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고은서는 온몸에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다.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갑자기 어지러움이 몰려와 머리를 감싸며 누웠다.“은서야!”귀에 들려오는 누군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니 병실이었다. 눈앞에는 송민아와 박지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고은서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창문으로 비치는 강렬한 햇빛에 다시 속이 울렁거려왔다.“움직이지 마, 내가 의사 부를게!”송민아가 의사를 부르러 가자 박지연은 그녀 옆으로 다가와 급하게 말했다.“은서야, 조금만 참아.”고은서는 힘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등과 팔이 욱신거렸다. 가장 괴로운 건 머리와 가슴이었다. 마치 땅이 빙빙 도는 것처럼 아무리 가만히 있어도 현기증이 심하고 구역질이 났다.그 어지러움 속에서 고은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불편함을 참으려 했다.손을 들어보니 팔에는 상처가 여러 개 있었고 붕대가 감겨 있었다.고은서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송민아가 의사를 데려왔다. 의사는 검사한 후, 별다른 문제는 없고 심한 뇌진탕 후유증 때문에 약을 먹는 것 외에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의사가 떠난 후, 박지연이 고은서를 천천히 부축해서 앉히고 약을 먹을 수 있게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베개에 기대어 잠시 쉬고 나니 고은서의 어지러움은 조금 나아졌다.그러나 이내 불안감이 그녀를 덮쳐왔다. 뭔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무엇인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겨우 기억을 떠올리려 했지만 다시 머리가 아파져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박지연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움직이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마.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면 내가 다 말해줄게!”고은서의 등에는 상처가 있었기에 박지연은 그녀를 옆으로 눕힌 후 커튼을 치고 병실의 불을 어둡게 했다.“나랑 시후 씨 같이 밴드 공연 보러 갔었던 것 같은데, 지금 왜 병원에 있는 거지?”고은서가 허약한
고은서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곽승재가 병실에 들어왔다.그는 평소와 다르게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고 단추 몇 개가 풀려 있고 셔츠 밑단은 허리춤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얼굴도 이상할 정도로 창백하고 입술엔 핏기가 없었다.“은서야, 깼어?”곽승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쉰 듯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은 것 같았다.고은서는 조금만 움직여도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르며 물었다.“당신 왜 여기 있어? 지연이는?”곽승재가 대답했다.“지연 씨가 하루 종일 너를 돌봤어. 그래서 내가 여기 있을 테니 지연 씨한테는 좀 쉬라고 했어.”고은서는 ‘지연이가 승재 씨한테 알린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지러움에 고통스러워하며 겨우 말을 이었다.“당신도 들어가 봐. 난 괜찮아. 간병인을 부르면 돼.”곽승재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신 물었다.“목마르지? 물 좀 마실래?”고은서는 목이 마르긴 했지만,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간호사 불러줘.”“뭐 하려고? 말만 해.”고은서는 민망한 마음에 고집을 부리며 말했다.“간호사만 불러줘.”곽승재는 그녀의 표정에서 의도를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일으켰다. 잠시 쉬게 한 후, 그녀를 가볍게 안아 화장실로 데려갔다.고은서는 부끄럽고 화가 나서 발버둥 쳤지만 그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머리가 어지러우니까 가만히 있어.”고은서는 너무 힘들어서 그의 말에 반응할 여유도 없었고 그저 체념하고 그에게 맡겼다.곽승재는 그녀를 화장실에 내려놓고 일어날 때 비틀거리지 않도록 의자 하나를 놓아주고 문을 닫으며 말했다.“밖에 있을게. 필요하면 말해.”피곤해서인지 곽승재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느리게 느껴졌다.겨우 볼일 보고 고은서는 힘겹게 세면대에 기대어 손을 씻었다.거울에 비친 그녀의 머리에는 두툼한 붕대가 감겨 있고 얼굴이 창백했다.그 얼굴을 보자 머릿속에 사고 장면이 떠오르며 불안하고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고은서는 갑자기 머리에서 통증이 밀려오면서 속이 뒤틀려 세면대에 기대고 구역질했다.“은서야!”
고은서의 부탁을 듣고 곽승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너무 늦었어. 우선 쉬어.”고은서는 고집을 부렸다.“휴대폰 좀 줘. 내가 직접 전화할게.”곽승재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민시후 씨 휴대폰은 그의 형이 보관하고 있어. 전화해도 받지 못할 거야.”고은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궜다.민시후의 가족은 전에도 그녀가 민시후한테 많은 피해를 줬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차 사고까지 났으니 더 그녀를 싫어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민시후의 휴대폰을 보관하면서 연락을 막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고은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안함에 못 이겨 다시 물었다.“시후 씨 지금 상태가 어때? 아는 거 있어?”곽승재는 잠시 침묵하다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의 형이 곁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고은서가 다시 물었다.“그런데... 나랑 시후 씨, 어쩌다 차 사고를 당한 거야?”곽승재가 간단히 설명했다.“누군가 음주 운전을 해서 다른 차와 충돌했어. 마침 너희가 그 근처에 있었고 불행히도 사고에 연루된 거야.”고은서는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공연이 끝난 후, 그녀와 민시후는 간장게장을 먹으러 가자고 했고 그 후 주차장에서 사고가 난 것 같았다.하지만 애써 기억을 떠올려도 그날의 사고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고은서는 다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통을 참고 있었다.“지연 씨가 여러 번 당부했어. 네가 가만히 누워있어야 한다고. 그러니 우선 누워서 쉬어. 너무 많은 생각 하지 말고.”곽승재의 목소리는 한층 더 허스키해졌다.“민시후를 보러 가고 싶으면 빨리 회복해야 하지 않겠어?”고은서는 민시후를 걱정하는 자신이 곽승재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말없이 옆으로 돌아누워서 그냥 쉬었다.그 후 이틀 동안 고은서는 병실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낮에는 박지연과 송민아가 와서 그녀를 챙겨주었고 이미숙은 밤낮으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밤마다 곽승재가 병실을 지켰다.고
고은서는 그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결국 눈을 감았다.입원한 지 나흘째. 다행히 어지럼증은 조금씩 나아졌고 팔과 등에 난 상처도 많이 아물었다. 하지만 후두부의 부상은 여전히 심각해 붕대를 풀지 못한 채로 있었다.며칠째 민시후에게서 연락이 없자 고은서는 이상한 불안감을 느꼈다.“시후 씨의 성격상 아무리 바빠도 최소한 안부 연락은 했을 텐데... 혹시 시후 씨 상태가 나보다 더 심각한 걸까?”박지연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시후 씨도 휴식이 필요해. 지금은 그의 형이 돌보고 있어서 나을 때까지 못 움직이게 하는 걸 거야.”답답한 마음에 고은서는 결국 민시후에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들려오는 건 기계적인 음성뿐이었다.“전원이 꺼져 있어...”‘민시현 씨가 일부러 시후 씨 휴대폰을 꺼 둔 걸까?’‘이렇게까지 연락을 차단하는 이유가 뭘까?’한참 고민하던 고은서는 결국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민시현이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더라도 그녀는 반드시 민시후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박지연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그녀에겐 알리지 않기로 했다. 마침 박지연이 약을 가지러 나간 틈을 타, 고은서는 외투를 걸치고 병실 밖으로 조용히 나섰다.그런데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두 사람이 보였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경호원인가?’‘단순한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뿐인데 대체 왜 병실 앞을 지키고 있는 거지?’‘혹시 민시현 씨가 사람을 붙여서 나를 감시하는 걸까? 시후 씨를 찾으러 가지 못하게?’고은서가 고민하고 있던 그때, 경호원들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무전으로 누군가에게 보고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지연이 급히 달려왔다. “은서야, 너 왜 나왔어?”고은서가 문틀을 붙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 경호원들은 대체 뭐야?”박지연이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별거 아니야. 승재 씨가 혹시라도 네가 위험해질까 봐 사람을 붙여 둔 거야.”‘단순한 사고였을 뿐인데 이렇게까
‘시후 씨 가족들도 모두 왔다고?’고은서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지연아, 솔직히 말해줘. 그날 밤 나랑 시후 씨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단순한 교통사고였다면 민시후가 그렇게까지 다칠 리 없었다. 게다가 곽승재가 병원 복도에 경호원을 배치한 것도 이상했다.박지연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송민아와 함께 고은서를 병실로 부축했다. 그리고 그날 밤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박지연의 이야기를 들으며 혼란스러웠던 고은서의 머릿속이 점점 또렷해졌다.그 SUV가 자신을 덮치려던 순간, 민시후가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밀어냈다.민시후는 차에 부딪혀 공중으로 날아갔고, 그 후 시멘트 기둥에 다시 부딪혔다. 그리고 그의 흰 후드와 모자는 붉은 피로 물들었다...SUV가 다시 돌진하여 그들을 덮치려던 긴박한 순간에 검은색 차 한 대가 나타나 다가오던 차를 들이받았다.귀를 찢는 듯한 충돌음이 다시 고은서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박지연이 말을 이었다.“현석 씨한테서 들었는데, 네가 곽 대표의 공연 초대를 거절했지만 그날 밤 곽 대표는 예정대로 체육관에 갔다고 하더라고. 그러다 네가 시후 씨랑 함께 있는 걸 보고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차에서 잠들었던 거야.”“그런데 공연이 끝난 뒤 주차장에서 누군가 일부러 차로 너희를 덮치려고 했어. 마침 곽 대표의 차가 그 근처에 있었고 그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차에서 내릴 틈도 없이 가해 차량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어.”“곽 대표가 공연장을 바로 떠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야. 안 그랬다면 정말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몰라.”박지연이 아직도 그때의 아찔함을 떨치지 못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은서는 온몸이 떨려왔다.만약 곽승재가 없었다면 그날 밤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두려움과 불안감에 휩싸여 고은서는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지연아, 시후 씨 있는 병실이 어디야? 가서 직접 시후 씨 상태를 봐야겠어.”박지연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백승엽이 내린 명령은 고은서와 민시후를 죽이거나 평생 장애를 남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대방은 첫 번째 충돌 후에도 다시 한번 더 두 사람을 향해 돌진해 왔던 것이다.고은서는 분노에 떨며 주먹을 꽉 쥐었고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백승엽이 요즘 승재 씨 위세에 눌려 조용히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왜 나랑 시후 씨한테 손을 쓴 거야?”박지연은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곽 대표가 백승엽의 전 부하에게 들었는데 백승엽이 너랑 시후 씨가 백씨 가문 산업을 인수한 걸 극도로 미워하고 있었대.”“그리고 그때 백유미가 유산하고 자궁 제거 수술하면서 대출혈로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그 일도 모두 네 탓이라 그랬다. 그면서 원한이 쌓였나 봐.”아무 잘못이 없는 민시후가 단지 자신 때문에 백승엽과의 싸움에 끌어들여진 것 같아 고은서는 죄책감이 다시 밀려왔다.“내가 아니었으면 시후 씨도 기업 인수에 휘말리지 않았을 텐데, 나 때문에 시후 씨가 백유미와 백승엽의 일에도 나선 거야!”박지연이 위로하며 말했다.“은서야, 네 잘못 아니야. 백승엽이 미친 거지.”“그는 단순히 너희를 죽이려고 한 것도 모자라 범가온도 독살했잖아.”박지연이 이를 악물었다.“그래서 백유미도 그렇게 잔인한 거지, 제 아비한테서 그 악독함을 물려받은 거야.”“백승엽은 이미 모든 걸 계획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곽 대표가 사람을 보내서 그를 찾고 있고 경찰과 민씨 가문에서도 함께 그를 추적하고 있으니 그는 절대 도망칠 수 없을 거야.”갑작스러운 많은 얘기에 고은서의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약 30분 후, 송민아가 병실로 돌아왔다.고은서가 창백한 얼굴로 송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시후 씨 가족분들 허락했어?”송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행히 아저씨는 자리에 없고 시현 오빠도 처음엔 반대했지만 시아 언니가 설득해서 허락했어.”고은서가 병문안을 허락한다는 말에 벌떡 일어났고 박지연은 혹시라도 그녀가 감정이 북받쳐 주체하지 못할까 봐 먼저 약을 챙겨주었다.약을
민시후는 깨끗한 병원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의 상처도 잘 치료한 뒤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지만 그는 잠든 것처럼 보였다.고은서는 그가 그냥 장난으로 자는 척하는 것이길 바랐고 이제 그만 깨어나서 모든 게 그녀를 놀리기 위한 장난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하지만 반나절을 서 있었지만 민시후는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후회와 자책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와 고은서의 눈시울이 더욱 붉어졌다.거의 쓰러질 것 같은 고은서의 모습을 보던 송민아는 의자 하나를 가져다주었다.고은서는 눈물을 참으며 조심스럽게 민시후의 손을 잡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정작 고요한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목이 메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자신 때문에 다친 민시후의 모습을 보면서 설사 그의 가족이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해도 고은서 자신은 앞으로 민시후를 전처럼 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그래서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누워있는 민시후에게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었다.중환자실의 면회는 15분 정도였고 고은서는 곧 떠나야 했다.면회 시간이 곧 끝나가자 송민아가 부드럽게 재촉했다. 드디어 고은서는 쉰 목소리로 힘겹게 한마디 내뱉었다.“미안해. 모두 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시후 씨가 이렇게...”“시후 씨 쓰러지면 안 돼. 어머님께 아버님 말씀을 잘 들을 거라고 약속했잖아, 약속을 어기면 안 돼...”고은서는 다시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고 두 사람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송민아도 누워있는 민시후를 향해 말했다.“시후 오빠, 은서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만약 깨나지 못하고 이대로 계속 누워만 있다간 완전히 기회가 사라질 거야!”하지만 그들이 뭐라고 말하든, 병상에 있는 민시후는 잠든 것처럼 조용히 누워있었다.고은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물은 민시후의 손등에 떨어졌다.간호사가 들어와 재촉하자 고은서와 송민아는 할 수 없이 병실을 떠났다.그 순간, 민시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병실 밖에서는 민시현이 여전히
넋을 놓고 있는 고은서의 모습을 보자 박지연은 그녀는 부축하여 병상에 눕혔다.하지만 고은서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민시후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떨칠 수 없었다.식물인간, 이 네 글자는 마치 거대한 산처럼 고은서의 마음을 눌러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고은서는 차마 식물인간이 된 민시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의 가족들이 얼마나 슬플지, 앞으로 그들과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몰랐다.밝았던 하늘이 점차 어두움으로 빠지자 고은서는 그제야 서서히 잠이 들었다.깊은 밤, 고은서는 별안간 꿈에서 깨어났고 눈을 뜨니 병실에는 곽승재가 아닌 박지연과 육현석이 있었다.무슨 일이 있는 듯 두 사람의 얼굴은 모두 심각해 보였다.“지연아.”고은서가 낮은 목소리로 박지연을 불렀다. 박지연과 육현석 두 사람은 동시에 다가왔다.“깼어? 배고프지 않아? 물 가져다줄까?”박지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너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먼저 물이라도 마셔.”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아.”육현석이 미안한 듯 말을 꺼냈다.“미안해. 요즘 일도 많았고 또 백승엽을 조사하느라 바빠서 병문안 올 시간이 없었어. 오늘에야 겨우 시간을 내서 왔어.”고은서는 그런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백승엽은 어떻게 됐어요? 찾았나요?”그 말을 듣고, 육현석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 그는 박지연과 시선을 마주친 뒤, 결국 입을 열었다.“찾기는 찾았는데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어. 백승엽이 죽었어.”“죽었다고요?”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현기증이 몰려와 머리를 움켜잡았다. “진정해, 너무 흥분하지 말고.”박지연이 급하게 말렸다.고은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백승엽이 정말 죽었어요?”“그래.”“다리가 불편한 백승엽은 경호원을 데리고 자취를 감췄어. 그런데 그도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았던 거야. 그래서 우리는 아마 그들 백승엽의 고향 집에 숨어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