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알겠습니다. 내일 사람을 데려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안 그러면 어머니의 혼수를 받았다고 해도 풀어주지 않을 겁니다.”말을 마친 온사는 상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알아들으셨나요?”온자월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좋아. 아주 잘났구나.”온사는 더 이상 그 말에 응대해 주지 않고 사저들과 함께 상자를 안으로 날랐다.마지막 상자가 들어갈 때까지 그녀는 온자월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고, 온모는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어차피 그녀는 지금 얌전하고 순진한 막냇동생이었기에, 셋째 오라버니가 그러라고 했으니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모든 정리가 끝나자, 온모는 그제야 후련한 느낌을 받았다.돌아가서 온권승에게 사실을 전한 후, 온권승은 바로 다음 날에 온사의 이름을 족보에서 지워버렸다.온장온은 말리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기분이 좋아진 온모는 온자신을 마중하러 옥으로 갔다.그녀가 오래 못 만난 둘째 오라버니에게 달려가서 애교를 부리려 할 때, 그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가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무의식적인 동작에 온자신의 얼굴이 수치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러자 온모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죄송해요, 둘째 오라버니. 몸에 부상이 있는 걸 깜빡하고 하마터면 달려들 뻔했네요. 상처가 벌어지면 안 되니까 부축은 안 할게요.”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온자신은 멍청해서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그는 멍청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막내야. 마침 몸에 악취도 풍기니 멀리 떨어져서 걸으렴.”온모는 애교 어린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전 오라버니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요!”말은 그렇게 해도 온모는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걸었다.마차에 오른 온자신은 이제 드디어 집으로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그런데 창문 가림막을 열어보니 마차가 향하는 방향이 뭔가 석연치 않았다.온자신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셋째야, 막내야, 우리 집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 어디 들를 데
“형님, 정말 미쳤어?”온자월이 놀란 눈으로 온자신을 바라보며 물었다.비록 처음부터 온자신을 데리고 가서 사과할 계획이었지만 온자신의 반응은 그의 예상밖이었다.“곤장 80대 맞고 바보가 된 거야? 아니면 옥에 너무 갇혀 지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온자월은 살짝 무시하는 투로 그에게 묻자, 온모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둘째 오라버니, 정말 괜찮은 거 맞죠?”온자신은 자신의 말 한마디에 두 사람이 보이는 반응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곧이어 그는 감옥에서 생각한 것들을 그들에게 말해주었다.“사실 그날 온사를 때리고 나도 후회했어…”그동안 그는 매번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당시의 온사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너무도 가슴을 아프게 하는 눈빛이었다.며칠 안 본 사이에 온사는 왜 그렇게 증오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됐을까?그는 산으로 간 목적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온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게 목적이었다.그런데 온사가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심지어 그를 깨물기까지 했으니, 그때는 너무 아파서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온사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손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물어뜯었다.온자신은 손에 움푹 패인 상처를 보고 생각에 잠겼다.그는 온사가 자신을 두려워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가문에 돌아가는 게 두려운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어느 쪽이라고 해도 그는 편히 잠들 수 없었다.온자신은 점점 후회가 됐다.자세히 생각해 보니, 큰 형의 말이 틀린 것 하나 없었다.반년 동안 그는 자주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온사에게 폭력을 썼다. 어쩌면 온사가 그 정도로 두려워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자, 동생에게 제대로 사과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누가 뭐래도 그는 온사의 오라버니였으니 말이다.남매 사이는 본디 서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관계 아닌가. 하물며 온사는 그의 친동생이었다.조금 천방지축에, 말을 잘 안 듣기는 해도 그녀가 자신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그런 생각을
퍽!온자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자신이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쳤다.“둘째 오라버니!”그러자 옆에 있던 온모가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온사를 위해 온자신이 온자월에게 주먹을 휘두를 줄이야!“양심도 없는 것이라고! 어머니가 임종 때 했던 말을 다 잊었어? 어머니께선 우리한테 여동생을 잘 돌보라고 하셨는데 넌 이런 식으로 할 거야? 온사가 예의 없고 철부지라고?”온자월도 몸을 비틀며 온자신에게 주먹을 날렸다.옥에 오랜 시간 갇혀 있고 부상까지 입은 온자신에 비해 온자월의 주먹에 실린 힘이 더 셌다.온자신은 하마터면 그대로 마차 밖으로 튕겨나갈 뻔했다.온자월은 피를 뱉은 뒤에 음산한 얼굴로 온자신에게 말했다.“형님, 나한테 화풀이하지 마. 난 온사가 아니야. 전에 형님도 온사에게 비슷한 말을 적지 않게 했고 주먹까지 휘둘렀어. 그런데 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훈수 두는 거지?!”“그래! 나도 나쁜 놈이야!”온자신은 결국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분을 토했다.“하지만 이제 난 정신을 차렸고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어! 온사는 내 동생이고 그 아이가 어떻게 변했든 우리 사이가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건 변하지 않아! 너도 같고 큰 형님, 넷째도 마찬가지야!”“그럼 막내는?”온자월도 언성을 높여 싸늘하게 말했다.“형님은 온사를 선택하고 막내를 버리겠다는 거야?”온모는 곧바로 상심한 표정을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둘째 오라버니, 저… 저는 오라버니들과 혈연관계가 아니라서 친동생이 아니라는 건가요?”“막내 너도 당연히 우리 동생이지! 온사도 너도 다 내 동생이야!”온자신은 자신의 말이 온모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에 다급히 해명했다.그러자 온모가 울며 말했다.“하지만 어제 언니가 사람들 앞에서 말했단 말이에요. 저를 동생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자기 가족이 아니라고요.”온자신은 순간 누가 찬물을 머리에 끼얹은 기분이었다. 그가 멍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니?”온자월이 싸늘하게 말했다.“그러니까 형님
그리고 역시나 온자월의 예상은 정확했다.그들이 다급히 말을 구해서 수월관에 달려갔을 때, 온자신은 방망이를 든 사태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온사야! 온사야, 나와!”“둘째 오라버니가 사과하러 왔어!”“온사야, 나와서 얼굴 보고 얘기하자, 응?”온자신은 수월관 밖에 서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온사를 불렀다.수월관 대문 앞으로 나온 막수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사과가 하고 싶다면 여기서 하세요. 제가 대신 무우에게 전하겠습니다.”“안 됩니다!”온자신은 고개를 저었다.“온사를 좀 불러주세요. 그 아이에게 사과하러 온 것이니 얼굴 보고 얘기하겠습니다.”“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막수 사태는 단박에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시주께선 괴팍하고 감정을 잘 주체하지 못하는 분이시니, 지난 번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 다시는 무우를 만나지 마십시오.”그 말을 들은 온자신은 망연자실했다.“다시는 만나지 말라는 말이…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말 그대로입니다. 무우는 진국공가와 완전히 연을 끊었습니다. 그러니 시주와 더 이상 할 얘기도 없을 거고요. 그러니 여기서 사과하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앞으로 다시는 수월관에 오지 마세요.”온자신은 다시 주먹을 쥐고는, 분노한 얼굴로 막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그건 사태의 뜻입니까, 아니면 온사의 뜻입니까?”“제 뜻이기 곧 무우의 뜻입니다. 차이가 있나요?”막수 사태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하지만 그 모습이 온자신을 더욱 자극했다.“당연히 차이가 있죠! 온사는 제 동생이란 말입니다! 왜 동생을 못 만나게 합니까!”“제가 무우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막수 사태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온자신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담담히 말했다.“이제 제가 그 아이의 유일한 가족입니다.”온자신은 그 말을 듣고 황당하기 그지없었다.“닥쳐! 유일한 가족 같은 소리하네! 온사는 내 동생이고 내가 걔 오라버니야! 온사의 가족은 나고 우리 집이 곧 온사의 집이라고!”“그건 시주 혼자만의 생각이지요. 어제 진국공께서는
“미안하다, 온사야. 내가 미안해. 오라비가 몹쓸 짓을 했어! 흑….”온자신은 계속해서 사과를 하다가,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통곡을 터뜨렸다.그를 둘러싼 사태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서로 눈치를 살폈다.상대가 눈물까지 보일 줄은 그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사태들은 분분히 고개를 돌려 막수 사태를 바라보았다.막수가 담담히 눈짓하자 사태들은 방망이를 내려놓고 막수 사태의 등 뒤로 가서 섰다.“사과는 들었으니 제가 무우에게 전하겠습니다.”온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고 구슬피 울고 있지만 막수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그는 싸늘하게 말을 마친 후에 사람을 시켜 문을 닫게 했다. 홀로 남은 온자신은 그 자리에서 계속 울었다.온자월은 그런 둘째 형이 너무 창피해서 다가가 온자신을 걷어찼다.“형님, 이렇게까지 울 일은 아니지 않아?”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며 다시 물었다.“그렇게 온사와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하지만 온자신은 계속 울기만 할 뿐, 온자월의 말엔 대답도 하지 않았다.옆에서 지켜보는 온모는 분노에 이가 갈렸다.‘이 멍청이가 진심이었어? 그냥 미친 건가?’자신이 온사에게 무력을 행사해 다치게 만들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후회한다는 꼴이라니.온모는 자신이 온사라도 이런 멍청이는 용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길게 심호흡하고는 혐오스러움을 감추며 다가가서 온자신을 달랬다.“둘째 오라버니, 그만 울어요. 지금 여기서 울고 있어도 아무 소용없잖아요. 제가 보기에 언니는 오라버니가 온 줄도 모를 수 있어요. 언니의 마음을 돌리고 싶으면 돌아가서 다시 방법을 생각하는 게 좋겠어요.”가장 중요한 건 그가 여기서 울고 있으니 창피해 죽겠다는 것이었다.순진하고 선량한 여동생의 형상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진작에 이 멍청이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막내 하는 말 들었지? 사과를 마쳤으면 빨리 돌아가자. 할 얘기 있으면 나중에 하고. 지금 아버지랑 큰 형님 그리고 넷째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동안 아버지가
“되었다. 네가 그렇게 싫다면 앞으로는 얘기 안 하마.”막수는 온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숙제 검사까지 마친 후에 말했다.“참. 근래 나랑 하산해야 할 일이 있다.”“예?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기운 없던 온사는 그 말을 듣자 눈을 반짝 빛냈다.“당연하지.”막수 사태는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산 아래에 내 환자가 한 명 있는데 하산해서 치료를 해주어야 해.”잠시 머뭇거리던 막수가 말을 이었다.“그런데 상대의 신분이 너한테 좀 곤란할 수도 있겠구나.”“누구인데요?”온사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충용 후작가의 노부인이시다.”그 말을 들은 온사는 왜 막수가 머뭇거렸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충용 후작가의 노부인이면 그녀의 전 약혼자 최소택의 할머니였다.하지만 온사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분이셨군요. 괜찮아요, 사부님. 저와 충용 후작가는 이미 혼약을 해지했고 최소택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니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어요.”“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안심이구나.”안 그래도 이 일로 걱정이 많았던 막수였다.전에 알아본 바로 온사와 최소택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우애가 아주 깊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최소택은 온사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충용 후작가의 노부인이 오래 전에 막수에게 은혜를 베푼 일이 있지 않았다면 그 요청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온사는 안도하는 스승의 모습에 웃으며 말했다.“설마 이 일로 오래 고민하신 건 아니지요?”“오래 고민했지.”그러자 막수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것 봐. 어젯밤에 잠을 설쳐서 안색도 안 좋아졌어.”오늘 하루 종일 시무룩해 있는 온사를 위해 기분전환을 해주고 싶지 않았다면 이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온사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사부.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인걸요.”“그리고 사부께서 그리 가르치셨잖아요. 출가인은 욕망을 끊어야 한다고요. 연정도 그 중 하나에 속하지요.”온사는 두 손을 합장하고 아미타불을 외웠다.막
온사는 후작 부인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원래부터 그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던 고모이기도 했다.전에는 원래 그런 성격이려니 했는데 온모가 가문에 들어온 후로부터는 온아려가 극진히 챙기는 모습을 보고 고모는 단순히 자신을 안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래서 온아려가 자신을 불렀음에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온아려는 요지부동으로 가만히 있는 그녀를 보고 불쾌한 표정으로 다가갔다.“이 계집애가 뭘 멍 때리고 있어? 고모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여전히 예의가 없구나.”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뻗어 온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당장 일어나. 웃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도리 몰라?”“시주.”막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길을 내치고 싸늘하게 말했다.“제 제자에게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온아려 막수를 그저 나이 든 여승으로만 생각했다.“온사야, 출가해서 드디어 의지할 사람을 찾았니? 늙은 여승이나 데리고 와서 의기양양한 꼴이라니. 설마 너 성녀가 됐다고 우리가 널 두려워할 거라 생각하는 거 아니지?”“우리 소택이는 절대 너 같은 애와 혼인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출가인이든 성녀든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고 소택이한테서 멀리 떨어져!”“후작 부인!”막수의 얼굴에 짙은 분노가 피어났다. 그녀는 온사를 뒤에 감추고 싸늘한 눈빛으로 온아려를 노려보며 말했다.“말은 똑바로 해야죠. 저희는 노부인의 초대를 받고 진료를 보러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상한 망상에 젖어 무례한 발언하지 마십시오.”온아려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진료를 봐? 여자 땡중들이 무슨 진료를 본다고. 너희들….”“에미야, 당장 그 입 안 다물어?”온아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에 누운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노인은 굳은 얼굴로 온아려에게 호통치고는 말했다.“막수 사태와 이 어린 승려분은 내 손님이다. 계속 내 손님들에게 무례를 범한다면 아무리 너라도 용서 못해.”“어머님, 저 사람들은….”“당장 안 나가?”더 이상 그녀의 말이 듣기 싫어
지난번 명절 때 한번 뵙고 몇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노부인은 원래는 손주며느리였어야 할 아이를 다시 마주하니 마음이 착잡했다.온사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다.그래서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막수에게 말했다.막수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바로 돌아와서 나를 찾거라.”그 말인 즉 후작가에서 온사를 괴롭히기라도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미였다.온사는 노부인의 오색한 표정을 힐끗 보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그녀 역시 어색한 상황이기에 어디 멀리 나갈 생각은 아니었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입구에 서서 멍하니 정원 풍경을 바라보았다.그녀가 그렇게 잠시 따분함을 느끼고 있을 때, 온아려는 분을 참지 못하고 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그녀의 목적은 온사와 마주치지 않게 오늘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오지 말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온사가 집에 왔다는 소리를 들은 최소택은 사람을 보내 국공부에 서신을 전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노부인의 처소에 들자 밖에서 멍 때리고 있는 온사가 보였다.출가한 후 법복을 입은 온사의 모습은 그 역시 처음이었다.그는 청색의 법복을 입은 소녀를 보고 순간 멈칫하고 걸음을 멈추었다.자신의 전 약혼녀가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여자복이 넘친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기도 했지만 그는 외모만 따지는 속물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여인은 온모처럼 마음이 선량한 여인이었다.그는 내적 아름다움만이 진짜 아름다움이라고 여겼고, 그런 여자만이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온사처럼 겉모습만 화려하고 속은 시커먼 여인은 자신을 진심으로 연모하는 마음도 없었더라면 절대 기회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최소택은 그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기침을 했다. 그러자 온사가 화들짝 놀란 것을 보고는 느긋하게 다가갔다.“네가 왜 여기 있어? 일부러 나 보려고 온 거니?”최소택은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고 온사에게 물었다.온사는 그를 힐
진국공부 서재.“아버지, 형님, 어찌 막내에게 이러실 수 있어요!”“후궁이 어떤 곳인지 뻔히 아시면서, 폐하께서 진국공 가문을 얼마나 견제하는지 아시면서 어떻게 막내를 그곳에 두고 와요!”“막내가 황궁에서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떡해요? 우리가 옆에 없으면 누가 걔를 지켜줘요?”“왜 다들 대답이 없어요? 아버지랑 형님이 안 가면 제가 가요!”“이럴 줄 알았으면 막내를 연회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애를 그런 곳에 버려두고 와요! 내가 거기 갔어야 하는 건데!”진국공 가문은 온모가 황궁에 남은 일로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정확히 말하면 온자월이 일방적으로 소란을 부리고 있는 거였다.온옥지는 온자월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매번 온자월이 소란을 피울 때 그는 온자월의 편에 섰다.온권승과 온장온 부자는 처음에는 인내심 있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온모를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온모가 고집을 피워서 황궁에 남은 거라는 말도 했다.하지만 온자월에게는 그런 설명이 통하지 않았다.“막내는 순진해서 후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아무리 폐하의 후궁에 아직 사람이 없다지만 앞으로는 누가 보장해요?”“폐하께서 막내한테 질려서 후궁 간택을 또 하면요? 그럼 수많은 여인들이 입궐하게 될 텐데 막내는 거기서 어찌 살아남아요?”이틀째 소란을 피우는 온자월 때문에 온권승은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그는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폐하께서 우리 진국공가를 견제하는 걸 알면 그분이 막내를 후궁으로 들이지 않을 것도 알지 않니.”“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온자월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에 폐하께서 정말 막내를 후궁으로 들일 생각이면요? 막내를 인질로 잡고 아버지와 우리 진국공 가문을 협박할 생각이라면요?”“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구나.”더 이상 그와 입씨름하기 싫었던 온권승은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그리고 이때, 옆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던 온장온이 담담히 말했다.“황비로 간택하여 우리 가문을
양 어멈은 태후의 심복이자, 태후가 온모에게 예의와 법도를 가르치라고 보낸 사람이었다.그녀는 온모의 요구를 단박에 거절했다.“죄송합니다, 아씨. 아씨는 아직 시골 촌티가 너무 나요. 빨리 궁중의 귀인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훈련을 다 통과하셔야 합니다.”촌티가 난다는 말에 온모는 금세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이 할망구가 감히 날 모욕해?’온모는 이를 부드득 갈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폐하께선 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하셨는걸요. 만약 어멈과 예의 법도를 배우다가 얼굴을 다치기라도 하면 어멈도 곤란하지 않을까요?”온모의 뻔한 수작은 양 어멈에게 너무도 하찮은 수로 보였다.어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온모에게 말했다.“아씨, 그건 틀린 말씀이죠.”온모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어디가 틀렸는데요?”“그 말 자체가 틀렸습니다. 폐하께서 아씨께 한눈에 반하여 아씨를 비로 들이겠다고 하셔서 제가 태후의 명을 받고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런데 아씨는 열심히 배우지도 않고 외모만 신경 쓰고 계시니, 폐하를 얼굴만 보는 속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아닙니까?”양 어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그 말에 온모는 가슴이 철렁했다.“그… 그건 모함이에요! 제가 언제 폐하를 속된 사람으로 말했어요!”“아씨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 때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 늙은 것을 협박할 게 아니라요!”온모는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머리에 이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양 어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부축하는 척하며 힘을 주어 온모를 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아씨, 진국공 저택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나 보군요. 아씨가 입궁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제 눈에는 성에 차지도 않지만요.”“폐하께서 아씨를 가르치라고 저를 보냈으니 저는 열심히 임할 뿐입니다. 아씨께서 제가 가르쳐 드린대로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저녁에 한번 제가 드린 숙제만 완수하면 빠른 시일 내에 궁중법도를 익히고 폐하의 시침을
온장온은 순간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녹두과자 아니었어? 그럼 계화떡인가?”온사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계화떡이요? 확실한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더 맞혀보세요. 어쩌면 매번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걸 말씀하시는지, 그것도 재능 아닌가요? 그만큼 제가 싫었고 관심이 없었던 거겠죠.”온장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됐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든 당신이랑 아무 상관없잖아요.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 못하는 것도 이해해요.”온사의 어투에는 진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난 싫어하지만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 그러니 얼른 그거 갖고 식기 전에 오라버니가 가장 총애하는 동생한테 갖다주세요.”“아니야, 온사야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일부러 네가 싫어하는 녹두과자를 사온 게 아니야. 그냥 저도 모르게… 이걸….”온장온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다시 생각해 보니 녹두과자와 계화떡은 막내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분명 온사를 찾아온다고 왔는데 온사에게 막내가 가장 좋아하지만 온사는 가장 싫어하는 걸 가져왔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온사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됐다.온장온은 손에 들린 녹두과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죄책감에 견딜 수 없었다.“온사야, 화내지 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가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걸 사올게!”온사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장온을 바라보며 말했다.“큰 오라버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 기억이 나요?”“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 오리구이, 맞지?”온장온은 기대에 찬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입에서 긍정의 답을 기다렸다.하지만 온사는 말없이 한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온장온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녹두과자도 아니고, 계화떡도 아니고, 오리구이는….’‘그래, 오리구이는 셋째가 좋아하는 거잖아!’어쩌다가 그것들을 온사가 좋아한다고 인지하게 된 걸까?온장온은 손에 들고 있던 녹두과자를 툭 하고
“제가 정말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른다면 저는 사람도 아닙니다. 벼락 맞아 죽어도 불만이 없어요!”온장온은 수월관 밖에서 장장 한 시진을 기다리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사태들에게 사정했다.보다못한 사태가 와서 말을 전했지만 온사의 반응은 냉담했다.“안 가요.”그 말은 그대로 온장온에게 전해졌다.하지만 그는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제발 동생 좀 설득해 주세요. 꼭 만나야 합니다.”“안 돼요. 성녀 전하께서 안 만나신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서 시간낭비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세요.”안 그래도 진국공 가문이 마음에 안 들었던 사태들은 말만 전하고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그렇게 그 뒤로 매일 온장온은 수월관을 찾아왔다.그는 오후 업무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바로 수월관으로 왔다.그가 매일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니 사태들도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무고 사저는 난감한 얼굴로 또 온사를 찾았다.“정말 끈질긴 사람이야. 강제로 침입한 건 아니지만 매일 찾아와서 꼭 널 만나야 돌아간다잖아.”막수와 함께 새로운 독약을 연구해낸 온사는 손을 씻고 돌아와서 말했다.“알겠어요, 사저들은 일단 돌아가 계세요. 제가 해결할게요.”그 말을 들은 무고 사저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사매야, 흥분하면 안 돼. 비록 짜증나게 굴긴 하지만 전에 왔던 그 녀석들과 비교하면 양반이잖아. 시비를 걸려고 온 건 같지 않았어. 그냥 몇 마디 해서 좋게 돌려보내.”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예, 제가 알아서 할게요.”온장온이 온 이유는 뻔했다.온씨 가문 인간들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면 분명 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서일 것이다.이미 어머니를 묻어드렸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절대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그러니 온장온이 매일 찾아와도 헛수고였다.사저와 사태들의 수련을 방해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무시하고 싶었다.“온사야!”드디어 온사를 마주한 온장온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드디어 나와줬구나. 오라비가 오늘 정성루에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