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12월 31일 화요일 저녁, 해윤제지 송년 모임』
“약혼을 끝내면 다시 갚으라는 거예요?”
아버지가 독촉장 아래를 보았다.
“담당자는 형식이라고 했어. 집안끼리 약속한 걸 적어 둔 거라고.”
“그럼 왜 대출 서류에 찍어요.”
나는 날짜와 도장이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는 도장을 손으로 가리지 않았다.
“이것도 확인받아라.”
“원본은 아버지가 갖고 계세요. 다른 서류하고 섞지 마시고요.”
나는 빈 봉투에 독촉장을 넣었다. 겉에 받은 날짜를 적어 달라고 하자 아버지가 펜을 들었다.
“연말에 직원들하고 밥 먹기로 했는데.”
“그날도 서류 갖고 오실 거예요?”
“아니.”
“그럼 저도 갈게요. 끝나면 같이 집에 가요.”
아버지가 날짜를 적은 봉투를 서랍 안에 넣었다.
◈
화요일 저녁, 공장 식당 문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
『오늘은 일 얘기 금지』
아래에 작은 글씨가 더 있었다.
『반장님도 금지』
나는 가방을 어깨 뒤로 돌리고 문을 밀었다. 식탁을 붙이는 소리와 수저를 나누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
염 반장이 종이를 가리켰다.
“저거 네가 썼냐?”
“저 이제 왔어요.”
“누가 썼는지 글씨만 보면 모르냐?”
“종이 고치는 사람이에요. 글씨 주인 찾는 사람 아니고요.”
안쪽에서 웃음이 났다. 염 반장은 문에 붙은 종이를 떼지 않고 의자를 들었다.
음식은 직원들이 조금씩 가져왔다. 큰 냄비는 식당에서 데우고, 과일 상자는 창가에 쌓아 뒀다. 나는 갈색 가방을 찬장 위에 놓고 소매를 걷었다.
아버지는 벌써 상 위에 수저를 놓고 있었다.
“앉아 계시라니까요.”
“내 자리에도 내가 놓는 거야.”
아버지 앞에는 수저가 여러 벌 남아 있었다. 나는 절반을 받아 맞은편부터 놓았다.
구석에 포장 상자가 있었다. 빈 의자에 걸쳐 둔 탓에 앉을 자리가 모자랐다. 상자를 들어 보니 안에서 그릇이 부딪쳤다.
“그건 혼자 들지 마.”
염 반장이 다가오기 전에 문이 열렸다.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문턱에서 멈췄다. 목까지 올라오는 점퍼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나는 상자 손잡이를 놓쳤다가 다시 잡았다.
이헌이 내 쪽을 보고 물었다.
“어디로 옮기면 돼요?”
“저쪽 찬장 아래요.”
이헌은 내 손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상자를 들었다. 모자 아래로 드러난 귀가 붉었다.
“오신다는 말 없었잖아요.”
“근처까지 와서 연락하려고 했어요. 문이 열려 있길래.”
“저 밥 먹고 늦게 가요.”
“밥 먹고 가도 됩니까?”
등 뒤에서 아버지가 대답했다.
“일 도우러 오셨으면 먹고 가셔야죠.”
나는 돌아섰다.
“제 일 아시는 분이에요. 전에 서류 확인할 곳도 알아봐 주셨고요.”
아버지가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때 그분이세요? 아직 인사도 못 했습니다.”
이헌은 상자를 내려놓고 장갑부터 벗었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내 손을 한 번 보았다. 나는 빈 수저 통을 들었다.
“자리부터 만들게요. 음식 식겠어요.”
이헌이 내 옆을 지나 접어 둔 의자를 폈다.
◈
식당 한쪽에서 의자를 더 가져오라는 말이 나왔다. 이헌은 점퍼를 벗어 등받이에 걸었다.
셔츠 소매를 두 번 접는 손을 보고 나는 수저 통을 바짝 당겼다.
“손 다쳐요. 장갑 끼세요.”
“의자만 옮길 건데요.”
“밑에 철판이 들뜬 것도 있어요.”
이헌이 벗었던 장갑을 다시 꼈다.
나는 앞에서 식탁 사이를 비웠다. 이헌은 의자를 겹쳐 들지 않고 하나씩 옮겼다. 직원이 건넨 접이식 탁자도 받아 벽에 세웠다.
“제본소에서도 이런 거 들어요?”
직원 하나가 묻자 내가 대답했다.
“책 상자는 들어요. 보기보다 무거워요.”
“그럼 오늘 잘 오셨네. 여기 것도 좀 부탁해요.”
이헌은 대답 대신 남은 의자를 가리켰다. 직원이 자리를 짚어 줬다.
염 반장은 출입문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내가 휴지를 꺼내러 갔을 때 반장이 낮게 물었다.
“저 사람, 네가 데려왔어?”
“따로 왔어요.”
“너 보러?”
나는 휴지 묶음의 비닐을 뜯었다.
“도와주러 왔대요.”
염 반장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내려 둔 의자 하나를 발로 밀었다.
“저건 빼. 다리 흔들린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종이를 붙였다. 사용하지 말라고 쓰고 모서리를 눌러 붙였다.
이헌이 빈자리를 메우려 다른 의자를 가져왔다. 내 손 바로 옆에 의자 다리를 내려놓고 몸을 폈다.
식탁 건너에서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나경아, 이쪽에 앉아.”
나는 이헌에게서 물러났다.
아버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염 반장이 앉았고, 이헌은 식탁 끝으로 갔다. 나는 물병을 들고 그쪽부터 돌았다.
이헌이 컵을 내밀었다.
“저도 주세요.”
컵을 받지 않고 물만 부었다. 물이 넘치지 않게 손목을 세우는 동안 이헌은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도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냄비 쪽으로 고개를 돌린 틈에 물었다.
“불편하면 갈게요.”
나는 물병 뚜껑을 닫았다.
“밥은 드셔야죠.”
이헌이 의자를 조금 당겼다.
나는 그 자리에 앉지 않고 아버지 옆으로 돌아갔다.
◈
식사가 시작되자 염 반장이 직원 하나를 향해 턱을 들었다.
“아까부터 왜 자꾸 웃어?”
“반장님이 아직도 말씀을 안 하셔서요.”
“뭘.”
“손자 대학 붙은 거요.”
반장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맞은편 직원이 벌써 휴대폰을 꺼내 합격 안내를 보여 달라고 했다.
“남의 손자 걸 왜 봐.”
“지난번에는 원서 쓴 데까지 다 말씀하셨잖아요.”
염 반장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몇 번 누르더니 옆 사람에게 건넸다.
깨진 보호 덮개 아래에 짧은 문자가 떠 있었다. 나는 건네받은 휴대폰을 기울여 읽었다.
『할아버지, 붙었어. 이따 전화할게.』
“축하드려요. 뭐 사 달라는 건 없대요?”
“신발.”
“사 주시게요?”
“발이 또 컸대.”
반장은 휴대폰을 받아 주머니 깊이 넣었다.
식탁 끝에서 봉투가 돌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쓰던 흰 봉투였다. 겉에 손자에게 줄 축하금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만해. 밥이나 먹어.”
“이건 반장님 드리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만하라고.”
“다 같이 조금씩만 넣어요. 많이 넣는 사람은 다시 돌려주기로 했고요.”
아버지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멈췄다.
“나도 정한 만큼만 내면 되나?”
“대표님도 똑같이요.”
누군가 아버지 앞에 봉투를 밀었다. 아버지는 옆 사람이 낸 돈을 확인하고 같은 만큼 꺼냈다.
나도 지갑을 열었다. 작업실에서 나오며 챙긴 현금이 있었다.
봉투가 이헌에게 갔을 때, 이헌은 앞사람이 내려놓은 지폐를 먼저 보았다. 지갑에서 같은 액수를 꺼내 넣고 봉투를 옆으로 건넸다.
염 반장이 그 손을 보았다.
“손님은 안 내도 돼.”
“밥도 얻어먹는데요.”
“그거하고는 다르지.”
“축하드리고 싶어서요.”
이헌은 지갑을 넣었다. 봉투를 다시 가져오거나 돈을 보태지 않았다.
직원이 봉투 입구를 접다가 풀린 부분을 다시 눌렀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잠깐 주세요.”
가방에서 종이띠를 꺼내 봉투를 둘렀다. 접힌 자리에 끼우면 풀 없이도 입구가 벌어지지 않았다.
“손자분 이름은 반장님이 쓰세요.”
염 반장이 펜을 받았다. 오른손으로 봉투를 누르고 이름을 천천히 썼다.
직원이 읽으려고 몸을 기울이자 반장이 봉투를 뒤집었다.
“남의 이름 구경 그만하고 국이나 떠.”
나는 빈 냄비를 받으러 일어났다.
이헌도 일어났다가 내가 든 냄비를 보고 멈췄다. 대신 문을 열어 줬다. 안쪽에서 국자를 찾던 직원이 내게 새 그릇을 건넸다.
식당으로 돌아가려는데 이헌이 문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말했다.
“오늘 잘 왔어요.”
나는 냄비를 고쳐 들었다.
“아직 설거지 남았어요.”
“그것도 하고요.”
◈
상을 치울 무렵 염 반장이 이헌을 창고 쪽으로 불렀다.
“이것 좀 잡아 줘.”
두 사람이 접이식 탁자를 세웠다. 나는 남은 반찬 통의 뚜껑을 닫다가 손을 멈췄다.
반장은 탁자 고리를 걸고 이헌에게 장갑을 건넸다. 그리고 모자 쪽으로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이헌이 고개를 조금 숙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찬장에 넣을 접시를 들어 두 사람 쪽으로 갔다.
“저도 잡을까요?”
“다 됐어.”
염 반장이 창고 문을 닫았다.
이헌이 먼저 식당으로 돌아갔다. 반장은 내 손에서 접시를 받아 선반에 올렸다.
“아버지는 아시냐?”
나는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뭘요.”
반장이 식당 안을 보았다. 이헌이 의자 밑에 낀 휴지를 줍고 있었다.
“서진 사람 온 거.”
접시 밑에 깔 종이를 꺼내다가 멈췄다.
“어떻게 아셨어요?”
“공장 일 하다 보면 얼굴 볼 일 있어. 저 사람도 그랬고.”
“아버지한테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반장은 선반 위 접시가 기울지 않게 밀어 넣었다.
“오늘은 일 얘기 하지 말라며.”
문에 붙은 종이를 가리킨 반장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종이 묶음을 찬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
이헌은 내 앞을 지나며 목소리를 낮췄다.
“반장님이 추운데 모자 벗지 말랍니다.”
나는 모자 끝을 보다가 식탁에 남은 컵을 집었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실장님은 의자만 정리해 주세요.”
“알겠어요.”
이헌이 물러서자 염 반장이 바로 의자를 가리켰다.
“저쪽에 기대 놔. 쓰러지지 않게.”
“네.”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반장이 다른 의자를 들었다.
◈
아버지는 먼저 집에 가기로 했다. 술을 마시지 않은 직원이 같은 방향이라며 차를 빼 왔다.
나는 아버지 외투의 지퍼를 올렸다.
“집에 도착하시면 전화 주세요.”
“너는?”
“정리 끝내고요.”
아버지는 식당 안을 돌아보았다. 이헌은 쓰레기봉투를 묶고 있었다.
“도와주신 분께 고맙다고 전해 드려라.”
“직접 하셨어도 되잖아요.”
“아까 했는데 또 하면 부담스러우실까 봐.”
나는 아버지 목도리 끝을 외투 안에 넣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아 내렸다.
“추운데 오래 있지 말고.”
차가 나간 뒤에도 식당에는 몇 사람이 남았다. 남은 음식은 통에 나눠 담고, 젖은 바닥은 마른 걸레로 닦았다.
염 반장은 축하금 봉투를 안주머니에 넣고 마지막으로 전등을 확인했다.
“둘 다 이제 가. 뒷문은 내가 잠가.”
이헌이 점퍼를 입었다.
“잘 먹었습니다.”
“다음엔 장갑이나 제대로 된 거 가져와. 그건 미끄러워.”
반장이 이헌의 장갑을 턱으로 가리키고 돌아섰다.
나는 찬장 위에서 가방을 내렸다. 휴대폰에는 아버지가 보낸 집 현관 사진이 와 있었다. 도착하면 전화하라는 말 대신 사진으로 끝낸 모양이었다.
전화를 걸자 아버지는 벌써 누웠다고 했다.
“내일 아침에 제가 갈게요. 난방 끄지 마세요.”
전화를 끊고 화면을 보았다. 자정이 가까웠다.
밖으로 나가자 이헌이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자는 그대로였고, 손에는 내 목도리가 들려 있었다.
“의자에 걸려 있었어요.”
“놓고 갈 뻔했네요.”
나는 목도리를 받아 둘렀다. 이헌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내가 끝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식당 창으로 염 반장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창 아래를 지나 주차장 쪽으로 걸었다.
이헌이 보폭을 줄여 옆에 섰다.
“오늘 고생했어요.”
“실장님이 더 하셨죠.”
“저는 밥 먹었잖아요.”
“저도 먹었어요.”
이헌이 짧게 웃었다. 나는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처음부터 여기 오실 생각이었어요?”
“오고 싶었어요. 안 된다고 하면 돌아가려고 했고.”
“그럼 문 열기 전에 물으셨어야죠.”
“맞아요. 다음엔 물을게요.”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이헌도 멈췄다.
식당 불이 꺼졌다. 나는 무심코 손을 뻗다가 가방끈을 다시 잡았다. 아직 반장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헌은 내 손을 보고도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조금만 더 걸을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란히 걸어 공장 담 끝에 닿았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 위의 시간이 자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새해에도 나만 봐요.』
고개를 들자 바로 옆에 선 이헌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35화 끝)
『오늘 일정: 1월 6일 월요일, 생일 문집 복원, 저녁 아버지 댁』“아니에요.”이헌은 벤치 끝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외투 안에 넣은 반지를 놓았다. 실에 매달린 반지가 옷 위로 내려갔다.“그럼 뭐예요.”“좋아하는 사람이에요.”유리문 안에서 직원이 손을 들었다. 정원을 닫을 시간이었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 넣어 둔 서류 모서리가 옆구리에 닿았다.“그 말하고 이 서류는 따로 생각할게요.”“그래도 됩니다.”“지금은 내려갈게요.”이헌이 먼저 문으로 가서 손잡이를 잡았다. 나는 문 앞에 멈췄다. 몇 분 전에는 나란히 들어온 문이었다.“혼자 갈 수 있어요.”손잡이에서 이헌의 손이 떨어졌다.“아버님 곁에 계세요. 저는 여기서 가겠습니다.”붙잡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간 뒤 바로 걷지는 못했다. 유리에 비친 이헌은 벤치 쪽을 보고 있었다.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뒤에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만 났다.◈월요일 오후, 작업대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풀을 묻힌 붓을 내려놓았다.아버지였다.“점심 드셨어요?”“먹었다. 네가 갖다 놓은 것 데워 먹었어.”“약도요?”“먹었어. 네가 적어 놓은 대로.”퇴원한 아버지의 목소리는 병실에서보다 나았다. 그래도 통화 너머로 기침이 들리면 나는 붓을 쥔 손을 멈췄다.“공장 아니죠?”
『오늘 일정: 1월 3일 금요일, 오후 책 납품 포장』나는 물통을 든 채 이헌에게 걸어갔다. 자판기 앞에 닿기 전에 이헌이 벽 쪽으로 비켜섰다. 지나갈 자리를 내주는 움직임에 나도 멈췄다.“언제 왔어요?”“조금 전에요. 아버님은요?”“주무세요. 수액 맞으면서 오늘 밤 지켜보자고 했어요.”이헌이 병실 쪽을 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들어가실 거예요?”“당신이 괜찮다면요.”나는 물통 뚜껑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지금은 주무시게 두고 싶어요.”“그럼 여기 있을게요.”아버지를 깨우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이헌 옆을 지나 정수기로 갔다. 물이 차는 동안 이헌은 오지 않았다. 통이 넘치기 전에 버튼에서 손을 뗐다.“오늘 회의는 끝났어요?”“네.”“공장 얘기도 했어요?”이헌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물통에 뚜껑을 돌려 끼웠다.“아버지가 쓰러진 날인데, 그것부터 물어보네요.”“물어봐야 하는 일이에요.”“그럼 대답해 주세요.”복도 건너에서 병실 문이 열렸다. 보호자가 전화기를 귀에 대고 나왔다. 이헌은 내 대답을 기다렸고, 나는 물통을 든 손을 내렸다.“아버지한테 물만 갖다 놓고 올게요.”◈아버지는 옆으로 누워 있었다. 입원할 때 벗어 둔 작업복이 의자 아래로 흘러내려 있었다. 나는 옷을 접어 사물함에 넣고 물통을 침대 옆에 놓았다.아버지가
『오늘 일정: 1월 3일 금요일, 오후 책 납품 포장』나는 휴대폰을 내리고 이헌을 보았다.“옆에 있는데 문자로 해요?”“말로 하면 대답 안 할까 봐요.”식당 뒷문이 열렸다. 우리는 동시에 공장 쪽을 돌아보았다. 염 반장이 문을 잠그는 동안 나는 휴대폰에 답을 썼다.『오늘 의자 나른 값으로 해 둘게요.』이헌이 화면을 확인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나는 먼저 주차장으로 걸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조금 늦었다.◈새해 첫 금요일 오후, 제본소에서 책을 포장하고 있을 때 염 반장에게 전화가 왔다.풀칠한 덧종이가 마르지 않아 나는 휴대폰을 어깨에 끼웠다.“반장님, 아버지 점심 드셨어요?”“나경아. 지금 병원으로 와.”종이를 누르던 손을 뗐다.“누가 다쳤어요?”“네 아버지. 사무실에서 쓰러지셨어. 구급차 타고 가시는 중이야.”“어느 병원이요?”반장이 이름을 말했다. 나는 작업대에 놓인 종이 뒷면에 받아 적었다.“의식은요?”“눈 뜨셨어. 대답도 하시고. 내가 뒤따라갈 테니까 넌 바로 와.”전화를 끊고 앞치마 끈을 풀었다. 매듭이 손톱에 걸려 한 번 더 당겼다.다은이 내 손에서 끈을 받아 풀어 줬다.“가방 챙겨. 여긴 내가 할게.”“창가 책은 누르지 마. 아직 젖었어.”“알아. 택시도 불렀어. 아래에 곧 온대.”나는 갈색 가방을 들었다가 작업대 쪽으로 돌아섰다. 무엇을 챙기려
『오늘 일정: 12월 31일 화요일 저녁, 해윤제지 송년 모임』“약혼을 끝내면 다시 갚으라는 거예요?”아버지가 독촉장 아래를 보았다.“담당자는 형식이라고 했어. 집안끼리 약속한 걸 적어 둔 거라고.”“그럼 왜 대출 서류에 찍어요.”나는 날짜와 도장이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는 도장을 손으로 가리지 않았다.“이것도 확인받아라.”“원본은 아버지가 갖고 계세요. 다른 서류하고 섞지 마시고요.”나는 빈 봉투에 독촉장을 넣었다. 겉에 받은 날짜를 적어 달라고 하자 아버지가 펜을 들었다.“연말에 직원들하고 밥 먹기로 했는데.”“그날도 서류 갖고 오실 거예요?”“아니.”“그럼 저도 갈게요. 끝나면 같이 집에 가요.”아버지가 날짜를 적은 봉투를 서랍 안에 넣었다.◈화요일 저녁, 공장 식당 문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오늘은 일 얘기 금지』아래에 작은 글씨가 더 있었다.『반장님도 금지』나는 가방을 어깨 뒤로 돌리고 문을 밀었다. 식탁을 붙이는 소리와 수저를 나누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염 반장이 종이를 가리켰다.“저거 네가 썼냐?”“저 이제 왔어요.”“누가 썼는지 글씨만 보면 모르냐?”“종이 고치는 사람이에요. 글씨 주인 찾는 사람 아니고요.”안쪽에서 웃음이 났다. 염 반장은 문에 붙은 종이를 떼지 않고 의자를 들었다.
『오늘 일정: 12월 27일 금요일, 해윤제지 아버지 서류 확인』“무슨 거래요?”나는 문턱에서 발을 돌렸다. 주원은 흰 휴대폰에 얹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여기서 본 거,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파일 이름밖에 못 봤어요.”“그것도.”열린 문 너머에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났다. 주원은 의자를 당겨 문 쪽을 보았다. 발소리는 복도 반대편으로 멀어졌다.“대신 뭘 해 주실 건데요?”“나경 씨가 어디서 누구 만나는지 안 물을게.”나는 가방끈을 쥔 손을 내렸다.“아버지에 관한 일이면요?”주원이 내 얼굴을 보았다.“우리 아버지?”“제 아버지요. 해윤 일.”주원은 뒤집힌 휴대폰을 서랍에 넣었다.“그건 나경 씨한테 먼저 말할게. 내가 아는 건.”“저도 여기서 본 건 말하지 않을게요. 다만 저한테 해윤 일을 숨기라고 하지는 마세요.”“그 정도면 됐네.”주원이 일어났다. 나는 먼저 복도로 나갔다. 계단 아래에서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금요일 새벽, 공장 사무실 창에 불이 켜져 있었다.나는 택시에서 내려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작업실에 가져갈 공장 문서를 받기로 한 건 아침이었다. 전날 밤 아버지에게 시간을 확인하려고 전화를 했을 때, 수화기 너머로 공장 안내 방송이 들렸다.아버지는 집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새벽에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도 같은 방송이 들렸다.현관문을 밀자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네. 나갈게요.”내 대답에 문밖 그림자가 옆으로 물러났다.나는 이헌을 돌아보았다. 이헌은 건조기 옆으로 비켜서 있었다. 문을 조금 열어도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내 손이 손잡이에서 멈추자 고개만 끄덕였다.나는 혼자 문밖으로 나갔다.주원은 복도 벽에 기대 있었다. 셔츠 목의 단추가 풀려 있었고, 손에는 검정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화면이 켜졌다가 꺼졌다.“왜 여기서 나와?”“할머니가 수건 정리하셔서 잠깐 도와드렸어요.”할머니가 우리 때문에 꺼낸 수건이 떠올랐다.주원은 문보다 내 얼굴을 보았다.“손까지 씻고 나온 줄 알았네. 한참 안 오길래.”“화장실에 회장님이 계셨어요.”“아. 그래서.”주원이 눈을 감았다 떴다. 세탁실 안에서는 건조기가 돌아갔다. 나는 손잡이를 잡은 채 문을 끝까지 닫았다.“거실에 가실 거예요?”“거기 말고. 나 잠깐만 앉아 있고 싶은데.”주원이 손으로 뒷목을 눌렀다. 손등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아까 수건으로 바닥을 닦던 손이었다.“나경 씨도 좀 쉬어. 얼굴 굳었어.”나는 주원이 가리키는 계단을 보았다.“어디서요?”“내 방. 아래에 있으면 엄마가 계속 뭐 시키잖아.”주원이 계단 쪽으로 먼저 걸었다. 나는 세탁실 문을 한 번 보고 따라갔다. 문 아래로 불이 새어 나왔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거실 앞에 놓아 둔 가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