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5화. 계산된 진심
한시준은 예약 시간보다 십 분 먼저 에덴에 도착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취미는 없었다. 약속 시간보다 먼저 움직이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상대가 늦으면 자리를 떠났고, 자신이 늦을 때는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남자가 진서아를 만나기 위해 일정을 비우고, 길이 막힐 가능성까지 계산해 차를 일찍 출발시켰다.
지난번 그녀가 했던 말 때문은 아니었다.
다음에는 늦지 마세요.
그 명령 같은 말을 따른 것이 아니라,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으려는 것뿐이었다.
시준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VIP룸에 들어선 그는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었다. 테이블 위에는 평소 마시던 위스키와 잔 두 개가 준비돼 있었다.
시준은 술병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열 시 오십오 분.
시간을 확인한 뒤 휴대전화를 뒤집어놓았다.
열 시 오십팔 분.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정각이 되자 문이 열렸다.
장미 향이 어둑한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서아는 짙은 남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긴 머리를 높게 묶어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고, 귀에는 가느다란 은색 장식이 흔들렸다.
서아의 시선이 시준을 발견했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일찍 오셨네요."
"정각이야."
"십 분 전부터 계셨다고 들었는데."
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직원들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네."
서아는 작게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손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간격이 남았다.
"기다리셨어요?"
"십 분을 기다렸다고 하나."
"기다린 건 맞잖아요."
서아가 술병을 들었다.
맑은 술이 잔 안으로 흘러드는 동안 시준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서아는 잔을 그의 앞으로 밀었다.
"기분이 어때요?"
"뭐가."
"누가 올 때까지 앉아 있는 거."
시준은 잔을 들었다.
"별로."
"저도요."
서아의 대답은 빨랐다.
지난번 자신을 기다리지 않은 일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시준은 술을 한 모금 삼켰다.
"오늘도 질문 게임 하자."
서아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
"부사장님이 먼저 하자고 하시네요."
"싫어?"
"아니요. 재밌어요."
"뭐가."
"부사장님이 자꾸 저를 알고 싶어 하는 게."
시준의 잔이 입술 앞에서 멈췄다.
서아는 그의 반응을 즐기듯 눈을 가늘게 휘었다.
"제가 먼저 물어볼게요."
"물어."
"여자가 떠나겠다고 하면 붙잡아본 적 있어요?"
시준은 고민하지 않았다.
"없어."
"한 번도요?"
"떠날 거면 보내줬지."
"후회한 적도 없고?"
"없어."
서아는 잔에 술을 따르며 그를 살폈다.
"매달린 여자는 많았겠네요."
"꽤."
"울기도 하고요?"
"그랬겠지."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시준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웃었다.
"울면 달라져야 하나."
잔인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시준의 얼굴에는 죄책감도, 자랑도 없었다. 그에게는 정말 별일이 아닌 듯했다.
서아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왜."
시준이 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서요."
"이제 알았어?"
"처음부터 알았는데 확인됐죠."
서아는 손끝으로 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
"여자들이 부사장님한테 빠지는 건 좋아하면서, 부사장님이 그 여자들을 좋아하는 건 싫은 거네요."
"싫은 게 아니라 필요가 없어."
"왜요?"
"내가 먼저 좋아하지 않아도 알아서 오니까."
시준은 너무 당연한 사실처럼 말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면 됐다.
외로운 여자에게는 다정한 말을 건넸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여자에게는 특별하다는 착각을 줬다. 사랑을 원하는 여자 앞에서는 잠시 사랑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다음은 쉬웠다.
상대가 먼저 선을 넘고, 먼저 마음을 주고, 먼저 관계의 이름을 요구했다.
시준은 그 순간 흥미를 잃었다.
"사람마다 원하는 걸 보여준다는 거네요."
서아가 말했다.
"그래."
"그게 전부 진짜가 아니어도?"
"진짜인지 아닌지가 중요해?"
"상대가 믿으면 상관없다?"
시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 아네."
서아도 웃었다.
그러나 시준이 기대했던 접객용 미소가 아니었다.
비슷한 부류를 발견한 사람처럼 묘한 웃음이었다.
"왜 웃어."
"부사장님도 다른 남자들이랑 똑같아서요."
시준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내가 누구랑 같아."
"에덴에 오는 남자들이요."
서아는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다들 자기가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난 그놈들이랑 달라."
"뭐가요?"
"전부."
짧은 대답에는 의심이 없었다.
서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돈이 더 많아서?"
"진서아."
"아니면 잘생겨서?"
그녀가 시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건 인정할게요. 지금까지 온 손님 중에는 제일 잘생겼어요."
시준의 눈빛이 조금 느슨해졌다.
서아는 그 변화를 확인하자마자 말을 이었다.
"그런데 부사장님도 결국 같은 걸 원하잖아요."
"내가 뭘 원하는데."
"다른 남자들한테 보여주는 건 가짜여도, 자기한테는 언젠가 진짜가 될 거라는 믿음."
술병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서아는 차분한 눈으로 그를 봤다.
"부사장님한테만 제가 다를 거라고 생각하죠?"
시준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부정하고 싶었다.
자신은 서아에게 사랑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진짜 미소를 보여달라고 했고, 다른 손님과 똑같이 대하지 말라고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같은 말이었다.
자신에게만 다른 진서아를 원했다.
"나랑 그놈들이 같아?"
"아직은요."
그 말이 또 나왔다.
시준은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네가 생각하는 특별한 남자는 어떤 놈인데."
"알려드리기 싫어요."
"왜."
"말해주면 따라 할 거잖아요."
서아의 입가에 장난기가 번졌다.
"제가 다정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다정한 척하고, 솔직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비밀 하나쯤 털어놓겠죠."
시준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아는 이미 그가 하려던 다음 수를 알고 있었다.
진심처럼 보일 만한 이야기를 하나 꺼내는 것.
다른 여자들에게는 잘 통했다.
시준이 먼저 기다려본 적 없다는 말, 떠난 여자를 붙잡은 적 없다는 말, 누군가에게 진심을 줘본 적 없다는 말을 들으면 여자들은 이상한 기대를 품었다.
자신이 처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틀린 말 했어?"
시준이 물었다.
"아니요."
서아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재미없는 거예요."
"뭐가."
"부사장님은 지금 저한테 솔직한 게 아니잖아요."
"내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야."
"사실이라고 진심은 아니죠."
서아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이 시준의 표정을 천천히 훑었다.
"제가 다른 여자들이랑 다르다고 생각하게 만들려고 말한 거잖아요."
시준의 턱이 굳었다.
"부사장님은 누구도 기다린 적 없고,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도 않고, 여자가 울어도 마음이 안 변한다."
서아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차갑고, 나쁘고, 누구한테도 마음을 주지 않는 남자."
그녀의 손이 멈췄다.
"그런데 저한테는 자기 얘기를 해준다."
서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면 제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낄 거라고 생각했죠?"
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 충분했다.
서아가 몸을 조금 가까이 기울였다.
장미 향이 짙어졌다.
"지금 저한테 솔직한 게 아니라, 솔직한 남자로 보이고 싶은 거잖아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말은 시준이 숨겨둔 계산을 정확히 찔렀다.
시준은 자신도 모르게 서아의 턱을 잡으려다 손을 멈췄다.
손가락이 그녀의 피부에 닿기 직전이었다.
서아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을 내려다봤다.
시준은 천천히 손을 거뒀다.
이번 회차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밀어붙이면 그녀의 말이 맞아진다.
원하는 반응을 얻기 위해 익숙한 수단만 사용하는 남자.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넌 모든 사람을 그렇게 의심해?"
시준이 물었다.
"아니요."
"그럼."
"부사장님만요."
"왜."
"부사장님이 먼저 말했잖아요."
서아는 그의 잔을 채웠다.
"사람마다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알아서 온다고."
시준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저한테는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할지 시험한 거죠."
시준은 술잔을 바라봤다.
진서아는 자신의 이야기에 감동하지 않았다.
자신만 약한 모습을 봤다는 착각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의 내용보다 그것을 꺼낸 이유를 먼저 읽었다.
처음이었다.
여자에게 진실을 말하고도 거짓말이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그럼 뭘 해야 믿는데."
서아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계산하지 않은 거요."
"그게 뭔데."
"제가 어떻게 알아요."
서아가 웃었다.
이번에는 완벽한 접객용 미소였다.
조금 전까지의 날카로운 눈빛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부사장님이 찾아야죠."
시준은 그 미소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녀는 다시 가면을 썼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갔다고 느낀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님과 접객원의 거리로 돌아갔다.
테이블 위에 놓인 시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여자 이름이 떠올랐다.
이채영.
서아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화면으로 향했다.
시준은 전화를 뒤집지 않았다.
"안 받으세요?"
서아가 물었다.
"궁금해?"
"중요한 연락일 수도 있으니까요."
"여자 이름인데."
"그러네요."
그뿐이었다.
말끝도, 표정도 달라지지 않았다.
시준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수화기 너머에서 채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 얼굴이나 보자는 말이었다.
평소였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시준은 서아를 보며 대답했다.
"에덴으로 와."
전화를 끊자 서아가 빈 잔 하나를 더 꺼냈다.
"여기로 오시는 거예요?"
"그래."
"어떤 술 좋아하세요?"
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궁금해?"
"손님 취향은 알아야죠."
서아에게 이채영은 질투할 대상조차 아니었다.
곧 들어올 새로운 손님일 뿐이었다.
그 사실이 시준의 신경을 건드렸다.
"내 여자일 수도 있는데."
서아의 손이 잠시 멈췄다.
시준은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서아는 곧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럼 더 잘해드려야겠네요."
"왜."
"부사장님이 좋아하는 여자니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부사장님, 일행분 도착하셨습니다."
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으로 향하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손님을 맞이할 때 사용하는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입술 위에 올렸다.
시준은 그 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의 진실도 통하지 않았다.
다른 여자의 존재도 아직은 서아의 가면을 흔들지 못했다.
문고리를 잡은 서아가 시준을 돌아봤다.
"들어오시라고 할까요?"
시준은 소파에 깊이 기대앉았다.
"그래."
문이 열렸다.
밝은 웃음소리와 낯선 향수가 VIP룸 안으로 흘러들었다.
시준의 시선은 들어오는 이채영이 아니라, 그녀를 향해 다정하게 웃는 진서아에게만 머물렀다.
다음 시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결과를 가장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 특별외전 - 우리가 사는 방식## 진서아 시점결혼했다고 해서 라운지의 규칙이 바뀌지는 않았다.한시준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런데 결혼 후 첫 금요일, 그는 예약도 없이 라운지 문을 열고 들어왔다.나는 바 안쪽에서 그를 바라봤다."오늘 예약 없는데요."시준이 멈췄다."남편도 예약해야 해?""손님으로 올 거면요."그의 표정이 굳었다.라운지에는 이미 손님이 몇 명 있었다.그중에는 강도현도 있었다.시준은 도현과 바 위에 놓인 디저트 상자를 번갈아 봤다.결혼 전부터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조합이었다."그럼 손님 아니면.""뭐로 왔는데요?"시준은 잠시 생각했다."너 보러.""그건 영업 끝나고요."직원 한 명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시준은 불쾌한 얼굴로 바 끝자리에 앉았다."그럼 예약할게.""오늘은 자리가 없어요.""여기 비어 있잖아.""그 자리는 예약석이에요.""누가.""곧 오세요."시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예약자를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남자라면 취소시키고 싶을지도 몰랐다.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끝나면 연락해.""가려고요?""네 규칙이라며."화를 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표정만으로도 라운지 온도가 내려갈 정도였다.그래도 나가야 할 때 나갔다.나는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괜찮으세요?""뭐가?""부사장님 화난 것 같은데.""맞아.""그런데 그냥 보내요?"나는 새 잔을 꺼냈다."화난 건 본인이 해결해야지."그날 마감을 마치고 나가자 시준은 건너편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정확히 네 시간 동안.차에 타자마자 그가 물었다."예약자 누구였어.""여자 손님이요."굳어 있던 얼굴이 아주 조금 풀렸다."그걸 먼저 말했어야지.""왜요?""괜히 기다렸잖아.""여자면 괜찮고 남자면 안 괜찮아요?"시준은 안전벨트를 매주는 척 내 쪽으로 몸을 기울
#특별외전 - 한시준 시점(2)## 네가 내게 걸어오던 날결혼식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많이 내리지는 않았다.문제는 비가 내린다는 사실 자체였다.나는 한 시간 단위로 기상 자료를 확인했다.오후에는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했지만 가능성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실내로 옮길까요?"행사 담당자가 물었다.정원과 연결된 실내 공간은 이미 준비돼 있었다.하객을 전부 수용할 수 있도록 테이블 배치도 바꿀 수 있었다.결정만 하면 됐다.나는 정원 끝의 작은 단상을 바라봤다.서아가 그곳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상상된다고 말했다.그래서 이 장소를 골랐다.정확히는 서아가 골랐고, 내가 동의했다."기다려."나는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서아에게 전화하면 드레스와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비 이야기부터 꺼낼 것이다.그녀가 직접 결정하게 해야 했다.그 사실은 알았지만 기다리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오전 열한 시가 넘어 서아에게 메시지가 왔다.[비 오는 것도 괜찮아요.]나는 화면을 보자마자 전화를 걸었다."밖 봤어?"[봤어요.]"정원 바닥 젖어."[의자만 닦으면 되죠.]"드레스도 젖을 수 있어."[그럼 조금 젖죠.]"감기 걸리면."[한시준 씨.]서아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저 결혼하러 가는 거지 야외 촬영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원래대로 해요.]"비 계속 오면."[우산 쓰고요.]역시 진서아였다.나는 담당자에게 정원 예식을 그대로 진행하라고 말했다.대신 통로 위에 투명 천막을 설치하고, 하객 자리에 우산과 담요를 추가했다.서아가 부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선택을 바꾸는 일은 아니었다.비를 멈출 수는 없어도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준비할 수는 있었다.하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강재혁은 나를 보자마자 웃었다."긴장하셨습니까?""아니.""넥타이가 비뚤어졌습니다."손을 올려 확인하자 멀쩡했다.재혁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농담입니다.""오늘 끝나고 보자.""결혼
#특별외전 - 진서아 시점(2)## 내가 고른 결혼식결혼식을 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다만 한시준과 결혼한다는 이유로 내 결혼식까지 한율그룹 행사가 되는 건 싫었다.그 생각이 더 확실해진 건 한율 비서실에서 보내온 첫 번째 결혼식 기획서를 본 뒤였다.서울 시내 특급호텔 그랜드볼룸.하객 예상 인원 천이백 명.정재계 주요 인사와 계열사 대표, 해외 협력사 관계자까지 포함된 명단.결혼식이라기보다 한율그룹 후계자의 공식 발표회에 가까웠다.나는 기획서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확인한 뒤 시준을 바라봤다."이거 봤어요?"시준은 소파에 앉아 태블릿으로 업무 자료를 확인하고 있었다."뭘."나는 두꺼운 기획서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표지에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한율그룹 한시준 부사장 결혼식 진행안.신부 이름은 작은 글씨로 그 아래에 붙어 있었다.진서아."제 이름이 부제예요?"시준이 문서를 펼쳐보더니 표정이 굳었다."누가 보냈어.""비서실이요."그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집었다.나는 그의 손을 눌렀다."또 전화부터 하지 말고요.""이건 내가 지시한 게 아니야.""알아요."시준이 원했다면 신부 이름조차 없는 결혼식 기획서가 왔을지도 모른다.그래도 그는 적어도 내게 묻기 전에는 장소조차 정하지 않았다."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시준이 물었다.나는 기획서를 다시 넘겨봤다."여기 있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건 하나 있어요.""뭔데.""음식."시준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것만?""네."나는 기획서를 덮었다."결혼식은 작게 하고 싶어요."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얼마나 작게.""제가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람만 부를 수 있을 정도로요.""그럼 한율 쪽은.""시준 씨가 정말 부르고 싶은 사람만요."시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한율 후계자의 결혼식은 개인 행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이미 여러 번 들었을 것이다.회사와 집안, 언론과 투자자까지 모두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내가 그 현실을
#특별외전 - 한시준시점 (1) ## 처음으로 갖지 않기로 한 사람결혼한 뒤에도 진서아는 내 것이 아니었다.법적으로는 배우자였고, 같은 주소에 살았으며, 서류 위에는 내 이름 옆에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하지만 그것이 서아를 소유할 권리는 아니었다.그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망쳤다.에덴에서 진서아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정확히는 가지고 싶었다.긴 검은 머리와 붉은 입술,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시선을 자신에게 모으는 태도.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였다.그런 여자는 익숙했다.원하는 것을 물어보고,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면 됐다.그런데 진서아는 달랐다.완벽하게 웃으면서도 나를 보지 않았다.내가 무슨 말을 원하는지 알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도 알았지만, 그 안에 자신은 없었다.세 번의 미소가 전부 같다고 말했을 때 그녀의 눈빛이 처음으로 조금 변했다.그 짧은 흔들림이 마음에 들었다.그래서 손목을 잡았다.그녀가 나를 의식하게 만들고 싶었다."밀어내지 않는다고 원하는 건 아니에요."서아가 내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기분이 나빴다.내 손을 거절한 여자는 있었지만, 내가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듯 말한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날부터 나는 진서아를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단순한 승부라고 생각했다.다른 손님에게 보이는 얼굴과 내 앞에서 보이는 얼굴을 다르게 만들면 내가 이기는 것이었다.비싼 귀걸이를 보냈다.당연히 하고 올 거라고 생각했다.서아는 돌려보냈다.대신 값도 알 수 없는 검은 귀걸이를 하고 나타났다.내가 선택한 것을 거절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을 보여주는 여자.불쾌한데도 눈을 뗄 수 없었다.일부러 늦게 도착한 날에도 그녀는 기다리지 않았다.나를 위해 시간을 비워두는 대신 다른 손님을 받았다.다음부터는 늦지 말라고 했다.그 말을 듣고도 다시 예약했다.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때부터 이미 지고 있었다.그녀가 정한 시간에 맞춰
#특별외전 - 진서아 시점(1)##내가 그 남자를 선택하기까지결혼한 뒤에도 한시준은 가끔 나를 손님처럼 기다렸다.정확히 말하면, 내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렸다."안 들어오고 뭐 해요?"늦은 밤 라운지 문을 열자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계단 끝에 서 있었다.영업은 이미 끝난 시간이었다.직원들도 모두 퇴근했고, 골목에는 겨울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네가 마감 중이었잖아.""열쇠 있잖아요.""라운지 열쇠는 없어.""집 열쇠 말고요."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손님으로 오지 않는 날에는 내가 먼저 부르기 전까지 계단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내 남편이 된 뒤에도 그랬다.처음 만난 날의 한시준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에덴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바로 알았다.비싼 정장과 손목시계 때문만은 아니었다.남자를 판단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시선이었다.무엇을 보고 있는지보다, 그것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했다.한시준은 사람을 선택하는 눈으로 봤다.마음에 들면 가지고, 싫증 나면 놓아버리는 사람.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가능성은 생각해본 적 없는 남자.그런 남자들은 오히려 다루기 쉬웠다.원하는 말을 해주고, 정해진 순간에 웃어주고, 자신이 특별하다는 착각을 주면 됐다.그날도 평소와 똑같이 웃었다.그런데 그가 말했다.세 번 다 똑같은 미소라고.처음에는 조금 놀랐다.그런 걸 알아보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그렇다고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내 손목을 잡고도 놓으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놓지 않을 것처럼 굴었으니까."밀어내지 않는다고 원하는 건 아니에요."나는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그 순간 시준의 눈빛이 달라졌다.기분이 상한 남자의 얼굴이었다.그런데도 화를 내지 않았다.대신 나를 더 오래 봤다.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그가 나를 손님에게 웃어주는 여자가 아니라, 자신을 거절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비싼 귀걸이를 돌려보낸 건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었다.정말
#외전 5화. 매일 다시 선택할 사람진서아가 한시준의 집에서 지낸 지 여섯 달이 지났다.처음에는 일주일씩 연장하던 동거였다.두 번째 일주일이 끝났을 때는 서아가 먼저 기간을 말하지 않았고, 시준도 묻지 않았다.계절이 바뀌는 동안 드레스룸의 절반은 자연스럽게 서아의 옷으로 채워졌다. 화장대 위에는 립스틱과 향수가 늘어났고, 냉장고에는 시준이 먹지 않던 과일과 탄산수가 들어왔다.침실 구석의 수면등도 여전히 켜져 있었다.이제 시준은 불빛이 없으면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다.같이 산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시준은 서아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시간을 확인했고, 서아는 그런 시준에게 라운지 영업시간표를 냉장고에 붙여놓으라고 했다.서아는 사용한 컵을 아무 곳에나 두었고, 시준은 발견하는 즉시 정해진 위치로 옮겼다.한 번은 서아가 일부러 컵을 거실과 침실, 드레스룸에 하나씩 놓아두기도 했다.시준은 말없이 전부 치운 뒤 다음 날 같은 자리에 새 컵을 가져다 놓았다."뭐 하는 거예요?""네가 필요해서 둔 줄 알았어.""제가 어지럽힌 거예요.""알아.""그런데 왜 다시 놔요?""내가 치우는지 시험한 거잖아."시준은 서아보다 먼저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여전히 자주 부딪혔다.하지만 이제는 한쪽이 사라지는 것으로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싫은 것은 싫다고 말하고, 화가 나면 화가 났다고 했다.문을 닫더라도 잠그지는 않았다.그 정도면 두 사람에게는 충분히 평온한 연애였다.서아가 시준의 변화를 눈치챈 것은 목요일 아침이었다.시준은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자꾸 서아의 왼손을 바라봤다.처음 한두 번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식탁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차에 타기 직전에도 시선이 같은 곳에 머물렀다.서아가 결국 손을 들어 보였다."왜 자꾸 봐요?"시준이 시선을 피했다."안 봤어.""세어봤는데 일곱 번 봤어요.""그걸 왜 세.""이상하니까요."서아는 그의 앞에 왼손을 내밀었다."뭐 묻었어요?""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