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
“접지칼이에요. 아까 보셨던 거요.”
나는 상자를 가방에 넣지 않고 뚜껑을 열었다. 경란의 시선이 흰 손잡이에서 받침 아래로 내려갔다.
“밑에는?”
“닦는 천이 들어 있어요.”
천을 꺼내 펼쳤다. 아무 무늬도 없는 천이었다. 경란은 한쪽 끝을 잡았다가 놓았다.
“저런 것까지 챙겨 줬네.”
나는 천을 접어 받침 아래에 넣었다.
“도구에 묻은 풀을 그대로 두면 다음 종이에 옮거든요. 쓰고 나면 닦아 둬야 해요.”
“네가 뭘 쓰는지 이헌이가 어떻게 알았을까.”
뚜껑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상자 모서리를 맞춰 닫았다.
“복원 맡기신 책 때문에 작업실에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 보셨나 봐요.”
“의뢰인한테 그런 것도 보여 줘?”
“작업하는 걸 궁금해하시면요.”
경란은 내 가방 안을 잠깐 보았다. 선물 포장지 옆으로 평소 쓰던 도구집이 나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 지퍼를 조금 열었다. 닳은 접지칼 끝이 보였다.
“이건 오래 써서 끝이 얇아졌어요. 오늘 받은 건 두꺼운 종이에도 쓸 수 있겠어요.”
경란은 도구집을 들여다보다 몸을 바로 세웠다.
“그래. 일에 쓰는 거면 잘 써야지.”
“네. 잘 쓰겠습니다.”
나는 도구집과 상자를 차례로 넣었다. 경란은 내가 가방을 닫는 것까지 보고 돌아섰다.
거실 입구에서 주원이 수건을 들고 나왔다. 바닥의 물기를 닦으려 하자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줘요. 그건 손 닦는 거예요.”
“이미 닦았는데요.”
“그럼 손에 다시 쓰지 말고.”
주원이 수건을 등 뒤로 감췄다가 순순히 내놓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 옆에 내려놓았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경란이 복도 안쪽을 가리켰다.
“주방 지나서 왼쪽이야. 문이 닫혀 있으면 두드리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거실을 나왔다. 등 뒤에서 주원이 내 자리를 묻는 소리가 들렸다. 경란이 화장실에 갔다고 답했다.
복도에 들어서고 나서야 쥐고 있던 손을 폈다. 포장지에 눌린 자국이 손가락에 남아 있었다.
◈
주방 문 앞에 이헌이 서 있었다.
빈 잔을 쟁반에 내려놓던 손이 멈췄다. 나는 이헌 앞을 지나려다 걸음을 늦췄다.
“괜찮아요?”
거실에서는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네. 칼이랑 천 보여 드렸어요.”
“곤란하게 했네요.”
“제가 오래 봤잖아요. 상자를 닫지도 않고.”
이헌은 쟁반에서 손을 뗐다. 주방 안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나는 왼쪽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쪽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누가 쓰고 계신가 봐요.”
“아버지 들어가셨습니다.”
나는 화장실에서 조금 떨어져 기다리려고 했다. 이헌도 거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복도 끝에서 경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헌아.”
이헌이 멈췄다.
“아까 가져간 잔은 어디 뒀니?”
바로 대답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화장실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이헌은 잔을 내려놓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경란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이헌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 상자 안을 들여다보던 얼굴이 떠올랐다. 나와 이헌을 함께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문에 손을 댔다. 손잡이가 돌아갔다.
세제가 든 통과 수건 선반이 보였다. 안쪽에서는 건조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열린 틈으로 먼저 들어갔다. 이헌은 문밖에 남아 나를 보았다. 나는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작게 말했다.
“잠깐만요.”
이헌이 들어왔다. 문을 닫을 때까지 이헌의 손은 문틀에 머물렀다. 나를 밀거나 당기지 않았다.
걸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곧 문밖에서 발소리가 멎었다.
“주방에 없니?”
경란의 물음에 할머니가 대답했다.
“잔은 여기 있어요. 씻으려고 내놓으셨네.”
“사람은 못 봤어요?”
“설거지하느라 못 봤지.”
나는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경란이 복도 반대쪽으로 몇 걸음 옮겼다.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회장의 목소리가 짧게 들렸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
세탁실은 안쪽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벽을 따라 선반이 붙어 있었고, 세탁기 위에는 빈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건조기 창 안에서 수건이 돌았다.
나는 세탁기 앞에 섰다. 이헌은 문 옆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50cm쯤 되는 바닥이 비어 있었다.
건조기가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문밖 말은 끝부분만 들렸다. 발소리가 멀어진 뒤에도 나는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이헌이 문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가 나를 보았다.
“제가 먼저 나갈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열면 제가 보여요.”
문을 열면 거실까지 복도가 이어졌다. 이헌 뒤에 숨을 곳도 없었다. 세탁기와 선반 사이에 서 있는 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터였다.
이헌은 다시 문에서 손을 뗐다.
“조금 기다리죠.”
나는 선반 끝을 보았다. 접어 놓은 수건 아래로 종이 포장지가 삐져나와 있었다.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남의 집 물건이었다.
“왜요?”
“수건이 떨어질 것 같아서요.”
이헌이 돌아보았다. 맨 위 수건의 귀퉁이가 선반 밖으로 나와 있었다. 이헌은 그것만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됐어요.”
나는 쥔 손을 풀었다가 다시 모았다.
바깥에서는 경란이 주원을 부르고 있었다. 대답이 들리지 않자 한 번 더 이름을 불렀다. 이헌은 그 소리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아까 선물은 부담됐어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그럼 됐습니다.”
“실장님은 안 물어보시네요.”
“뭘요.”
“마음에 드는지요.”
이헌의 눈이 내 손에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상자 닫기 싫어하는 건 봤어요.”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거실에서는 포장지를 버리기 싫어서 오래 접었고, 칼을 넣은 뒤에도 다시 꺼내 보고 싶었다.
“내일 작업실 가서 써 보려고요.”
“쉬는 날인데.”
“제 책에 써 보면 되니까요.”
“손에 안 맞으면 말해요.”
“안 맞아도 고쳐 쥐면 돼요.”
“그러지 말고요.”
말이 짧아졌다. 이헌은 소매 끝에 손을 댔다가 그대로 내렸다.
“손 아프게 쓰지는 마요.”
나는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쌌다. 굳은살 옆에 실이 스친 자리가 있었다. 일할 때는 잊고 있던 곳이었다.
“알겠어요.”
건조기 안에서 단추 같은 것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놀라 창 쪽을 봤다. 수건 사이로 작은 베갯잇이 지나갔다.
이헌이 웃지 않고 기다려 주어서 더 얼굴을 들기 어려웠다.
나는 발끝을 조금 옮겼다. 뒤쪽 세탁기에 치마가 닿았다. 이헌이 곧바로 물었다.
“좁아요?”
“아니요. 여기 있어도 돼요.”
“나경아.”
문밖 소리에만 신경을 쓰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헌은 말을 잇지 않았다. 복도에서 접시 부딪치는 소리가 난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불편하면 지금 나가도 됩니다. 제가 설명할게요.”
“뭐라고요?”
“화장실 기다리다 만났다고요.”
사실이었다. 나는 문을 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때에 나왔다면 그 말로 끝났을 것이다.
“제가 문부터 열었잖아요.”
“그건 말하지 않아도 돼요.”
“실장님 혼자 잘못한 일로 만들지는 마세요.”
이헌이 나를 보았다. 나는 목소리를 더 낮췄다.
“저도 여기 있고 싶어서 들어왔어요.”
건조기 소리가 계속 났다. 나는 이헌의 셔츠 단추를 보다가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이헌은 문에 등을 붙이지도, 내 쪽으로 오지도 않았다.
그 사이가 아까보다 더 좁게 느껴져서 나는 세탁기에서 몸을 뗐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이헌과 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발소리는 문 앞을 지나갔다. 물을 잠그는 소리가 나고, 회장이 기침했다.
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여기 들어오는 건 아니었는데.”
말하고 나서 이헌을 보았다.
“후회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이헌이 조금 웃었다.
“알아요.”
“너무 빨리 아신다고 하지 마세요.”
“그럼 기다릴게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이헌이 웃는 것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거실에서는 의자와 식탁 때문에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이헌은 웃음을 거둔 뒤에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에 넣을 것도 없는데 빈손을 허리 옆으로 내렸다. 이헌에게 다가가지는 않았다.
“아까는 답답했어요.”
“거실에서요?”
“주원 씨가 밖에 나가 있을 때요. 다들 제 얼굴을 보시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나오지 그랬어요.”
“제가 일어나면 실장님도 보실 것 같아서요.”
이헌의 손이 문 옆에서 멈췄다.
나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여기까지 따라오시게 했네요.”
“제가 들어왔습니다.”
“알아요.”
이번에는 내가 먼저 대답했다. 이헌은 잠시 눈을 내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에서 식기 옮기는 소리가 그쳤다. 문 아래로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손잡이가 내려갔다.
◈
문이 조금 열렸다. 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할머니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헌이 먼저 몸을 세웠다. 나는 세탁기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할머니의 눈이 이헌에게서 내게로 옮겨 왔다. 내 손이 치마 옆선을 잡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폈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바구니를 문 안으로 밀었다. 문이 더 열리지 않게 바구니 모서리가 바닥에 닿았다.
“수건 가지러 왔어요.”
복도에 들릴 목소리였다.
이헌이 선반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직접 수건을 꺼내 바구니에 넣더니 손바닥으로 위를 눌렀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나를 보며 손가락을 입에 댔다. 그러고는 복도로 고개를 내밀었다.
“여긴 아무도 없네.”
거실 쪽에서 경란이 물었다.
“누구 찾아요?”
“작은 가위요. 수건에 실이 나와서.”
할머니가 바구니에서 수건 끝을 들어 보였다. 실제로 가장자리 실이 길게 풀려 있었다. 이헌이 선반의 통을 가리켰다. 할머니는 그쪽을 보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주방에서 찾으면 돼요.”
문이 닫혔다.
나는 닫힌 문을 한동안 보았다. 손잡이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할머니가 바구니를 내려놓는 소리가 조금 떨어진 데서 났다.
“보셨어요.”
내가 작게 말했다.
“네.”
“모른 척해 주신 거죠.”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세탁기에서 떨어져 바로 섰다. 할머니가 문을 막아 주던 바구니 모서리가 떠올랐다. 우리가 보이지 않도록 서 있던 자리도.
그대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갈게요.”
“제가 먼저 확인할까요?”
“아니요. 따로 나가는 게 낫겠어요. 저는 화장실 기다리던 중이었으니까.”
이헌은 문 앞에서 비켜섰다. 나는 손잡이 앞까지 걸어갔다. 이헌 옆을 지날 때 소매에 닿지 않으려고 팔을 몸에 붙였다.
“가방은 거실에 있어요.”
이헌이 낮게 말했다.
“네. 선물도요.”
“천천히 가요.”
나는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 닿았다. 아까는 경란에게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이 문을 열었다. 이제는 문밖에 누가 있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귀를 기울였지만 건조기 소리만 들렸다.
나는 손잡이를 반쯤 내렸다. 그때 복도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그건 내가 가져갈게요. 그냥 둬요.”
주원이 대답했다.
“빈 잔밖에 없는데요.”
“옷에 물 튀어요.”
나는 내렸던 손잡이를 놓았다. 이헌이 나를 보았다.
주원의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세탁실 문 아래에서 그림자가 멈췄다. 나는 손을 거두지도 못한 채 문을 보았다.
“나경 씨, 거기 있어?”
(32화 끝)
『오늘 일정: 12월 31일 화요일 저녁, 해윤제지 송년 모임』“약혼을 끝내면 다시 갚으라는 거예요?”아버지가 독촉장 아래를 보았다.“담당자는 형식이라고 했어. 집안끼리 약속한 걸 적어 둔 거라고.”“그럼 왜 대출 서류에 찍어요.”나는 날짜와 도장이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는 도장을 손으로 가리지 않았다.“이것도 확인받아라.”“원본은 아버지가 갖고 계세요. 다른 서류하고 섞지 마시고요.”나는 빈 봉투에 독촉장을 넣었다. 겉에 받은 날짜를 적어 달라고 하자 아버지가 펜을 들었다.“연말에 직원들하고 밥 먹기로 했는데.”“그날도 서류 갖고 오실 거예요?”“아니.”“그럼 저도 갈게요. 끝나면 같이 집에 가요.”아버지가 날짜를 적은 봉투를 서랍 안에 넣었다.◈화요일 저녁, 공장 식당 문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오늘은 일 얘기 금지』아래에 작은 글씨가 더 있었다.『반장님도 금지』나는 가방을 어깨 뒤로 돌리고 문을 밀었다. 식탁을 붙이는 소리와 수저를 나누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염 반장이 종이를 가리켰다.“저거 네가 썼냐?”“저 이제 왔어요.”“누가 썼는지 글씨만 보면 모르냐?”“종이 고치는 사람이에요. 글씨 주인 찾는 사람 아니고요.”안쪽에서 웃음이 났다. 염 반장은 문에 붙은 종이를 떼지 않고 의자를 들었다.
『오늘 일정: 12월 27일 금요일, 해윤제지 아버지 서류 확인』“무슨 거래요?”나는 문턱에서 발을 돌렸다. 주원은 흰 휴대폰에 얹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여기서 본 거,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파일 이름밖에 못 봤어요.”“그것도.”열린 문 너머에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났다. 주원은 의자를 당겨 문 쪽을 보았다. 발소리는 복도 반대편으로 멀어졌다.“대신 뭘 해 주실 건데요?”“나경 씨가 어디서 누구 만나는지 안 물을게.”나는 가방끈을 쥔 손을 내렸다.“아버지에 관한 일이면요?”주원이 내 얼굴을 보았다.“우리 아버지?”“제 아버지요. 해윤 일.”주원은 뒤집힌 휴대폰을 서랍에 넣었다.“그건 나경 씨한테 먼저 말할게. 내가 아는 건.”“저도 여기서 본 건 말하지 않을게요. 다만 저한테 해윤 일을 숨기라고 하지는 마세요.”“그 정도면 됐네.”주원이 일어났다. 나는 먼저 복도로 나갔다. 계단 아래에서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금요일 새벽, 공장 사무실 창에 불이 켜져 있었다.나는 택시에서 내려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작업실에 가져갈 공장 문서를 받기로 한 건 아침이었다. 전날 밤 아버지에게 시간을 확인하려고 전화를 했을 때, 수화기 너머로 공장 안내 방송이 들렸다.아버지는 집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새벽에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도 같은 방송이 들렸다.현관문을 밀자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네. 나갈게요.”내 대답에 문밖 그림자가 옆으로 물러났다.나는 이헌을 돌아보았다. 이헌은 건조기 옆으로 비켜서 있었다. 문을 조금 열어도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내 손이 손잡이에서 멈추자 고개만 끄덕였다.나는 혼자 문밖으로 나갔다.주원은 복도 벽에 기대 있었다. 셔츠 목의 단추가 풀려 있었고, 손에는 검정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화면이 켜졌다가 꺼졌다.“왜 여기서 나와?”“할머니가 수건 정리하셔서 잠깐 도와드렸어요.”할머니가 우리 때문에 꺼낸 수건이 떠올랐다.주원은 문보다 내 얼굴을 보았다.“손까지 씻고 나온 줄 알았네. 한참 안 오길래.”“화장실에 회장님이 계셨어요.”“아. 그래서.”주원이 눈을 감았다 떴다. 세탁실 안에서는 건조기가 돌아갔다. 나는 손잡이를 잡은 채 문을 끝까지 닫았다.“거실에 가실 거예요?”“거기 말고. 나 잠깐만 앉아 있고 싶은데.”주원이 손으로 뒷목을 눌렀다. 손등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아까 수건으로 바닥을 닦던 손이었다.“나경 씨도 좀 쉬어. 얼굴 굳었어.”나는 주원이 가리키는 계단을 보았다.“어디서요?”“내 방. 아래에 있으면 엄마가 계속 뭐 시키잖아.”주원이 계단 쪽으로 먼저 걸었다. 나는 세탁실 문을 한 번 보고 따라갔다. 문 아래로 불이 새어 나왔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거실 앞에 놓아 둔 가방을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접지칼이에요. 아까 보셨던 거요.”나는 상자를 가방에 넣지 않고 뚜껑을 열었다. 경란의 시선이 흰 손잡이에서 받침 아래로 내려갔다.“밑에는?”“닦는 천이 들어 있어요.”천을 꺼내 펼쳤다. 아무 무늬도 없는 천이었다. 경란은 한쪽 끝을 잡았다가 놓았다.“저런 것까지 챙겨 줬네.”나는 천을 접어 받침 아래에 넣었다.“도구에 묻은 풀을 그대로 두면 다음 종이에 옮거든요. 쓰고 나면 닦아 둬야 해요.”“네가 뭘 쓰는지 이헌이가 어떻게 알았을까.”뚜껑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상자 모서리를 맞춰 닫았다.“복원 맡기신 책 때문에 작업실에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 보셨나 봐요.”“의뢰인한테 그런 것도 보여 줘?”“작업하는 걸 궁금해하시면요.”경란은 내 가방 안을 잠깐 보았다. 선물 포장지 옆으로 평소 쓰던 도구집이 나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 지퍼를 조금 열었다. 닳은 접지칼 끝이 보였다.“이건 오래 써서 끝이 얇아졌어요. 오늘 받은 건 두꺼운 종이에도 쓸 수 있겠어요.”경란은 도구집을 들여다보다 몸을 바로 세웠다.“그래. 일에 쓰는 거면 잘 써야지.”“네. 잘 쓰겠습니다.”나는 도구집과 상자를 차례로 넣었다. 경란은 내가 가방을 닫는 것까지 보고 돌아섰다.거실 입구에서 주원이 수건을 들고 나왔다. 바닥의 물기를 닦으려 하자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커튼이 다 내려간 뒤에도 나는 2층 창을 올려다봤다. 이헌이 현관문을 연 채 기다렸다. 그날은 안에서 손만 녹이고 바로 나왔다. 경란에게서는 6일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다.12월 24일 저녁, 나는 같은 현관 앞에 다시 섰다. 2층 창가의 커튼은 걷혀 있었다.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는데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구두 밑창에 붙은 눈이 매트에 떨어졌다.“나경 씨, 손 시려?”주원이 내 뒤에서 문을 닫았다.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괜찮아요.”“장갑 좀 끼고 다녀. 오늘 사진도 찍을 건데 손 빨갛겠다.”주원은 내 가방을 받아 들려다 안에서 종이봉투가 나오자 웃었다.“내 선물?”“회장님 드릴 거예요.”“나는 빈손으로 들어왔는데. 옆에 서 있어야겠다.”거실에서는 접시 놓는 소리가 났다. 경란은 식탁 끝에서 냅킨을 펴고 있었다. 진주 귀걸이 아래로 머리카락 한 올이 붙어 있었다.“늦지는 않았네. 외투 벗고 앉아.”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렸을 때 이헌이 보였다. 식탁 건너 창문 옆이었다. 소매를 두 번 접은 손에 물잔을 들고 있었다.“오셨습니까.”“네, 삼촌.”입안에 남은 호칭을 삼켰다. 이헌은 물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사이에는 의자가 여섯 개 놓여 있었다.주원이 내 옆 의자를 빼 주었다.“자기, 오늘은 일 얘기 금지야. 아버지도 약속하셨고.”석진이 금색 시계를 보고 웃었다.“아직 내가 아무 말도 안 했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본가 장부 수선 마무리』나는 가방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맡기신 건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회장은 책상 위의 장부를 당겼다. 끈이 눌린 자리를 살피던 손이 멈췄다.“그럼 됐네.”더 묻지 않았다. 나는 기록지 한쪽에 수선한 자리를 짚어 드린 뒤 서재를 나왔다. 이헌이 문을 닫았다. 문고리에서 손을 뗄 때까지 나는 복도에 서 있었다.안에서는 서류 넘기는 소리가 났다.“외투 가져올게요.”이헌이 현관으로 갔다. 나는 가방 안쪽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 모서리에 손끝이 닿았다가 빠졌다. 여기서 화면을 켜면 서재 문이 열려도 못 볼 수 있었다.이헌이 코트를 벌려 주려다 내 가방을 봤다.“놓고 입어요. 제가 들고 있을게요.”“바닥에 안 닿게만 해 주세요.”가방을 건네고 팔을 넣었다. 소매 안에서 옷이 말려 올라가 손목을 당겼다. 이헌은 기다렸다가 가방을 돌려줬다. 검은 외투는 아직 팔에 걸쳐 있었다.“회사로 가세요?”“조금 있다가요.”나는 현관 유리 너머를 봤다. 정원 길에는 눈이 치워져 있었다. 담장 아래에만 군데군데 흰 눈이 남았다.“잠깐 걸어도 될까요?”이헌이 외투를 입었다.“정원으로 나가요.”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가방 밑이 젖어 있었다. 서재에서 천을 걷을 때 묻은 건지, 바닥에 남은 눈이 닿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가방을 기울여 바닥의 이음매부터 확인했다.“안까지 들어갔어요?”“겉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