔은 지율에 대한 생각을 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
.
반란 세력을 소탕한 뒤, 사건이 뉴스로 공식 보도되기까지는 약 이틀이 걸렸다.
우두머리의 처단 과정과 신생 뱀파이어 사냥 작전이 뱀파이어 전용 뉴스 채널을 통해 상세히 공개되자, 뱀파이어 사회는 즉시 큰 파문에 휩싸였다.
“평화 시대에 반란 세력이라니...”
믿기 어렵다는 듯, 많은 뱀파이어들이 온라인과 커뮤니티 곳곳에서 동요했다.
수백 년간 뱀파이어-인간 공존 체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왔기에, 이번 사건은 오랜 평화를 한순간에 흔들어놓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각 안전 지역을 이끄는 리더 뱀파이어들이 잇달아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이미 진압된 사건이며, 추가 위험은 없다. 일상생활을 그대로 유지해도 괜찮다.”
리더들의 단호하고 침착한 발표에, 술렁이던 분위기는 금세 차분히 가라앉았다.
카페 루비 아워를 찾는 뱀파이어 직원들과 단골 손님들 역시 최근 뉴스에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손님으로 오는 뱀파이어들은 음료를 주문하면서도, 계산을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지율에게 물었다.
“사장님..... 진짜 괜찮은 거 맞나요?”
“우리 구역과 가까운 곳에서 반란 세력이 나왔던데 진짜 괜찮은거죠?”
평소라면 농담을 건네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 지율도, 이번만큼은 그들의 눈동자 속 불안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잔을 정리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특유의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지율의 목소리는 불안해 하는 뱀파이어들을 안심시켰다.
“저희 심판자들과 헌터들은 고도로 훈련된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움직였다는 건 이미 상황이 통제되었다는 뜻이에요. 믿어도 됩니다.”
지율의 말에 직원들과 손님들은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런 평화의 시대에 반란 세력이라니.... 말세야, 말세.”
누군가 중얼거리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지율은 혈청 재고표를 들여다보며 담담히 대꾸했다.
“그러게요. 그래도 진압됐으니까 이제 괜찮을 거예요.”
오늘 밤만 해도 뱀파이어 사회 전체가 들썩였다.
반란 세력 소탕 소식은 빠르게 퍼졌고, 뉴스는 계속해서 현장 장면을 재생하고 있었다.
루비 아워 역시 평소보다 더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소식을 나누며 밤의 공기를 흔들어놓았다.
그때— 딸랑– 하고 문 위의 작은 종이 울렸다.
루비 아워의 문이 열리며, 특유의 여유로운 걸음과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닌 해일이 들어섰다.
“지율아~!”
해일이 지율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은재 혈청 라떼 주문했어! 지금 회사로 배달해줘야 해~!”
지율은 해일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고 은재가 좋아하는 혈청을 찾았다.
“해일형. 혹시 모르니까 혈청 라떼 두 잔 만들어 줄테니까 은재한테 아껴 먹으라고 해. 버그 사냥하다가 저번처럼 또 많이 먹으면 큰일나니까.”
해일은 한 숨부터 나왔다.
“당연하지~!! 저번에 신생 뱀파이어들 사냥하고 나서는 그나마 안정기에 접어들어서 망정이지 언제 또 혈청 샷을 남발할지는 아무도 모를일이지.... 안그래?”
해일은 평소처럼 돌아 온 은재를 보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생 뱀파이어들을 사냥할 때 샤냥 본능으로 번들거리 던 그 눈동자를 보고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그때의 감각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래.... 형이 은재 보살피느라 정말 고생이 많다~! 자~! 이건 혈청 샷 많이 넣은 은재 커피 두 잔이랑 이건 형 커피니까 마셔~! 돈은 안 받을테니까 걱정마.”
지율은 혈청 커피는 내어 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해일을 바라보았다.
“형~ 나 진짜 걱정스러워서 이야기하는 건데.... 요즘 형... 쉬는거 맞아? 다크써클 내려오는 것 같은데?”
지율의 걱정스러운 말에 해일은 커피를 배달 가방에 넣으며 웃었다.
“요즘 내가 바쁘기는 했지...... 걱정해줘서 고맙다~! 급한 일은 끝났으니 이제 좀 쉬면서 해야지~! 지율아! 나 이제 간다?? 수고~~!!”
지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해일이 배달을 위해 떠나는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해일은 오토바이에 배달 가방을 단단히 고정한 뒤, 헬멧을 쓰고 은재가 있는 회사로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요즘 자신이 꽤 고생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반란 세력을 처단하러 움직일 때는 피곤이라는 걸 느낄 틈조차 없었지만, 큰 사건이 지나자 누적된 피로와 데미지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핸들을 꽉 잡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몸이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나도 이제 늙은 건가? 미친 체력이었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됬지?”
혼잣말을 내뱉으며 해일은 속도를 조절했다.
은재의 회사 앞에 오토바이를 세운 해일은, 배달 가방을 풀어 자신의 어깨에 걸친 후 은재가 있는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무실 밖에서 살짝 들여다보니, 은재는 여전히 모니터를 응시하며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반짝이고, 손놀림은 익숙하게 키보드를 오갔다.
오랜 긴장과 사냥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은재는 점차 본연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해일은 자연스럽게 벨을 누르고 은재 커피 배달왔다고 알렸다.
“은재야! 혈청 커피 배달 왔다!”
‘혈청 커피’라는 단어에 반응하듯, 은재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에 생기가 번지기 시작했고, 마치 미디어 속에서 ‘파칭-!’ 하는 효과음이 울리는 것처럼 순간의 반짝임이 느껴졌다.
해일은 그 모습을 보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 순간을 위해 사는 녀석이야.”
그리고는 커피 두 잔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지율이가 일부러 두 잔 만들어줬어. 한 잔은 지금 일하면서 마시고, 나머지 한 잔은 천천히 마시라고 하니까 그래야 한다~?.”
해일은 은재의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은재는 그저 혈청 커피에 정신이 팔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해일의 얼굴은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응. 형~! 지율 형한테는 내가 고맙다고 연락할게.”
해일은 이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다.
“야.... 혈청 커피는 보이면서 나는 안보이냐?”
그제야 은재는 눈동자만 위로 올려 해일을 바라보았다.
“됐지? 형. 이제 그만 가.... 나 일해야 되....”
다시 타자를 치며 코딩 작업을 하기 시작하는 은재를 바라보며 해일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너 나한테 뭐 숨기는거 있냐? 너 뒷조사 시작해야 말할래? 아니면 그냥 말할래?”
반 협박식의 말을 하는 해일의 반응에 은재는 어깨를 떨었다.
“내... 내가.... 뭐..... 형은.... 안 바빠?”
은재는 이상황을 넘기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이백년이 넘는 세월을 지켜 본 해일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하은재...... 똑바로 말해.... 뭐야.”
은재는 해일과 눈을 맞추지 못한 채 눈을 내리깔며 할말을 찾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저기.... 형 한테 미안해서.....”
예상치 못한 말에 해일은 벙이쪄 온 몸이 굳어버렸다.
“음? 내가 뭘 잘못들었나?”
해일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수백 년을 살아오면서 별별 말을 다 들어봤지만, 하은재 입에서 ‘미안해서’라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은재. 형이 지금 귀가 막혔나봐. 다시 말해봐.”
해일은 허리를 조금 숙여 은재의 시야까지 내려갔다. 은재는 입술을 꾹 눌러 물고,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저기... 그... 형이 요즘 나 때문에 고생 많잖아. 지율 형도 그렇고... 나 때문에 다들 신경 쓰고....”
“그래서?” 해일의 눈빛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자신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은재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머리 위로 김이 빠져나가는게 눈에 보일 정도 였다.
은재의 귀여운 모습에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달아오른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야... 너 지금 얼굴 터지겠다. 선풍기 주랴?”
해일이 참지 못하고 놀리자 은재는 결국 자신의 책상 위로 엎드리며 얼굴을 숨겨버렸다.
“보지마!!!!!”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높아져서 더더욱 귀여웠다. 해일은 푹—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내가 뭘... 그냥 귀여워서 하는 말인데?”
“그게 더 싫어...”
은재는 낮게 중얼거리며 더 숨기에 바빴다.
해일은 그제야 장난을 멈추고, 은재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려 쓰다듬으며 제법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그거면 충분하다.”
은재는 살짝 눈을 들어 해일을 보았다. 아직 얼굴은 빨갛고, 눈동자는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확실히 안도한 표정이 묻어 있었다.
“형이 네 옆에 있어주는 건... 부담 아니야. 너라서 괜찮은 거야. 너니까 하는 거라고.”
은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해일의 말에 감동한 듯 울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형... 그런 말 갑자기 하면... 더... 더.....”
“더 날 사랑한다고?”
해일이 웃으며 마저 말하자, 은재는 양손으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아아!!!! 짜증나!! 꺼져!!!”
그 순간 해일은 알았다. 은재가 숨기려고 했던 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약해져 있는 모습이 들킬까 봐 부끄러워했던 거라는 걸.
“자, 일해. 혈청 라떼 식는다.”
해일은 은재를 더 놀렸다가는 큰일나겠다 싶어 어깨를 토닥이고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은재는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해일의 뒷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반란 세력들을 사냥할 때 잘못하면 정말 폭주할 뻔했다.
자신의 상태를 신경 써주는 해일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 뿐이었지만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항상 힘들었었다.
“하.... 진짜.....”
은재는 머리를 감싸 쥐며 한숨을 쉬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팀원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우는 순간 뒷걸음질을 했다.지율의 단호한 행동과 무서운 표정이 그녀를 더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무서움 때문이었는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 앉은 지우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서러움에 더 어깨를 들썩이며 얼굴을 숙이는 그녀를 지율은 무표정하게 내려다 볼 뿐이었다.지율은 그동안 뱀파이어들의 정체가 인간 사회에 들어나지 않도록 노력 해왔고, 자칫 자신들의 정체가 들어나는 순간 오랜 시간 쌓아 올린 모든 균형이 무너질 수 있었다.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인간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며 살아왔다.루비 아워에서 마주하는 인간들 역시 직원들이거나, 뱀파이어의 존재를 알고 있는 극히 제한된 이들뿐이었다.그런데 지우가 그 깨져서는 안 되는 불가침의 선을 넘었다.지우가 자신의 정체를 몰랐다는 사실은 변명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상처받은 감정 하나에 휘둘려 익명 게시판에 지율의 이름을 언급했고, 그의 거절을 이유로 루비 아워의 이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지율은 숨을 길게 들이켰다.“지우씨.”지율은 낮게 숨을 고르며 그녀의 어깨에 시선을 떨구었다.“얼굴 들어서.... 날 봐요. 내가 진짜 인간처럼 보이나요?”그의 목소리가 떨어지는 순간, 지율의 눈동자가 천천히 변했다.평소에는 따뜻한 갈색을 띠던 눈빛이 피처럼 붉게 번져 올라갔고, 얇게 감춰져 있던 송곳니가 길고 뾰족하게 모습을 드러냈다.지우는 숨이 넘어갈 듯 울고 있던 것을 멈추고 지율의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그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순간— 그녀의 다리가 풀리듯 힘이 빠지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입술은 파랗게 떨리고, 숨은 끊어질 듯 가쁘게 들이켜졌다.“하... 하아... 하.... 저...
지우는 방 밖에서 들리는 웅성 거림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 보았다.“엄마, 누구야?”등 뒤에서 들리는 딸의 목소리에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지우야! 방에 들어가 있어! 나오지말고 얌전히 기다려!”복도에서는 인터폰을 타고 들리는 모녀의 대화 소리에 요원들은 경고를 하기 시작했다.“어머니! 숨긴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저희 요구를 계속 거부하는 경우 문을 강제 개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지우는 놀란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엄마, 뭐야? 뭔데!!!”그 순간, 현관문 스마트키가 부서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아!!! 열게요!! 열게요!!”지우의 어머니는 공포에 휩싸여 손이 떨리며, 정신을 다잡으려 하다가 결국 현관문을 급히 열었다.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정부 요원들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검은 정장과 군복 차림의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배치되어, 지우의 앞을 가로막았다.“이지우 씨 되시죠?”“네... 그..런데요?”지우는 겁을 먹은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고 답을 하자 상대 남자는 날카로운 눈을 더 치켜 떴다.“저희는 정부에서 나왔습니다. 잠깐 저희와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지우는 순간 얼어붙었다.자신 앞에 서서 신분증을 내밀며 ‘동행’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마주한 지우는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잠.... 잠깐요. 무슨... 무슨 일인데요?”
지우가 루비 아워를 그만둔 지 일주일이 지났다.아무리 머릿속을 뒤집어도 자신이 지율에게 들었던 이야기들과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 그 근본적인 이유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그리고, 이솔에게 느꼈던 질투심, 그리고 지율에게 자신의 마음이 거절당했다는 절망감이 한데 뒤엉켜 버린 탓이었다.그 감정들이 조금씩 부패하듯 마음속 깊이 스며들면서, 지우는 더 이상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루비 아워를 떠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그날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어디에도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속앓이만 계속하던 지우는, 결국 자신이 주로 눈팅만 하던 익명 게시판을 떠올렸다.그곳이라면, 얼굴도 이름도 드러내지 않은 채 마음속 깊이 쌓인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익명이라는 그림자 뒤에 숨으면 누군가에게 위로 한마디쯤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결국 결심했다. 자신이 겪은 일을 익명으로 털어놓기로. 그러나 그 선택이, 지우에게 있어 최악의 한 수가 될지는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지우는 익명 게시판의 작성 칸을 열어놓고 잠시 손가락을 멈춘 채 숨을 골랐다.하지만 한 번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그는 **‘루비 아워’**라는 상호명과 지율의 실명을 적어 넣으며, 자신이 겪었다고 믿는 일들을 하나하나 풀어놓기 시작했다.지율에게 느꼈던 그리움, 사랑 고백이 거절되던 순간의 절망감, 그리고 이솔에 대한 복잡한 질투까지.... 마치 누군가에게라도 꼭 알아주길 바라는 듯, 지우는 기억 속 감정들을 빠짐없이 글로 적었다.“내가 사장님만 바라보면서 루비 아워에 쏟은 정성이 얼만데....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지우는 이성적인 판단을 전혀 할 수 없
지우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지율이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해일과 은재는 그를 위로하며 고생하고 있는 그 시간..... 이솔은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었다.이솔은 버스 창문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햇빛은 유리에 부딪혀 눈부신 반짝임을 만들고, 도심은 점점 멀어지며 산과 들이 펼쳐지고 있었다.“또 여행을 가도 되는 걸까....”그녀는 잠시 고민했지만, 곧 작은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돌아가면 더 열심히 하면 되지.”지난 휴가 때 우연히 보았던 강릉의 바다는 아직도 선명했다.거센 파도 대신 잔잔하고, 바람도 부드러워 마음을 편하게 해주던 그 순간.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다시 찾아갈 이유가 있었다.이번 여행을 다녀오면 해일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훨씬 선명해질 거라 믿으며, 이솔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환하게 웃었다.강릉 터미널에 도착한 이솔은 바로 택시를 타고 바로 바다로 향했다.그동안 고민으로 답답했던 마음은 바다를 보면 해결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이솔은 강릉의 바다를 보며 자신의 모든 고민들을 깊은 바다 속으로 던져버린 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자고 마음 먹었다.루비 아워에서 근무를 시작 후 몇 년동안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여행을 해본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보며 해일에 대한 생각도 해보았다.루비 아워로 돌아가면 자신은 해일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예전의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보는 것이 가능할까.... 고민을 해보았다.해일이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강릉으로 오기 직전에서야 비로소 또렷하게 깨달았다.그가 보내온 작은 신호들, 가까워지려는 눈빛과 말투... 뒤늦게 떠올려보니 모두 의미가 있었다.그리고 이솔은
지우는 잠시 말을 잃었다. 사무실 안의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심장만이 요동쳤다.‘출근을 하지 말라니?’순간 머릿 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끼며 지율을 바라보았다.“사장님....?” 목소리가 떨렸지만, 끝내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지율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시선을 돌렸다.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그 냉정함이 지우의 마음을 더 깊이 찔렀다.지우는 입을 달싹거렸지만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는 지율을 보니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말씀드린 대로 오늘 퇴근하세요. 그리고... 다시 출근할 일은 없을 겁니다.”지우는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처를 껴안은 채, 단호하게 자신을 밀어내는 지율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사장님... 오늘은 정말 죄송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직원 휴게실로 들어가 자신의 사물함을 열어 가방을 챙겨 나왔다.지율에게는 목례만 한 채, 무겁게 발걸음을 옮겨 루비 아워를 나섰다.밖으로 나오자마자 지우는 코너를 돌아 골목길로 접어들었다.마음속 울분과 상실감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눈물이 쏟아졌다. 발걸음도 채 가뿐히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거웠고, 결국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지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비 아워 매니저 자리가 앞으로 2주 동안 비게 된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마음속으로는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지만, 일단 현실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루비 아워 문이 열리고 인간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평소와 달리 김매니저가 아닌 지율이 있는 모습을 보고, 직원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지우는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루비 아워 문을 밀었다.차가운 아침 공기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매장 안에서,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며 지난 밤 정리해둔 생각들을 다시 떠올렸다. 어제 내내, 마음 한편이 뒤죽박죽이었다.짜증, 섭섭함,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조금의 질투까지.하지만 감정만을 앞세워 말을 꺼내면, 오히려 더 어린 티만 날 것 같았다.정확하게. 침착하게. 버벅거리지 말고. 지우는 스스로에게 여러 번 되뇌었다.지율 앞에 서면 늘 마음이 괜히 조급해지고 목소리도 이상하게 높아졌지만, 오늘만큼은 그러면 안 됐다.그는 사장이고, 자신은 직원이다. 그리고 자신의 불만과 감정은 분명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문제였다.지우는 직원 휴게실 안 자신의 사물함 앞에 서서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좋아.... 오늘은 꼭 제대로 말하자.’루비 아워 매장 한켠에는 지율이 늘 그랬듯, 퇴근 전 매니저에게 꼼꼼히 인수인계를 정리해 둔 서류들이 놓여 있었다.지우는 직원 휴게실 문 밖으로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살폈다.심장이 괜히 조금 빨리 뛰었다.오늘은 꼭 말해야 해. 흔들리지 말자. 문을 밀고 나간 순간, 지율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지우 씨, 인수인계해야 하니까 이쪽으로 와요.”그 목소리는 따뜻했고, 말끝은 다정하게 내려앉았다.딱 그 한마디에 지우는 숨이 잠깐 멎은 것 같았다.가슴이 간질거리고, 눈길을 피하고 싶을 만큼 떨렸다.하지만—오늘만큼은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됐다. 지우는 황홀함에 휘말릴 뻔한 자신을 다잡으며 머릿속의 생각을 다시 정리했다.그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