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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김치통.

작가: 기봉이
last update 게시일: 2026-08-05 17:58:45

그날 이후 이상할 정도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눈을 감으면 ‘그녀’가 떠올랐다.

봄볕은 따뜻했지만, 유진이 스치고 간 시골의 밤공기가 아직도 남은 것만 같았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채영은 친구들과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

그녀는 공항 출국장에서 내 손을 장난스럽게 만지면서도, 서늘한 눈빛으로 경고했다.

“나 없는 동안 딴생각하면 알지?

술 많이 먹고 이상한 데 가기만 해, 땅콩 띤다.”

채영의 비행기가 이륙했다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나 오늘부터 일주일간 자유다! 지금 바로 나와.”

오늘 끝까지 달릴 생각이었다.

그래야 마음속의 이상한 기분이 비워질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준비를 마쳐가던 그때였다.

띵동ㅡ.

정적을 깨는 초인종 소리에 움찔했다.

택배가 올 게 있었나 싶은 마음에 인터폰도 확인하지 않은 채 현관으로 달려갔다.

현관문이 열리는 찰나 훅 느껴졌다.

시골에서의 그 기운이.

“……어?”

택배가 아니었다.

여자친구의 조카였다.

***

그녀는 나를 보고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나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 안녕하세요. 이모는요?”

“네? 아, 채영 씨 친구들이랑 여행 갔는데…….”

“아, 그렇군요.”

유진의 시선이 내 화려한 외출복에 머물렀다.

잠시 흐른 정적 속에서 유진의 손에 들린 김치통이 눈에 들어왔다.

“같이 사시는 줄 몰랐어요. 실례했습니다.

이거 엄마가 이모 갖다주라고 하셔서요.”

유진은 김치통을 문 앞에 조심스레 내려두고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뒤돌았다.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진이 떠난 자리에는 김치통만 덩그러니 남았다.

김치통을 김치냉장고 깊숙이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나랑 동갑이라고 했나.’

냉장고 냉기 사이로 아까 마주친 유진의 눈동자가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ㅡ

그날 저녁, 나는 예정대로 친구들을 만났다.

왁자지껄한 강남의 클럽.

평소라면 즐거웠을 그 공간이 즐겁지 않았다.

“야, 이규현! 너 왜 그래? 채영 누나가 GPS라도 달아놨냐? 왜 자꾸 멍때려?”

“아니, 그냥… 좀 피곤하네.”

고막을 때리는 음악도, 독한 술도 갈증을 적시지 못했다.

오히려 알코올이 들어갈수록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변하는 거 같았다.

결국 난 친구들을 뒤로한 채 클럽을 빠져나왔다.

***

다음 날 정오.

타는 듯한 갈증에 눈을 떴다.

‘해장이라도 해야 살겠네.’

숙취로 인해 바짝 말라버린 입안을 적시며 배달 앱을 켰다.

배달이 오기까지 30분.

주문을 마치고 소파에 누우려다가 정신을 부여잡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작업실 문을 열고 메일과 SNS DM을 확인했다.

-너무 잘생기셨어요…

피규어 제작 문의는 없고 쓸데없는 말뿐.

“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였다.

띵동ㅡ.

초인종이 울렸다.

“…벌써? 요즘 배달 진짜 빠르네.”

나는 엉망이 된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 문득 어제가 머릿속에 스쳤지만 설마 했다.

하지만 문을 연 순간, 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곳엔 배달 기사가 아닌 유진이 서 있었다.

어제와는 다른 상체에 달라붙은 흰 티에 청바지 차림. 그리고 옅은 화장기.

“죄송해요, 어제 김치통을 그냥 두고 가서요.

엄마가 그 통 비싼 거라고 꼭 찾아오라 하셔서….”

유진의 시선이 내 흐트러진 셔츠 자락과 숙취로 붉게 충혈된 눈에 머물렀다.

아마도, 당황이 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을 것이다.

난 허둥지둥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아! 김치통 정리를 안 했는데, 잠깐 들어와서 기다리실래요?”

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현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허둥지둥 김치냉장고에서 김치통을 꺼냈다.

싱크대를 뒤지며 옮길만한 통을 찾았지만, 주방은 채영의 공간.

설거지 외에는 거리가 멀었던 내 손길은 그저 시간만 축낼 뿐이었다.

그때 유진이 다가왔다.

“도와드릴게요.”

“아, 고마워요.”

유진은 자연스럽게 싱크대 깊은 곳을 뒤졌다.

망설임 없는 손길이었다.

“거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예전에 이모 대신 몇 번 했었어요.”

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김치를 덜어 담을 통을 꺼냈다.

이상했다.

채영 외에는 누구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공간 안에,

유진이 너무 자연스럽게 있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김치를 옮겨 담는 동안, 미세한 김치 냄새와 그녀의 화장품 냄새가 묘하게 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유진이 김치통 뚜껑을 닫다가 내 손에서 시선이 멈췄다.

잠시간 내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녜요.”

유진은 설거지까지 자처했다.

“설거지 제가 할게요.”

“예? 아뇨, 도와주셨는데 제가 할게요.”

“설거지할 손은 아닌 거 같네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물줄기 아래를 오갔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충동이 밀려왔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입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 유진 씨라고 했죠?”

“네.”

“같이 밥 먹을래요?”

유진의 눈이 커졌다.

당황스러운 듯 커진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가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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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가 울렸다. 등도 아팠고, 숨 쉴 때마다 갈비뼈 안쪽이 욱신거렸다. 그런데, 지금 물러나면 안 될 거 같았다.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운동으로 만든 몸. 분명 단단했다. 그런데 가까이 마주하자 오히려 알 수 있었다. 힘은 분명 내가 더 셌다. 문제는 저 인간이 싸움을 안다는 거였다. 중심을 무너뜨리고, 관절을 꺾고, 힘을 흘리는 법을 안다. “왜, 그 남자에겐 그런 눈을 하는 거야.” 그 순간, 그가 내게 다시 달려들었다. 훅ㅡ! 순간적으로 팔이 뻗어왔다. 이번에도 메다꽂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메다꽂히더라도 팔 하나는 부수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윽…!” 남자의 호흡이 순간 흔들렸다. 그래, 힘은 내가 더 셌다. 나는 그대로 몸을 밀어붙였다. 쾅ㅡ! 이번엔 남자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나와 그의 숨이 거칠게 얽혔다. 남자가 바로 몸을 비틀며 빠져나오려 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끝까지 붙잡았다. “유진 씨…! 도망ㅡ” 그때, 남자가 팔꿈치로 내 뺨을 후려쳤다. 퍽ㅡ! 시야가 흔들렸고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놓지 않았다. 놓으면 안 될 거 같았다. 뒤쪽에서 흐느끼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콰직ㅡ!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버둥거림이 멈췄다. 따뜻한 액체가 내 손등 위로 떨어졌다. 남자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였다. 뒤를 돌아봤다. 유진 씨가 부서진 키링을 쥔 채 떨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 준 유진 씨의 미니어처였다. 그걸로 남자의 머리를 찍은 거였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유진 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에선 거친 숨이 연거푸 오갔다. 그때였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뭐야?” “싸움 난 거 아냐?” 현관문 밖 복도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도. *** 경찰서의 형광등 불빛은 바깥과는 달리 밝았다. 나는 말없이 손만 내려다봤다. 아까부터 계속 떨리고 있었다

  • 여자친구의 조카를 사랑했다.   58화 : “도와주세요.”

    “그 남자 때문이죠?” 철렁ㅡ. 규현 씨. “맞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 틈을 윤슬기가 비집고 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맨날 집에 틀어박혀서 이상한 거나 만들고. 돈도 제대로 못 버는 남자잖아.” 계속 말을 이었다. “근데 그런 남자는 되고, 나는 안 돼요?” 윤슬기가 두 손으로 제 어깨와 팔을 쓸어내렸다. “나 진짜 최선을 다했는데… 아, 이제 진짜 남자가 되어가는구나 싶어서.” 윤슬기의 붉게 젖은 눈이 처참할 만큼 솔직했다. “6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나는 벽에 등을 붙인 채 주먹만 움켜쥐었다. “근데 결국… 그냥 ‘남자’를 좋아했던 거였어요…?” *** 한 칸, 그리고 또 한 칸. 나는 말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그렇게 유진 씨 방 앞에 멈춰 섰다. 잠깐 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똑똑. ‘전화도 안 받는데 찾아온 건 정말 뭐 하는 건지.’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유진 씨.” 목소리가 내 생각보다 낮게 가라앉았다. 대답은 없었다. “아직 안 온 건가.” 나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엔 조금 더 세게. 똑똑ㅡ. 그 순간이었다.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려던 그때였다. 철컥.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ㅡ. 문이 천천히 열렸다. 처음 보는 남자가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나시 아래로 드러난 단단한 몸, 붉게 충혈된 눈, 그리고 입가에 걸린 기묘한 웃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너머를 바라봤다. 원룸 안쪽, 벽 끝까지 몰린 유진 씨가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겁에 질린 눈.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나는 천천히 남자를 향해 물었다. “당신 뭐야?” 잠깐 정적이 흘렀다. 남자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아. 여기서 이렇게 등장하네.” 뭐

  • 여자친구의 조카를 사랑했다.   57화 : 사람 미치게 만드는 눈(2)

    채영의 회사 근처 카페에서 유진의 연락을 기다렸다.창밖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고 있었다.나는 얼음이 녹아내리는 아메리카노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오후 3시 37분.조금 전에도 전화했었다.신호는 갔는데,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뭐 하고 있는 거야.’바쁜 건가, 아니면 진짜 나 피하는 건가.문득 며칠 전 유진 씨 얼굴이 떠올랐다.ㅡ이모로 바꾸라고 했잖아요!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어떻게 바꾸냐고.당신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그걸 바꾸냐고.문득 생각이 스쳤다.그녀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다가오다가도 갑자기 선 긋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 밀어내고.나는 괜히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30분 뒤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받지 않았다.또 한 시간 뒤 다시 걸었지만, 이번에도 연결음만 길게 이어졌다.이건 바쁜 게 아니다.일부러 안 받는 거다.순간, 가슴 안쪽이 천천히 식어 내려가는 거 같았다.나는 멍하니 꺼진 휴

  • 여자친구의 조카를 사랑했다.   56화 : 사람 미치게 만드는 눈.

    오후였다.ㅡ지금 회사로 와. 오늘도 유진이 수발 좀 들어줘.나는 거울 앞에 한 번 더 섰다.웃겼다. 고작 방을 같이 보러 가는 건데.작업대 조명 아래에는 유진 씨를 본떠 만든 피규어가 놓여 있었다.아직 완성되지 않은 눈매와 입술 선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조금만 더.”완성된 피규어를 받은 유진 씨의 표정을 상상하자 자꾸 웃음이 나왔다.집을 나서며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바쁜가?”***어떻게 여기에? 어떻게 알고?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내가 신은 구두가 삐걱 소리를 냈다.윤슬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순간,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돋았다.저 눈.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나와는 달리,단 한 번도 나를 놓친 적 없다는 듯한 눈.윤슬기가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후드 그림자 아래 드러난 얼굴은 예전과 달랐다.턱선은 더 날카로워졌고, 목엔 옅은 굴곡이 생겨 있었다.“…여길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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