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리스트의 연주는 마치 불꽃처럼 타올랐고 드러머의 타격은 천둥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가수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공감을 끌어냈다.그 순간, 고은서는 완전히 분위기에 푹 빠져들었다. 마치 처음 밴드를 만났을 때의 설렘이 되살아난 듯, 음악의 리듬에 맞춰 형광봉을 흔들며 몸을 흔들었다. 음악이 주는 기쁨과 여유 속에서 고은서는 그저 즐거움에 젖어 들었다.콘서트의 분위기보다 민시후를 더 즐겁게 한 건 고은서가 온전히 음악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고은서가 주위 관중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동안, 민시후는 그녀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공연이 끝나자 고은서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민시후가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배고프지? 간장게장 맛집이 있어. 한번 가볼래?”세 시간 가까이 노래를 따라 부른 고은서는 배가 고팠고 간장게장 얘기만 듣고도 침이 고여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생각이야.”사람들이 많아 출입이 불편할까 봐 민시후는 차를 경기장 뒤쪽의 한적한 주차장에 세웠다.밤하늘 아래, 도시의 네온 불빛이 부드럽게 깜빡였고 오래된 수상한 SUV 한 대가 나무 아래에 세워져 있었다. 그 차는 그림자 속에 숨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은서와 민시후가 차에 다가가려는 순간, 갑자기 눈부신 차 불빛이 켜졌다.두 사람이 반응할 시간도 없이 SUV가 미친 듯이 그들에게 돌진해 왔다!빠른 엔진 소리에 공기까지 진동하는 듯했고 고은서가 피하려는 순간, 차는 이미 눈앞까지 다가왔다!“조심해!”민시후가 소리치며 고은서를 힘껏 옆으로 밀쳤다.고은서는 민시후의 힘에 밀려 바닥에 굴러떨어졌고 민시후는 공중으로 떠오르다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민시후의 머리가 시멘트 기둥에 부딪혔다.“시후 씨!”고은서가 놀란 얼굴로 일어나 비틀거리며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하얀 후드티의 모자를 빨갛게 물들였다.그때, SUV의 차주는 도망치지 않고 후진한 뒤 다시 악셀을 힘껏 밟아 두 사람을 향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고은서는 온몸에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다.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갑자기 어지러움이 몰려와 머리를 감싸며 누웠다.“은서야!”귀에 들려오는 누군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니 병실이었다. 눈앞에는 송민아와 박지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고은서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창문으로 비치는 강렬한 햇빛에 다시 속이 울렁거려왔다.“움직이지 마, 내가 의사 부를게!”송민아가 의사를 부르러 가자 박지연은 그녀 옆으로 다가와 급하게 말했다.“은서야, 조금만 참아.”고은서는 힘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등과 팔이 욱신거렸다. 가장 괴로운 건 머리와 가슴이었다. 마치 땅이 빙빙 도는 것처럼 아무리 가만히 있어도 현기증이 심하고 구역질이 났다.그 어지러움 속에서 고은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불편함을 참으려 했다.손을 들어보니 팔에는 상처가 여러 개 있었고 붕대가 감겨 있었다.고은서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송민아가 의사를 데려왔다. 의사는 검사한 후, 별다른 문제는 없고 심한 뇌진탕 후유증 때문에 약을 먹는 것 외에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의사가 떠난 후, 박지연이 고은서를 천천히 부축해서 앉히고 약을 먹을 수 있게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베개에 기대어 잠시 쉬고 나니 고은서의 어지러움은 조금 나아졌다.그러나 이내 불안감이 그녀를 덮쳐왔다. 뭔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무엇인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겨우 기억을 떠올리려 했지만 다시 머리가 아파져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박지연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움직이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마.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면 내가 다 말해줄게!”고은서의 등에는 상처가 있었기에 박지연은 그녀를 옆으로 눕힌 후 커튼을 치고 병실의 불을 어둡게 했다.“나랑 시후 씨 같이 밴드 공연 보러 갔었던 것 같은데, 지금 왜 병원에 있는 거지?”고은서가 허약한
고은서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곽승재가 병실에 들어왔다.그는 평소와 다르게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고 단추 몇 개가 풀려 있고 셔츠 밑단은 허리춤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얼굴도 이상할 정도로 창백하고 입술엔 핏기가 없었다.“은서야, 깼어?”곽승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쉰 듯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은 것 같았다.고은서는 조금만 움직여도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르며 물었다.“당신 왜 여기 있어? 지연이는?”곽승재가 대답했다.“지연 씨가 하루 종일 너를 돌봤어. 그래서 내가 여기 있을 테니 지연 씨한테는 좀 쉬라고 했어.”고은서는 ‘지연이가 승재 씨한테 알린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지러움에 고통스러워하며 겨우 말을 이었다.“당신도 들어가 봐. 난 괜찮아. 간병인을 부르면 돼.”곽승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신 물었다.“목마르지? 물 좀 마실래?”고은서는 목이 마르긴 했지만,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간호사 불러줘.”“뭐 하려고? 말만 해.”고은서는 민망한 마음에 고집을 부리며 말했다.“간호사만 불러줘.”곽승재는 그녀의 표정에서 의도를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일으켰다. 잠시 쉬게 한 후, 그녀를 가볍게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고은서는 부끄럽고 화가 나서 발버둥 쳤지만 그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머리가 어지러우니까 가만히 있어.”고은서는 너무 힘들어서 그의 말에 반응할 여유도 없었고 그저 체념하고 그에게 맡겼다.곽승재는 그녀를 화장실에 내려놓고 일어날 때 비틀거리지 않도록 의자 하나를 놓아주고 문을 닫으며 말했다.“밖에 있을게. 필요하면 말해.”피곤해서인지 곽승재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느리게 느껴졌다.겨우 볼일 보고 고은서는 힘겹게 세면대에 기대어 손을 씻었다.거울에 비친 그녀의 머리에는 두툼한 붕대가 감겨 있고 얼굴이 창백했다.그 얼굴을 보자 머릿속에 사고 장면이 떠오르며 불안하고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고은서는 갑자기 머리에서 통증이 밀려오면서 속이 뒤틀려 세면대에 기대고 구역질했다.“은서야!”
고은서의 부탁을 듣고 곽승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너무 늦었어. 우선 쉬어.”고은서는 고집을 부렸다.“휴대폰 좀 줘. 내가 직접 전화할게.”곽승재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민시후 씨 휴대폰은 그의 형이 보관하고 있어. 전화해도 받지 못할 거야.”고은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궜다.민시후의 가족은 전에도 그녀가 민시후한테 많은 피해를 줬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차 사고까지 났으니 더 그녀를 싫어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민시후의 휴대폰을 보관하면서 연락을 막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고은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안함에 못 이겨 다시 물었다.“시후 씨 지금 상태가 어때? 아는 거 있어?”곽승재는 잠시 침묵하다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의 형이 곁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고은서가 다시 물었다.“그런데... 나랑 시후 씨, 어쩌다 차 사고를 당한 거야?”곽승재가 간단히 설명했다.“누군가 음주 운전을 해서 다른 차와 충돌했어. 마침 너희가 그 근처에 있었고 불행히도 사고에 연루된 거야.”고은서는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공연이 끝난 후, 그녀와 민시후는 간장게장을 먹으러 가자고 했고 그 후 주차장에서 사고가 난 것 같았다.하지만 애써 기억을 떠올려도 그날의 사고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고은서는 다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통을 참고 있었다.“지연 씨가 여러 번 당부했어. 네가 가만히 누워있어야 한다고. 그러니 우선 누워서 쉬어. 너무 많은 생각 하지 말고.”곽승재의 목소리는 한층 더 허스키해졌다.“민시후를 보러 가고 싶으면 빨리 회복해야 하지 않겠어?”고은서는 민시후를 걱정하는 자신이 곽승재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말없이 옆으로 돌아누워서 그냥 쉬었다.그 후 이틀 동안 고은서는 병실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낮에는 박지연과 송민아가 와서 그녀를 챙겨주었고 이미숙은 밤낮으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밤마다 곽승재가 병실을 지켰다.고
고은서는 그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결국 눈을 감았다.입원한 지 나흘째. 다행히 어지럼증은 조금씩 나아졌고 팔과 등에 난 상처도 많이 아물었다. 하지만 후두부의 부상은 여전히 심각해 붕대를 풀지 못한 채로 있었다.며칠째 민시후에게서 연락이 없자 고은서는 이상한 불안감을 느꼈다.“시후 씨의 성격상 아무리 바빠도 최소한 안부 연락은 했을 텐데... 혹시 시후 씨 상태가 나보다 더 심각한 걸까?”박지연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시후 씨도 휴식이 필요해. 지금은 그의 형이 돌보고 있어서 나을 때까지 못 움직이게 하는 걸 거야.”답답한 마음에 고은서는 결국 민시후에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들려오는 건 기계적인 음성뿐이었다.“전원이 꺼져 있어...”‘민시현 씨가 일부러 시후 씨 휴대폰을 꺼 둔 걸까?’‘이렇게까지 연락을 차단하는 이유가 뭘까?’한참 고민하던 고은서는 결국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민시현이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더라도 그녀는 반드시 민시후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박지연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그녀에겐 알리지 않기로 했다. 마침 박지연이 약을 가지러 나간 틈을 타, 고은서는 외투를 걸치고 병실 밖으로 조용히 나섰다.그런데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두 사람이 보였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경호원인가?’‘단순한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뿐인데 대체 왜 병실 앞을 지키고 있는 거지?’‘혹시 민시현 씨가 사람을 붙여서 나를 감시하는 걸까? 시후 씨를 찾으러 가지 못하게?’고은서가 고민하고 있던 그때, 경호원들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무전으로 누군가에게 보고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지연이 급히 달려왔다. “은서야, 너 왜 나왔어?”고은서가 문틀을 붙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 경호원들은 대체 뭐야?”박지연이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별거 아니야. 승재 씨가 혹시라도 네가 위험해질까 봐 사람을 붙여 둔 거야.”‘단순한 사고였을 뿐인데 이렇게까
‘시후 씨 가족들도 모두 왔다고?’고은서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지연아, 솔직히 말해줘. 그날 밤 나랑 시후 씨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단순한 교통사고였다면 민시후가 그렇게까지 다칠 리 없었다. 게다가 곽승재가 병원 복도에 경호원을 배치한 것도 이상했다.박지연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송민아와 함께 고은서를 병실로 부축했다. 그리고 그날 밤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박지연의 이야기를 들으며 혼란스러웠던 고은서의 머릿속이 점점 또렷해졌다.그 SUV가 자신을 덮치려던 순간, 민시후가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밀어냈다.민시후는 차에 부딪혀 공중으로 날아갔고, 그 후 시멘트 기둥에 다시 부딪혔다. 그리고 그의 흰 후드와 모자는 붉은 피로 물들었다...SUV가 다시 돌진하여 그들을 덮치려던 긴박한 순간에 검은색 차 한 대가 나타나 다가오던 차를 들이받았다.귀를 찢는 듯한 충돌음이 다시 고은서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박지연이 말을 이었다.“현석 씨한테서 들었는데, 네가 곽 대표의 공연 초대를 거절했지만 그날 밤 곽 대표는 예정대로 체육관에 갔다고 하더라고. 그러다 네가 시후 씨랑 함께 있는 걸 보고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차에서 잠들었던 거야.”“그런데 공연이 끝난 뒤 주차장에서 누군가 일부러 차로 너희를 덮치려고 했어. 마침 곽 대표의 차가 그 근처에 있었고 그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차에서 내릴 틈도 없이 가해 차량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어.”“곽 대표가 공연장을 바로 떠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야. 안 그랬다면 정말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몰라.”박지연이 아직도 그때의 아찔함을 떨치지 못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은서는 온몸이 떨려왔다.만약 곽승재가 없었다면 그날 밤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두려움과 불안감에 휩싸여 고은서는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지연아, 시후 씨 있는 병실이 어디야? 가서 직접 시후 씨 상태를 봐야겠어.”박지연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백승엽이 내린 명령은 고은서와 민시후를 죽이거나 평생 장애를 남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대방은 첫 번째 충돌 후에도 다시 한번 더 두 사람을 향해 돌진해 왔던 것이다.고은서는 분노에 떨며 주먹을 꽉 쥐었고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백승엽이 요즘 승재 씨 위세에 눌려 조용히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왜 나랑 시후 씨한테 손을 쓴 거야?”박지연은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곽 대표가 백승엽의 전 부하에게 들었는데 백승엽이 너랑 시후 씨가 백씨 가문 산업을 인수한 걸 극도로 미워하고 있었대.”“그리고 그때 백유미가 유산하고 자궁 제거 수술하면서 대출혈로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그 일도 모두 네 탓이라 그랬다. 그면서 원한이 쌓였나 봐.”아무 잘못이 없는 민시후가 단지 자신 때문에 백승엽과의 싸움에 끌어들여진 것 같아 고은서는 죄책감이 다시 밀려왔다.“내가 아니었으면 시후 씨도 기업 인수에 휘말리지 않았을 텐데, 나 때문에 시후 씨가 백유미와 백승엽의 일에도 나선 거야!”박지연이 위로하며 말했다.“은서야, 네 잘못 아니야. 백승엽이 미친 거지.”“그는 단순히 너희를 죽이려고 한 것도 모자라 범가온도 독살했잖아.”박지연이 이를 악물었다.“그래서 백유미도 그렇게 잔인한 거지, 제 아비한테서 그 악독함을 물려받은 거야.”“백승엽은 이미 모든 걸 계획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곽 대표가 사람을 보내서 그를 찾고 있고 경찰과 민씨 가문에서도 함께 그를 추적하고 있으니 그는 절대 도망칠 수 없을 거야.”갑작스러운 많은 얘기에 고은서의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약 30분 후, 송민아가 병실로 돌아왔다.고은서가 창백한 얼굴로 송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시후 씨 가족분들 허락했어?”송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행히 아저씨는 자리에 없고 시현 오빠도 처음엔 반대했지만 시아 언니가 설득해서 허락했어.”고은서가 병문안을 허락한다는 말에 벌떡 일어났고 박지연은 혹시라도 그녀가 감정이 북받쳐 주체하지 못할까 봐 먼저 약을 챙겨주었다.약을
민시후는 깨끗한 병원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의 상처도 잘 치료한 뒤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지만 그는 잠든 것처럼 보였다.고은서는 그가 그냥 장난으로 자는 척하는 것이길 바랐고 이제 그만 깨어나서 모든 게 그녀를 놀리기 위한 장난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하지만 반나절을 서 있었지만 민시후는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후회와 자책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와 고은서의 눈시울이 더욱 붉어졌다.거의 쓰러질 것 같은 고은서의 모습을 보던 송민아는 의자 하나를 가져다주었다.고은서는 눈물을 참으며 조심스럽게 민시후의 손을 잡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정작 고요한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목이 메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자신 때문에 다친 민시후의 모습을 보면서 설사 그의 가족이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해도 고은서 자신은 앞으로 민시후를 전처럼 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래서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누워있는 민시후에게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었다.중환자실의 면회는 15분 정도였고 고은서는 곧 떠나야 했다.면회 시간이 곧 끝나가자 송민아가 부드럽게 재촉했다. 드디어 고은서는 쉰 목소리로 힘겹게 한마디 내뱉었다.“미안해. 모두 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시후 씨가 이렇게...”“시후 씨 쓰러지면 안 돼. 어머님께 아버님 말씀을 잘 들을 거라고 약속했잖아, 약속을 어기면 안 돼...”고은서는 다시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고 두 사람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송민아도 누워있는 민시후를 향해 말했다.“시후 오빠, 은서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만약 깨나지 못하고 이대로 계속 누워만 있다간 완전히 기회가 사라질 거야!”하지만 그들이 뭐라고 말하든, 병상에 있는 민시후는 잠든 것처럼 조용히 누워있었다.고은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물은 민시후의 손등에 떨어졌다.간호사가 들어와 재촉하자 고은서와 송민아는 할 수 없이 병실을 떠났다.그 순간, 민시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병실 밖에서는 민시현이 여전히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