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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의 조카를 사랑했다.
여자친구의 조카를 사랑했다.
Author: 기봉이

1화 : 눈발 같은 여자.

Author: 기봉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5 17:58:35

“진짜 나도 가?”

“안 가도 돼.”

채영이 피식 웃더니 안전벨트를 고쳐 매며 덧붙였다.

“대신 이번 달은 당신 돈만 쓰도록 해.”

경쾌한 협박에 나는 헛웃음 쳤다.

“아이고, 무서워라. 얌전히 따라가겠습니다. 마마님.”

“그렇지.”

나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끼웠다.

방금까지 보고 있던 건 네튜브 댓글 창이었다.

구독자 527명의 내 채널.

알고리즘을 탄 덕분에 조금 터져준 영상.

좋아요 1.7천

댓글 312개

- 손 때문에 영상 끝까지 봤어요.

- 브이로그도 찍어 주세요.

- 얼굴 공개 더 해주세요.

한숨이 나왔다.

‘피규어 얘기는 없네.’

나는 화면을 끄고 네비를 켰다.

“규현 씨.”

“응?”

“어째, 조형에 대한 평가보다 외모 평가가 더 많은 거 같은데?”

“아냐, 제작 문의도 있어.”

채영이 창밖을 힐끗 보며 내게 말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재능만으론 안 굴러가. 세상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으니까.

피규어 외주 몇 개를 긁어모아도 월 백만 원 남짓.

그 돈으로는 혼자 먹고사는 것도 빠듯했다.

반면 채영은 비싼 집의 방 하나를 작업실로 쓰라며 내어주고, 한도조차 알 수 없는 블랙 카드를 내게 쓰라며 주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옮겨 날 바라봤다.

“혹시라도, 댓글 남긴 여자들 따로 만나기만 해.”

“하하, 질투하는 거야?”

“질투?”

채영이 피식 웃더니 덧붙였다.

“한 번 만나보던가.”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나는 조금 굳었다.

그녀는 늘 그랬다.

사람을 편하게 안아주듯 감싸놓는 거 같지만,

어딘가 조금 무서울 때가 있었다.

“당신을 두고 내가 왜 다른 여자를 만나.”

내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채영이 내 오른손을 운전대에서 떼어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그래도 당신 손은 정말 예뻐. 정말 좋겠어, 이 손으로 만든 걸 선물 받는 사람은.”

***

여섯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폐업을 앞둔 오래된 예식장이었다.

팔순 잔치 현수막.

촌스러운 조명.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예식장 문을 열자마자 음식 냄새와 사람 열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언니들! 오빠!”

“채영이 왔다!”

채영은 내 팔에 팔짱을 끼고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인사해. 내 남자친구 규현 씨.”

나는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채영의 언니 넷과 오빠 하나, 그리고 친척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남자친구가 아니라 조카 아냐?”

기분이 조금 나빴다.

“채영이 능력 좋네.”

다들 농담처럼 웃었지만, 그 안에 묘한 가시가 섞여 있는 거 같았다.

‘그래, 열두 살 차이니.’

채영이 잠시 날 보다가 가족들에게 말했다.

“우리 규현 씨 기죽이는 사람 있으면 나한테 혼난다.”

어째서일까, 채영의 말과 동시에 그녀 가족들의 태도가 변했다.

“농담이야, 농담.”

“규현 씨, 이리 와서 앉아요.”

자리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진아!”

채영이 누군가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이모, 오랜만이에요.”

내 귓가를 채우던 주변 소음이 순간 전부 멀어졌다.

“얘는 같은 서울 살면서 얼굴 보기가 더 힘들다니까?”

“시험 끝나면 놀러 갈게요.”

이상했다.

이 공간에서 이 여자만 유독 다른 존재 같았다.

채영이 내 팔을 당겼다.

“유진아. 이쪽은 내 남자친구 규현 씨.”

유진이 먼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나는 한 박자 늦게 따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왜인지 모르겠는데, 목이 바짝 마르는 거 같았다.

그 이후 몇 번이나 시선이 마주쳤다.

가족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채영과 달리, 유진은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변을 맴돌았다.

나도 모르게 몇 번 더 눈이 갔다.

***

잔치가 끝난 뒤 도착한 채영 부모님 집은 오래된 단독주택 특유의 냄새가 났다.

채영의 가족들과 인사는 했지만, 어울릴 자신까진 없었다.

방 하나를 내어준 덕분에 난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고 거실에선 늦은 밤까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이불 위에 누운 채 천장만 바라봤다.

이상했다.

계속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인지 알 수 없는데 자꾸 얼굴이 떠올랐다.

한참이 지나서야 집 안이 조용해졌다.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었다.

쇼츠를 넘기다, 어느 영상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이성의 관심 신호 7가지 알려드릴게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넘기려다가 다시 봤다.

-자꾸 눈이 마주치나요?

-괜히 주변을 맴도나요?

“미친.”

나는 머리를 흔들고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런데도 괜히 심장이 더 뛰는 거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담배나 피우고 자자.”

담배를 챙겨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오래된 집 특유의 마룻바닥 소리가 삐걱 울렸다.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흙냄새. 풀냄새. 축축한 봄밤의 공기.

나아가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별들이 하늘 가득 떠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때였다.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아래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아직 안 주무셨네요?”

심장이 다시 크게 뛰었다.

밤에 보니 알 수 있었다.

낮에 느꼈던 그 감각이 무엇이었는지.

그래, 어울리지 않는 계절에 내리는 눈발 같은.

내 여자친구의 조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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