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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주원의 방

Auteur: Jino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10-23 17:00:00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

“네. 나갈게요.”

내 대답에 문밖 그림자가 옆으로 물러났다.

나는 이헌을 돌아보았다. 이헌은 건조기 옆으로 비켜서 있었다. 문을 조금 열어도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내 손이 손잡이에서 멈추자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혼자 문밖으로 나갔다.

주원은 복도 벽에 기대 있었다. 셔츠 목의 단추가 풀려 있었고, 손에는 검정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화면이 켜졌다가 꺼졌다.

“왜 여기서 나와?”

“할머니가 수건 정리하셔서 잠깐 도와드렸어요.”

할머니가 우리 때문에 꺼낸 수건이 떠올랐다.

주원은 문보다 내 얼굴을 보았다.

“손까지 씻고 나온 줄 알았네. 한참 안 오길래.”

“화장실에 회장님이 계셨어요.”

“아. 그래서.”

주원이 눈을 감았다 떴다. 세탁실 안에서는 건조기가 돌아갔다. 나는 손잡이를 잡은 채 문을 끝까지 닫았다.

“거실에 가실 거예요?”

“거기 말고. 나 잠깐만 앉아 있고 싶은데.”

주원이 손으로 뒷목을 눌렀다. 손등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아까 수건으로 바닥을 닦던 손이었다.

“나경 씨도 좀 쉬어. 얼굴 굳었어.”

나는 주원이 가리키는 계단을 보았다.

“어디서요?”

“내 방. 아래에 있으면 엄마가 계속 뭐 시키잖아.”

주원이 계단 쪽으로 먼저 걸었다. 나는 세탁실 문을 한 번 보고 따라갔다. 문 아래로 불이 새어 나왔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실 앞에 놓아 둔 가방을 챙기는데 경란이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가니?”

“위에서 잠깐 쉬려고요.”

주원이 계단 난간을 잡고 답했다.

“나경 씨 머리 아프대요.”

“제가 언제요.”

작게 묻자 주원이 나를 보았다.

“지금부터 아파도 돼.”

경란은 내 가방과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빈 잔을 가리켰다.

“수정과 마저 마시고 가.”

나는 식탁으로 가서 잔을 들었다. 남은 수정과를 마시는 동안 주원이 계단에서 기다렸다. 경란은 내가 잔을 내려놓자 주원에게 말했다.

“문 열어 두고.”

주원이 대답 없이 계단을 올랐다. 나는 경란에게 고개를 숙이고 뒤따랐다.

계단 중간에서 아래를 보았다. 주방 쪽 복도 끝에 이헌이 나와 있었다. 이헌은 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주원이 위에서 불렀다.

“나경 씨.”

나는 가방끈을 고쳐 잡고 올라갔다.

◈

주원의 방은 계단에서 멀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진한 향수 냄새가 났다. 창가에 책상이 있었고, 맞은편 벽에는 책장이 붙어 있었다. 주원은 의자에 걸린 재킷을 옷장에 넣었다.

“여기 앉아. 겉옷은 줘도 되고.”

“괜찮아요.”

나는 문 가까이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가방은 무릎에 올렸다. 주원은 책상 의자를 끌어와 마주 앉았다.

“오늘 오래 서 있었네.”

나는 책장으로 눈을 돌렸다. 아래 칸에는 호텔에 관한 책이 꽂혀 있었다. 가운데에는 상자와 사진 액자가 있었고, 맨 위에는 남색 상장철이 거꾸로 놓여 있었다.

금박 글씨가 아래로 향했다.

“저건 일부러 저렇게 두신 거예요?”

“뭐?”

내가 가리키자 주원이 올려다봤다.

“아, 저거. 떨어진 걸 그냥 꽂았나 보네.”

“안에 종이가 밀려 나왔어요.”

상장철 사이로 종이 귀퉁이가 나와 있었다. 접힌 부분이 선반에 눌려 있었다.

주원이 책장으로 갔다. 팔을 뻗어 상장철을 꺼내다가 위에 있던 빈 상자까지 건드렸다. 나는 일어나 떨어지는 상자를 받았다.

“이런 건 잘 받네.”

“종이 떨어지는 걸 많이 봐서요.”

상자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주원은 상자를 책상에 놓고 상장철을 펼쳤다. 안쪽 종이에는 어린 주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글씨 쓰기 대회에서 받은 상이었다.

“이런 것도 받으셨어요?”

“엄마가 내보냈어. 글씨는 내가 썼고.”

나는 소파 앞 탁자에 상장철을 내려놓았다. 끼우는 비닐이 접혀서 종이까지 눌린 상태였다.

“꺼내 봐도 돼요?”

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비닐 끝을 벌리고 상장을 뺐다. 손끝으로 접힌 자리를 펴려다가 멈췄다. 오래 눌린 종이를 마른손으로 문지르면 표면부터 상할 수 있었다.

“이건 작업실에 가져가면 펴 드릴 수 있어요.”

“그 정도는 아닌데.”

“그럼 비닐만 바로 끼울게요. 종이가 더 접히지는 않게.”

주원은 탁자 건너편에 서서 내가 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상장을 반대쪽 비닐에 끼우고 모서리가 눌리지 않게 맞췄다.

“글씨 잘 쓰셨네요.”

“지금은 못 써.”

“이름은 그대로인데요.”

주원이 몸을 숙였다. 상장 아래에는 연필로 쓴 이름이 있었다. 인쇄된 이름을 보고 따라 쓴 글씨였다.

“저걸 아직 안 지웠네.”

“직접 쓰신 거예요?”

“응.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해서.”

나는 상장철을 닫지 않고 조금 더 보았다. 어린 손으로 여러 번 고친 자리가 남아 있었다.

주원은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가렸다.

“엄마는 상 받은 글씨만 보여 줬는데.”

나는 주원의 손이 물러난 뒤 상장철을 닫았다.

“둘 다 주원 씨가 쓴 건데요.”

주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건넨 상장철을 받아 맨 위 칸에 바로 꽂았다. 이번에는 금박 글씨가 똑바로 보였다.

◈

복도에서 사람들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주원은 열린 문을 보다가 책상으로 돌아갔다.

나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다은의 문자가 와 있었다.

『아직 거기야? 돌아오면 연락해.』

답장을 쓰기 전에 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문은 경란이 말한 대로 열려 있었다. 복도를 지나는 사람이면 소파에 앉은 내 무릎까지 볼 수 있었다.

주원은 책상에 앉아 검정 휴대폰의 화면을 넘겼다. 알림이 거듭 떴다. 한 번은 답을 쓰다가 전부 지웠다.

“아까 오신 분은 잘 가셨어요?”

주원의 손이 멎었다.

“그 얘기 하려고 올라왔어?”

“아니요. 계속 연락 오는 것 같아서요.”

“그쪽 아니야. 호텔.”

주원이 화면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직원들이 보낸 보고가 떠 있었다. 나는 보려고 몸을 기울이지 않았다.

“안 보여 주셔도 돼요.”

“또 밖에 나가야 하나 보고 있었어.”

주원은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까는 미안해.”

“저한테 사과하실 일은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했을 때 주원이 한 말이었다.

주원은 책상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우리 집 앞까지 오게 한 건 내 잘못이지. 나경 씨 앉혀 놓고.”

나는 무릎 위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안에는 이헌에게 받은 접지칼이 들어 있었다. 가방끈에서 손을 떼어 소파 옆에 내려놓았다.

“다음에는 그 자리에서 기다리지는 않을게요.”

“그래. 먼저 가도 돼.”

“먼저 간다고 말씀은 드릴 거예요.”

“그건 고맙네.”

주원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더니 눈가를 눌렀다. 아래층에서 보던 웃는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다은에게 늦게 돌아갈 것 같다고 답장을 보냈다. 보내고도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헌에게는 아무것도 보내지 못했다.

책상 서랍이 열렸다.

주원이 흰 휴대폰을 꺼냈다. 검정 휴대폰 옆에 나란히 놓고 충전선을 꽂았다. 화면이 켜졌다.

나는 내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약혼식 때도 본 적이 있었다. 주원은 다른 전화가 오면 그걸 따로 챙겼다. 나는 책상에서 고개를 돌려 탁자의 물 자국을 보았다.

컵 받침 아래가 젖어 있었다.

“이거 닦을 것 좀 있어요?”

“옆에 휴지.”

나는 휴지를 뽑아 받침을 들었다. 물기를 닦고 컵을 옮겨 놓았다. 주원은 흰 휴대폰을 만지다가 내 쪽을 봤다.

“여기서까지 일하지 말고.”

“종이에 닿을까 봐요.”

탁자에는 상장철에서 빠진 종이가 남아 있었다. 상장을 받았을 때 함께 받은 안내문이었다. 나는 젖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책장 앞에 세워 뒀다.

주원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시 넣어야겠네.”

“이번에는 똑바로요.”

“봤지? 지금은 바르게 꽂았잖아.”

주원이 책장 위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밖에서 경란이 불렀다.

“주원아.”

주원의 손이 내려갔다.

경란은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 섰다. 나를 본 뒤 책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버지가 부르셔. 아래 서재로 와.”

“지금요?”

“지금.”

주원이 검정 휴대폰을 집었다.

“나경 씨 내려갈 때 같이 갈게요.”

“기다리시잖아.”

주원은 입을 다물고 의자를 책상 안으로 밀었다. 흰 휴대폰은 충전선에 꽂힌 채 남아 있었다.

경란이 먼저 복도로 돌아섰다. 주원은 따라 나가다 내게 말했다.

“잠깐만 있어. 금방 올게.”

“저도 내려갈게요.”

“아직 거실에 사람 많아. 여기서 쉬어.”

나는 열린 문을 보았다. 경란의 발소리는 계단 쪽으로 멀어졌다.

“문은 그대로 둘게요.”

주원은 문에서 손을 떼고 나갔다.

◈

나는 소파에 앉아 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아래층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말을 했는지는 알아듣지 못했다. 주원의 발소리도 계단을 내려간 뒤 끊겼다.

휴대폰을 꺼내 이헌과 주고받은 문자를 열었다. 마지막 문장은 성탄 모임에 늦지 않게 오라는 말이었다. 남에게 보여도 되는 말만 남아 있었다.

나는 입력칸을 눌렀다가 화면을 껐다.

문 하나 건너 복도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헌이 아직 아래에 있는지도 몰랐다. 조금 전까지 같은 세탁실에 있었는데, 이제는 어디로 갔는지 물을 수도 없었다.

가방 안에서 상자 모서리가 손등에 닿았다.

꺼내 보지 않고 안쪽으로 밀었다. 경란이 다시 올라왔을 때 무릎 위에 그것이 놓여 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주원을 기다리는 대신 거실로 내려가면 됐다.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책장 앞에 세워 둔 안내문을 보았다.

끝이 바닥에 닿아 있었다.

나는 종이를 집어 책상 위에 올렸다.

종이를 놓은 바로 옆에 흰 휴대폰이 있었다.

화면이 아직 켜져 있었다. 가로로 긴 막대 아래에 파일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이름이 모두 같은 말로 시작했다.

『아버지 12월 24일』

『아버지 12월 18일』

『아버지 12월 14일』

나는 안내문에서 손을 뗐다.

그 아래에도 같은 이름이 있었다. 날짜만 달랐다. 파일명 옆에는 재생 표시가 있었고, 화면 위에는 녹음 목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흰 휴대폰은 애인에게 연락할 때 쓰는 줄 알았다. 주원이 검정 휴대폰과 따로 챙기는 것을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화면 어디에도 다른 여자의 이름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을 보았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다시 보지 않으려고 가방끈을 당겼다. 그런데 맨 위 날짜가 눈에 남았다. 오늘이었다. 오늘 아래층에 함께 앉아 밥을 먹고, 선물을 나누던 동안에도 주원은 흰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 켰을까.

누구 앞에서 켰는지 묻는 말은 쓰지 않았다. 가방 안 휴대폰을 꺼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서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주원이 문 안으로 들어왔다. 검정 휴대폰을 쥔 손이 내려가 있었다. 나는 책상 앞에 선 채 주원을 보았다.

“안내문이 바닥에 닿아서요.”

내가 종이를 가리켰다.

주원의 시선은 내 손끝을 지나 흰 휴대폰에 멈췄다. 화면에는 여전히 같은 목록이 떠 있었다.

나는 변명을 더 하지 않았다.

주원은 책상으로 와서 흰 휴대폰을 집었다. 충전선이 책상 끝에서 당겨졌다. 화면을 끄려던 엄지가 옆면에서 멈췄다.

“들었어?”

“아니요. 손대지 않았어요.”

주원이 내 얼굴을 보았다.

“이름만 봤어요. 종이 놓다가.”

주원은 흰 휴대폰을 책상에 다시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화면을 뒤집었다. 나는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에 내려가 있을게요.”

주원은 막아서지 않았다. 내가 가방을 고쳐 드는 동안 자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의자 바퀴가 바닥을 긁었다.

문턱에 다다랐을 때 주원이 나를 불렀다.

“나경 씨.”

나는 돌아섰다. 주원은 뒤집어 놓은 휴대폰에 손을 얹고 있었다.

“봤어? 그럼 우리 거래 하나 더 하자.”

(3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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