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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화 같은 날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3 22:06:39

새벽 부엌에 불이 없었다.

오어멈이 쌀독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 도로 덮은 뒤, 시렁 아래에서 항아리를 하나 꺼내 안고 뒷문으로 나갔다.

성 서쪽 쌀전은 아침에 문을 늦게 열었다.

오어멈이 문턱에 항아리를 내려놓자 주인이 안에서 내다보고 문을 반만 밀었다.

"아이고. 어멈. 나는 요새 육가에는 안 파오."

"육가에 파는 게 아니고 나한테 파는 거지."

"…어멈 것이라 해도 그 집 솥에 들어가는 건 매한가지 아니오."

오어멈이 항아리 안에서 헝겊에 싼 것을 꺼내 문턱에 올려놓았다.

헝겊을 푸는 동안 손등이 보였는데, 화덕 재와 찬물에 스무 해를 담근 자리가 트고 갈라져서 금이 여러 줄 나 있었다.

주인이 헝겊 안을 들여다보고 문을 마저 밀었다.

"…이걸 여태 안 쓰고 뒀소?"

"쓸 데가 없어서 뒀지.

오늘 생겼으니 오늘 쓰는 거고."

오어멈이 쌀자루를 지고 골목을 나오다 한 번 놓쳤다.

도로 지고 일어설 때 무릎을 두 번에 폈다.

부엌에 자루를 부리고 나서, 빈 항아리를 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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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194화 달인 것

    안채에 이틀째 늦도록 등이 꺼지지 않았다.문안을 받는 자리에 어제도 그제도 아무도 앉히지 않았고, 낮에 삼월이 죽 그릇을 손도 안 댄 채로 물려 왔다.한경이 마당을 건너 동쪽 방 앞에 서자 안에서 무엇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방에 등이 둘 켜져 있었고, 대부인이 아랫목에 이불을 무릎까지 덮고 등을 세워 앉아 있었다.오어멈이 죽상을 들고 들어와 내려놓다가 숟가락을 떨어뜨렸다."아이고. 이거 새로 가져오겠습니다.""두어라."오어멈이 숟가락을 주워 앞치마에 닦아 상 귀에 올려놓았다.한경이 문지방을 넘어 상 옆에 앉았다."어머님. 아침에도 죽을 반만 드셨다면서요."대부인이 오른손을 들어 문 쪽을 가리켰다."나가."오어멈이 상을 물려 안고 나갔다.문이 다 닫히지 않아서 마루 쪽 빛이 한 줄 들어왔다.대부인이 무릎 위의 염주를 오른손으로 한 알씩 넘겼다.세 알을 넘기다 손안에서 미끄러뜨렸고, 도로 잡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나."왼쪽 입술이 따라 올라오지 않아 소리가 그 틈으로 샜다."…나 아아.""…""…나 아아 사라."세 번째에도 같은 데서 걸리자 대부인이 오른손으로 무릎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한경이 머리맡의 물그릇을 들어 입에 대 주었다.반쪽만 오므려지는 입이라 물이 왼쪽으로 흘러 앞섶에 떨어졌고, 대부인이 그것을 보고 손등으로 제 턱을 한 번 눌렀다."어머님. 지금 그거 다시 한 번만요."대부인이 숨을 고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 *"그 사라 주근 해에 나는 그 야탕과늘 우더아.그 사라아테 야글 다여 어긴 거슨 나아.운주이 시킨 거시 아니고 내가 저내아.여리레를 다여꼬 여려드레째 아치에 가아.아우도 나아테 우찌 아나아."한경이 무릎으로 한 뼘 다가앉았다."…약."대부인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문중."대부인이 고개를 저었다.젓고 나서 오른손으로 무릎을 두 번 쳤다."…문중이 아니고."또 끄덕였다."이레."대부인이 다시 저었다.젓는 김에 오른손으로 허공에 획을 하나 더 그었다.

  •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193화 같은 날

    새벽 부엌에 불이 없었다.오어멈이 쌀독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고 도로 덮은 뒤, 시렁 아래에서 항아리를 하나 꺼내 안고 뒷문으로 나갔다.성 서쪽 쌀전은 아침에 문을 늦게 열었다.오어멈이 문턱에 항아리를 내려놓자 주인이 안에서 내다보고 문을 반만 밀었다."아이고. 어멈. 나는 요새 육가에는 안 파오.""육가에 파는 게 아니고 나한테 파는 거지.""…어멈 것이라 해도 그 집 솥에 들어가는 건 매한가지 아니오."오어멈이 항아리 안에서 헝겊에 싼 것을 꺼내 문턱에 올려놓았다.헝겊을 푸는 동안 손등이 보였는데, 화덕 재와 찬물에 스무 해를 담근 자리가 트고 갈라져서 금이 여러 줄 나 있었다.주인이 헝겊 안을 들여다보고 문을 마저 밀었다."…이걸 여태 안 쓰고 뒀소?""쓸 데가 없어서 뒀지.오늘 생겼으니 오늘 쓰는 거고."오어멈이 쌀자루를 지고 골목을 나오다 한 번 놓쳤다.도로 지고 일어설 때 무릎을 두 번에 폈다.부엌에 자루를 부리고 나서, 빈 항아리를 씻어 화덕 옆에 엎어 놓았다.* * *낮에 형부 서리가 광 앞 멍석까지 들어왔다.노영감이 나무판을 무릎에 놓고 앉아 있었다."영감. 이 집에 드나든 사람을 적었다고 들었소.""…적었습니다."서리가 판을 받아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도로 내밀었다."이건 금뿐이지 않소.""예. 금뿐입니다.짐은 작대기로 적고 사람은 금으로 적습니다.""이름은.""소인 눈이 어두워 글자를 못 씁니다."서리가 판을 멍석에 놓고 일어섰다.일어서면서 발끝으로 판을 한 번 밀었다."영감이 스무 해를 세도 이건 아무 데도 못 쓰오."서리가 나가고 나서 노영감이 판을 무릎에 올리고 칼을 댔다.금 그은 자리를 위에서부터 밀어 깎았는데, 엄지 밑동에 오래 앉은 굳은살이 칼자루에 눌려 하얗게 됐다.깎아 낸 부스러기가 멍석 밖으로 떨어졌다.노영감은 쓸지 않고 다음 판을 집었다.* * *낮에 행랑 앞 툇마루에서 서란이 물목을 옮겨 적고 있었다.등을 안 켜고 볕 드는 쪽으로 종이를 돌려놓았다.분

  •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192화 제 발로

    새벽에 행랑 앞 툇마루에 등이 하나 켜져 있었고, 류가가 그 아래에 앉아 종이를 궤에 넣고 있었다.궤가 작아서 두 벌이 다 안 들어갔다.한 벌을 넣어 뚜껑을 닫고, 남은 한 벌은 무명보에 싸서 무릎에 올려놓았다.한경이 마당을 건너와 마루 끝에 앉았다."류가.""…예. 부인.""신을 닦아 놓으셨네요.어제저녁에 툇마루 밑에 내놓고 마르는 걸 봤어요.""…예.""거기 가시면 물은 끓여서 식힌 걸 드세요.오어멈이 그러는데 새벽에 끓인 건 뜨거워서 못 마신대요."류가가 무릎 위의 보퉁이를 두 손으로 눌렀다."소인이 부인께 여쭙지 않고 정했습니다.""알아요.""…부인께서 물으실 줄 알고 밤새 대답을 골랐습니다.그런데 안 물으시니 고른 것이 다 쓸데없어졌습니다.""아. 그거 아까우면 나중에 편지로 쓰세요.편지는 길어도 되니까."류가가 웃어 버렸다.웃고 나서 얼른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그건 두고 가시지.""…가지고 갑니다.소인이 적은 것을 소인이 지고 있어야, 나중에 누가 물으면 소인한테 묻습니다.""그럼 무거우시겠네.""무겁습니다."* * *해가 뜨기 전에 궁 서문 앞에 사람이 스물쯤 줄을 서 있었다.물지게를 진 사내들과 빨래 광주리를 인 여자들이 섞여 있었고, 문지기가 하나씩 목패를 받아 보고 들여보냈다.류가가 줄 끝에 섰다.앞에 선 여자가 뒤를 돌아보다가 광주리를 놓쳤고, 젖은 빨래가 흙바닥으로 미끄러져 나왔다."아이고. 이걸 또."류가가 앉아서 그것을 주워 담았다.여자가 광주리를 고쳐 이면서 곁눈으로 류가의 소매를 봤다."댁은 어느 방이오.""완의국입니다.""거긴 물이 무거운데.""…예. 예. 무겁다 들었습니다."앞에 선 사내가 제 물지게를 한 번 추슬렀다."물은 앞을 낮추고 지시오.뒤를 낮추면 뒷물이 다 목으로 넘어오오."차례가 되자 문지기가 목패를 받아 들고 얼굴을 한 번 봤다가 도로 목패를 봤다."어. 류 상궁 아니시오.""류가입니다.""…""작년 십일월에 나갔습니다.오늘부

  •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191화 스물셋

    아침에 중문 안쪽으로 서리 하나가 들어와 섰다.어제 온 사람들과 달리 궤도 수레도 없이 붓과 접은 종이만 들고 왔다."이 댁에 궁에서 나온 사람이 있다 하였소."류가가 행랑 앞에서 종이를 안고 나왔다.마당 가운데까지 와서 종이를 툇마루에 내려놓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소인입니다.""이름.""류가입니다."서리가 두 자를 적고 붓을 뗐다."나온 날짜와 사유.""작년 십일월 열이레에 나왔습니다.사유는 적힌 것이 없습니다.그날 아침에 나가라 하셔서 나갔습니다."한경이 마루 끝으로 나와 섰다."이 사람이 이 댁에 있는 것을 알고 두셨소?""빈방이 있길래 쓰라고 했어요.""…부인께서 두라 하셨다고 적겠습니다.""그러세요."서리가 접은 종이를 소매에 넣고 중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나가면서 툇마루 위의 종이 뭉치를 한 번 보고 지나갔다.* * *서재 뒤꼍에서 연기가 한 줄 올랐다.장복이 화덕 앞에 쭈그려 앉아 종이 뭉치를 무릎에 놓고 있었다.육정이 뒤꼍으로 들어서면서 그 손목을 잡았다."태우면 그게 죄가 되오.""…나리. 이 안에 별당 장부가 있습니다.이게 나가면 아씨한테까지 갑니다.아씨는 지금 그 담 안에 계시고요.""알고 있소. 알고 있으니 내가 내겠소.자네 손으로 태우면 자네가 태운 사람이 되고, 태운 사람은 관에서 먼저 부르오."장복이 종이를 도로 안았다.안으면서 화덕 앞 재를 밟아 신코가 하얘졌다.* * *안채 쪽에서 박씨가 보퉁이를 안고 나왔다.마당을 반쯤 건너다가 마루 위를 보고 걸음이 빨라졌고, 빨라지다가 보퉁이를 떨어뜨렸다.마른 대추가 섬돌 아래까지 굴러갔다."어머! 이건 제 친정에서 온 거예요.이 댁 것이 아니고요.아, 제가 말을 잘못 했지요.이 댁 것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이 댁에서 난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동서. 어디 가세요.""…친정에 좀 다녀오려고요.어머님께는 아침에 여쭈었어요.오래는 아니고 열흘이나, 아니 스무날쯤이요."소하가 대추를 주우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190화 빈 소매

    밤에 침전 안쪽에 등이 셋 켜져 있었고 황제는 안석을 등지고 앉아 있었으나 등에 닿지는 않았다.낮은 상에 종이가 넉 장 놓여 있고 붓이 벼루 전에 걸쳐져 있었다.태감이 등 하나를 상 쪽으로 옮기다가 기름을 조금 쏟았다.쏟은 자리를 소매로 훔치면서 무릎을 굽혔다."…소인이 다시 채워 오겠습니다.""두어라."황제가 손을 뻗어 맨 위의 종이를 끌어왔다.소매가 팔뚝에서 헐거워 손등까지 내려왔고, 그가 그것을 반대 손으로 걷어 올린 다음 종이를 봤다."이 종이는 오늘 아침까지 내 상에 있었다.""…예.""오늘 아침에 여기 있던 것이 지금은 넉 장이다.어제는 여섯이었다."* * *회랑에서 발소리가 오다가 문 앞에서 한 번 멎었다.강목이 문서 상자를 안고 들어와 상 앞에 내려놓았는데, 내려놓기 전에 팔을 한 번 고쳐 안았다."소신이 태의원에서 가져왔습니다.지난 여섯 해 치 물목 가운데 소신이 인을 찍은 것만 뽑았습니다. 스무 장입니다.""경이 적은 것인가.""소신이 적었습니다.소신이 적고 소신이 찍었습니다.그 아래에 다른 사람 이름은 없습니다."황제가 상자 뚜껑을 열지 않고 손끝으로 모서리를 눌렀다."경은 오늘 아침에 두 번 불려 갔다.""…예. 예. 두 번이었습니다.""나는 오늘 이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강목이 고개를 들었다가 도로 내렸다.등불이 낮아서 황제의 입가가 잠깐 밝아졌는데, 웃는 것은 눈매뿐이었고 벌어진 입술 안쪽 잇몸 가장자리에 검푸른 선이 한 줄 지나 있었다.강목이 그 자리를 보다가 눈을 내렸다."소신이 다시 보겠습니다.""경은 그것을 여섯 해 동안 다시 보았다."* * *황제가 붓을 들었다.붓끝이 벼루에 닿기 전에 승지가 문 안쪽으로 반걸음 들어섰다."…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 문서는 어제 저녁부터 형부 소관입니다.오늘 아침에 그 방 문패를 바꾸어 달았습니다."황제가 붓을 도로 벼루 전에 걸쳤다.걸치고 나서 말끝에 침을 한 번 삼켰다."어선방 밖에서 항아리가 깨진 일이 있었다.깬 사람을

  •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189화 스물석 장

    아침에 서재 문이 열려 있었고 상 위에 종이가 여러 장 펴져 있었다.관원이 그것을 한 장씩 손끝으로 밀어 위아래를 맞춰 놓는 동안 육정이 상 건너에 앉아 있었다.한경이 들어와 문 옆에 앉았다.관원이 맨 위의 장을 집어 팔을 조금 뻗어 들고 읽었다."금호방 뒤 국숫집 여자. 나이 서른.아침에 반, 저녁에 반, 이레.""…""그 아래에 마른 잎 두 가지가 적혀 있고, 값은 육가로 보내라 하였소.이 글씨가 부인 것이오?""제가 썼어요. 제가 찍었고요."관원이 그 장을 옆에 놓고 다음 장을 들었다.들면서 종이를 등불 쪽으로 한 번 기울여 아래쪽을 봤다."배오개 나무전 늙은이. 나이 예순여덟. 저녁에만 한 술. 열흘.""…예순아홉이요.""…""그 어른 정월에 하나 잡수셨어요.내가 지난가을에 적어서 하나가 틀렸네요.고쳐 적으셔야 되는데요."육정이 상 위의 것을 손바닥으로 눌렀다."부인.""나리. 가만 계세요."* * *관원이 종이 아래쪽의 붉은 자국을 손톱으로 짚었다."이 인은 이 댁 가주의 것이오.""안채 문갑에 있어요.열 해 동안 살림 종이에 내가 찍었고요.""가주가 맡기셨소?""…""저. 그. 내가 맡겼소.십 년 동안 곳간 문서도 삯 문서도 다 아내가 보아 왔고, 보아 온 사람이 찍는 것이 이 집에서는 당연한 일이라 나는 여태 그것을 문서라고 생각한 적이 없고, 그러니까 내 말은 저 인이—""나리."한경이 육정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나리는 그 종이를 한 장도 안 보셨어요."육정이 무릎에 놓았던 손을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는데,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한경이 일어서서 안채로 갔다.문갑 둘째 칸을 열고 인을 꺼내 오는 동안 마당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돌아와 앉아서 인주 갑을 열고 인을 두 번 굴린 다음 빈 종이 귀에 한 번 찍어 관원 앞으로 밀었다."대조하시라고요."관원이 그 종이와 상 위의 것을 나란히 놓았다.* * *"부인. 이 종이가 몇 장인지 아시오.""스물석 장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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