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오늘 일정: 12월 27일 금요일, 해윤제지 아버지 서류 확인』
“무슨 거래요?”
나는 문턱에서 발을 돌렸다. 주원은 흰 휴대폰에 얹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여기서 본 거,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
“파일 이름밖에 못 봤어요.”
“그것도.”
열린 문 너머에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났다. 주원은 의자를 당겨 문 쪽을 보았다. 발소리는 복도 반대편으로 멀어졌다.
“대신 뭘 해 주실 건데요?”
“나경 씨가 어디서 누구 만나는지 안 물을게.”
나는 가방끈을 쥔 손을 내렸다.
“아버지에 관한 일이면요?”
주원이 내 얼굴을 보았다.
“우리 아버지?”
“제 아버지요. 해윤 일.”
주원은 뒤집힌 휴대폰을 서랍에 넣었다.
“그건 나경 씨한테 먼저 말할게. 내가 아는 건.”
“저도 여기서 본 건 말하지 않을게요. 다만 저한테 해윤 일을 숨기라고 하지는 마세요.”
“그 정도면 됐네.”
주원이 일어났다. 나는 먼저 복도로 나갔다. 계단 아래에서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
금요일 새벽, 공장 사무실 창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택시에서 내려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작업실에 가져갈 공장 문서를 받기로 한 건 아침이었다. 전날 밤 아버지에게 시간을 확인하려고 전화를 했을 때, 수화기 너머로 공장 안내 방송이 들렸다.
아버지는 집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새벽에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도 같은 방송이 들렸다.
현관문을 밀자 바닥에 깔린 고무판이 구두 밑에서 밀렸다. 나는 발로 끝을 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 문에는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그 너머로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내렸다.
아버지 오른손에 펜이 들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펼쳐져 있었고, 왼손으로 마지막 장을 누르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아버지.”
펜 끝이 종이에 닿기 전에 멈췄다.
아버지가 의자를 뒤로 밀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전화하셨을 때 아직 공장이셨잖아요.”
“집에 갔다가 일찍 나온 거야.”
책상 옆에는 접은 작업복이 놓여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건 겉옷은 어깨 부분이 구겨져 있었다. 나는 벗어 둔 구두 옆 실내화를 보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주무시긴 하셨어요?”
아버지는 대답 대신 펜 뚜껑을 찾았다.
나는 책상 앞으로 갔다. 서류 위쪽에 서진캐피털 이름이 있었다.
『추가 대출 약정서』
“그거 잠깐 보여 주세요.”
“아직 정해진 건 아니야.”
“서명하려고 하셨잖아요.”
내가 손을 내밀자 아버지는 서류를 덮었다. 펜을 쥔 손은 그대로였다.
나는 의자를 끌어 맞은편에 앉았다.
“안 뺏어요. 같이 읽어요.”
◈
아버지가 서류를 내 쪽으로 돌렸다.
나는 가방에서 안경집 크기의 자를 꺼내려다가 손을 멈췄다. 종이를 재러 온 게 아니었다. 대신 휴대폰을 책상에 놓고 첫 장부터 읽었다.
중간에 붙은 종이 귀퉁이가 나왔다. 본문과 다른 종이였다. 나는 그 장을 넘기지 않고 아버지를 보았다.
“이것도 같이 받으셨어요?”
“어제 저녁에 가져왔어. 필요한 부분만 먼저 보면 된다고 해서.”
“누가요?”
“캐피털 담당자가.”
덧댄 종이에는 서명할 곳이 표시돼 있었다. 붙인 쪽지를 들자 그 아래에 담보를 추가하는 조항이 있었다.
나는 쪽지를 떼지 않고 옆으로 젖혔다.
“여기 읽으셨어요?”
아버지가 안경을 고쳐 썼다.
“공장 기계까지 잡겠다는 건 알아.”
“이건 아까 첫 장에 쓴 금액만 갚으면 풀리는 게 아닌데요.”
나는 같은 말이 있는 앞쪽을 찾아 손가락으로 짚었다. 기존 채무와 새 대출을 함께 묶는다는 문장이 있었다.
아버지는 한동안 그곳을 보았다.
“변호사한테 물어보자고 했어. 그런데 서류를 보내 달라니까 먼저 도장을 찍어야 심사를 넣는대.”
“그 말은 서류에 없어요.”
“나도 그래서 못 찍고 있었어.”
펜을 잡았던 아버지 손가락에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책상 옆 인주 뚜껑을 닫았다. 도장은 작은 천 위에 놓여 있었다.
“얼마나 급해요?”
아버지가 서류 모서리를 맞췄다.
“이번 달 끝에 나갈 게 있어. 직원들 월급도 있고, 납품받은 원료 값도 남았고.”
“그래도 이건 오늘 서명하지 마세요.”
“날이 밝으면 전화가 올 거다.”
“제가 옆에서 같이 들을게요.”
아버지는 벽시계를 보았다. 아직 출근 시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어젯밤 이헌에게 받은 문자가 마지막으로 떠 있었다.
『아버님 만나고 나오면 연락해요. 늦어도 괜찮아요.』
나는 입력칸에 손가락을 댔다가 아버지에게 먼저 물었다.
“이 서류 사진 찍어서 확인받아도 돼요?”
“누구한테.”
“확인할 수 있는 사람한테요. 서진 쪽에 바로 보내지는 않을게요.”
아버지는 도장을 천으로 감쌌다.
“네가 믿을 만한 사람이면.”
나는 서명란이 빈 상태로 페이지를 찍었다. 어느 곳에도 새 잉크가 묻지 않았다.
◈
사무실 안이 추웠다. 아버지는 전기난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네 쪽으로 해 둬라. 손 시리겠다.”
“아버지 발밑에 두세요.”
나는 난로를 책상 가운데로 옮겼다. 그 아래에 종이 상자가 있어서 의자 뒤로 밀었다.
벽장 안에서 컵을 꺼내자 손잡이에 검은 자국이 보였다. 아버지는 찬물로 헹구려 했다. 나는 컵을 받아 작은 탕비실로 갔다.
컵 바닥에 씻기지 않은 차가 남아 있었다.
수세미를 찾는 동안 아버지가 문가에 섰다.
“그건 그냥 놔둬. 내가 할게.”
“손잡이에 풀이 묻었어요.”
“어제 포장하는 데 좀 갔어.”
나는 따뜻한 물에 컵을 담갔다. 굳은 풀이 불기를 기다리며 물을 올렸다. 아버지는 찬장 위에서 차 통을 내렸다.
그 옆에 손잡이가 없는 컵이 있었다. 입구 한쪽이 깨져 있었고, 안에는 볼펜이 꽂혀 있었다.
“저건 아직 쓰세요?”
“네 엄마 거잖아.”
“버린 줄 알았어요.”
아버지가 컵에서 볼펜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
“깨진 걸 누가 마시겠니. 펜 꽂아 두면 되지.”
깨진 가장자리에는 투명한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나는 그 부분을 보다가 아버지 컵을 다시 씻었다.
“엄마가 저 컵으로 풀 쒔던 거 기억나요.”
“차 마시던 컵인데 자꾸 갖다 쓰더라.”
아버지가 차 통 뚜껑을 열었다가 닫았다.
“종이 만지는 손으로는 거짓말을 못 한다고 했어. 어디 묻혔는지 다 남는다고.”
나는 컵 손잡이에 남은 풀을 손톱으로 밀지 않고 물에 더 담가 뒀다.
“아버지는요.”
“뭐가.”
“저 대출 처음 받을 때도 엄마 생각하셨어요?”
아버지는 차 통을 내려놓았다.
물이 끓자 나는 전원을 껐다. 컵에 물을 붓고 하나를 아버지 앞으로 밀었다. 아버지는 손잡이를 잡지 않고 양손으로 컵을 감쌌다.
“그때는 은인인 줄 알았다.”
“누가요?”
“강 부회장.”
나는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석진 부회장님이 서진캐피털을 소개하셨어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3년 전에. 거래처 대금이 밀려서 은행을 돌았는데 잘 안 됐어. 그때 공장에 왔더라. 자기네 금융사에서 길을 찾아보자고.”
“원래 아는 사이셨어요?”
“일하면서 얼굴은 봤지. 네 엄마도 알았고.”
아버지는 컵을 조금 들었다가 마시지 않고 내려놓았다.
“돈 들어오고 직원들 월급부터 줬다. 그날은 저녁밥이 넘어가더라.”
나는 탕비실 문 너머 책상을 보았다. 서류를 펼쳐 둔 자리에 난로 불빛이 닿아 있었다.
“그 뒤에도 계속 부회장님하고 얘기하셨어요?”
“처음에는. 나중에는 담당자한테 하라고 하더라. 바쁜 분 붙들고 있을 수도 없고.”
“추가로 돈이 붙었다는 연락도 담당자한테 받으신 거예요?”
아버지가 컵을 놓은 자리를 손바닥으로 닦았다.
“받은 것보다 갚을 게 많더라. 설명을 들어도 모르겠는 게 있었어. 네가 약혼하고 나서는 독촉이 좀 줄었고.”
나는 컵 안의 찻잎을 보았다. 아버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서 괜찮아진 줄 알았다. 내가 버티면 네가 시집가서 고생은 안 하겠지 싶었어.”
“저 결혼시키려고 회사 지키시는 거 아니잖아요.”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도 여기서 일하시잖아요. 직원들도 있고요.”
나는 물기 묻은 손을 수건에 닦았다.
“모르겠는 서류는 모르겠다고 하세요. 저한테도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
책상으로 돌아온 나는 약정서를 다시 첫 장부터 폈다. 아버지는 서랍에서 봉투를 꺼냈다.
“이것도 같이 봐라.”
안에는 대출 내역과 우편 봉투가 있었다. 나는 날짜가 찍힌 쪽을 앞으로 모았다. 서로 붙은 종이는 억지로 떼지 않았다.
“이건 가져가서 분리할게요. 습기를 먹었어요.”
“중요한 게 있는지 모르겠다.”
“중요한지 보려면 일단 읽을 수 있어야죠.”
아버지는 빈 봉투를 반듯하게 접었다. 접힌 선이 어긋나자 다시 펴려 했다. 나는 봉투를 받아 서류 밑에 깔았다.
“이대로 넣으면 돼요.”
서류를 꺼낸 순서대로 봉투 뒷면에 적었다. 아버지는 내가 쓴 목록을 보며 빠진 것이 없는지 짚었다. 마지막으로 받은 날이 기억나지 않는 봉투는 따로 놓았다.
“전화 오면 이것부터 물어봐 주세요. 전체 내역을 다시 보내 달라고요.”
아버지는 탁상 달력의 빈칸에 그 말을 적었다. 펜 끝이 멈출 때까지 나는 다음 종이를 넘기지 않았다.
“집에 가서 좀 주무세요. 서류는 제가 챙겨 둘게요.”
“직원들 오면 얼굴은 봐야지.”
“그럼 그때까지라도 누워 계세요.”
아버지는 소파를 보다가 웃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네 엄마도 그 사람 싫어했는데.”
나는 봉투 입구를 벌리던 손을 멈췄다.
“부회장님이요?”
“응.”
“왜요?”
“물어보면 말을 안 했어. 회사 일로 만나는 건 내가 알아서 하되, 집에는 부르지 말라고 했지.”
“엄마가 그렇게까지 말했어요?”
“네 엄마가 싫다는 소리 잘 안 했잖니. 그런데 그 사람 얘기만 나오면 컵부터 치웠어. 앉혀 놓고 차 줄 일 없다고.”
나는 탕비실 쪽을 돌아보았다.
손잡이 없는 컵이 문틈으로 보였다. 아버지가 꺼내 놓은 볼펜은 아직 탁자에 있었다.
“그때 더 물어보시지.”
“그랬어야 했는데.”
아버지는 펜 뚜껑을 닫았다.
나는 다음 장을 넘기지 않았다. 엄마가 살아 있을 때의 일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공방 작업대 앞에 앉아 있던 모습만 생각났다.
아버지가 내 쪽으로 손을 뻗다가 거뒀다.
“기억 안 나면 애쓰지 마.”
“지금 기억나는 건 없어요.”
나는 봉투를 접지 않고 가방 안쪽에 세워 넣었다. 접지칼이 든 상자가 걸려 옆으로 옮겼다.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아직 공장이에요?』
이헌이었다.
나는 책상 아래로 휴대폰을 내리지 않았다. 화면을 본 뒤 그대로 답을 썼다.
『네. 서명은 안 하셨어요. 나가서 전화할게요.』
곧 답이 왔다.
『잘했어요. 밖은 추우니 안에서 해요.』
나는 화면을 끄지 않은 채 잠깐 손에 쥐고 있었다. 아버지가 종이를 모으는 소리가 났다.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손을 내밀었다.
“그건 제가 할게요.”
“한 장 남았다.”
아버지가 서류 받침을 들었다.
밑에서 우편 봉투가 나왔다. 뜯긴 부분에 종이 가루가 붙어 있었다. 나는 봉투 안의 종이를 빼서 책상에 폈다.
『채무 상환 독촉장』
아래쪽에 상환 기한이 적혀 있었다.
『1월 31일』
나는 날짜 옆에 찍힌 도장을 보았다. 다른 글자보다 진한 잉크가 종이 뒷면까지 배어 있었다.
『약혼 유지 조건으로 상환 유예』
“아버지.”
나는 도장 바로 아래를 눌렀다.
“날짜를 미뤄 주는 조건이, 제 약혼이에요?”
(34화 끝)
『오늘 일정: 12월 31일 화요일 저녁, 해윤제지 송년 모임』“약혼을 끝내면 다시 갚으라는 거예요?”아버지가 독촉장 아래를 보았다.“담당자는 형식이라고 했어. 집안끼리 약속한 걸 적어 둔 거라고.”“그럼 왜 대출 서류에 찍어요.”나는 날짜와 도장이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는 도장을 손으로 가리지 않았다.“이것도 확인받아라.”“원본은 아버지가 갖고 계세요. 다른 서류하고 섞지 마시고요.”나는 빈 봉투에 독촉장을 넣었다. 겉에 받은 날짜를 적어 달라고 하자 아버지가 펜을 들었다.“연말에 직원들하고 밥 먹기로 했는데.”“그날도 서류 갖고 오실 거예요?”“아니.”“그럼 저도 갈게요. 끝나면 같이 집에 가요.”아버지가 날짜를 적은 봉투를 서랍 안에 넣었다.◈화요일 저녁, 공장 식당 문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오늘은 일 얘기 금지』아래에 작은 글씨가 더 있었다.『반장님도 금지』나는 가방을 어깨 뒤로 돌리고 문을 밀었다. 식탁을 붙이는 소리와 수저를 나누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염 반장이 종이를 가리켰다.“저거 네가 썼냐?”“저 이제 왔어요.”“누가 썼는지 글씨만 보면 모르냐?”“종이 고치는 사람이에요. 글씨 주인 찾는 사람 아니고요.”안쪽에서 웃음이 났다. 염 반장은 문에 붙은 종이를 떼지 않고 의자를 들었다.
『오늘 일정: 12월 27일 금요일, 해윤제지 아버지 서류 확인』“무슨 거래요?”나는 문턱에서 발을 돌렸다. 주원은 흰 휴대폰에 얹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여기서 본 거,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파일 이름밖에 못 봤어요.”“그것도.”열린 문 너머에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났다. 주원은 의자를 당겨 문 쪽을 보았다. 발소리는 복도 반대편으로 멀어졌다.“대신 뭘 해 주실 건데요?”“나경 씨가 어디서 누구 만나는지 안 물을게.”나는 가방끈을 쥔 손을 내렸다.“아버지에 관한 일이면요?”주원이 내 얼굴을 보았다.“우리 아버지?”“제 아버지요. 해윤 일.”주원은 뒤집힌 휴대폰을 서랍에 넣었다.“그건 나경 씨한테 먼저 말할게. 내가 아는 건.”“저도 여기서 본 건 말하지 않을게요. 다만 저한테 해윤 일을 숨기라고 하지는 마세요.”“그 정도면 됐네.”주원이 일어났다. 나는 먼저 복도로 나갔다. 계단 아래에서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금요일 새벽, 공장 사무실 창에 불이 켜져 있었다.나는 택시에서 내려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작업실에 가져갈 공장 문서를 받기로 한 건 아침이었다. 전날 밤 아버지에게 시간을 확인하려고 전화를 했을 때, 수화기 너머로 공장 안내 방송이 들렸다.아버지는 집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새벽에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도 같은 방송이 들렸다.현관문을 밀자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네. 나갈게요.”내 대답에 문밖 그림자가 옆으로 물러났다.나는 이헌을 돌아보았다. 이헌은 건조기 옆으로 비켜서 있었다. 문을 조금 열어도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내 손이 손잡이에서 멈추자 고개만 끄덕였다.나는 혼자 문밖으로 나갔다.주원은 복도 벽에 기대 있었다. 셔츠 목의 단추가 풀려 있었고, 손에는 검정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화면이 켜졌다가 꺼졌다.“왜 여기서 나와?”“할머니가 수건 정리하셔서 잠깐 도와드렸어요.”할머니가 우리 때문에 꺼낸 수건이 떠올랐다.주원은 문보다 내 얼굴을 보았다.“손까지 씻고 나온 줄 알았네. 한참 안 오길래.”“화장실에 회장님이 계셨어요.”“아. 그래서.”주원이 눈을 감았다 떴다. 세탁실 안에서는 건조기가 돌아갔다. 나는 손잡이를 잡은 채 문을 끝까지 닫았다.“거실에 가실 거예요?”“거기 말고. 나 잠깐만 앉아 있고 싶은데.”주원이 손으로 뒷목을 눌렀다. 손등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아까 수건으로 바닥을 닦던 손이었다.“나경 씨도 좀 쉬어. 얼굴 굳었어.”나는 주원이 가리키는 계단을 보았다.“어디서요?”“내 방. 아래에 있으면 엄마가 계속 뭐 시키잖아.”주원이 계단 쪽으로 먼저 걸었다. 나는 세탁실 문을 한 번 보고 따라갔다. 문 아래로 불이 새어 나왔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거실 앞에 놓아 둔 가방을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접지칼이에요. 아까 보셨던 거요.”나는 상자를 가방에 넣지 않고 뚜껑을 열었다. 경란의 시선이 흰 손잡이에서 받침 아래로 내려갔다.“밑에는?”“닦는 천이 들어 있어요.”천을 꺼내 펼쳤다. 아무 무늬도 없는 천이었다. 경란은 한쪽 끝을 잡았다가 놓았다.“저런 것까지 챙겨 줬네.”나는 천을 접어 받침 아래에 넣었다.“도구에 묻은 풀을 그대로 두면 다음 종이에 옮거든요. 쓰고 나면 닦아 둬야 해요.”“네가 뭘 쓰는지 이헌이가 어떻게 알았을까.”뚜껑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상자 모서리를 맞춰 닫았다.“복원 맡기신 책 때문에 작업실에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 보셨나 봐요.”“의뢰인한테 그런 것도 보여 줘?”“작업하는 걸 궁금해하시면요.”경란은 내 가방 안을 잠깐 보았다. 선물 포장지 옆으로 평소 쓰던 도구집이 나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 지퍼를 조금 열었다. 닳은 접지칼 끝이 보였다.“이건 오래 써서 끝이 얇아졌어요. 오늘 받은 건 두꺼운 종이에도 쓸 수 있겠어요.”경란은 도구집을 들여다보다 몸을 바로 세웠다.“그래. 일에 쓰는 거면 잘 써야지.”“네. 잘 쓰겠습니다.”나는 도구집과 상자를 차례로 넣었다. 경란은 내가 가방을 닫는 것까지 보고 돌아섰다.거실 입구에서 주원이 수건을 들고 나왔다. 바닥의 물기를 닦으려 하자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커튼이 다 내려간 뒤에도 나는 2층 창을 올려다봤다. 이헌이 현관문을 연 채 기다렸다. 그날은 안에서 손만 녹이고 바로 나왔다. 경란에게서는 6일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다.12월 24일 저녁, 나는 같은 현관 앞에 다시 섰다. 2층 창가의 커튼은 걷혀 있었다.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는데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구두 밑창에 붙은 눈이 매트에 떨어졌다.“나경 씨, 손 시려?”주원이 내 뒤에서 문을 닫았다.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괜찮아요.”“장갑 좀 끼고 다녀. 오늘 사진도 찍을 건데 손 빨갛겠다.”주원은 내 가방을 받아 들려다 안에서 종이봉투가 나오자 웃었다.“내 선물?”“회장님 드릴 거예요.”“나는 빈손으로 들어왔는데. 옆에 서 있어야겠다.”거실에서는 접시 놓는 소리가 났다. 경란은 식탁 끝에서 냅킨을 펴고 있었다. 진주 귀걸이 아래로 머리카락 한 올이 붙어 있었다.“늦지는 않았네. 외투 벗고 앉아.”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렸을 때 이헌이 보였다. 식탁 건너 창문 옆이었다. 소매를 두 번 접은 손에 물잔을 들고 있었다.“오셨습니까.”“네, 삼촌.”입안에 남은 호칭을 삼켰다. 이헌은 물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사이에는 의자가 여섯 개 놓여 있었다.주원이 내 옆 의자를 빼 주었다.“자기, 오늘은 일 얘기 금지야. 아버지도 약속하셨고.”석진이 금색 시계를 보고 웃었다.“아직 내가 아무 말도 안 했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본가 장부 수선 마무리』나는 가방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맡기신 건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회장은 책상 위의 장부를 당겼다. 끈이 눌린 자리를 살피던 손이 멈췄다.“그럼 됐네.”더 묻지 않았다. 나는 기록지 한쪽에 수선한 자리를 짚어 드린 뒤 서재를 나왔다. 이헌이 문을 닫았다. 문고리에서 손을 뗄 때까지 나는 복도에 서 있었다.안에서는 서류 넘기는 소리가 났다.“외투 가져올게요.”이헌이 현관으로 갔다. 나는 가방 안쪽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 모서리에 손끝이 닿았다가 빠졌다. 여기서 화면을 켜면 서재 문이 열려도 못 볼 수 있었다.이헌이 코트를 벌려 주려다 내 가방을 봤다.“놓고 입어요. 제가 들고 있을게요.”“바닥에 안 닿게만 해 주세요.”가방을 건네고 팔을 넣었다. 소매 안에서 옷이 말려 올라가 손목을 당겼다. 이헌은 기다렸다가 가방을 돌려줬다. 검은 외투는 아직 팔에 걸쳐 있었다.“회사로 가세요?”“조금 있다가요.”나는 현관 유리 너머를 봤다. 정원 길에는 눈이 치워져 있었다. 담장 아래에만 군데군데 흰 눈이 남았다.“잠깐 걸어도 될까요?”이헌이 외투를 입었다.“정원으로 나가요.”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가방 밑이 젖어 있었다. 서재에서 천을 걷을 때 묻은 건지, 바닥에 남은 눈이 닿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가방을 기울여 바닥의 이음매부터 확인했다.“안까지 들어갔어요?”“겉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