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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 죽을 첫사랑
얼어 죽을 첫사랑
작가: 공자영

1화. 길바닥 재회

작가: 공자영
last update 게시일: 2026-09-09 15:14:32

“홍여림. 이제 너 말해 봐.”

“응?”

“네 첫사랑은 언제야?”

첫사랑이라... 여림은 앞에 놓인 강냉이를 입에 넣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자. 이거 가져.’

‘이거 진짜 주는 거예요?’

‘갖고 싶다며 내 명찰.’

아, 그 순간. 억지로 깊숙이 묻어뒀던 기억이 떠올랐다. 

“첫사랑은 얼어죽을.”

여림은 강냉이를 하나 더 들다 말고 도로 내려놓으며 손을 털었다. 

“왜 그래?”

“그냥.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올라서.”

친구의 말에 여림은 대충 넘기며 비어 있는 맥주잔을 채웠다. 

“아니, 그래서 첫사랑이 언제냐니까? 네 첫사랑 궁금해. 왠지...”

“왠지 낭만적일 거 같다고?”

또 다른 친구가 말했다. 

모든 첫사랑을 낭만이라 포장하는 친구였다. 대본 같은 말에 여림은 고개를 저었다.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이 뭐가 낭만적인 건지. 마음이 닿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첫사랑을 뭣하러 추억하는지. 괜히 그때의 초라한 제 자신만 떠올리는 일 아닌가.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날, 여림은 다짐했다. 다시 만나도 절대 다시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 거 없어.”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여깄다.”

없어. 첫사랑 같은 거 정말 없어. 있어도 없어. 

여림은 지루한 표정으로 컵에 담긴 맥주를 털어넣었다.

‘오빠 오늘 오는 거지?’

그리고 테이블에 맥주잔이 쿵.

‘미안, 못 가.’

아, 이건 또 왜. 여림은 입가를 쓸어내렸다. 

한 번 시작한 회상은 끝도 없이 여림의 머릿속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몇 년을 잊고 있었는데. 고작 이거 한 번으로?

“미안, 못 가?”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났다. 8년이 지났어도 오랜만에 떠올린 감정은 어떻게 이렇게 무르익지도 않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뭐? 어딜 못 간다고?”

“어? 아, 아 나 2차 못 간다고. 피곤해. 집 갈래.”

갑자기 기분이 팍 다운됐다. 오늘은 얼른 집으로 도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너 진짜 가?”

“응. 피곤해졌어. 다음에 봐.”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들은 직장인이 되어도 여전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게 친구라고 어떤 교수가 그랬는데. 여림의 친구들이 딱 그랬다. 

여림은 가방을 챙겨 가게를 나섰다. 얼른 집에 가서 심신의 안정을 취해야했다. 

“하, 비도 와?”

운도 없다. 하필 집에 갈 때 비가 쏟아지다니. 

“이 정도 비면...”

가게 천막 아래 서서 손을 내밀었다.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그럭저럭 맞고 가도 될 만한데 문제는 바람이었다. 

휙.

바람이 한 번 불어오자 빗줄기가 사선으로 휘며 사람들의 우산은 제 기능을 잃기 시작했다. 

2월에 이 정도 비가 내릴 수 있나. 추운데 비까지 내리니 온 몸이 떨렸다. 

도저히 그칠 비가 아니었다. 여림은 하는 수 없이 대충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옆 편의점으로 향했다. 

“네? 우산이 없다고요?”

“그게, 갑자기 내린 비라서 방금 막 우산이 다 나갔어요.”

하긴. 예고에 없던 비였다. 이렇게 추운데 누가 비가 올 것이라 예상했겠는가.

상심하며 다시 창밖을 바라볼 때.

“혹시... 우비는 있는데, 이거라도 괜찮으시면 구매하시겠어요?”

“...... 네, 그러죠 뭐.”

지금 찬 물, 더운 물 가릴 처지인가. 비에 젖은 생쥐 꼴보다 낫겠다고 생각했다. 

여림은 포장지를 뜯어 우비를 입어보았다. 다행히 꼭 맞았다. 

“... 하는 수 없지.”

고민도 잠시. 여림은 바로 우비를 꺼내 입었다. 

가방을 멘 상태에, 바지 밑단을 차례로 걷어 올렸다. 다행히 면바지를 입어서 망정이지. 청바지를 입었다면 우비 마저 소용 없을 뻔 했다. 

그리고 머리까지 높게 모아 묶고는 마치 전쟁에 나가는 용사 마냥 숨을 한 번 크게 내쉬며 말했다. 

“가자.”

마지막으로 우비에 딸린 모자를 뒤집어 썼다. 

쏴아아ㅡ. 순식간에 우비 위로 비가 쏟아졌다. 하지만 지금 길 위를 걷고 있는 사람 중에는 여림이 가장 보송할 것이다. 

여림은 고개를 푹 숙이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쉽게도 장화는 없어, 신발은 포기했다. 

그렇게 몇 분 쯤 걸었을까. 

고개를 숙이고 걷던 여림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지다 어느 가게 앞에 멈추었다. 

“... 어?”

문을 닫은 가게 앞에는 천막에 제법 깊게 나와 있었고, 비를 피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아니, 왜 저러고 있어.”

쭈그려 앉은 사람이 있었다. 이미 홀딱 젖은 몸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는 추위에 몸이 떨리는 모양새로. 

술에 취한 사람인가. 아니면 어디 아픈 사람? 여림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대로 지나쳤다.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해. 엮이면 곤란해질 뿐이었다. 

“......”

하지만 그냥 지나치자니 신경이 쓰였다. 

비가 좀 오는 게 아닌데 이런 날씨에 저렇게 길바닥에 있다니. 여림은 자신이 가진 우산이라도 건네줄 심정으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저기요...”

조용히 그 남자에게 다가선 여림은 빗소리에 묻힐 만큼 작은 목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반응이 없었다. 

여림은 조금 더 고개를 숙여 말했다. 

“저기요.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감기,”

그때.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두 눈이 마주쳤고.

“어......”

여림은 남자의 정체에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 마주치는 시선. 너무 익숙한 얼굴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차윤호.....”

여림은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을 입 밖을 뱉어버렸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 내가 드디어 미쳤나. 그거 잠깐 회상 좀 했다고 길바닥에 비 맞고 있는 사람이 차윤호로 보인다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여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남자를 다시 봤다. 여전히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는 시선.

“......”

여전히 차윤호였다. 

길바닥에 길고양이처럼 앉아 있는 사람이 정녕 자신의 첫사랑이 맞다니. 

“... 미쳤네.”

하필 오늘. 하필 비 오는 날. 하필 첫사랑 생각을 하다가 집에 가는 길에. 

그것도 이런 길바닥에서.

여림은 현실을 부정하듯 두 눈을 질끗 감았다. 

그때, 아래에서 낮은 목소리가 힘겹게 한 마디를 뱉었다. 

“홍여림...”

그 소리에 여림은 질끈 감았던 한 쪽 눈을 살며시 떴다. 

왠지 정말 길고양이 마냥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윤호. 여림은 꿈인지 현실인지, 아니 그냥 자신이 하는 망상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살려줘.”

그 말에 여림은 한 쪽 눈을 마저 뜨며 윤호를 똑바로 내려다봤다. 

“아니, 왜 여기 이러고.”

여림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여전히 세차게 쏟아지고 있는 비.

그리고 다시 윤호를 보았다. 

“하......”

여림은 이마를 짚었다. 얼굴은 또 왜 이리 창백한 건지, 여기에 이러고 있은지 얼마나 된 건지. 이러다 얼어 죽을 것만 같이 보였다. 

8년 만에 만난 첫사랑이 홀딱 젖은 고양이 마냥 하는 말이 살려달라는 말이라니. 

이런 식의 재회는 여림이 생각했던 백만 가지 재회 시나리오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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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어 죽을 첫사랑   37. 고백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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